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2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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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209화
은천검제
제209화
전중방의 담 위로 솟구친 진무린은 허공에 누운 듯한 자세로 맹렬하게 몸을 돌리며 속도를 단숨에 죽였다.
양팔은 물론이고 다리마저 들어 담에 매달린 임운령과 은혼, 은천문의 제자들과 매화검수들을 보았고, 길게 이어진 균열 아래쪽이 무너져 내리는 것도 알았다.
진법이 무너지는 덕분일까.
진무린은 벽계의 세상과 옅게 연결된 기운을 통해 먼저 암연을 부르는 기운을 쏟아냈다.
‘사매!’
기운을 쏟아내는 것과 동시에 진무린은 담을 향해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는 적의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담의 한중간에 비수를 깊게 찔러 넣었다.
후아아악!
진무린이 쏟아낸 강렬한 기운을 이기지 못해 담을 버티고 있던 모두가 고개를 옆으로 돌린 뒤였다.
드드득! 드득! 드드득!
더는 버티지 못한 담이 무너져 내렸다.
**
각오를 마친 모려원과 종무헌이 처연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태양처럼 강렬한 암연의 기운이 느닷없이 쏟아져 벽계의 세상을 뒤덮었다.
“대사형!”
저 기운을 어찌 모를까.
숨결처럼 익숙한 진무린의 기운을.
왔다. 와주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운에 담긴 간절함을 모려원은 바로 알아차렸다.
‘무사하셨다면 됐어요.’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은 진무린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모려원과 종무헌을 잊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더 무엇을 바랄까.
‘소매는 더 바라는 것 없어요.’
모려원이 의지를 잃지 않으려 입술에 힘을 꾹 주었을 때였다.
크드드드등!
하늘 중간에서 공간이 피어나더니 먹처럼 검게 번지며 녹색의 하늘을 물들였다.
‘사매!’
진무린이 만든 공간인 게 분명했다.
저곳까지 과연 솟구칠 수 있을까?
생각이 흔들렸던 모려원은 단박에 의지를 피워냈다.
진무린이 저리 기회를 만들었는데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건 제자의 도리가 아니었다.
크드드드등!
민가가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고, 지평선이 서서히 올라와 공간의 아랫부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검게 피어난 공간이 이미 하늘을 대부분 삼켜서 세상은 순식간에 찾아든 밤처럼 변했다.
“사제! 마지막 기회일지 몰라! 공력을 아끼지 마!”
“예, 사저!”
모려원의 말뜻을 바로 이해한 종무헌의 대꾸도 있었다.
공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린 두 사람은 마지막이 될지 모를 기회를 향해 몸을 솟구쳤다.
크드드드등!
감당하기 어려운 진동이 울린 다음이었다.
민가가 부서져 내리고, 땅이 갈라질 때, 있는 힘껏 솟구친 모려원과 종무헌은 한계에 부딪혔다.
대사형! 포기하지 않았어요!
은천문의 제자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어요!
갈라진 바닥이 배고픈 괴물처럼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 모려원과 종무헌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우뚱 기운 모려원의 몸이 아래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후아아아아악!
엄청난 기운이 모려원과 종무헌을 휩쓸었다.
**
드드득! 크등! 크드등!
담이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까지 힘을 다하던 임운령과 운진, 제자들이 잔해들을 피해 물러섰고, 날리는 돌가루 때문에 고개를 모로 틀었다.
“사매! 사제!”
그 순간이었다.
진무린의 외침이 담의 안과 밖에 있던 이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대사형!”
모려원과 종무헌이었다.
놀라고 당황한 두 사람이 부서진 담에서 피어난 것처럼 그곳에 있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표정과 눈빛을 보는 것으로 얼마나 간절하게 구하려 애썼는지 다 알 수 있는데 말이다.
‘돌아왔구나!’
진무린의 눈을 향해 모려원의 눈이 빛났고, 종무헌은 감정을 감추지 못해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진무린과 모려원, 종무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만난 기쁨을 눈빛과 표정으로 나누었다.
주변에 지켜보는 이들이 있음을 깨달은 진무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늦었다.”
“이리 뵈었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대사형.”
“나와 전 사부는 안 보인단 말이냐?”
“제자 모려원과 종무헌이 전임 문주와 사부를 뵙습니다.”
“잘 왔다! 무사히 돌아와서 참으로 다행이다!”
