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2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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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215화
은천검제
제215화
진무린의 앞에서 의견을 내놓은 양소소와 임운령, 전도위는 최종 결정은 문주의 몫이라는 의미로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였다.
“사제가 돌아오면 홍화루가 어떻게 할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암연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으니 다른 소식이 있을지 모릅니다. 결과를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참으로 답답하다! 얼른 가서 목을 베면 끝날 일이라니까. 정 못하겠으면 내가 하마. 그놈이 벽계의 인물이라면 만만하게 생각하는 나에게는 숨겨둔 무공을 내놓겠지.”
“말씀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며칠 걸리지 않는 일입니다.”
“외조부. 그 정도면 문주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예요.”
“크흠.”
남굉모가 불같은 성정을 드러냈으나 문주 진무린의 결정에 대해 다른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우리는 이만 거처로 돌아가마. 이렇게 모였으니 제 거처로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좋은 술이 들어와 나눌까 합니다.”
“술?”
임운령이 던진 미끼를 남굉모가 덥석 물면서 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문주는 신중한 것이 좋다. 잘하고 있어.’
집무실을 나서기 직전에 의미 있는 눈빛을 전한 임운령이 나선 것으로 집무실에는 진무린과 모려원만 남았다.
“소매도 자리를 피해 드릴까요?”
“사매가 피곤하다면 모를까 부러 그럴 것은 없지.”
가볍게 대꾸한 진무린은 창가로 움직여 앞쪽에 서 있는 전각을 보았다.
“네 사람을 지켜보며 그들이 누군가와 접촉할 때까지, 혹은 음모를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그 넷이라도 싹을 자르는 것이 옳은지 아직 결단이 서지 않는다.”
창을 보며 진무린이 혼잣말처럼 고민을 털어놓았고,
“어떤 쪽이든 대사형은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리실 거예요.”
돌아보는 진무린의 곁으로 모려원이 다가왔다.
“본문과 대사형은 벽계를 상대로 지금껏 잘해왔거든요.”
모려원의 나직한 말에 진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이틀 뒤에 종무헌이 무사히 도착했다.
“대사형의 전갈을 무사히 전했습니다. 답이 있을 텐데 언제인지는 확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고생했다.”
진무린이 답을 건넬 때였다.
다시 본 것이 반가운 것처럼 종무헌의 어깨에서 내려온 백초가 진무린의 정강이에 얼굴을 비볐고, 다시 모려원의 무릎 위로 뛰어올라 재롱을 부렸다.
“백초가 저를 따르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대사형께서 허락하시면 함께 지내볼까 합니다.”
“다른 말은 하지 않겠다. 다만, 홍화루가 정보를 취급하는 곳인 만큼 수상스러운 행동이 없는지 알려주고, 혹 갑자기 사라진다면 바로 알려다오.”
“예, 대사형.”
그렇게 종무헌과 대화를 나누고, 다시 닷새 뒤에는 백면호리가 은천문을 방문했다.
홍화루의 답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진무린은 그를 문주의 전각 2층에서 만났다.
점잖은 것과는 원래 거리가 멀던 백면호리였다.
“어서 와.”
“조용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겠…소?”
그러나 문주의 전각, 주변을 경계하는 제자들과 진무린의 위상을 보자 조금은 주눅 든 모습이었다.
“잠시들 나가 있지.”
진무린은 부드러운 얼굴로 백면호리를 안내했던 제자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아후. 이제 좀 살겠다. 구대문파도 여러 곳 다녀봤지만, 은천문은 어딘가 모르는 중압감이 있네. 이게 지닌 무공 차이일까?”
2층을 둘러보던 백면호리가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백 총관이 확인했는데 그날 홍화루를 방문했던 사람과 성치문은 동일인이 아니라네.”
짐작했던 것과 같은 결과에 진무린은 궁금했던 점을 꺼냈다.
“백면호리.”
“왜?”
“백초의 능력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지? 만약 벽계가 향을 바른 것을 알고 성치문 장주에게 수단을 부렸을 수도 있잖아?”
“에이!”
백면호리는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그쪽은 또 내 전문이잖아. 향이라는 것이 의복을 바꿔 입는다고 옮겨지지 않아. 처음 묻는 순간에 몸으로 파고들기 때문에 절대 그럴 일은 없어요.”
대꾸가 없는 진무린을 보며 백면호리는 아예 억울한 모양이었다.
“믿으라니까. 나를 잡자고 어디 한두 명이 향을 사용했겠나? 그걸 뚫고 여태 무탈한 점을 생각해 줘야지. 그러지 말고 이것 좀 봐.”
말을 마친 백면호리가 오른손 엄지로 나머지 네 손가락을 문질렀다.
진무린이 백면호리의 손을 확인하고 고개를 든 뒤였다.
“내가 이미 진 문주에게 향을 발랐어. 이건 하루면 독특한 향을 풍기니까 내일까지는 절대 알지 못하지. 오늘 밤, 아니 지금 당장 의복을 갈아입는다고 바뀌지도 않아.”
