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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전설 64화

무료소설 패왕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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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패왕전설 64화

 64화

 

부용화의 말에 무표정한 사내의 얼굴에 아주 잠시지만 괴로움이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 제안입니다. 손을 거두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죽여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아녀자를 상대로 손을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만! 그마안!”

사내의 말에 귀를 막고 소리치던 부용화가 갑자기 몸을 웅크리며 오열을 했다. 그러다 뭐가 생각이 났는지 눈물을 흘리며 사내를 보고 물었다.

“내가… 내가 얌전히 잡혀주면……. 우리 아이들도 무사할 수 있나요?”

“무공을 모르는 영령 아가씨는 무사하겠지만… 운휘 공자는…….”

“…….”

사내의 말에 여태까지 울음을 터트리고 있던 부용화가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냉정한 모습으로 일어나 사내를 똑바로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눈물을 보이며 오열하던 여인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척경.”

“……!”

사내는 부용화로부터 처음 불리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심정에 커다란 동요가 일었다.

사실 사내가 수십 년간 부용화를 호위하며 그녀를 위해 궂은 일들을 모두 처리한 것은 부용화에 대한 연정 때문이었다. 수신호위가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생겨버린 감정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부용화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부용화를 호위하면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미소였다. 그 미소는 그 어떤 말보다 많은 의미와 고마움을 담고 있었다.

“지금쯤 운휘와 령아도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겠군요. 후훗! 하지만 당신들은 착각한 것이 하나 있어요.”

“……!”

“그것은 바로 령아의 능력이에요.”

부용화의 알 수 없는 말에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말해도 당신은 믿지 못할 거예요. 척경,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부탁이 있어요.”

“말해 보십시오.”

“나를 위해… 죽어줘요.”

부용화의 말에 사내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지금 부용화는 자신을 향해 애정과 도움을 바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꿈에서라도 바라마지 않았던 일이 아니던가?

“후우. 그것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 대화는 끝났다. 죽여라.”

사내가 그렇게 말하며 나직이 명령하자 부용화를 둘러싸고 있던 수십 명의 사내들이 부용화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용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검이 코앞까지 다가오는데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당장 죽음이 눈앞에 있었지만 뭔가를 믿는 듯, 흔들림이 없는 모습이었다.

가가가각!

까까까깡!

그 순간이었다. 부용화를 공격해 가던 사내들의 검을 막으며 그들을 베어내는 누군가 있었다.

사내들은 그 누군가를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가 바로 방금까지 부용화와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들에게 부용화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척경이라는 사내였기 때문이다.

“무슨 짓이오?”

사내들 중 한 명이 척경을 보고 외치자 척경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훗! 글쎄. 나도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군. 나도 모르게 이렇게 몸이 움직여 버리다니……. 그동안의 습관 때문인가?”

척경이 그렇게 말하면서 부용화를 바라보자 부용화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허리띠를 풀러 살짝 손목을 떨치자 곧 기다란 검이 손에서 뻗어 나왔다. 허리띠에 두르고 있던 연검(軟劒)을 뽑아 든 것이었다.

“가죠. 일단 운휘와 령아를 구한 후에 이곳을 빠져나가요.”

“후훗! 불가능하겠지만 명령이니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길은 제가 뚫죠.”

그렇게 말하면서 척경이 앞으로 쏘아져 나가며 검을 휘두르자 그 뒤를 부용화가 연검을 휘두르며 따랐다.

 

그 시각 적운휘도 수신호위대와 폭풍대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받고 있었다.

퍼억!

우직!

적운휘의 주먹에 배를 맞은 상대의 허리가 기역 자로 꺾이며 공중으로 튕겨 올랐다. 그 순간 적운휘가 주먹을 한 번 휘돌려 떠오르는 상대를 내려치자 상대가 피를 뿜으며 바닥에 처박혔다.

콰아앙!

그것을 보고 적들이 선뜻 적운휘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적운휘의 무공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지금 여기에 모여 있는 이 정도의 수의 사람들이라면 적운휘를 능히 제압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벌써 반 시각 이상 싸우고 있었지만 적운휘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적운휘의 싸움 방식 때문이었다.

마력진패강기를 쓰는 적운휘는 위력적인 초식들을 구사하며 한 사람, 한 사람씩 차례차례 쓰러트리고 있었다.

그렇게 적운휘의 손에 쓰러진 상대들은 마치 커다란 망치에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참담한 몰골이었다. 가슴이 움푹 꺼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목이 서너 바퀴나 돌아가 버린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적운휘는 사람들을 그렇게 끔찍하게 만들면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무표정했다. 눈빛에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것이 그저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그런 눈이었다.

한 방에 사람을 폐인으로 만드는 그 박력과 사람을 그렇게 만들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적운휘의 모습에 적들은 유리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쉽게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적운휘의 기세에 완전히 눌리고 있었던 것이다.

퍼어억!

“크아아악!”

검을 찔러오던 상대의 팔을 잡아 비틀어 반 이상을 뽑아버리자 상대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적운휘의 장이 그자의 머리를 내려치자 목이 몸속으로 쑥 들어가면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꿀꺽!

그걸 보고 적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사이에 적운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폭풍대는 그렇다 쳐도 호위대까지 내게 칼을 들이대다니…….’

