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천제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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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암천제 7화
7화
아마 살고자하는 본능이었을 것이다. 독고무령은 손에 걸린 바위를 감싸 안고 악착같이 버텼다.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구명줄을 잡은 심정으로.
그런데 손에 잡힌 바위는 생각보다 컸다. 게다가 바위와 천장 사이에는 약간의 공간마저 있었다.
독고무령은 물살에 대항하며 사력을 다해서 바위 위로 몸을 끌어 올렸다.
천장과의 공간이 좁긴 하지만, 그의 몸이 끼어들 정도는 되었다.
“콜록, 콜록, 헉, 헉, 헉…….”
거친 숨소리가 기침과 함께 흘러나왔다.
이미 품속에 있던 세 개의 공기주머니는 모두 써버린 상태다.
바위를 붙잡지 못했다면 일각이나 견딜 수 있었을까?
“후읍, 후읍…….”
바위에 몸을 걸친 그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허파에서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들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독고무령은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호흡만 가다듬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호흡이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돌아오자 몸 상태를 하나하나 살폈다.
다행히 부러지거나 크게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몸을 단련해 오지 않았다면, 가죽옷을 몇 겹 껴입었어도 온몸의 뼈가 다 부러졌을 것이었다.
‘이제 얼마나 남은 것일까?’
한 시진 이상을 흘러왔다. 그가 아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다행인 점은, 숨을 쉬는데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딘가에서 미량의 공기가 유입되고 있다는 뜻.
다시 반 시진가량이 지났다.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여전했다. 지하수로를 흘러가는 물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하지만 한기로 인해 정신만큼은 또렷해졌다.
그때였다.
퍽!
뭔가가 바위에 부딪치며 물살이 얼굴을 덮쳤다.
독고무령은 엉겁결에 손을 휘저어서 바위에 부딪친 것을 붙잡았다.
손에 잡힌 물체는 바람이 반쯤 든 가죽포대였다.
어둠 속에서 하얀 웃음이 번졌다.
지하수로에 난데없이 가죽포대가 흘러들어올 일이 뭐가 있을까?
‘네놈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독고무령은 가죽포대를 바위 위로 끌어당겼다. 물이 반쯤 담겨서 제법 무거웠지만, 이대로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오래도록 가죽포대가 떠오르지 않으면 저들도 포기할 수밖에 없을 터. 그만큼 자신이 살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질 것이었다.
그때 문득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끌어올린 가죽포대의 한쪽이 한 뼘가량 길게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만져지는 감촉으로는 결코 바위에 부딪쳐 찢어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칼로 긋지 않고서는 이렇듯 예리하고 반듯하게 갈라질 리가 없었다.
가죽포대에 담긴 물은 그곳을 통해서 들어간 듯했다.
물이 가득 차면 끝까지 흘러가지 못할 텐데, 왜 칼로 가른 것일까?
대체 누가?
* * *
아침 해가 관제산 동쪽 능선 위로 떠오를 즈음.
제왕성 제일대전인 천검전의 깊숙한 곳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되었느냐?”
어깨를 짓누르는 만근 무게의 목소리.
이를 악문 남조경은 태사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직 찾지 못했다 하옵니다, 성주.”
상석의 거대한 황금빛 태사의에 오십 전후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전신에서 만인을 압도하는 중후한 기운이 절로 흘러나오는 자.
그가 바로 대 제왕성의 성주이자, 신주사대천왕(神州四大天王) 중 한 사람인 천검무왕(天劍武王) 위지천백이었다.
“그 아이가 살아날 가능성은 얼마나 된다고 보느냐?”
“공 군사와 인근 지역의 지리도를 놓고 상의해 봤사온데, 이십 리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일 푼의 가능성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사옵니다.”
제왕성의 두 머리라 할 수 있는 공노명과 남조경이 그렇게 예상했다면, 소악귀의 이름은 이미 지옥의 명부에 올라갔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위지천백의 관심사는 소악귀의 생사가 아니었다.
“그 아이가 해독서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보느냐?”
남조경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답했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소악귀가 해독서를 따로 필사해서 가져가지는 않은 것 같사옵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해독서를 가져갈 마음이 있었다면, 기존의 해독서를 먹물통에 넣을 이유가 없지 않사옵니까?”
그건 그랬다. 그냥 그것을 가져가면 되는데, 뭐 하러 시간을 소모하며 필사를 한단 말인가?
“혹시라도 빼돌릴 생각으로 필사를 해 놓았다면?”
“양피지에는 숫자가 인두로 새겨져 있사온데, 자재책임자가 남아 있는 양피지를 확인한 결과 없어진 것은 한 장도 없었사옵니다. 그렇다면 양피지가 아닌 종이나 다른 곳에 필사했다는 말이온데, 그러한 것은 물속에서 오래 견딜 수 없사옵니다.”
남조경이 단순명료하게 결론을 내렸다.
위지천백이 생각해도 허점이 보이지 않는 결론이었다. 설령 필사했다 하더라도, 가져갈 때까지 아무 일도 없으면 원본을 가져가는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니던가.
그러나 소악귀의 시신을 보지 않고는 누구도 안심할 수 없었다.
“그 아이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되느냐?”
“삼 할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하옵니다.”
“이유는?”
“비옥 지하의 수로가 제법 컸사온데, 그 정도의 물이 빠져나가려면 통로 역시 제법 넓다는 말이 되옵니다. 거리가 멀어서 살아 통과하기는 힘들어도, 시신은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고 보고 있사옵니다.”
“현재 그 아이를 찾기 위해 동원된 무사가 몇이나 되느냐?”