그 짧은 손동작만으로 백면호리는 추종향을 바른 모양이었다.
“지우는 방법은?”
“없어. 보름이 지나면 없어지는데 이건 무공과 달라서 진 문주도 구별하지 못해.”
세 가닥 수염을 한 백면호리는 단호하게 답을 내놓았다.
“이게 살수들이 사용하는 향이야. 물론 고급이긴 한데 홍화루가 사용한 향과 비교하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이지.”
진무린의 염려는 만에 하나라도 성치문이 벽계의 인물이 아니면 어떻게 할까 하는 점이었다. 그 염려를 백면호리가 완벽하게 지워주었다.
“그건 그렇고, 백면호리가 바른 향을 추적하는 방법은?”
“그것까지야 알려줄 수가 있나? 내가 목숨을 부지하는 비법인데.”
진무린의 표정을 살핀 백면호리가 “큼.”하고 헛기침을 뱉었다.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 문주니까 뭐. 특별히…….”
말을 하다말고 백면호리는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의 자기로 만든 병을 꺼냈다.
“이 안에 벌이 있어요. 이게 향을 따라가지. 이 안에 꿀을 채워두면 아예 잠든 것처럼 있다가 병을 열면 깨어나는데 향을 찾으면 다시 꿀에 가득 담아 재우지.”
자랑처럼 병을 보인 백면호리가 손짓 한 번으로 품 안에 담았다.
“백초는 영물이야. 그 녀석이 향을 찾았다면.”
뒷말 대신 백면호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절대 잘못 판단하지 않았으리란 확신에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진무린이 내심 마음을 굳힐 때였다.
“문주가 됐다고 해도 이렇게 은천문에서 직접 보니 내가 다 뿌듯하네. 이렇게 달려온 정성을 봐서라도 우리 정아 잊으면 안 되네. 알지?”
마지막까지 요정을 각인시킨 백면호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흐뭇한 얼굴이었다.
**
황종관은 모려원에게서 받은 세 가지 보물을 집무실 기관에 보관했고, 백룡단, 청룡단, 가신까지 세 사람이 동시에 지키게 했다.
쉬우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세 권의 책을 뒤져도 아홉 곳의 위치를 알지 못한 황종관은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가득을 초빙했다.
“서문 모가 가주를 뵙소.”
“어찌 그리 과한 예를 보이시오.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일이 급히 바로 뵈었소. 이리 앉으시오.”
황종관은 그를 극진히 맞아 자리를 권했으며, 좋은 차를 먼저 대접했다.
“내가 이리 가주를 초빙한 것은 세 가지 서적 안에 아홉 곳의 위치가 있다고 들었는데 글솜씨가 부족해서인지 위치를 알지 못한 탓이오.”
말을 한 황종관은 탁자 앞에 있던 세 권의 책자를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무인이 무공서를 보면 이럴까.
서문가득은 욕심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황종관의 앞에 놓인 책들을 살폈다.
“지금 보시는 세 권의 책이 각각 천서유기, 보양진서, 유광록이오. 명심하시오. 이 책을 들추는 순간, 구관을 개방하는 날까지 가주는 맹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누구와도 연락할 수 없소.”
학사건에 학사 복장을 갖춘 서문가득은 기다란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제가 그 책에서 세 곳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찌 됩니까?”
“그래도 가주는 구관을 개방할 때까지 같은 조건으로 이곳에 있어야 하오. 외람된 말이지만, 가주가 거절하거나 아홉 곳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제갈가에 도움을 청할 생각이오.”
제갈가의 이름을 들은 서문가득은 빙그레 미소를 그려냈다.
“맹주께서 그리하시니 반드시 아홉 곳의 관문을 찾고 싶다는 욕심이 듭니다. 두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손등으로 수염을 쓸어내린 서문가득은 느긋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구관을 찾지도 못한 채 영웅대회를 개최하셨으니 이는 정도맹의 행사치고는 참으로 졸속하다 할 것입니다. 왜 그러셨는지가 하나, 다음으로 일을 마치면 어떤 득이 본가에 있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당연한 요구요, 질문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리다. 아홉 곳이 실제로 있는지도 알기 어렵소. 그런데도 이를 먼저 확인하지 않은 것은 만약 본맹이 특정 지역을 찾거나 경계하는 순간부터 먼저 그곳에 들어가겠다고 달려들 이들이 있음을 염려해서이고.”
황종관의 대꾸가 만족스러운지 서문가득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설명하자면, 세 가지 보물의 효능을 확인한 터라 당연히 아홉 곳 또한 있으리라 믿었소.”
누가 효능을 확인했는지 궁금할 법도 한데 서문가득은 덤덤한 얼굴로 황종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서문세가에 드릴 보상은 얄팍한 금전으로 해결되지 않을 테니 가주께서 원하시는 바를 먼저 말씀하시구려.”
“흠.”
