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203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203화
은천검제
제203화
진무린은 먼저 장 노대의 눈가와 볼에 묻은 흙가루를 털어냈고, 이어 소매를 이용해 입가에 진득하게 달라붙은 흙을 닦았다.
볼이며 입술이 온통 퍼렇게 변한 것으로 보아 독에 당한 모양이었다.
‘무엇이 그리 좋으셨습니까?’
고통이 대단했을 텐데도 장 노대의 눈 끝은 웃는 것처럼 보였다.
“노대. 문주가 부족해서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사매와 사제 또한 데리고 나오지 못했으니 이렇게 부족한 문주가 있었나 싶습니다.”
공력을 얻어 혈색이 돌아온 정동추와 비척거리며 뒤로 물러나 무너트리려던 담에 기대앉은 벽계의 인물이 지켜보는 앞이었다.
“이제 본문에 대한 염려를 놓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행여 다음 생을 얻으신다면 한 번 더 문도로 태어나십시오. 반드시 저의 제자로 오십시오.”
정성스레 얼굴과 손을 닦아준 진무린은 장 노대의 양손을 가슴에 올렸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보기 좋게 만져주었다.
애잔한 얼굴로 장 노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던 진무린이 천천히 몸을 세울 때 정동추는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덤덤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분노를 감당할 이가 현재 강호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억지로 부여잡은 진무린의 울분이 정동추의 눈에는 분명하게 보였다.
“이걸 맡기더군.”
정동추는 잊고 있었던 물건을 꺼내 진무린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다른 말씀을 드리기 전에 먼저 해결할 것이 있습니다.”
보자기에 싼 기물을 품에 넣은 진무린은 곧장 벽에 기댄 중년 남자에게 다가갔다.
“마음 같으면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싶다만, 너 역시 속한 곳을 위해 애쓴 무인이라 여기겠다. 질문을 할 텐데 답이 없다면 두 번 묻지 않으마.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중년 남자는 어림없다는 투로 비웃음을 얼굴에 담았다.
후우우욱.
진무린의 몸에서 기운이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끄으. 끄아아아.”
발목이 잘려나간 중년 남자가 단박에 비명을 토해냈다.
발목 두 개를 잘랐을 순간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던 벽계의 인물이 온 얼굴을 찌푸린 채 토해내는 비명은 처절했다.
‘완전히 괴물이 되었구나!’
놀란 정동추 앞에서 진무린은 묵묵하게 내려다보았고, 시선 아래에서 벽계의 인물은 고개를 좌우로 비틀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끄아-.”
무공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혈도를 스스로 끊어서 자결할 수 있다. 그런데도 중년 남자가 저리 고통에 몸부림친다는 것은 이미 진무린이 온몸의 혈도를 장악했다는 말이 된다.
정동추는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간혹 환자를 살피고자 실처럼 엷게 기운을 풀어내도 고통이 끔찍한데 지금 진무린은 아예 굵직한 기운을 뻗어 중년 남자의 혈도를 꿰뚫었으니 고통이 어떨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혈도를 진무린이 모두 움켜쥐었으니 자결하지 못하는 것도 단박에 이해했다.
“끄윽.”
마침내 중년 남자의 눈과 코, 귀와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는데 진무린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중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정동추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진무린의 오른쪽 뒤편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만 보내줘라.”
“끄아. 끄으으.”
“분노를 이기는 것이 무인의 첫 번째 덕목이다. 자신보다 하수를 괴롭히는 것은 올바른 모습이 아닐뿐더러, 문도를 이끄는 문주가 지닐 태도는 절대 아니다. 본교도 목을 뽑으면 뽑았지, 이리 고통 속에 놓아두지는 않는다.”
잔잔한 정동추의 조언이 건너간 뒤였다.
경련처럼 몸을 떨던 중년 남자의 몸이 한순간 축 늘어졌다.
“잘했다.”
정동추가 팔을 다독여줄 때 진무린은 무너지기 직전의 담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저곳을 통해 진을 빠져나온 직후에 벽계와 연결되었던 기운이 봄날의 눈처럼 사라졌다.
저 맞은편에서 모려원이 이곳을 보고 있으리라.
‘참 못난 문주다.’
진무린은 담을 향해 옅게 웃었다.
‘그렇더라도 어떻게든 구할 테니 그때까지 굳게 견뎌다오.’
무슨 일인가 싶은 정동추가 날카로운 눈으로 담과 진무린을 번갈아 보았을 때였다.
“두 명이 몸을 감추고 있었는데 방금 움직였습니다. 그들을 따라가 볼까 합니다.”
진무린이 정동추를 돌아보았다.
“두 명이라 했냐?”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둘이다. 어쩔 셈이냐?”
“한 명을 따라갈 볼 생각인데 이곳을 누군가 지켜줘야 합니다.”
