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217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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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제217화
문주의 집무실에 갇힌 것처럼 진무린은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영웅대회를 위해 임운령을 대표로 모려원과 종무헌, 제자들의 파견을 결정했고, 그나마 출발 당일에 잠시 나와 얼굴을 보여준 것이 전부였다.
“사숙. 먼 길 무탈하게 다녀오십시오.”
“려아가 이미 등룡창천을 깨달았고, 무헌이마저 초입에 있으니 좌청룡, 우백호라 할 만하다. 문주는 염려를 놓고 안위를 살펴라.”
그렇게 출발하는 일행의 끝에 남굉모와 나탑사가 있었다.
“외조부. 생각나시면 언제고 들러주십시오.”
“은천문은 내게 집과 같은 곳이다. 이제는 문주의 무공에 비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으나 이 늙은이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고 불러다오.”
“외조모. 본문에 도움 주신 점 잊지 않겠습니다.”
“문주의 보살핌에 감사해. 좋은 소식을 고대하네.”
양손을 맞잡아 인사한 것을 끝으로 일행은 은천문을 나섰다.
“검법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데 문주는 너무 급하게 매달리는 건 아니니?”
일행이 나선 뒤 내성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양소소가 달래듯 진무린에게 건넨 말이었다.
“벽계의 태상을 상대하며 얻은 것이 손에 잡힐 듯해서 고민 중입니다. 이 단계를 지나면 얻든, 못 얻든, 잠시 여유를 가질 생각입니다.”
진무린의 대꾸에 양소소와 전도위는 고개만 끄덕였다.
제자들에게 유포한 은천수호검을 대신해 문주에게만 전해질 검법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 전도위나 양소소 모두 더는 입에 담지 않았다.
“모산의 문주는 어찌할 셈이니?”
“도력을 채우고 나면 연락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사부님을 모시고 나설까 합니다.”
“문주 덕에 모처럼 강호 구경을 하겠구나.”
진무린의 답에 전도위가 호탕한 답을 내놓았다.
영웅대회를 위해 출발하는 명단을 보며 짐작했던 내용이었으나 진무린의 확답을 듣자 그제야 흡족해 하는 눈치였다.
**
화산은 끝내 영웅대회의 참가를 포기하고 대신 문혼과 매화검수를 보내 정도맹의 행사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홉 자리 중 서문세가가 한 자리를 차지해 남은 것은 여덟 자리였다.
구대문파에서 화산과 봉문한 공동, 점창이 빠져 모두 여섯 곳이 참여하였으니 몰려든 이들의 관심은 남은 두 자리를 누가 차지하는가였다.
영웅대회를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우-!”
몰려든 이들이 퍼붓는 야유가 기름에 물을 부은 것처럼 들끓었다.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섬도곤은 야유 따위 즐거움의 한 가지라는 것처럼 유유자적하는 걸음으로 수하들을 이끌고 정도맹으로 들어섰다.
“대체 강호가 어찌 되려고 마교의 후계자를 이런 대회에 받아들이는지! 정도맹과 구대문파도 타락한 게지!”
내내 여유롭던 섬도곤이 걸음을 멈추고는 다 들으란 듯 떠든 남자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마교라 해도 이 몸이 물러설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지켜보는 눈이 셀 수 없이 많은 곳이어서 섬도곤의 시선에 움찔하고도 남자는 기개를 꺾지 않았다.
“출신과 별호가 어찌 되오?”
그러나 그는 섬도곤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쭈뼛댔다.
막말로 섬도곤이든, 마교든 작정만 하면 굳이 출신과 별호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남자는 물론이고, 가족과 속한 무관의 모든 이가 죽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 까닭이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자가 별호도 말하지 못한단 말이냐.”
“크흠.”
“계속 그렇게 나오면 내가 찾아볼까?”
결국,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면서도 그는 끝내 섬도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켜보는 이들 앞에서 마교에 고개 숙였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원한다면 그리해주지.”
눈빛을 독하게 빛낸 섬도곤이 픽 웃으며 수하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남자와 그의 가족, 관련된 무관의 삶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남자의 뒤편에서 눈이 밝아지는 미녀와 눈썹이 머리에 닿을 정도로 날카로운 인상의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려원과 종무헌이었다.
모려원이 그만하라는 투로 짧게 고개를 저었는데 섬도곤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정도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리되면 남는 것이 한 자리가 아닌가.”
긴장이 풀리자 누군가 입을 열었다.
조금 전의 상황을 본 터라 감히 마교에 관해 말하지 못해 이어진 대화들은 부족한 자리에 관한 불평과 불만이 전부였다.
“그런데 여기 있던 일남일녀는 어디에 갔지? 우리가 헛것을 보았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모려원과 종무헌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
백면호리의 방문을 통해 황종관의 편지를 받은 진무린은 다음 날 전도위, 제자들과 함께 조용하게 은천문을 빠져나갔다.
