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전설 55화
무료소설 패왕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7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패왕전설 55화
55화
<보타문으로 가다>
부용화는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유도 모른 채 계속 그런 마음이 들자 자꾸 짜증이 치밀었다.
이에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그 원인이 말없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고 있는 적상군에게 있다고 여겨졌다.
적상군이 이렇게 말없이 자리를 비우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었다. 늘 패왕성의 막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적상군에게 그것은 아주 잠시 동안의 휴가였다. 그것을 부용화도 알고 있기에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휴가가 너무 길었다. 보통 한 달에서 두 달 사이에는 돌아오던 그가 이번에는 무려 1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다 연락도 없고 찾을 수도 없으니 답답한 심정에 불안과 짜증이 밀려왔던 것이다.
“상공의 위치는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나요?”
부용화가 묻는 말에 부용화의 뒤에 서 있던 사내가 대답했다. 그는 강인한 인상의 남자다운 모습의 사내였다.
“아직…입니다.”
“아무리 몰래 성을 나간 것이라지만 어떻게 1년 동안이나 행방을 찾아내지 못하는 거죠? 패왕성의 정보력이 그렇게 약했나요?”
“현재 패왕기밀수위대가 전력을 다해 찾고 있습니다. 곧 소식이 있을 겁니다.”
사내의 대답에 참고 있던 부용화의 짜증이 폭발했다.
“그 말을 벌써 몇 달째 하고 있는지 아나요? 안 되겠어요. 내가 직접 섭초홍을 만나봐야겠어요.”
섭초홍은 패왕성 안팎의 모든 정보를 취급하는 패왕기밀수위대(覇王機密守衛隊)의 대주였다.
그녀가 하루에 처리하는 정보의 양은 무려 수백여 건이나 되었다. 이에 그녀는 늘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패왕성 내에서도 얼굴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여제갈이라 불릴 정도로 기지(奇智)가 뛰어나 앉아서 천 리를 본다는 여인이었다.
쾅!
당당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간 부용화는 커다란 책상에 수북이 쌓여 있는 서류들 틈에서 인상을 살짝 쓰며 일을 하고 있는 섭초홍을 바라봤다.
섭초홍은 이미 4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30대 초반으로 보일 만큼 젊은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섭초홍의 질문에 부용화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상공에 대한 것은 아직인가요? 1년이 넘도록 상공의 행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흐음, 그건 흥분한다고 어떻게 되는 일이 아니에요. 성주님 같은 절정의 고수가 흔적을 지우려 하면 우리도 방법이 없다고요.”
섭초홍이 그렇게 말하면서 보고 있던 서류를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용화가 다가가서 책상을 힘껏 내리치면서 말했다.
쾅!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요!”
“말하세요. 귀는 열어두고 있으니까.”
부용화의 기세에도 상관없이 섭초홍은 여전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부용화가 다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뭔가 숨기는 게 있죠? 상공에 대한 것을 이미 알고 숨기고 있는 것 아닌가요?”
부용화의 말에 섭초홍이 서류에서 눈을 떼고 부용화를 보면서 말했다.
“제가 왜 그런 것을 숨긴다고 생각하죠? 제가 하루에 처리하는 정보 건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나요? 하루 꼬박 이러고 앉아 있어도 시간이 모자라죠. 지금 당신과 이렇게 이야기할 시간이면 적어도 서너 건의 정보는 처리할 수 있어요. 게다가 성주님에 대한 일이라면 여기가 아니라 수신호위대(守身護衛隊)를 찾아가서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여기서 물어보면 어떻게 하란 거죠? 나도 빨리 성주님을 찾아서 저기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일들을 보고해야 한다고요.”
섭초홍이 쉴 새 없이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사람의 키만큼이나 높게 쌓인 서류 뭉치들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 부용화가 잠시 질린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휴우, 미안해요. 나도 알고는 있지만 요즘 이상하게 뭔가 불안한 마음이 자꾸 들어서 그랬어요.”
그런 부용화의 모습에 섭초홍도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기밀수위대는 물론이고 수신호위대도 전력으로 성주님의 행방을 찾고 있으니 조만간 소식이 들려올 거예요. 사실 얼마 전에 성주님으로 보이는 사람을 찾았다는 연락이 있었어요. 그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사람이 나가 있으니 곧 연락이 올 거예요.”
“그래요. 그럼 연락이 오면 바로 알려주세요.”
“그러죠.”
“휴.”
부용화가 다시 한숨을 쉬고는 그 고운 아미를 살짝 찡그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섭초홍이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여자의 직감은 무섭군. 그나저나 이 일을 어떻게 알려야 하나. 성주님의 죽음이 알려지면 패왕성에 피바람이 불 텐데. 언제까지 정보를 묵혀둘 수도 없는 일이고. 흠. 모든 게 정말 그의 뜻대로 되어가는 건가?”
“당신은 왜 자꾸 우리를 따라오는 거죠?”
용보아가 강무진을 보며 소리치자 강무진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야. 내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이지. 나도 지금 보타문으로 가고 있거든.”
“그럼 따로 가요. 계속 졸졸 쫓아오지 말고!”
“기왕에 가는 길, 같이 가면 좋지 않나?”
“난 싫다고요!”
용보아가 그렇게 소리를 꽥 지르자 강무진이 용보아의 얼굴 바로 앞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대며 물었다.
“왜 싫은 거지?”