귀혼곡을 출발한 이후 처음으로 숨을 길게 내쉰 진무린은 임운령과 전도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사숙과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문주에서 물러난 임운령이 사숙이란 말에 오히려 흐뭇한 얼굴을 지었다.
“문주는 화산의 장문인에게 먼저 인사하게. 장문인과 매화검수가 아니었다면 저 두 아이를 데려오지 못했을 게다.”
조언을 들은 진무린이 몸을 돌린 직후였다.
양손을 맞잡기 무섭게 다가온 은혼이 진무린의 손을 붙들었다.
“진 문주. 화산은 은혜를 잊지 않아 작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런 일로 고개를 숙이시면, 화산은 몸 둘 곳이 없습니다.”
“매화검수께서도 수고들 많았소.”
“장문인을 따라 화산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갚고자 했을 뿐입니다. 문주께서는 과한 칭찬을 거두어주십시오.”
은천문은 감사하고, 화산은 이전의 은혜를 잊지 않아 한껏 몸을 낮추었다. 힘겹고 어려운 시기였으나 이 순간만큼은 참으로 기쁘고 흐뭇했다.
**
황종관은 귀혼곡이 미심쩍었고, 양묘를 처참하게 가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이안공자에게 도움받았으며 진무린이 인정한 일이라 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길을 나서기에는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부상이 심한 가신들과 백호단 단원들도 고려해야 했다.
그러나 황종관은 길을 나서겠노라 말하고 준비를 명했다.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황종관 앞으로 이안공자가 다가왔다.
“귀혼곡을 나선다 하셔서 준비했습니다. 상처에 바를 금창약과 환약입니다.”
이안공자가 돌아보자 섭성이 들고 있던 제법 큼직한 보따리를 황종관의 왼편에 있던 가신에게 조심스럽게 건넸다.
“내게 원하는 것이 있나?”
“귀혼곡은 조용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바람입니다.”
“나 역시 그러길 바라네. 서운하게 들릴지 모르나 벽계라는 곳이나 구주 모두 이제는 흘러가야 할 때라고 생각하네.”
“다른 곳은 어떨지 몰라도 귀혼곡은 평온한 삶을 바랄 뿐 그 어떤 욕심도 없습니다.”
하고자 하는 말을 나누었으니 이제는 도움을 받은 사람이 해야 할 최소한의 인사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나와 가신들, 본맹의 단원들을 살펴준 것에 감사하네. 언제고 강호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청을 한다면 한 가지는 분명하게 들어주지.”
“감사합니다.”
몸을 일으킨 황종관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린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모산의 문주는 아직 동굴에 있나?”
“그렇습니다.”
진무린이 전중방의 담에 비수를 꽂을 때까지는 술법의 기운을 풀지 못한다는 운진이었다.
“술법을 방해할까 염려돼서 그냥 가겠네. 배려에서 나온 일이니 인사가 없음을 이해해달라는 당부를 전해주게.”
“그리하겠습니다.”
나직하게 숨을 내쉰 황종관은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강호란 세상에 어찌 무인들만 살까.
의술, 진법, 술법을 익힌 이들이 함께 사는 세상인 것을 알았으나 최근 경험한 일들은 황종관의 좁은 시야를 바꾸어야 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약 보따리를 받은 가신이 이안공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로 인사를 전했다.
누가 뭐래도 신세를 진 것은 분명해서 가신들과 백호단원들은 귀혼곡에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
동굴에 가부좌로 앉아 있던 운진은 상체를 꿈틀한 뒤에 한 움큼의 피를 토해냈다.
그 직후였다.
양묘의 가슴에 꽂아두었던 비수가 불길로 변해 화르륵 타오르더니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고통에 온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양묘는 독한 시선으로 운진을 노려보았다.
“멍청한 놈! 결국, 남은 수명의 절반을 소비했구나! 우습다, 운진! 그런 희생을 치르고도 말 한마디 못 하다니!”
“진 문주가 없었다면 이미 죽었을 몸이다. 또한, 나는 네 몸에 갇혀 있던 어린아이들의 혼백을 풀어낸 것만으로도 목숨보다 무거운 도움을 받았다고 여긴다.”
철컹!
양묘가 상체를 불쑥 기울이자 그의 양팔에 묶인 사슬이 요란하게 울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내 도력을 복구해주면 강호는 온통 우리 것이 돼.”
“그래서 무엇을 할 참이냐?”
