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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5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55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5화

 

5화

 

 

 

 

 

 

“말씀해보시죠.”

 

유백하가 속삭이듯이 입을 열었다.

 

“백운서원에 갈 일이 있거든, 서고 안쪽의 동쪽 벽을 살펴봐라. 아마 새로 회칠이 된 곳이 있을 것이다. 그곳의 회칠을 벗겨보면 얇은 동판이 석 장 나올 것이야. 책을 촛불에 태울 때 표지 속에서 나온 것이지. 내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고 네가 가져라. 그리고…….”

 

석 장의 동판.

 

그것이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비옥십팔호실에 있는 독고무령에겐 주먹밥 하나만 못했다.

 

독고무령은 유백하의 머리맡에서 걸음을 멈추고 마저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유백하는 잔잔한 눈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말을 독고무령의 뇌리에 심으며 눈을 감았다.

 

“앞으로는 네가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니라.”

 

독고무령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침이 들린 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고 유백하의 백회혈로 다가갔다.

 

‘잊지 않겠습니다.’

 

 

 

* * *

 

 

 

그날, 밤이 깊어질 무렵.

 

독고무령은 열 장의 양피지를 먹물통에 집어넣었다. 먹물통에 집어넣은 지 반각 정도 되자 양피지가 퉁퉁 불었다.

 

그는 퉁퉁 불은 양피지를 꺼내어서 박박 문질렀다. 글자가 쓰였던 흔적마저 알아보지 못하게.

 

그리고 잠시 후.

 

거처의 석실로 들어간 그는 아버지의 땀 냄새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침상을 조심스럽게 들어냈다.

 

드르륵.

 

침상이 치워진 바닥에는 가로세로 석 자 크기의 네모진 자국이 희미하게 나 있었다.

 

독고무령은 들고 있던 횃불을 한쪽에 꽂았다. 그러고는 자국이 난 곳에 칼을 꽂더니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긁었다.

 

그렇게 십여 번 긁어대자, 칼끝이 석판 틈바구니로 쑥 들어갔다.

 

독고무령은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느릿하게 칼을 비틀어 올렸다.

 

끼이이…….

 

석판이 위로 살짝 들리자, 찬바람이 좁은 틈바구니를 비집고 밀려나왔다.

 

쉬이이이이.

 

손가락 굵기의 봉을 벌어진 틈에 끼워 넣은 독고무령은 칼을 놓고 두 손으로 석판을 잡았다.

 

석판이 쑥 위로 들렸다.

 

휘이이잉!

 

순간 바람이 더욱 거세지며 시커먼 동혈이 모습을 드러냈다.

 

독고무령은 깊게 침잠된 눈으로 동혈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우연히 발견했다는 동혈이었다.

 

‘침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들었는데, 놓치는 바람에 바닥이 깨졌다고 했지.’

 

아버지는 발견한 동혈을 숨기기 위해서 다른 곳의 석판을 빼내어 그곳에 얹었다고 했다.

 

다행히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고 한다.

 

하긴 방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거늘, 석판이 뜯어진 것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 후,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횃불을 들고 동혈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하고는, 수 년 동안 뭔가를 준비하셨다고 했다.

 

그게 벌써 십육 년 전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준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모든 계획을 완성했을 때, 자신이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길을 자신이 가려고 한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버지조차 모른다.

 

어쩌면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다.

 

내일이 되면 남조경이 찾아올 테니까.

 

그가 천자무서만 가져가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안다. 

 

비밀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밀을 아는 사람을 없애는 것이다.

 

아버지도 같은 이유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않은가. 아들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너희들은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해. 천자무서의 해독서도, 내 목숨도. 내 죽음은…… 내 스스로가 결정할 거다.’

 

이를 지그시 악문 독고무령은 동혈을 내려다보았다.

 

동혈의 직경은 두 자가 조금 넘었는데, 대여섯 자 아래쪽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어둠이었다.

 

아버지 말로는, 통로는 빛이 없어도 통과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끝에 가면 빛이 있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는 한쪽에 꽂아 놓은 횃불을 들어 동혈 속에 던져 넣었다.