강호의 시선이 온통 영웅대회에 쏠린 참이었다.
진무린, 전도위는 백면호리와 제자들과 함께 귀혼곡으로 향했다.
“백면호리. 굳이 전부 방문할 필요 없으니 가서 모산의 문주만 모셔줘.”
“저기 문주. 그 전에 말씀을 좀…….”
백면호리는 전도위가 두려운 양으로 전전긍긍이었다.
“내가 전에 발목을 자르겠다는 말을 이미 문주가 풀어준 것으로 안다. 백면호리의 공이 적지 않으니 본문의 한 사람으로 오히려 감사의 뜻을 전한다.”
전도위가 진중하게 말을 건네자 백면호리는 밝아진 얼굴로 귀혼곡을 향해 뛰어들었다.
잠시 후였다.
“진 문주!”
사람 좋은 운진이 진무린을 향해 달려왔다.
전도위와 인사를 나눈 다음이었다.
“백면호리는 들어가 정아와 지내. 일을 마무리하면 한 번 들러서 정아의 무공을 보아주지.”
“진 문주의 마음이 바다와 같으니 은천문의 앞날이 한없이 밝을 거요.”
백면호리답지 않은 인사를 마친 그가 귀혼곡의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언제가 발목을 자르게 되리라 여겼는데 역시 사람은 어울리는 이들을 닮아가는 모양이다. 백면호리가 저리 달라진 모습을 보일 줄 짐작조차 못 했었다.”
귀혼곡으로 사라진 백면호리를 보며 전도위가 내놓은 혼잣말이었다.
“이런! 문주의 행사를 앞에 두고 말이 있었다. 문주는 사부의 실없는 언사를 용서해라.”
“문주께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던 참입니다. 문주. 추적이 가능하십니까?”
“노도가 바로 시작하리다.”
운진은 검지와 중지로 부적을 한 장 꺼내고는 주문을 빠르게 외웠다.
“가라!”
운진이 부적을 하늘로 뿌린 다음이었다.
한 마리 새처럼 허공을 맴돈 부적이 방향을 정하고는 빠르게 날았다.
진무린과 전도위가 제자들과 출발하려는 순간이었다.
“진 문주! 노도가 종횡주를 묶는 것을 잊었소!”
엉뚱한 고함이 운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부적은 어찌합니까?”
“길들여진 새와 같아서 얼마든지 부를 수 있다오.”
운진이 주문을 외우자 날아갔던 부적이 다시 돌아와 허공을 맴돌았다.
급히 종횡주를 묶은 운진이 계면쩍은 표정으로 다시 주문을 외웠다. 이번에도 부적이 방향을 잡고 날았고, 이번에야말로 일행은 걸릴 것 없이 경공을 펼쳤다.
**
영웅대회는 성황리에 막을 열었다.
은천문의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은 임운령은 황종관에게 당부하여 바깥쪽에 따로 자리 잡고서 묵묵하게 자리를 지켰다.
복장이며 태도가 허술하지 않으나, 대회가 열리는 앞쪽에 앉지 못하여 바깥에 자리한 모습이었다.
“초대를 받지 못하셨소?”
“연이 없어 그리되었습니다.”
“허어! 그렇다고 이렇게 있으면 누가 알아준답디까? 앞으로 가서 구경이라도 하지.”
오가는 이들이 행여 이름 있는 문파인가 하며 왔다가 제자들과 몇 마디 말을 나눈 뒤에 바삐 대회장이 잘 보이는 앞으로 움직였다.
지나가는 이들이 어찌 알겠나.
임운령의 곁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영웅대회에 모인 이들 중 최강자에 속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등룡창천을 이용해 기를 넓게 펼쳐 주변을 살피던 모려원이 고개를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이미 약속된 대로 몸을 숨겼던 백호단원이 바삐 그쪽으로 움직였다.
“사파의 무리인 것 같아요. 바깥에서 기운을 뻗는 것으로 보아 대회장에 올라간 동료를 도우려는 모양이에요.”
모려원의 말에 임운령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와아-!”
대회장 한쪽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대회에 참여한 무인이 상대를 제압하자 나온 함성이었다.
**
꼬박 하루 반나절을 달린 다음이었다.
부적은 호북의 치용이라는 곳을 날아 명판조차 달지 않은 외곽의 민가 위를 맴돌았다.
“저곳에 부적을 지닌 자가 있소.”
“정확한 인물을 찾아내지는 못합니까?”
“노도가 확인하고 오겠소.”
“문주. 위험합니다.”
진무린은 운진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벽계의 인물입니다. 금제를 가해 무공을 감췄다고 하나 언제 힘을 사용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진 문주. 노도의 뜻이 전해지면 저 부적이 목표한 자에게 달려든다오. 진 문주와 전 사부, 제자분들을 보면 오히려 그가 의심하지 않겠소?”
진무린은 기운을 옅게 풀어 잠시 민가의 안을 살폈다.