그러자 용보아의 얼굴이 빨개지다가 갑자기 다시 소리치며 몸을 홱 돌려버렸다.
“몰라요! 흥!”
용보아의 그런 반응에 강무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정소옥에게 물었다.
“도대체 용 소저가 나한테 왜 저러는 겁니까?”
“후훗! 글쎄요.”
“참 내.”
그렇게 강무진은 계속 용보아에게 냉대를 받으면서도 항주(杭州)를 벗어나 보타문((普陀門)으로 향하는 그들과 끝까지 동행을 했다.
그들이 항주에서 보타문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소흥(紹興)에 도착해 한 객잔에서 묵을 때였다.
이미 밤이 깊어 침상에 누워 눈을 붙이려던 강무진은 순간 뭔가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가로 가서 밖을 살피다가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지붕의 처마를 잡고는 몸을 뒤집어 지붕으로 올라섰다.
그러자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몸매의 굴곡이 심한 것으로 봐서 여자인 것 같았다.
“누구냐?”
강무진이 낮지만 위협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상대는 대답도 없이 그렇게 등을 보인 상태에서 손만 뒤로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뭔가 빽빽이 적힌 종이 뭉치가 날아와 강무진 앞에 떨어졌다.
이에 강무진이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슬쩍 내려다보는 찰나에 상대는 이미 모습을 감춰 버렸다.
“……!”
‘뭐지? 어떻게 저렇게 순식간에 사라질 수가 있지? 모습으로 봐서는 여자인 것 같았는데.’
강무진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예전에 패왕무고에서 봤던 대결록의 내용이 떠올랐다. 대결록에는 살수들이 모습을 감추는 것에 대한 기록도 많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 살수라면 그런 움직임이 가능하지. 그런데 살수가 왜? 성에서 또다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인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강무진은 그렇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면 칼이라도 한 번 휘두르고 가지 이렇게 그냥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강무진은 일단 상대가 던져 놓고 간 종이 뭉치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크으, 정말 악필이군. 내가 발로 써도 이것보다는 잘 쓰겠다.’
그랬다. 종이에 적혀 있는 글씨체는 정말 악필 중에도 악필이었다. 그중 몇몇 글자는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종이들을 훑어보던 강무진의 눈은 점점 놀라움으로 커져 갔다.
“이, 이건!”
종이 뭉치에 적혀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열화마결이었다.
앞부분의 내용이 강무진이 기억하고 있는 열화마결의 초반부 내용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리고 뒷부분부터는 그 어려웠던 문장들이 알기 쉽게 풀어져 쓰여 있었다.
다시 한 번 서류 뭉치들을 쭉 살펴본 강무진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고 있는 건가?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분명 열화마결이다. 으음. 그때 협곡에서 나를 구해서 기루에 데려다 놓은 사람일 가능성이 많아. 도대체 누구일까?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강무진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열화마결이 쉽게 풀이되어 있는 부분이 놀랍게도 강무진이 익힌 다음 부분부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강무진이 들고 있는 열화마결은 무리하지 않고 한동안 익힐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 자칫 욕심을 내어 주화입마에 빠질 것을 막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런 것으로 미루어 보아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끙, 모르겠다. 때가 되면 나타나겠지.’
강무진은 잠시 더 생각을 하다가 답이 안 나오자 그렇게 그냥 생각을 접어버렸다.
그때부터 보타문으로 가는 동안 강무진은 틈틈이 열화마결을 수련했다.
정소옥과 용보아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강무진을 보고 이유는 몰랐으나 평소에도 강무진은 밝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그런 밝은 성격 때문인지 화가 나 있던 용보아도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보타문에 거의 도착할 무렵에는 예전과 같이 강무진을 대하고 있었다.
역시 시간이 약이었던 것이다.
“정 소저.”
보타산을 오르던 강무진이 정소옥을 부르자 정소옥이 강무진을 바라봤다.
“네?”
“사부님인 구해신니는 어떤 분이시오?”
“음, 사부님은 자상하시고 정이 많은 분이세요. 또 모든 사람들한테 항상 따뜻하게 대하세요. 무공도 강하시고요.”
정소옥의 말에 강무진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군요.”
“에? 뭐가 다행이라는 거예요?”
“혹시나 무서운 분이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호호. 그렇지 않아요.”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용보아가 끼어들며 말했다.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걸요. 사부님은 대사저를 굉장히 아낀다고요. 그런데 당신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이겨버렸으니, 사부님이 당신을 곱게만 보지는 않을 거예요. 흥! 그때 당신이 대사저를 이긴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지만 어쨌든 이긴 건 이긴 거니 사부님을 만나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하하하. 나도 그때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강무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앞에서 말하면서 가던 용보아가 갑자기 뒤를 홱 돌아봤다. 그리고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강무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요! 왜 사저는 존대를 해주면서 나한테는 그런 말투를 쓰는 거죠?”
“응?”
강무진은 여태까지 그런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용보아의 말대로였다.
정소옥에게는 계속 존대를 해오고 있었지만 용보아한테는 언제부터인가 말을 낮추고 있었던 것이다.
‘주 사매랑 닮아서 나도 모르게 편하게 느껴졌나?’
강무진이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여전히 앞에서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용보아를 힐끗 바라봤다.
‘닮았어. 닮았어. 왠지 친숙해서 자꾸 반말이 나가는데 어쩐다.’
“갑시다.”
강무진은 용보아의 물음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말하면서 용보아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