“오백의 내성 무사가 인근 호수와 강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습니다.”
“으음…….”
나직한 침음성을 흘리는 위지천백의 미간에 주름이 그어졌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무천련의 눈을 가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 거라고 보느냐?”
오백의 내성 무사가 풀려서 수십 리 일대를 샅샅이 훑고 다녔다.
근 일 년 사이 처음 있는 대규모 수색작전.
제왕성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은 어떤 정보든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터. 산서에서 제왕성의 유일한 적이라 할 수 있는 무천련도 예외가 아닐 것이었다.
“하루 정도이옵니다.”
“하루라…….”
위지천백은 눈을 반쯤 감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열린 것은 반 각 정도가 지난 후였다.
“내일 아침까지 발견하지 못하거든 무사들을 철수시켜라.”
백 자를 뺀 구백 자를 얻었다.
그러나 제왕성이 천자무서를 얻었다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은 글자의 수에 연연치 않을 것이다.
남조경은 그걸 알기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성주.”
그때였다.
위지천백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남 당주, 그 아이의 이름이 뭔가?”
남조경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소악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성이 ‘독고’라는 것뿐이었다.
천검전을 빠져나온 남조경은 즉시 염상소를 찾아갔다.
“이봐, 염 향주. 자네는 소악귀의 이름이 뭔지 알겠지?”
염상소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글쎄요, 애기 때부터 소악귀라고 불러서…….”
“이름이 없단 말인가?”
“비옥에서만 사는 놈인데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빌어먹을…….”
염상소는 남조경의 일그러진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몸을 돌렸다. 언뜻 그의 입가로 가느다란 미소가 번졌다.
‘낄낄낄, 약 좀 오를 거다, 이놈.’
하지만 곧 시무룩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제길, 설마 그 안에서 죽은 건 아니겠지?’
* * *
남조경은 초조한 마음으로 다음 날 날이 샐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물에서 떠오른 시신을 찾았다는 보고도, 떠내려 보낸 가죽포대를 발견했다는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염탐꾼으로 보이는 자들이 오간다는 보고만 올라왔다.
결국 태양이 떠오를 즈음, 그는 무사들을 철수시켰다.
하루반이 지났는데도 찾지 못했다면, 자신의 예상대로 지하수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게 분명했다. 아니라면 사람보다 더 작은 가죽포대라도 어딘가에서 떠올라야만 했다.
그 시각.
독고무령은 지하수로의 바위 위에서 운기행공을 하며 끊임없이 기운을 돌렸다.
젖은 몸의 한기를 몰아내기 위해서, 기운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
그리고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 큰소리로 숫자를 세고, 천자무서의 내용을 소리 내어 읊었다.
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감기려는 눈을 뜨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독고무령은 난생처음으로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에는 생소한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자 곧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아버지의 꿈을 찾아줄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자신의 삶을 찾지 못하고 지하수로에서 이대로 죽어갈지 모른다는 두려움.
어쩌면 그가 큰 소리로 숫자를 세고, 천자무서를 소리 내어 읊는 것은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것일지도 몰랐다.
“열둘! 열셋! 나는 살 수 있어! 열넷! 열다섯! 살 수 있어! 열여섯! 열일곱! 그렇지, 아버지!”
좁은 지하수로의 동굴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때만큼은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를 부를 때는 그리움으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흔일곱! 아흔여덟! 아흔아홉! 백! 풍령조천하(風靈朝天下)! 아침 하늘 아래서 바람의 기운을 느껴라! 팔만사천모공으로 천지의 기운을 받아들여라! 사람의 몸에는 세 개의 호수가 있으니…… 신(身)이 정(精)이 되고, 정이 심(心)이 되고, 심이 의(意)가 되어…….”
아마 소주천을 스무 번 정도 한 것 같다.
백을 백 번도 더 센 것 같다.
천자무서의 내용을 열 번 정도는 더 읊어댄 것 같다.
지하수로에 몸을 던진 지 적어도 하루 반나절 이상은 흘렀을 것이다.
사방이 막힌 비옥십팔호실에서만 산 그가 아니던가. 암흑천지여서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독고무령은 시간의 흐름을 누구보다도 더 정확하게 느꼈다.
독고무령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떠내려 온 가죽포대의 물을 빼고 공기를 채워두었다.
그리고 수어잠혼공을 펼치며 호흡을 조절했다.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잘해야 하루.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 해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살 수 있는 확률이 눈곱만큼이라도 높아졌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적어도 반은 왔을 것이 아닌가 말이다.
“가자! 독고무령! 세상이 너를 기다린다!”
그는 고함치듯 소리치며 몸을 지하수로에 던져 넣었다.
지하수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길었다.
수어잠혼공이 풀리고, 가죽포대의 공기를 다 소모했는데도 끝이 나타나지 않았다.
두 번의 행운은 없다는 듯 공기가 있는 공동도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지하수로의 흐름이 전보다 약해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하지만 그것은 독고무령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만큼 지하수로를 빠져나가는 시간이 길어질 테니까.
차라리 부딪친 충격으로 인해 죽을 때 죽더라도 빠른 유속이 더 도움이 될지 모르거늘…….
정신이 가물가물해질 즈음, 독고무령은 가죽포대의 찢어진 부분을 벌리고 머리를 집어넣었다. 단 일 푼이라도 희망이 있을지 모르는데, 머리를 다쳐 죽는 어이없는 경우가 생기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러고는 일각이 채 지나기도 전,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늘은 끝까지 내 편이 아닌가? 아버지…….’
독고무령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