낡은 담에 오래된 문이 달려 있으나 말끔하게 유지된 것으로 보아 부지런히 관리한 것이 분명했다.
“마침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다 함께 가셔도 될 듯합니다.”
“그것참 반가운 일이오.”
“기운을 감추기 어려우니 너희는 잠시 이곳을 지켜다오.”
“예, 문주.”
제자들에게 기다릴 것을 지시한 진무린은 전도위, 운진과 함께 민가로 향했고, 반쯤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그저 평범한 민가였다.
낡은 건물의 대청에서 고고한 태도로 서책을 들여다보던 중년 남자가 다가온 진무린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학사모에 잿빛 학사복을 갖추어서 책만 파고 사는 전형적인 학사의 모습이었다.
“어찌 오신 분들이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잡을 때 진무린은 운진에게 시선을 주었다.
“삼마삼마 가리나 옴.”
운진이 짧은 주문을 마치자 하늘을 맴돌던 부적이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꽂혀 학사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벽계의 인물이 학사의 탈을 쓰고 앉아 책을 읽는 척하다니. 마지막 모습치고 너무 구차하지 않으냐.”
“느닷없이 방문해 알아듣지 못할 말씀을 하시니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소.”
학사가 당황한 듯 전도위와 운진을 차례로 돌아본 다음이었다.
“노도의 술법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감히 진 문주 앞에서 허튼짓을 하지 마라.”
예상하지 못했던 운진의 꾸짖음이 작은 민가에 울렸다.
이미 성치문을 통해 경험했던 일이고, 운진이 저토록 확신한다면 더는 의심할 바 없는 일이었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 진무린은 검집을 움직여 끝으로 학사의 혈도를 집었다.
“무슨 일이오? 글만 읽는 내게 왜 이런 위해를 가하시는 거요?”
“이대로 본문으로 데려가 희생된 제자들과 구주 엄소동 대협의 무덤 앞에서 목을 잘라주마. 더 할 말이 없다면 아혈을 짚겠다.”
진무린의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금제를 풀어다오! 어차피 죽는 길밖에 없다면 네놈과 명예롭게 맞서겠다!”
학사는 죽기를 각오한 모양으로 눈에 독기를 품었다.
“내내 억울하다 항변했던 놈이 명예를 입에 올리다니. 네놈의 명예란 필요에 따라 버렸다가 아쉬울 때면 다시 찾는 것이냐.”
학사를 냉정하게 꾸짖은 진무린은 더 볼 것도 없다는 투로 다시금 검집을 휘둘렀다.
입마저 막힌 학사가 나름 독하게 눈을 굴렸으나 금제를 당한 몸이라 달리 방법은 없었다.
“문주가 죄인을 드는 것이 보기 흉하다. 제자들을 부르마.”
전도위가 나선 뒤에 고개를 돌리고는 제자들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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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었을 때, 객잔의 별채에 묵은 임운령을 황종관이 찾았다.
두 사람은 격식을 차리지 않고 곧바로 대청에 자리했다.
“조금 전에 서문세가의 가주가 아홉 곳을 지정했습니다.”
내용을 전하는 황종관의 표정이 무거웠다.
“잘못되면 목숨을 잃는 일인데도 확신한다는 답을 세 번이나 내놓았으니 믿음이 갑니다.”
“제갈세가와 서문세가는 다른 서책들과 들리는 말을 모아 오래전부터 아홉 곳을 연구했던 이들이오. 무인들과 달리 쉽게 목숨을 걸지 않는 두 곳이니 장소가 잘못될 일은 없을 듯하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그와 관련해 어려운 청이 있습니다.”
“본문은 문주의 뜻에 따라 정도맹의 행사에 도움이 되고자 왔으니 편히 말씀해주시오.”
임운령의 권유에 황종관은 그나마 안도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홉 곳을 개방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서문가주가 구관을 모두 개방하는 동안, 그를 지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홉 곳을 모두 돌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소?”
“입구는 같고, 안에서 아홉 곳으로 갈라진다고 들었습니다. 그곳까지 함께 가셔서 아홉 곳에 제자들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니 하루면 끝나리라 봅니다.”
나직하게 숨을 내쉰 임운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과 아미, 무당, 마교의 섬도곤, 서문세가는 이미 권리를 확보하였고, 곤륜은 불행하게 탈락이 확정되었습니다.”
“가능성이 있는 자들 중에서 수상한 출신이 있소?”
“딱히 의문이 드는 곳은 없습니다. 뜻밖에도 작은 방파에서 두 명이나 놀라운 후보가 나와 시선을 끄는 것이 전부입니다.”
“알았소. 일정이 정해지면 알려주시오.”
임운령의 답을 들은 다음이었다.
황종관은 커다란 짐을 덜어낸 것처럼 상체를 세워 의자의 등받이에 기댔다.
