암천제 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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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37화
37화
둘째 조부인 진원정은 닷새 동안 쉬지 않고 쇠를 다룬 적도 있었다. 사흘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사흘은커녕 하루도 지겨웠다.
‘제기랄! 괜히 조부님께 가져왔네.’
하루가 막 지날 무렵부터 화로에서 청화가 피어올랐다. 진원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금도 놀라지 않고 검신을 청화 속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한 번 피어오른 청화는 독고무령이 마음먹을 때마다 피어올랐다.
이제 독고무령은 자신이 어떻게 청화를 피워낼 수 있게 되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몸의 울림, 공명. 그 일을 겪고 난 후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훨씬 수월해진 것이다. 불에 집중하는 마음가짐 역시 전과 달라져 있었고.
노인은 청화가 안정되게 피어오르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쇠를 독고무령의 검신과 합치기 시작했다.
이틀째가 되자 검신이 완벽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원정은 멈추지 않고 똑같은 일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화로에서 쇠가 달구어지는 동안에는 진원정과 진사혁이 쉬었고, 망치질을 하는 동안에는 독고무령이 쉬었다.
하지만 독고무령은 다른 두 사람보다 쉬는 시간이 짧았다. 불길을 어느 정도는 계속 유지해주어야 했으니까.
결국 사흘 간 세 사람은 잠도 자지 않고 철방에서 지냈다.
망치소리가 사흘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렸는데도, 진가철방의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루에 세 번, 물과 약간의 음식을 가져오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흐르고, 갑자기 망치 소리가 멎었다.
화로의 불길도 사그라졌다.
독고무령과 진사혁은 후줄근한 모습으로 진원정의 등을 바라보았다.
진원정은 명주 천을 입에 문 채 검인을 갈고 있었는데, 마치 엄숙한 의식을 치루는 숙연한 표정이었다.
쓱, 쓱, 쓱싹, 쓱싹…….
현철이 섞인 검은 유난히 검은색이었다. 완전히 검지는 않았지만, 일반 검에 비하면 먹물에 담근 것처럼 보일 정도로 검었다.
다시 하루가 더 지났다.
넷째 날 정오 무렵, 진원정은 허리를 펴고 완성된 검을 바라보았다. 진원정의 눈빛은 오히려 전보다 더 맑아 보였다.
뒤에 서 있던 진사혁이 의아한 듯 물었다.
“조부님, 끝난 겁니까? 날이 완전히 안 섰잖아요?”
그랬다. 처음보다는 나아졌지만, 검인은 날이 제대로 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진원정은 검을 검집에 천천히 밀어 넣으며 나직이 말했다.
“이 검은 이대로가 좋다. 굳이 날이 필요 없으니까.”
독고무령도 동의했다.
“저도 그 상태가 마음에 듭니다.”
외톨이가 된 진사혁이 뚱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뭐, 무령이 좋다면 할 말 없지만…….”
진원정이 검을 내밀었다.
독고무령이 담담한 표정으로 검을 받아들자, 진원정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언제고, 저 멍청한 놈에게 네가 얻은 것 중 일부라도 나누어주었으면 한다. 그리할 수 있겠느냐?”
독고무령은 진원정의 말뜻을 깨닫고 순순히 응낙했다.
“본래 진가의 것이었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되었다. 둘 다 그만 가봐라. 좀 쉬어야겠다.”
독고무령은 진원정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돌아섰다.
어정쩡한 표정으로 서 있던 진사혁도 더 묻지 못하고, 입을 삐죽이며 몸을 돌렸다.
‘쳇, 조부님이나 이조부님이나,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는 거야?’
* * *
객방에서 잠시 눈을 붙였는데 어느덧 창문 틈으로 석양빛이 스며든다.
독고무령은 침상에서 일어나 태천일심법을 행하며 기운을 다스렸다.
느낌이 며칠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단지 뜻을 일으켰을 뿐인데 몸이 반응한다.