 

횃불이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더니,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졌다.

 

희미한 빛이 보이는 걸로 봐서 꺼지지는 않은 듯했다.

 

“후우우우…….”

 

숨을 길게 내쉰 독고무령은 작은 가죽주머니를 집어 들고 목에 걸었다. 그가, 아버지가 아끼던 것이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동혈 속으로 들어갔다.

 

한 발, 한 발…….

 

가슴까지 동혈 속에 집어넣은 그는 침상의 다리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리고 침상이 완벽히 제자리에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밑으로 더욱 깊숙이 몸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팔과 머리만 남겨지자, 손을 뻗어 석판을 위로 끌어 올렸다.

 

곧 석판이 제자리를 찾아 놓여졌다.

 

텅!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비옥십팔호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키만큼 아래로 내려가자 통로가 조금 넓어졌다. 양쪽을 손으로 짚으며 내려가는데도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혈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독고무령은 손발을 이용해서 몸을 지탱하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꼬불꼬불하게 아래쪽으로 뻗은 통로는 십오륙 장쯤 되는 듯했다. 그곳을 통과하는데 일각가량 걸렸다.

 

긴장 때문인지 온몸이 땀으로 젖어 후줄근해졌다.

 

통로가 넓어질수록 힘도 더 들었다.

 

그나마 아래쪽에서 비치는 희미한 빛에 벽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간간이 튀어나온 곳을 손으로 잡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이삼 장을 더 내려가자, 바람이 좁은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쉬이이이…….

 

‘거의 다 왔군.’

 

독고무령은 조심조심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벽을 밟으려던 발에 아무 것도 걸리지 않자 갑자기 중심이 흔들렸다.

 

독고무령은 다급히 벽을 짚은 손에 힘을 주고, 내려진 발을 다시 들어올렸다.

 

아버지가 말했던 통로의 끝에 당도한 듯하다.

 

‘높이가 이 장 정도 된다고 했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한쪽에 떨어져 있는 횃불 덕분에 주위는 제법 밝았는데, 발 아래쪽은 상당히 넓은 공동이었다.

 

독고무령은 손에서 힘을 빼고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순간 바닥에 내려선 그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그곳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칠팔 장 넓이의 천연 동굴이었는데, 반대편 벽 아래로 지하수로가 흐르고 있었다.

 

부드럽게 출렁이는 지하수로의 넓이는 여섯 자 정도. 횃불에 반사된 물결이 마치 살아서 출렁이는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독고무령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고개를 돌렸다.

 

구석에서 바람이 강하게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수로의 끝에 있는 구멍으로 물이 빠져나가며 나는 소리였다.

 

그는 그곳을 잠시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제법 넓고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그 위에 아버지가 준비해 놓은 물건이 있었다.

 

아들을 위해서.

 

가슴이 먹먹하고 두 눈이 찡하니 울렸다.

 

‘아버지…….’

 

 

 

“아비는 양가죽으로 된 커다란 물통에 바람을 넣고, 오 년 동안 만든 기다란 줄에 매달아서 수로에 떠내려 보냈다. 줄의 길이가 무려 수백 장이나 되었지. 한데 그것이 다 풀리도록 걸리는 게 없이 흘러가더구나.”

 

한마디로 수로가 사람이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좁지는 않다는 말.

 

“그 후 염마귀에게 넌지시 말했다. 근처 호수나 강에서 핏물이 솟구치는 날은 살기가 너무 센 날이니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방에 처박혀 있으라고 말이다. 크크크, 그러고는 많은 양의 피를 모아 몇 번에 걸쳐 흘려보냈지.”

 

그랬더니 어느 날 염마귀가 찾아와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고 했다.

 

“동쪽으로 이십 리가량 떨어진 곳에 분하(汾河)로 흘러들어가는 호수가 있네. 그곳에서 핏물이 솟구친다는 소문이 돌더군.”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해주고는 수어잠혼공(水魚潛魂功)이라는 무공을 가르쳤다. 

