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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제 2화

무료소설 암천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4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암천제 2화

 

2화

 

 

 

 

 

 

그날따라 철창 사이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유난히 따사로웠다.

 

독고무령은 햇빛이 비치는 곳에 의자를 갖다놓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햇빛이 비치는 시간은 길어야 한 시진.

 

그나마도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만 비친다. 봄 날씨가 완연해지는 사월이 되면, 태양이 하늘 높이 떠서 햇빛이 석실 안까지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하기에 그는 일이 있든 없든, 그 시간만큼은 모든 일을 중단하고 햇빛에 몸을 내맡겼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군.’

 

어느덧 햇빛이 들어오는 시간이 반 시진으로 줄어들었다.

 

앞으로 열흘이면 태양이 하늘 높이 솟구치고, 반년은 햇볕을 쬘 수 없을 것이다.

 

뚜벅, 뚜벅, 뚜벅…….

 

지하통로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린 것은, 햇빛이 한 뼘도 남지 않았을 때였다.

 

독고무령은 눈을 감은 채 발자국 소리를 세었다.

 

‘세 사람이군. 열둘, 열하나, 열…… 셋, 둘, 하나.’

 

하나를 셈과 동시에 발자국 소리가 멎었다.

 

철컹철컹!

 

철문의 자물쇠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걸쇠가 비명을 지르며 당겨졌다.

 

끼이이이…….

 

“소악귀, 손님이다. 문 열어라!”

 

목구멍에 밤송이가 박힌 것처럼 칼칼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옥의 책임자로, 자신이 염마귀(閻魔鬼)라 부르는 염상소의 목소리였다. 

 

십칠 년 전에 비옥의 책임자로 부임한 그는 자신을 항상 소악귀라 불렀다. 아마 아버지 옆에서 고문을 돕는 걸 본 후부터였던 듯싶다.

 

어릴 때부터 들어서인지, 독고무령은 소악귀라는 이름이 자신의 이름보다 더 정겹게 들렸다. 

 

하긴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염마귀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문득 엉뚱한 의문이 떠올랐다.

 

독고무령은 천천히 일어서서 철문의 안쪽 걸쇠를 잡아 당겼다. 철문은 안팎이 모두 걸쇠로 걸려 있었는데, 행여나 누군가가 침입했을 때를 대비한 조치였다.

 

그는 걸쇠를 잡아당기고 철문을 열었다.

 

염마귀 뒤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 중 중년인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전에 봤을 때는 어린 꼬마였는데, 많이 컸군.”

 

그는 깨끗한 하늘색 청삼을 걸친, 이제 마흔 서넛 정도의 중년인이었다. 뾰족한 턱에 매달린 다섯 치 정도의 수염이 하얗기만 했다면 영락없이 염소였다.

 

하지만 생김새와 달리 그의 몸에서는 범접키 힘든 기운이 넘실거렸다.

 

독고무령은 오 년 전쯤에 한 번 봐서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비화당주 남조경이 웬일이지?’

 

비화당은 성의 비밀스런 일을 처리하는 곳으로,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성주 직속 단체다.

 

그곳의 주인이 직접 왔다는 것은 오늘 데려온 손님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과도 같았다.

 

독고무령은 눈을 돌려 남조경의 옆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는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의 장한이 서 있었는데, 손님은 그의 어깨에 축 늘어져 있었다.

 

언뜻 보이는 모습만으로도 나이가 예순은 넘어 보였다.

 

‘오늘 손님은 조금 늙었군.’

 

독고무령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자, 남조경의 이마에 골이 파였다.

 

“너는 인사도 할 줄 모르느냐?”

 

염마귀가 대신 변명이라도 해주려는 듯 재빨리 입을 열었다.

 

“소악귀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지요.”

 

남조경은 눈살을 찌푸린 채 독고무령을 바라보더니, 방 안에서 나는 피비린내에 코를 찡그렸다.

 

“지독하군. 빨리 일을 보고 나가세.”

 

그거야 독고무령도 반기는 바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의자를 한쪽으로 치우고는, 손을 들어 한쪽에 놓인 돌로 된 침상을 가리켰다.

 

염마귀가 무표정한 얼굴의 장한을 향해 손짓했다.

 

“저곳에 눕혀 놓게.”