텅 빈 몸 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기분.
단 며칠 사이, 중단전에 뭉쳐 있던 기운이 호두알보다 훨씬 커져 있다. 이대로만 간다면 머지않아 외부로의 운용이 가능할 것 같다.
일각 후.
독고무령은 사지백해를 누비던 기운을 회수하고 눈을 떴다.
운기 시간을 반으로 단축했다. 그럼에도 이전과 다름없는 결과를 보인다. 마음은 더욱 고요해졌고.
과연 자신이 무엇을 얻은 걸까? 그것이 무엇인데 짧은 시간에 이토록 많은 변화를 가져온 걸까?
아직 정확한 진체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로 인해서 자신의 무공이 또 다른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무령, 일어났는가?”
밖에서 진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철방에서 함께 나흘 밤을 샌 후로 진사혁은 독고무령을 친구처럼 대했다.
운양의 친구면 자신의 친구나 마찬가지라나?
독고무령도 진사혁이 싫지 않았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일어났네. 들어오게.”
독고무령이 대답하자, 곧 진사혁이 문을 열더니 약간의 열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조부님께서 좀 보자고 하시네.”
정원에서 봤던 키 큰 노인을 말하는 것 같다.
무슨 일인지는 가보면 알 터. 독고무령은 선뜻 방을 나섰다.
진사혁의 조부, 진원명은 진가철방의 뒤쪽 별원에서 독고무령을 기다렸다.
별원에는 동산만 한 거대한 바위가 있었는데, 진원명이 기다리는 건물은 바로 그 바위에 딱 붙은 채 지어져 있었다. 마치 암벽에 지어진 사찰처럼.
독고무령이 진사혁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방 안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진원명, 족히 백 살이 넘어 보이는 백발의 노인, 그리고 어깨가 떡 벌어진 육십 전후의 노인.
독고무령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그리 앉게.”
육순의 노인이 자리를 가리켰다.
언뜻 봐도 진사혁과 많이 닮은 얼굴이다. 절정의 경지를 오래 전에 넘어선 듯 몸 안에 바다와 같은 내력이 갈무리되어 있다.
‘진 형의 부친이신가?’
아니나 다를까, 독고무령이 자리에 앉자 노인이 바로 자신을 밝혔다.
“나는 사혁이의 애비 되는 사람이네. 이렇게 자네를 부른 것은 이유가 있어서네. 그리고 여기 계신 두 분은, 나에게 숙조부 되시는 분과 아버님이시네.”
그가 바로 진가철방의 현 주인인 진관호였다.
독고무령은 일단 진원명과 진문화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진관호를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시지요.”
그에 대해서는 진원명이 말했다.
“너에게 한 가지 보여줄 것이 있어 불렀느니라. 그걸 보여줘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가주와 숙부를 모시고 상의해봤다. 결론은 보여주자는 쪽으로 났지. 단 네가 한 가지 약속을 해야만 한다.”
대체 뭘 보여주려는데 이리 복잡하게 말하는 걸까?
독고무령은 의문이 일었지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진원명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혹시라도 그것을 보고 얻는 게 있거든, 일부를 본가의 사람에게 돌려다오.”
“약속을 하는 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선조께서 남기신 그림이다. 암벽에 새겨져 있지.”
“왜 저에게 그걸 보여주시려는 것인지요?”
“둘째와 함께 만 사흘간 검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깨달음에 대한 오성과 집중력, 거기에 정심한 마음까지. 그런 너라면 우리가 보여주는 그림에서 뭔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진가철방에는 선조가 남긴 암각화가 하나 있었다.
진가의 후예들은 지난 백여 년 동안 암각화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진가의 누구도 선조가 남긴 그림의 진체를 깨닫지 못했다. 심지어 기재라 불렸던 몇 사람은 그 그림을 보고 반쯤 미친 상태가 되었다.