“서문가주를 지키는 일도 쉽지 않으실 텐데 방비는 괜찮겠소?”
“정도맹의 한가운데 모셨고, 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도록 가신, 백룡단의 사십 명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안전도 그렇지만, 외부에 그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임운령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두 사람의 긴한 의논은 끝났다.
황종관은 근심을 덜어낸 얼굴이었고, 임운령은 얼마 남지 않은 일정을 되짚는 느낌이었다.
**
제자들에게 학사를 들게 한 진무린과 전도위는 부적을 따라 다음 곳에 당도했다.
부적이 맴돈 곳은 하남의 동인에 자리한 부화상단이었다.
“안에 제법 많은 이들이 있고, 무인들 또한 서른둘이 있습니다.”
말을 한 진무린은 부화상단을 둘러보았다.
상단이라 규모가 제법 커서 기와를 덮은 건물만 다섯 개요, 그중 본채는 궁궐을 연상할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다.
“낮에 소란을 피우면 문제가 될 듯합니다. 밤에 문주와 함께 들어가 상단의 누가 벽계의 인물인지를 확인한 뒤에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문주의 판단이 현명하다.”
근처에 몸을 숨겼던 진무린은 밤이 되자 전도위, 운진과 함께 경공을 펼쳤다. 이때는 진무린과 전도위가 운진을 부축해 혹시라도 작은 소리가 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세 사람은 곧장 부화상단에 들어서지 못했다.
담과 지붕에 몸을 숨긴 무인들이 제법 많은 까닭이었다.
‘제가 움직여 지붕을 해결하겠습니다.’
진무린이 손으로 정면을 가리켰고,
‘그렇다면 내가 이쪽 담을 맡으마.’
전도위가 바로 앞의 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부와 제자였고, 은천문의 실력자였다.
어두운 밤에 소리 없이 부화상단에 날아든 두 사람은 운진이 조심스럽게 숨 세 번을 내뱉었을 때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들어가겠습니다, 문주.”
진무린과 전도위가 양팔을 잡아 훌쩍 담을 넘을 때, 안쪽에 몸을 숨긴 무인들은 경계를 서는 자세 그대로 움직임이 없었다.
도움을 받아 지붕에 올라간 운진이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오른손을 높게 든 다음이었다.
높다란 하늘을 맴돌던 부적이 역시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지붕을 파고들었다.
저곳이구나!
진무린과 전도위가 시선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엄청난 기운이 뿜어지는 것과 동시에 부적이 파고들었던 기와지붕을 뚫고 노인 한 명이 솟구쳤다.
진무린은 운진을 전도위에게 밀치는 것과 동시에 검을 뽑았고, 노인을 향해 치솟았다.
쉐에에에엑! 쉐에엑!
검이 번득이는 틈으로 몸을 빼낸 노인은 도주가 목적이었던 것처럼 동인의 외곽을 향해 날았다.
지붕을 밟고 달려가는 노인을 진무린은 매섭게 따라붙었다.
후우우욱!
태상이 발휘하던 시공간을 넘어서는 경공을 펼친 직후였다.
노인을 앞선 진무린은 번득 몸을 돌리며 검을 세차게 뿌렸다.
쉐에에엑!
몸을 급하게 틀어 검을 빠져나간 노인이 방향을 바꾸는 순간이었다.
휘릭! 휘리리릭!
기다렸다는 것처럼 허공을 휘저은 진무린의 검이 노인의 상체를 완벽하게 뒤덮었다.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노인을 낚아챈 진무린은 곧장 제자들이 기다리는 장소로 날았다.
“진 문주!”
기다리던 운진이 반갑게 맞이하는 앞에 진무린은 노인을 던졌다.
“이자는 분명 학사가 당했던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 생각 또한 그렇다.”
“사부께서 이 둘을 데리고 본문으로 먼저 향해주십시오. 저는 문주와 함께 세 번째 인물을 찾아 암연에 맡기고 돌아가겠습니다.”
“다음 인물이 움직이리라 기대하는 게냐?”
“두 번째에서 이 정도 반응이라면 지켜볼 만하다고 여깁니다. 만에 하나 도주할 수도 있으나 장주, 학사, 상단의 단주로 활동하는 것으로 봐서 암연이 충분히 찾을 것입니다.”
진무린의 의견에 전도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임운령과 모려원, 종무헌이 나서 눈에 불을 켠 덕분인지 영웅대회가 끝나는 날까지 사고라고는 문파간의 사소한 시비 두 건이 전부였다.
“본인은 정도맹의 맹주로 영웅대회가 무탈하게 끝났음을 강호의 여러분 앞에서 선포하는 바이오!”
황종관의 말을 끝으로 흥분과 열기가 가득 찼던 영웅대회는 서운함과 아쉬움을 남기며 끝났다.
남은 것은 구관에 들어서는 일이었다.
은천문의 호위를 받으며 서문가득이 앞섰고, 정도맹의 무인들이 거의 나서다시피 아홉 명의 후보를 감싸며 길을 나섰다.