진무린을 따라가려던 정동추는 전중방을 지키게 생긴 상황에 입술을 뒤틀었다.
그러던 정동추가 확인처럼 고개를 돌린 뒤에 픽 웃었다.
“정파라는 인간들이 마음에 들 때도 있구나.”
정동추의 말이 끝난 뒤였다.
담장을 훌쩍 넘어 은혼과 매화검수들이 안쪽으로 날아들었다.
**
날이 환하게 밝은 뒤였다.
민가를 나선 종무헌이 급히 모려원의 뒤편으로 다가왔다.
“대사형께서는 강호에 나서셨다.”
모려원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아직 붉은 기운이 남아 있을지 모를 눈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제는 얻은 것이 있어?”
“대사형과 사저의 배려를 받은 소제는 뻔뻔하게도 이리 묵룡심법을 얻었습니다.”
호랑이만큼이나 매서운 인상의 종무헌이 풀죽은 음성으로 답을 하는데 어찌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모려원이 고개를 돌렸을 때 종무헌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사저께서 이곳에 계신 것이 혹시 소제 때문입니까? 운기하는 소제를 깨우지 못해 남으셨습니까?”
이토록 짐작이 빨랐나.
모려원이 억지로나마 웃는데도 종무헌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소제는 백 년, 천 년 이곳에 있어도 되었을 텐데 왜 대사형과 함께 나서지 않으셨습니까?”
모려원은 꿇어앉은 종무헌을 향해 움직였다.
“사제라면 그럴 수 있어?”
해를 등지고 있어서 모려원의 그림자가 종무헌의 몸을 덮었다.
“기혈이 엉킬지 모를 사제를 두고 대사형을 따라 강호에 나섰다면 평생 죄를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할 테지? 사제를 버린 죄책감과 대사형에 대한 그리움. 나는 둘 중 앞엣것을 선택했을 뿐이야.”
모려원은 자세를 낮춘 뒤에 종무헌의 소매를 잡아 몸을 일으켰다.
“나는 대사형께서 무슨 수를 쓰든 우리 둘을 구해내시려 한다는 것을 믿어. 그래서 대사형이 더 걱정돼.”
고개를 떨구었던 종무헌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우리 둘을 구해내지 못하면 대사형은 남은 평생 내내 죄책감에 시달리실 테니까. 그러니 믿자. 대사형께서 돌아오시리라고. 이곳에서 등룡창천을 깨우쳐 그날을 준비하자.”
“예, 사저.”
“사제 때문에 강호에 따라나서지 못했으니 등룡창천을 깨우치지 못한다면 이곳 생활이 참으로 힘들 거야.”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등룡창천을 깨우치겠습니다.”
종무헌의 곁으로 움직인 모려원은 몸을 돌려 이제는 환하게 밝아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대사형께서 나서셨으니 본문은 이제 한 시름을 덜었지. 우리는 그것만 생각하자.”
종무헌을 다독이며 모려원은 눈물을 털어냈다.
그리움은 가슴 저 깊은 곳에 감추고 무섭게 수련에 매달리겠다는 각오를 세운 까닭이었다.
**
사망자와 부상자를 맹으로 돌려보낸 황종관은 지독한 부상을 안고도 귀혼곡으로 향했다.
평생을 무인으로 살아온 그의 감이 걸음을 멈추지 말라고 속삭인 탓이 가장 컸고, 윤고성이 귀혼곡으로 향하는 것에 무언가 중대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황종관은 머리부터 몸, 심지어 눈과 코, 입, 손가락까지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컸다.
왼쪽 팔뚝을 뜯긴 자리에는 금창약을 듬뿍 발라 천을 둘둘 말았고, 내상을 가라앉히기 위해 환약을 삼켰다. 그런데도 황종관은 통증을 이기느라 식은땀을 흘렸다.
평소에는 가신이 보관하는 것과 달리 지금 황종관은 커다란 도를 직접 들고 아래로 늘어트린 채 걸었다.
죽음을 각오했고, 앞길을 막는 자는 모조리 베겠다는 강렬한 의지였다.
백호단은 또한 동료 단원의 뒷덜미를 잡아채 목숨을 구해주는 장면을 분명하게 보았다. 팔뚝에 감은 천에서 연신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한참을 걸은 뒤였다.
“가주. 잠시 휴식하신 뒤에 가십시오.”
어지간해서는 감히 하지 못할 권유를 가신이 내놓았다.
팔에서 배어 나온 피가 바닥에 떨어지고 있어서 상처도 돌봐야 했고, 백호단원들은 간단하게나마 식사도 해야 했다.
굳게 입을 다문 황종관이 가신을 돌아보았다.
“가주! 지옥을 가리키셔도 소신은 달려갑니다. 그러나 가주께서는 맹을 책임지고 계십니다. 맹에 속한 단원들을 살피시는 것 역시 가주께서 하실 일이라 여깁니다.”