그때 적운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적운휘가 그를 보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그 사내가 어두운 얼굴로 적운휘를 불렀다.

“사형…….”

그는 적운휘의 사제인 왕이후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적에게 둘러싸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적운휘는 주위를 압도하는 기세를 뿜어내며 왕이후를 향해 말했다.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손을 거둔다면 최대한 예의를 지키겠습니다.”

왕이후의 말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적운휘가 작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반란인가? 어쩐지 아버님의 부재가 너무 길다고 여겼지.”

“이미 사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쯤이면 사모님은 물론, 영령이도 붙잡혔거나 죽었을 겁니다.”

적상군이 죽었다는 말이나 부용화와 적영령이 위험하다는 말에도 적운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런가? 하지만 너희들은 몇 가지 실수를 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첫 번째 실수는 너희들은 영령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

“그리고 두 번째 실수는 네가 이 자리에 온 것이지.”

적운휘가 그렇게 말하면서 왕이후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앞에 있던 자들이 그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적운휘가 다가오자 왕이후도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며 허리에 차고 있던 도를 뽑아 들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목숨을 걸고 사형과 한번 겨루어보고 싶었습니다.”

왕이후가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는 적운휘를 향해 도를 빙글 돌려 밑에서부터 위로 그어 올렸다.

그것을 적운휘가 정말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도를 잡고 있는 왕이후의 팔을 노리고 주먹을 뻗었다.

퍼억!

적운휘의 공격을 왕이후가 팔을 당겨 막아냈으나 충격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하마터면 들고 있던 도를 놓칠 뻔했다.

“흐아아앗!”

그 순간 왕이후가 기합을 지르며 왼손 장으로 적운휘의 머리를 후려치려고 했다.

그러자 적운휘가 그것을 막으면서 빠르게 주먹을 뻗어갔고, 그때부터 두 사람은 바짝 붙어서 싸우기 시작했다.

적운휘는 원래 무기를 쓰지 않는 적수공권의 접근전이 주특기였다.

그러나 왕이후 역시 예전에 강무진에게 한 번 당한 이후로 근접전을 많이 연습했기 때문에 적운휘에게 밀리지 않고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주먹과 장, 팔꿈치와 무릎, 그리고 어깨까지 쓰며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런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낄 틈이 없어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때였다.

“흐아아압!”

퍼퍼펑!

갑자기 왕이후가 기합과 함께 힘껏 장을 뻗어내자 그것을 맞받아친 적운휘의 몸이 뒤로 밀리며 공중으로 튕겨 올랐다. 그러자 왕이후가 적운휘를 따라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또다시 장을 힘껏 뻗었다.

그것을 보고 적운휘의 눈이 살짝 빛이 났다.

‘나를 보내주려고 하는 건가?’

적운휘는 왕이후의 공격에서 그런 의도를 읽고 왕이후가 내미는 장에 자신의 장을 맞부딪쳐 갔다.

퍼엉!

그러자 또다시 적운휘의 몸이 뒤로 밀리며 이제는 주위의 포위를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되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때 왕이후가 그렇게 외치면서 도를 크게 휘둘러 뇌기(雷氣)를 사방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지금 왕이후가 쓴 것은 뇌전폭풍도(雷電暴風刀)의 뇌전폭사(雷電爆瀉)라는 초식이었는데, 사실 이 초식은 한 사람을 상대로 쓰기보다는 다수의 적을 상대로 할 때 쓰는 초식으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초식이었다.

왕이후가 그렇게 뇌전폭사를 쓰자 적운휘는 물론이고 밑에서 적운휘를 포위하고 있던 적들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그 순간 적운휘가 뒤로 훌쩍 몸을 날리며 그 자리를 벗어나자 왕이후가 주위를 둘러보며 사납게 외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그를 쫓지 않고!”

그런 왕이후의 외침에 잠시 멍해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적운휘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쫓아 이미 사라진 적운휘가 간 방향을 보면서 왕이후는 생각했다.

‘사형, 그간의 정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부디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십시오. 다음에 만나면 정말 서로를 죽이기 위해 칼을 겨누어야 할 겁니다.’

“놈! 사사로운 정 때문에 그를 놓아준 거냐?”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왕이후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덩치가 좋고 우직하게 생긴 장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가 바로 패왕폭풍대의 대주이자 왕이후의 아버지인 왕철심이었다.

“아버지!”

“네가 그를 놓아준다고 해도 그들의 손에서 그가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형은 반드시 이곳을 빠져나가 다시 저한테 칼을 겨눌 것입니다. 사형은 능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왕이후의 말에 왕철심은 잠시 말없이 왕이후를 바라봤다. 그동안 그저 어린애로만 여겼건만 이제는 어엿한 한 명의 무인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가 돌아온다면 그때는 그를 이길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그동안 뼈를 깎는 수련을 하겠습니다.”

왕이후가 불끈 쥔 주먹을 내밀면서 말하자 왕철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더 이상 너를 문책하지 않으마. 가자, 오늘은 이 아비랑 술이나 한잔하자꾸나.”

다른 때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왕철심에게 주어진 명령은 적운휘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것을 나 몰라라 하고 술을 마신다는 것은 이미 그 명령을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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