아홉 명의 후보 중에 가장 놀라운 이는 비룡방 방주의 딸 등소옥이었다.
반갑게 나섰던 철비완은 모려원의 눈짓을 단박에 알아차리고는 짐짓 모른 척하는 경륜을 보였다.
아홉 명의 후보가 앞서고, 그 뒤로 후보의 관련자들, 다시 수천 명의 구경꾼이 뒤따랐는데, 막아봐야 몰래 보겠다며 따라올 터라 황종관은 딱히 막아서지 않았다.
섬서의 평곡에 있는 우락산이었다.
서문가득은 미리 확인했었나 싶을 정도로 막힘없이 산을 올라가 중턱에 있는 언덕을 가리켰다.
“저 앞의 바위를 옆으로 치우면 입구가 나올 것입니다.”
언덕에 박힌 것처럼 자리한 바위는 사람의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거대했다.
“무리할 것 없습니다. 내공이 있으신 분이 가볍게 옆으로 밀어도 충분히 치우리라 짐작합니다.”
서문가득의 말에 나선 것은 섬도곤이었다.
그는 모려원과 종무헌을 모른 척 행동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섬도곤은 이까짓 것 하는 표정으로 바위의 오른쪽에 양손을 올리고 힘껏 밀었다.
그드등. 그드드등.
서문가득의 말대로 바위는 쉽게 움직였고, 놀랍게도 그 뒤에 동굴이 나왔다.
우르르 구경꾼들이 앞으로 몰려드는 순간이었다.
“백룡단은 경계의 두 걸음 안쪽으로 다가오는 자는 그가 누구라도 목을 베라!”
황종관의 고함이 우락산을 들썩이도록 커다랗게 울리자 몰려들던 이들이 멈칫하고는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했다.
“후보들은 안으로 들어가 각자 지정된 곳으로 들어가 하늘이 내린 인연을 맺어라.”
황종관의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후계자들은 각기 어른들에게 예를 보인 뒤에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혹시 모를 분란을 염려해 임운령과 모려원이 가장 뒤에서 따라 들어갔는데 이각 쯤 지나 밖으로 나섰다.
“무헌이는 돌을 굴려 앞을 막아.”
“예, 사숙.”
임운령의 지시에 종무헌이 돌을 굴려 앞을 막자 지켜보던 이들에게서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완벽한 수련동의 구조요. 말씀대로 아홉 곳에 정해진 대로 들어섰으니 기연을 얻은 자도 있을 것이고, 불행한 결과를 받은 이들도 나올 거라 믿소. 어떤 결과든 모두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기다려 봅시다.”
임운령의 말이 끝나자 지켜보던 황종관부터 후계자를 안에 넣은 이들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
또다시 하루를 달린 진무린과 운진은 섬서의 진등곡에 도착했다.
작은 고을이어서 이런 곳에 몸을 숨겼을까 싶었는데 부적은 분명하게 그나마 모양이 깨끗한 민가의 위에서 맴돌았다.
“신기하게 하루 거리에 있소.”
“저들 나름으로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무 명이라 했으니 경공으로 하루 거리를 두었거나 일정한 방식으로 안위를 확인하기 위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안에 몇 명이나 있소?”
진무린은 처음으로 민가 안쪽을 보며 눈가를 좁혔다.
옅게 펼친 기가 물속에 들어가며 왜곡되는 것처럼 느낌이 선명하지 않았다.
“문주. 만약 추적하는 자가 진법 안에 있다면 어찌 됩니까?”
“노도가 진법 안에 들어가면 부적도 함께 그곳으로 들어온다오. 저곳에 진법이 펼쳐졌소?”
“그런 것 같습니다.”
“흠. 혹시 진 문주의 방문을 짐작하고 최후의 항전을 대비한 것은 아니오?”
진무린의 실력을 믿으면서도 홀로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앞선 모양이었다.
“진법을 펼쳤다는 것은 대놓고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봅니다. 저 안에 벽계의 인물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까?”
“노도의 목을 걸겠소.”
“문주께서는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말을 마친 진무린은 가릴 것 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민가를 향해 걸었다.
작은 고을이었다.
전에 양소소가 다른 이들과 뚝 떨어져 지낸 것처럼 진법을 펼친 민가 역시 외부와 단절한 모양으로 멀찍이 자리한 모양새였다.
진무린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입구와 출구를 알 길이 없는 데다 진법 안에 어떤 수를 펼쳤을지 몰라 공연히 들어섰다가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하면 영영 저 안에 갇힐 수도 있었다.
‘최후에 함께 죽자는 수도 있겠지.’
스응.
검을 꺼낸 진무린은 지닌바 기운을 끌어냈고, 곧바로 민가를 향해 솟구쳤다.
쉐에에에에엑!
검의 끝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온 직후였다.
그가가가가각.