도를 거꾸로 해서 앞에 든 가신이 다부지게 의견을 내놓았다.
가뜩이나 독이 오른 호랑이의 수염을 저렇게 잡아 뽑을 필요가 있을까.
백호단원들이 긴장해 바라보는 앞이었다.
“흥! 본가에 그래도 충언을 하는 가신 하나쯤은 남았었나 보구나.”
황종관은 의도를 알아듣기 어려운 감탄을 먼저 뱉었다.
콰악!
그런 뒤에 그는 도를 들어 땅에 찍었다.
“이각을 쉬고 가겠다. 그동안 단원들은 점심을 해결해라.”
“예, 맹주.”
백호단원들을 돌아본 황종관이 아직 도를 거꾸로 들고 있는 가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여태 그러고 있어? 가주를 굶길 참이냐?”
투박한 말투와 달리 황종관은 체격에 걸맞은 굵직한 미소를 보였다.
“상처를 보아다오.”
“예, 가주.”
가신들과 대원들을 잃은 분노를 가라앉힌 황종관이 팔을 내밀었고, 고개를 숙이던 가신이 바로 다가섰다.
**
은혼은 그렇다 쳐도 매화검수들은 마교 교주를 처음 보는 자리였다.
그러나 소개하는 사람이 진무린이었다.
정동추를 강호의 선배를 대하듯 하고, 반대로 교주는 진무린을 조카처럼 여기는지라 마교라는 적대감을 내세우기는커녕 마치 정도의 선배를 대하는 모양새가 돼버렸다.
인사를 막 마쳤을 때였다.
담장을 높다랗게 넘어 두 사람이 마당에 내려섰다.
“진 문주!”
운진은 감정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단박에 진무린에게 달려들어 팔을 쓸었고, 무탈한가를 살폈는데 달려오는 동안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를 한눈에 알 정도였다.
은혼은 말할 것 없고, 운진과 백면호리 또한 장 노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정동추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그저 희생된 사람으로 여겼는데 진무린 또한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암연의 수장에 대한 도리인 까닭이었다.
진무린은 먼저 벽계에서 홀로 나오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상황에서 이어 진무린은 벽계의 인물 두 사람이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이곳을 빠져나갔다는 말도 전했다.
“공연히 인사하느라 두 놈만 놓친 게 아니냐.”
뒷짐을 진 정동추가 불만을 토해냈는데 진무린은 먼저 은혼에게 고개를 돌렸다.
“장문인께 청이 있습니다.”
“말씀해주십시오, 진 문주. 본파의 위상에 해가 되지 않는 청이라면 무엇이든 나서겠습니다.”
흔쾌하게 답을 한 은혼이 진무린의 말을 기다렸다.
“태상과 서른 명에 달하는 벽계의 인물을 해결했으나 불행하게 사매와 사제가 아직 진 안에 있습니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저 담이 마지막 희망입니다. 담을 부수고자 할 때 진법을 통과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전혀 기운이 통하지 않습니다. 우스운 청이라 여기실지 모르겠지만, 사매와 사제를 구할 수 있는 하나뿐인 연결 고리입니다.”
담을 돌아본 은혼이 시선을 가져온 다음이었다.
“보기에도 위태롭습니다. 제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전중방을 지켜주시겠습니까?”
“능력이 부족해 다른 말씀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 몸이 살아 있는 한, 담은 안전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장문인.”
“문주께서는 어찌 이리 과한 예를 보이십니까?”
양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이는 진무린을 은혼이 급하게 말렸다.
“바로 돌아올 것입니다.”
비슷하게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의 마주한 시선이 간절한 요청이었고, 그에 대한 확실한 답이었다.
진무린은 다시 운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문주. 어려운 청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진 문주. 노도가 소용되는 곳이 있다면 설혹 그 자리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하더라도 주저치 않으리다.”
뭐 그런 장담을.
백면호리와 정동추가 비슷하게 운진을 돌아보았는데 느낌은 약간 달랐다.
“언젠가 납타이에게 쓰셨던 술법이 필요합니다. 다만, 제가 직접 부적을 붙여야 하고, 상대방이 그 점을 알면 안 됩니다.”
“납타이에게 썼던 술법이라면 추적술이오. 그 술법을 말씀하시오?”
“그렇습니다. 함께 죽을 이유는 없으니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만 알 수 있으면 됩니다.”
“상대가 술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은밀하게 부적을 놓을 수는 있으나 시행은 노도가 해야 하오.”
진무린의 눈을 향해 운진은 분명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열아홉 개의 지옥계단을 넘어야 한다 해도 진 문주를 기꺼이 따를 것이오.”
답을 내는 운진의 뒤편에서 백면호리가 고개를 심하게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