 

장한이 어깨에 걸쳤던 노인을 돌로 된 침상에 눕혀놓고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남조경이 품속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고는 본론을 꺼냈다.

 

“이자는 본성의 중요 죄인이다. 지금부터 너는 이자의 입을 열어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내야만 한다. 할 수 있겠느냐?”

 

이곳까지 데려와 놓고 물어보는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못 믿겠으면 비옥에 있는 다른 두 곳의 고문실에 데려가면 될 일이 아닌가?

 

독고무령은 가타부타 대답 없이 남조경만 바라보았다.

 

“내 묻지 않느냐?”

 

남조경이 노성을 내지르며 독고무령을 윽박질렀다.

 

독고무령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이곳에 들어와서 입을 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어린나이답지 않게 음울한 목소리.

 

남조경은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독고무령을 노려보았다. 그도 잠시, 그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났다.

 

‘그놈, 꼽추의 아들만 아니었으면 이런 곳에 있기 아까운 놈이군. 작년에만 해도 별 볼일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몸이 아주 잘 발달되었어.’

 

그는 약간 놀란 눈빛으로 독고무령의 몸을 세세히 훑어보았다. 

 

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져 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겉옷만 입은 몸은 많은 부분이 드러나 있어서 세세한 근육 움직임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흠, 애비가 체계적으로 몸을 단련시켰나? 훗, 하긴 제 꼴이 그러니 아들놈에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겠지.’

 

아무리 그래봐야 세상에 나갈 수 없는 놈이다. 어쩌면 곧 죽을지도 모르는 놈이고.

 

남조경은 비릿한 조소를 지으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험, 좌우간 확실하게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알아낸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알겠느냐?”

 

독고무령은 고개를 딱 한 번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려서 침상 위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남조경은 그런 독고무령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접힌 종이를 던졌다.

 

“이곳에는 그자의 신상명세가 적혀 있다. 참고하도록.”

 

그러고는 독고무령이 알아내야 할 일을 말해주었다. 

 

말할 때마다 차가운 눈빛이 독사의 눈빛처럼 번뜩였다.

 

“네가 할 일은 그자의 입에서 천자무서의 해독서를 얻어내는 것이다. 기간은 무제한이다. 얻어내지 못하고 죽으면 네가 벌을 받을 것이니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독고무령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들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고막이 울릴 정도로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천자무서라고?’

 

그는 일단 주운 종이 위에 쓰인 글을 읽어보았다.

 

 

 

이름 : 만유(滿儒) 유백하

 

나이 : 쉰아홉 살

 

출신 : 하남 낙양

 

신분 : 하남 정주의 백운서원 원주

 

가족관계 : 사별한 부인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고 함

 

죄목 : 헛소문을 퍼뜨려 제왕성을 모욕한 죄

 

 

 

독고무령은 죄목 부분을 보고 눈을 들었다.

 

서면에 쓰인 죄목은 그저 그를 잡아오기 위해서 가져다 붙인 것일 뿐이다. 아니라면 그를 고문해서 알아내야 할 것이 ‘천자무서(千字武書)의 비밀’일 리가 없었다.

 

비록 십육 년을 비옥십팔호실에서만 살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강호에서 벌어진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밤마다 이야기해주었으니까. 그것도 수백 명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아버지가 해준 이야기의 대부분은 죄인들이 겪은 일이나 야사처럼 일반적인 강호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그중에는 강호인들이 모르는 비밀스런 이야기들도 많았다.

 

천자무서에 대한 이야기도 그중 하나였다.

 

 

 

제목에 ‘무(武)’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긴 하나, 그것이 무공비급(武功秘笈)인지, 아니면 다른 비밀을 간직한 책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게 천자무서다.

 

원 주인은 태백산인(太白山人)이라 알려진 칠백 년 전의 기인이다. 

 

그가 선계에 들기 전 세상에 남겨놓은 한 권의 책자. 그게 바로 천자무서인데, 그 이름도 후세 사람들이 지었다.

 

그런데 강호인들이 천자무서를 갈망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다름이 아니었다.

 

당시 천하제일을 다투던 한 절대고수가 태백산을 지나던 중 태백산인과 만났는데, 그에게 승복해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문제는 당시의 절대고수가 바로, 승천무조(昇天武祖) 단천승이라는 것이었다.

 

단천승이 누군가. 역사상 가장 강한 무인으로 꼽히는 십대무신 중 한 사람이 아닌가!