듣기 거북한 소리가 울려 나왔고, 진무린이 바닥에 내려섰을 때, 진은 사라졌다.
하늘을 맴돌던 부적이 나풀나풀 떨어져 내린 것도 그때였다.
추적하던 부적이 떨어져 내리고 기운이 선명하게 살피는 민가에 살아 있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진법이 무너지는 순간에 함께 죽었을까?
떨어져 내린 부적의 의미를 알기 위해 진무린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추적하는 자가 죽었다는 의미로 보셔야 하오, 진 문주.”
운진이 예상했던 답을 내놓았다.
암연을 통해 지키려 했던 세 번째 인물을 찾아 민가로 들어선 진무린은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정확하게 반이 갈린 중년 남자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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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린은 운진과 함께 은천문에 들어섰다.
먼저 전도위와 양소소를 청해 세 번째 인물의 최후를 알려주었고, 그들이 하루 거리에 있었다는 내용을 전해주었다.
또한, 진무린은 암연으로부터 들어온 영웅대회의 진행을 양소소를 통해 들었다.
“성치문과 학사는 어찌하셨습니까?”
“내가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없도록 나누어 가두었고, 조금이라도 수작을 부린다면 주저하지 말고 목을 자르라 지시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문주의 수고에 비할 바가 아니다.”
“두 사람은 사숙께서 돌아오신 뒤에 처형하겠습니다.”
“당장 급한 일이 없으니 이만 거처에 가 있으마. 문주는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조금이라도 쉬어.”
진무린을 다독인 두 사람이 문주의 집무실을 나선 뒤였다.
“저들의 속을 모르겠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니오?”
근심을 가득 담은 운진의 질문에 진무린은 먼저 가볍게 웃었다.
“그럼 노도도 이만 일어날 테니 문주께서는 짧으나마 좀 휴식을 취하시오.”
어차피 운진은 객이 지내는 곳으로 옮겨야 하는 참이었다.
그를 제자들에게 맡겨 객청으로 보내는 것이 싫은 진무린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잠시 들러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넉넉하게 온 길이오. 노도는 염려하지 말고 편히 걸음 하시오.”
운진에게 양해를 구한 진무린은 뒤편 동산으로 향했다.
은천문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곳이어서 운진은 연신 감탄을 내놓으며 고개를 바삐 돌렸다.
“사매, 사제와 수련하던 시기에 자주 들렀던 장소입니다. 사부께서도 그러셨고, 지금 수련하는 제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알고 있습니다.”
진무린의 설명을 들으며 운진은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갑갑해서 그러시오?”
그런 뒤에 뜻밖의 질문을 꺼내 진무린의 시선을 당겼다.
“전에 혈교의 술법을 정리하고자 모산을 출발할 때 노도의 심정이 그랬다오. 지닌 술법과 노력을 모두 쏟아 부었는데 납타이를 처리하지 못한 회한을 이기기 어려웠소.”
진무린을 위로하는 것처럼 운진은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려냈다.
“진 문주는 벽계의 태상을 물리친 분이 아니오? 저들은 진 문주가 두려워서라도 쉽사리 나서지 못할 게요. 먼 훗날 그들의 후인들이 발기할지 모르나 그것은 또 후인들의 몫이지 진 문주의 책임은 아니라 보오.”
운진의 눈과 음성에는 진심이 가득해서 진무린은 저절로 고마운 미소를 그렸다.
“문주의 말씀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넉넉하게 대꾸한 진무린은 시선을 다시 은천문으로 돌렸다.
“노도는 내일이라도 출발할까 하오.”
“본문에서 지내시다가 사제가 돌아오면 함께 모산으로 향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사제 또한 몹시 기뻐할 것입니다.”
“종 소협이 번거롭지 않겠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진무린의 질문에 운진이 해맑은 미소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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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과 다르게 동굴의 안에서 소리가 들렸고, 바위가 왼편으로 움직였다.
“오오-!”
사흘을 꼬박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지른 환호성을 뒤집어쓰며 섬도곤이 가장 앞에서 나왔고, 이어 구대문파의 제자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임운령이 궁금한 눈으로 모려원을 보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황종관과 구대문파에서 나온 장로들 역시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오는 아홉 명에게서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은 탓이었다.
“어찌된 일인가?”
황종관이 질문을 던졌는데 가장 앞에서 나선 섬도곤은 픽 웃는 얼굴이었다.
“동굴의 입구를 닫는 순간 신기하게도 벽에서 심법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나머지 여덟이 동의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입니다. 한 시진쯤 떠오른 심법이야 모두 외웠는데 그에 따라 운기한다고 해서 특별한 내공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섬도곤이나 구대문파의 제자들이 새로운 내공이나 기운을 얻지 못하는 심법이라니.
황종관마저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바라볼 때였다.