 

아버지가 고문했던 사람 중에는 황하를 무대로 활동했던 황하삼귀가 있었는데, 그중 수귀(水鬼) 호상이라는 자에게서 얻은 무공이었다.

 

수귀는 그 무공 덕분에 물속에서도 한 시진이나 참을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은 그 무공을 익히며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 다른 무공을 익힐 때처럼, 아버지의 말이 있기 전까지는 무조건 버텼으니까.

 

그 덕에 수귀 못지않게 숨을 오래 참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수로를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

 

수로가 갑자기 좁아져서 몸이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고, 중간에 숨을 쉴 곳이 없어서, 죽은 채 강이나 호수 위에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살아날 확률이 단 일 푼뿐이라 해도 해야만 한다.

 

가만히 앉아서 저들의 손에 죽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아버지의 판단을 믿는다. 분명히 살 수 있을 거야!’

 

독고무령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아버지가 준비해 놓은 가죽옷을 걸쳤다.

 

머리까지 뒤집어쓸 수 있는 통짜 가죽옷이었다. 행여나 수로를 빠져나가며 몸이 상할까 봐 준비한 것이었다.

 

가죽옷을 다 입은 그는 옷 속에 두 가지 물건을 넣었다.

 

하나는 양가죽에 기름을 발라 만든 세 개의 공기주머니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가 먼저 던져 넣은 가죽주머니였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독고무령은 지하수로의 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한쪽 끝이 바위에 묶인 채 둥글게 말아놓은 엄청난 양의 밧줄이 있었다.

 

염마귀에게 수 년 간에 걸쳐 얻은 세 겹으로 된 밧줄을 풀은 후, 죄인들의 옷과 머리카락을 섞어 다시 만든 것이었다.

 

아버지말로는 일천 장쯤 된다고 했으니, 밧줄을 잡고 가면 절반 정도는 급류에 휘말리지 않고 갈 수 있을 듯했다.

 

독고무령은 밧줄 끝에 마지막 남은 공기주머니를 매달았다. 그리고 물속에 흘려보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밧줄이 반쯤 풀렸다.

 

다행히 엉킨 곳은 없는 듯했다.

 

그제야 독고무령은 천천히 숨을 깊게 들이쉬며 수어잠혼공을 운기했다. 그러고는 밧줄이 다 풀린 것을 확인한 후, 밧줄을 잡고 지하수로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이제 믿을 것은, 아버지가 만든 밧줄과 자신밖에 없었다.

 

하늘은, 태어날 때부터 그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 * *

 

 

 

남조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옥으로 향했다.

 

아침까지 기다려도 됐지만, 마음이 조급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비화당주의 자리에 오른 것은 단순히 무공이 높아서가 아니다. 남들보다 뛰어난 판단력과 예민한 감각 때문이다. 

 

‘왜 이리 기분이 찜찜하지?’

 

얼마 전, 성주가 말했다.

 

 

 

“가짜는 아닌데, 해석을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군. 숱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고도 천자무서를 해독하지 못했다더니, 정말로 어려운 구결이야. 어쩌면 그를 좀 더 살려두고 자세한 걸 물어봐야할지도 모르겠네.”

 

 

 

반도 아니고 구 할의 해석이다. 절대경지의 고수인 성주가 직접 백 일에 가깝게 연구했다. 그 정도면 어떤 결과가 나와도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천자무서의 무공이 그렇게 어려운 건가?’

 

아직 하루가 남긴 했지만 지금쯤이면 해석이 다 끝나 있을 것이다. 

 

그것마저 성주에게 바치면 어떤 결론이 나오겠지. 

 

천자무서가 엉터리든, 해석에 문제가 있든. 아니면 그만큼 어려운 것이든.

 

그럴 경우 그를 다시 고문해서라도 모든 것을 알아내야 한다. 

 

그런데 해석이 끝났다면 소악귀가 그를 죽일지도 모르는 일. 막아야 했다.

 

‘설마 아직 죽이진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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