 

세월이 지나 단천승이 죽고 천자무서에 대한 소문이 돌자 강호가 발칵 뒤집혔다.

 

 

 

-천자무서의 비밀을 풀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강호인들은 천자무서를 얻기 위해서 피를 마다하지 않았다.

 

백여 년 전 사라지기 전까지, 천자무서는 혈해 속을 떠다니며 십여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제대로 뜻을 풀이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

 

오죽하면 역사상 해독되지 않은 다섯 권의 비서(秘書) 중 하나로 불리겠는가.

 

 

 

‘고금오대비서(古今五大秘書) 중 단 한 번도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책이 천자무서다. 이자가 정말로 천자무서의 비밀을 풀어낸 걸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터. 독고무령은 의문을 접고 묵묵히 종이를 한쪽에 내려놓았다.

 

중요한 것은, 눈앞에 있는 자가 정말로 비밀을 풀었는지, 아니면 말뿐인지, 그러한 사실여부가 아니었다.

 

천자무서!

 

그 이름이 지닌 무게였다. 

 

천하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이 숨겨진 비서!

 

그 무게는 억만근 만큼이나 무거웠다. 

 

‘수백 명의 목숨도 그에 비하면 종잇장에 불과해.’

 

하물며 자신쯤이야…….

 

종이를 내려놓은 독고무령의 눈빛이 천장 무저갱처럼 깊어졌다.

 

그때 염마귀가 등에 대고 소리쳤다.

 

“이놈아! 결과가 나오면 불러라!”

 

남조경과 무표정한 얼굴의 장한은 석실 안의 비릿한 냄새를 참지 못하고 이미 밖으로 나간 후였다.

 

독고무령은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침상 위의 노인을 향해 걸어갔다.

 

끼이이, 쾅!

 

염마귀가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것처럼 철문을 세게 잡아 당겼다.

 

이제 비옥십팔호실뿐만이 아니라 이곳으로 오는 지하통로의 입구도 봉쇄될 것이다. 그리고 비옥 사방 이십 장 안으로는, 식사를 가져오는 염마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비밀은 최대한 아는 사람이 적어야 하는 법이니까.

 

독고무령은 철문이 닫힌 후에야 눈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때가 된 건가?’

 

천하를 들썩이고도 남을 비밀을 지닌 손님이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의 나흘 전처럼.

 

그 말인즉, 자신이 숨을 쉴 수 있는 날도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저들은 결코 천자무서의 비밀을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독고무령은 노인의 팔다리를 침상에 달려 있는 족쇄와 수갑으로 고정시켰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데다, 단전이 파괴되어 있어 반항은 거의 없었다.

 

그러고 난 후, 기다란 장침을 하나 들고 와 서슴없이 노인의 가슴에 꽂았다.

 

“크으윽!”

 

둘을 세기도 전에 노인이 신음을 토하며 정신을 차렸다.

 

 

 

* * *

 

 

 

유백하는 흐릿한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짧은 순간 두 번에 걸쳐 놀랐다.

 

첫 번째는 음침하고 비릿한 혈향이 가득한 곳에 어린소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소년이 바로 침 하나로 자신을 깨운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아직 세 번째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대학자조차 꿈에도 짐작치 못했다.

 

그는 목을 쥐어짜 소년에 대해 물었다.

 

“아이…… 야, 너는…… 누구……?”

 

독고무령이 음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방의 주인. 당신의 입에서 천자무서에 대한 것을 불게 할 사람.”

 

고문술사라는 말.

 

유백하의 파르르 떨리던 눈이 한껏 커졌다.

 

말대로라면, 자신을 고문할 사람이 바로 눈앞의 소년이라는 말이 아닌가?

 

“네, 네가…… 나를…… 고문하겠…… 다는 거냐?”

 

독고무령은 고개만 끄덕였다.

 

굳이 입을 열어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느릿하게 돌아선 그는 탁자 위에 놓인 기구 중 두어 가지를 가져와서 침상 한쪽에 올려놓았다.

 

“말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말할 때까지 백여덟 가지의 고문을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그가 무심한 어조로 말하며 톱날처럼 생긴 침을 집어 들었다.

 

유백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정말 이 어린 소년이 자신을 고문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열을 세기도 전에 모든 의문을 접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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