“들어간 날 저녁에 아홉 개의 문이 모두 열려 저희 아홉 명이 함께 의논하였습니다. 먼저 하루를 더 지내보자는 의견이었고, 하루 더 연장했으나 얻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말을 낸 이는 서문가득의 장자 서문청이었다.
“차라리 본가에 돌아가 고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란 판단에 제가 나섰고, 다른 분들도 동의하였습니다.”
나직하게 의논을 할 때였다.
“보검이 있지는 않았소?”
“기연이 있다면 들려나 주시오!”
바깥을 둘러싼 이들에게서 연신 고함이 달려들었다.
모려원은 안타까운 얼굴로 나이 든 철비완을 돌아보았다.
등소옥이 저대로 돌아가면 온갖 노괴들이 내공심법을 내놓으라 비룡방을 찾아들 것이 분명했다.
영웅대회에 나섰다가 정체가 발각되면 당장 정도맹의 뇌옥에 갇힐 자들만 해도 서른을 헤아리는 판국이었다.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수준까지 합치면 숫자는 단박에 수백 명에 이를 정도로 불어난다.
그렇게 영웅대회에 나서지 못하는 노괴들은 무공을 얻을 수만 있다면 등소옥의 피라도 빨아먹겠다고 달려들고 남는다.
“모두 일단 정도맹으로 함께 갑시다.”
황종관의 말이 떨어진 뒤였다.
“저는 이만 본산으로 가겠습니다.”
섬도곤이 양손을 잡고는 좌우로 상체를 돌려 단숨에 주변에 있던 이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가 훌쩍 몸을 날리자 수하들이 뒤따랐고,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몰렸다.
마교의 첫 번째 제자인 섬도곤도 저런데 등소옥이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황종관이 몸을 돌렸고, 남은 여덟 명이 함께 움직이고 있어서 모려원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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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맹에 들어선 다음이었다.
“철 호법.”
모려원은 나직하게 철비완을 불렀다.
“모 소저! 이리 뵐 줄은 몰랐더니 이 늙은이에게 복이 남았나 보오! 진 대협은 무탈하시오?”
“본문의 문주가 되셨어요.”
“이런! 늙은이가 큰 결례를 범했소.”
“모르고 하신 일에 어찌 결례를 말씀하세요.”
모려원은 먼저 부드럽게 말을 건네고 이어 걱정하는 바를 꺼냈다.
도움을 청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철비완은 과거 보였던 그 고집스러운 눈빛과 표정을 거침없이 꺼내들었다.
“그런 고비를 넘기는 것이 무인이고, 강호의 삶이 아니겠소? 분에 넘치는 것을 얻었으니 그에 상응하는 고통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철 호법. 상등에서 호법이 나서신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이에요.”
“그렇다고 비룡방이 몸을 숨길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모 소저의 염려를 충분히 알았으나 이 늙은이는 진 문주께 무인의 삶을 배운 사람이오. 가르침을 얻고도 따르지 않는다면 말을 하지 못하는 짐승과 이 늙은이가 다를 바가 무엇이겠소.”
한숨이 푹 나오는 대꾸였다.
더는 뭐라 하기 어려운 모려원은 옅은 미소를 그려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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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뒤에 임운령 일행은 은천문에 도착했다.
먼저 진무린에게 영웅대회의 일을 보고 느낀 대로 전했는데 훌쩍 한 시진이 흘렀다.
다음은 진무린과 전도위가 있었던 일을 들려주며 또 시간이 흘렀다.
“내일 향을 사르고 잡아놓은 두 사람을 처형하겠습니다.”
진무린의 무거운 한 마디를 끝으로 길었던 논의가 끝났다.
찌익.
그때 종무헌의 앞섶에서 백초가 깜찍한 표정으로 머리를 내밀어서 모였던 이들이 조금은 편안한 얼굴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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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을 사른 진무린이 고개를 돌리자 제자들이 학사와 성치문을 끌고 나왔다.
은천문의 모든 이들과 운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전이 부서진 성치문은 죽지 못해 살아 있는 느낌이었고, 학사는 독이 머리끝까지 올라 악귀의 느낌마저 들었다.
“사매는 저 둘의 아혈을 풀어주어라.”
“예, 대사형.”
모려원이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귀 아래를 서너 번씩 누른 직후였다.
“어차피 죽일 거라면……!”
“사매는 저자의 혈도를 풀어주고 목을 잘라 희생된 제자들과 엄 대협의 원혼을 달래줘.”
“문주의 명을 받습니다.”
모두가 화들짝 놀랄 지시를 진무린은 덤덤하게 내놓았고, 모려원은 당연하다는 듯 대꾸를 냈다.
모려원이 학사의 상반신을 다시 엄지와 검지로 찍어준 다음이었다.
쉐엑!
허공을 가르는 한 번의 검소리가 울리며 학사를 묶었던 줄이 풀렸다.
후아아악.
섬뜩한 벽계의 기운이 주변을 맴돌자 임운령과 전도위가 볼을 씰룩였다.