서문가득은 대답 전에 부드러운 얼굴로 황종관과 그의 앞에 놓인 세 가지 책자를 번갈아 보았다.
“제가 구관의 위치를 알게 된다면 본가의 한 명을 그곳에 들어갈 수 있도록 특전을 주십시오.”
그런 뒤에 그가 조건을 내놓았다.
태연한 태도도 그렇고, 막힘 없이 조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는 황종관의 초빙을 받을 때 이미 이런 상황을 짐작한 눈치였다.
“제갈가에 의뢰해도 같은 조건이 나오겠구려?”
“그럴 것입니다.”
“세 가지 서책에 관해 짐작하는 바가 있소?”
“본가와 제갈가는 구관의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해 다른 서적들을 통해 오랜 시간 연구하였고, 각각 얻은 바가 적지 않다고 여깁니다.”
쉽지 않은 대답일 텐데 서문가득은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본가와 제갈가가 구관의 위치를 찾아 나서지 못한 것은 그곳이 진짜든, 틀렸든, 구관 중 하나를 찾아 나섰다는 소문과 함께 일어날 피바람을 염려해서입니다.”
황종관이 보기에 서문가득은 아홉 곳을 짐작하고 있고, 확실하게 찾아낼 능력도 있었다.
남은 것은 한 곳을 서문세가에 넘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말이 쉽지, 그런 결정을 하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일이었다.
“맹주. 이리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황종관의 침묵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서문가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홉 곳을 당일까지 공개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맹주와 저만 아는 것으로 하십시오.”
“당일에 장소가 틀렸다면 뒷감당을 어찌하시려오?”
“본 가주의 목을 내놓겠습니다.”
황종관이 딱딱해진 얼굴로 보았으나 서문가득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리 발표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사전에 일어날 피바람을 막을 길이 없을 테고, 누구에게 감시를 맡기든, 그들이 먼저 들어갈 소지가 남아 뒷말이 무성할 것입니다.”
“대신 아홉 곳이 정확하다면 한 곳을 서문세가에 달라?”
“아홉 곳을 찾는 공을 세웠고, 사전에 일어날지 모를 피바람을 막았으며, 틀린다면 가주인 제 목을 걸었습니다. 그 정도면 강호의 누구라도 이해할 만한 조건입니다.”
이 또한 준비했던 대화이리라.
서문가득을 바라보며 황종관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의 미소를 그렸다.
“가주께 책자를 드리면 아홉 곳을 정확하게 아는 데 얼마나 걸리겠소?”
“보름이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잠시 시간을 주시겠소? 한 곳을 드리는 결정은 나 혼자 함부로 할 것이 아니라 그렇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있겠습니다.”
몸을 일으키는 서문가득을 황종관은 집무실의 입구까지 배웅했다.
“전령을 불러라.”
“예, 맹주!”
그런 뒤에 그는 부관을 통해 전령을 불렀다.
**
진무린은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종무헌을 보내 임운령, 전도위, 양소소, 남굉모, 나탑사를 청한 진무린은 집무실에서 결심한 바를 내놓았다. 물론 모려원도 함께였다.
“성치문은 이미 방문을 받은 터라 자신이 들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본문이 자신을 무고하게 죽인다고 오해하게 만들 소지가 있습니다.”
“내가 염려하던 것이 그 점이지!”
덜컥 나섰던 남굉모가 양소소의 눈짓을 받고는 입을 다물었다.
“사매, 사제와 함께 성치문을 찾아가 그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나올 생각입니다.”
“그가 끝까지 정체를 감추고 억울하다고 하면 어쩔 테냐?”
“본문으로 데려오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처리하지 않는 이유는?”
“삼 개월 뒤에 문주와 추적한 다른 세 사람이 역시 금제를 가해 무공을 모른다면 그들 또한 본문으로 데려올 생각입니다.”
답을 들은 임운령이 고개를 돌려 양소소를 보았다.
“문주는 성치문을 데려와 남은 벽계의 인물들을 자극할 생각이구나. 그들이 급해지게 하려는 거지. 삼 개월 뒤에 또 세 명이 사라지면 남은 자들은 더 급해지겠지. 우리가 하나둘 찾아낸다고 여길 테니까.”
“사고의 말씀이 맞습니다. 남은 세 명의 위치를 확인한 뒤에도 한 명씩 기간을 두고 처리해서 저들을 더욱 급하게 만들 생각입니다.”
양소소는 고개를 끄덕여 진무린의 판단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데려와라. 내가 무공을 내놓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해주마!”
남굉모가 이를 부드득 갈았고,
“제자들의 무덤 앞에 놈들의 머리를 놓아서 원한을 갚겠다.”
임운령이 평소답지 않은 독한 각오를 내놓았다.
“문주는 언제 출발할 생각이냐?”
“오후에 출발하겠습니다.”
진무린의 답이 떨어진 다음이었다.
모여 있는 이들 사이로 알지 못하는 흥분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