“천년만년 강호를 호령하지. 그리하면 모산의 이름이 강호를 뒤덮을 테고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많은 자들이 제자가 되겠다며 몸을 낮춘다. 모산의 강호, 모산의 세상을 떠올려 봐.”
운진의 대꾸는 애잔한 미소였다.
철컹!
“그따위 웃음 말고 모산의 앞날을 생각하라고!”
“내가 추적술을 세 번 연속해서 펼치면 삶을 다한다. 그리하면 네놈의 삶도 함께 끝나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이라도 지난 잘못을 반성하려무나.”
철컹! 철컹!
“왜 그런 미친 짓에 목숨을 허비하냔 말이다! 왜!”
“사람의 도리를 잃은 술법으로 이름을 얻는 것보다, 죽음을 맞더라도 어려운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모산의 도사가 할 바이니라. 이것이 사부님께서 내게 주신 마지막 말씀이다.”
“진무린이 어려운 이라고 말하는 게냐! 강호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이 어떻게 어려운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일이 돼!”
양묘의 고함이 동굴을 쩌렁쩌렁 울린 뒤였다.
“그가 외면하지 않고 지키려는 이들을 봐라. 강호를 손에 넣을 능력을 지녔음에도 터럭만큼도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선택한 것이 사부님의 가르침에 맞는 행동이라 여기며, 사람의 도리라 믿는다.”
꼿꼿한 운진의 눈매와 다부진 말에 양묘는 입술만 꿈틀댈 뿐 더는 말을 내지 못했다.
**
오후의 끝자락이었다.
그림자가 어디까지 따라왔나를 확인하는 것처럼 태양이 산의 꼭대기에 걸터앉아 오늘의 마지막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이미 진중탈구검이 강호의 주요문파에 퍼졌습니다. 더구나 은천문은 독특한 검법을 보이는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전중방에서 급히 몸을 뺀 중년 남자가 눈빛을 빛내며 내놓은 전음이었다.
[태상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몸을 감추라 하신 이유도 명확합니다. 우리가 나선다면 몇몇이야 쓰러트릴 수 있겠으나 이는 대세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가 남은 뜻을 전한 다음이었다.
묵묵하게 듣고 있던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더는 나서지 않기로 의논이 있었지. 우리는 열 개의 가문을 일으켜 독자적으로 힘을 키우되 최선의 목표는 은천문의 멸문, 다음은 정도맹을 손에 넣는 것일세.]
몸을 돌린 노인은 그림자에 잠기는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세월을 두고 저 그림자처럼 천천히, 하나씩 우리 손에 넣는 걸세. 정도맹이 먼저여도 되고, 마교여도 상관없다네. 그렇게 해서 어둠에 잠기는 것처럼 언젠가는 강호를 지배하는 것이지.]
그가 나직하게 속을 털어놓은 뒤였다.
[벽계의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는데 강호를 손에 넣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화가 나거나 반항이 아니라 참담한 심정이 묻은 질문을 중년 남자가 내놓았다.
[우리가 왜 강호에 섞이지 않았는지 잊었나? 저들은 그저 키우는 가축과 다를 바 없어. 가축이 날뛴다고 그 아래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살 텐가, 아니면 기회를 보아 다시 위치를 찾을 텐가?]
무언가를 전하려던 중년 남자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노인이 옅게 웃었다.
[잠시 가축의 우리에 몸을 숨기는 것일세. 우리 역시 세월의 굴레에 몸을 던져 늙어가겠으나 이 숨이 끊기기 전에 저들의 목을 끊어 주인으로 올라설 것이고.]
노인의 전음을 들은 중년 남자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천문과 진무린을 조심하게. 별것 아닌 것 같은 놈이 끝이 없이 성장하더니 태상의 경지를 넘어서지 않았나. 우리 역시 그 점만큼은 배워야 하지. 더 강해지면 되네. 놈보다 월등히 강해지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임무일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부진 대꾸를 내놓는 중년 남자를 향해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강호를 혼란하게 만들어. 바른 자들을 원망하게 하고, 뭉치지 못하도록 갈라놓아야 하며, 의와 도리를 찾기보다 강한 것이 최고라는 생각에 물들게 해야 하네.]
중년 남자는 충분히 말귀를 알아들은 표정이었다.
[이만 가세. 이후로는 마주쳐도 모르는 사람일세.]
[부디 뜻을 이루십시오.]
마지막 전음을 나눈 두 사람이 훌쩍 산 아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동시에 뛰어내렸으나 방향은 확연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