곧게 타오르던 향이 바깥으로 휘몰아칠 때 모려원은 등룡창천의 기운을 서서히 끌어올렸다.
“오-!”
지켜보던 임운령, 전도위, 양소소가 단박에 탄성을 내뱉었다.
모려원의 수준이 이 정도였던가.
양팔로 허공을 긁으며 기운을 끌어올리는 학사를 상대로 모려원은 전혀 밀리지 않는 공력을 내뿜었다.
한 명이라도 더 죽이겠다며 다른 생각을 품었을까.
학사가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진무린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솟아나 학사를 옭아맸다.
너 따위 언제고 죽인다.
그러니 마지막 기회를 헛되이 날리지 마라.
경고는 분명하고 확실했으며, 또렷했다.
모려원을 잡아먹을 듯 노려본 학사가 손을 뻗으며 대결이 시작되었다.
휘감고, 잡아채는 학사의 날카로운 손을 모려원은 외포가 말릴 정도로 빠르게 피했고, 이어 빈틈으로 검을 찔러넣었다.
밝은 날의 은천문이었다.
희생된 제자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묘비와 마지막까지 꿋꿋했던 엄소동을 기리는 묘비가 지켜보는 앞에서 학사의 손이 연신 급소를 파고들었고, 그에 맞서 모려원의 검이 번득였다.
“흠.”
진무린의 의도를 전도위가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번거로울 것 같은 이 과정을 통해 모려원은 벽계를 상대로 어떻게 은천수호검을 발휘할 것인지를 임운령, 전도위, 양소소, 또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쉐에엑! 쉑! 쉐엑!
외포를 날렵하게 날리며 검을 뻗어내는 모려원의 자태는 마치 검법의 교본과 같아서 진무린이 힘차게 내는 것보다 확실히 눈에 담기 좋았다.
삽시간에 백여 초가 흐른 다음이었다.
쉐에에엑!
학사의 목을 노렸던 모려원이 툭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화려하게 검을 휘날렸다.
휘리리릭! 휘리릭!
햇살을 쪼갰던가.
아니면 화창한 끝 봄의 한낮에 느닷없이 눈이 내리는가.
지켜보는 이들의 눈이 아릴 정도로 희고 밝은 검광들이 쏟아져 학사를 뒤덮었다.
휘리릭.
내려선 모려원은 검을 한 차례 떨치고는 자부심 가득 담긴 눈으로 학사를 바라보았다.
터덕. 턱. 턱.
온몸이 피로 범벅된 학사가 뒤로 서너 걸음을 비틀거리다가 짚단처럼 앞으로 쓰러졌다.
털썩.
그가 앞으로 엎어질 때였다.
쉬이익.
진무린이 중지를 튕겼고, 죽지 못해 견디던 성치문이 움찔했다가 뻣뻣하게 바닥에 널브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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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에 오른 진무린은 모려원과 함께 은천문을 내려다보았다.
“암연의 보고가 있었나요, 대사형?”
“사매의 염려대로 비룡방이 시달리는 것과 섬도곤을 찾기 어려운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후계자들은 무탈하다.”
“벽계가 그들을 노릴 줄 알았더니 그도 아닌 모양이네요.”
“오래도록 몸을 숨겼다가 자신이 생기면 나타나겠지.”
“그때는 어찌할까요?”
모려원을 돌아본 진무린이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사매가 있고, 사제가 등룡창천의 초입에 들어섰으며, 사부께서 가능성을 보이고 계시지 않으냐.”
“대사형은요?”
“나야 지난번처럼 사매의 뒤에서 편히 지내야지.”
이번에는 모려원이 기가 막힌 얼굴로 웃었다.
“소매가 없으면 어쩌시려고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지.”
무슨 뜻이냐는 모려원이 눈을 크게 뜨는 순간이었다.
“사제가 문주와 모산으로 갔으니 이곳에 올 사람이 없겠지?”
팔을 뻗은 진무린이 모려원을 부드럽게 당겼다.
“대사형? 사숙과 사부, 사고가 계세요.”
“그분들이 보시라고 하는 일이다.”
진무린의 얼굴 바로 앞에서 흑요석 같은 모려원의 눈이 봄날의 햇살만큼이나 아름답게 빛났다.
“사매의 붉은 면사를 내 손으로 올리고 싶다. 오랫동안 품었던 바람이었고, 늘 간절했던 소망이었는데 괜찮다면 어른들께 말씀드릴까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보인 모려원이 진무린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소매가 붉은 면사를 쓴다면 그것을 올리실 분은 대사형 한 분밖에 없어요.”
진무린이 팔을 뻗어 모려원을 감싸고, 모려원이 손을 내밀어 진무린의 허리를 감았다.
벽계의 인물들이 남아 있어 근심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으나 강호를 일통하려는 자들은 늘 있었다.
언젠가 나오리라.
그것이 십 년 후일지, 이십 년 후일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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