그러한 일마저 벌어지자, 진가의 후예들은 그 그림을 멀리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접근하는 것조차 자제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때문에 기재들을 또 잃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림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이다.
훼손된 부위는 아주 미미해서 감상만 하는 거라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림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느다란 선 하나하나에도 그 나름의 뜻이 담겨 있는데, 그 선들이 사라지면 뜻도 달라지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을 복구할 수 있느냐 하면 그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형(形)은 흉내 낼 수 있겠지만, 그림에 깃든 선조의 의지는 다른 누군가가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선조가 남긴 그림만 버려놓을 뿐.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진가 제일의 보물이 언젠가부터 진가의 고민이 되어버렸다.
계륵, 딱 그러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대로 몇 해만 지나면 그림에서 뭔가를 깨닫는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해질지도 모를 일.
안타까워하던 차에 공명을 느낀 사람이 나왔다. 그것도 상당한 경지의 공명을.
문제는 진가의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남에게 선조의 깨달음에 대한 해석을 맡긴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진원명은 고민하며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흘, 그는 마음을 정하고 가주와 가문의 가장 웃어른인 진문화에게 말했다.
“그에게 그림을 한번 보여줘 보지요.”
처음에 그 말을 들은 진관호와 진문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가문 최고의 비밀을 외인에게 보여주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진원명의 말을 계속 듣고 마음을 돌렸다.
“어차피 언제 그림의 생명이 끝날지 모르는 상탭니다. 그게 올해일 수도, 아니면 내년일 수도 있습니다. 얻을지 못 얻을지도 모르는데 보여주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선조의 깨달음을 그냥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는 일. 만에 하나의 가능성만 있어도 시도해봐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대신 진관호가 하나의 조건을 걸었다.
“인연이 닿아 그가 뭔가를 얻을 경우, 얻은 것 중 일부를 본가에 돌려달라고 하십시오. 그렇다면 저도 찬성하겠습니다.”
진문화도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백 년을 넘게 살아온 그다. 그림이 진가의 사람과 인연이 없음을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던 터였다.
선조의 깨달음 중 조그마한 것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최소한 완전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는 일. 그는 단호한 어조로 한 가지 제약을 두었다.
“암각화는 보여주되, 비결(秘訣)이 적힌 책은 절대 보여줘선 안 된다.”
‘과연 비결 없이 그림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을까?’
아침의 일을 떠올린 진원명은 착잡한 표정으로 확답을 재촉했다.
“말해봐라, 약속할 수 있겠느냐?”
얻는 게 있다면 주지 못할 것도 없다.
‘도대체 무슨 그림인데 이러는지 모르겠군.’
은근히 호기심이 동한 독고무령은 순순히 진원명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약속하겠습니다.”
“그럼, 나를 따라와라.”
진원명은 독고무령을 더 안쪽 방으로 데려갔다. 기이하게도 진관호와 진문화, 진사혁은 동행하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조금 의아했지만, 아무런 말도 않고 진원명의 뒤를 따라갔다.
안쪽 방은 상당히 컸다. 앞쪽에 있는 두 개의 방을 하나로 합친 것만 했다.
방의 사방에는 십여 개의 대황초가 꽂혀 있었는데, 불은 하나만 켜져 있었다.
진원명은 불이 켜진 대황초를 뽑아들고 나머지에 불을 붙였다.
곧 방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
진원명은 방이 밝아지자, 전면의 넓은 벽으로 다가갔다.
다른 곳에는 소소한 장식이라도 있는데, 그 벽에만 아무런 장식이 없이 그저 기다란 휘장만 쳐져 있었다.
진원명은 손을 뻗어 휘장을 젖혔다.
그리고 벽을 한쪽으로 밀었다.
쿠르르릉.
벽이 밀리며 묵직한 소리가 났다.
‘쇠로 된 벽?’
독고무령은 그 사실을 깨닫고 의아함과 놀람이 교차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벽이 밀린 전면에 불빛이 비치며 그림 하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