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2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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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6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200화
은천검제
제200화
진무린의 기운이 사당을 통해 쏟아진 직후였다.
담장에서 그림자가 훅 날아서 사당의 지붕에 내려섰다.
담벼락에 은신한 장 노대의 바로 머리 위에 있는 지붕이었다.
들켰나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장 노대의 위쪽에서 벽계의 인물은 세심하게 주변을 살폈다.
‘오해했구나! 문주의 기운을 내 기운이라고 오해한 거야!’
주변을 살피던 그림자는 바로 몸을 날려 장 노대가 몸을 숨긴 담장 앞으로 뛰어내렸다.
‘어떻게?’
그가 기척을 알아차렸다면 장 노대는 피하거나 대항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긴장한 상태에서도 장 노대는 호흡이 가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오랜 세월 암연으로 활약하며 얻은 경험, 켜켜이 쌓인 연륜, 그리고 은천문과 진무린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리라는 의지를 다진 장 노대는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긴장한 장 노대의 앞에서 그림자는 사당 반대편의 빈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견하지 못했다. 나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이런 식으로 움직여 혹여 놀란 내가 움직이기를 바라는 게지!’
어둠 속에서 맹수처럼 빛나는 그림자의 눈빛은 매서웠다.
저 환한 눈이 당장에라도 장 노대를 발견하고는 매섭게 손을 뻗어 목을 움켜쥘 것만 같았다.
사당에서는 아직 진무린이 전하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분명 이곳 어디에 있는 게지.”
그림자가 쏟아내는 말에 장 노대는 머리칼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일각만 시간이 더 있었다면 몸을 감춘 쥐를 찾았을 것인데 참으로 분하다.”
장 노대의 짐작이 맞았다.
모든 능력을 동원해 몸을 숨겼건만 벽계의 인물은 장 노대가 있는 곳의 범위를 점점 좁혀오고 있었다.
진무린이 기운을 쏟지 않았다면 장 노대는 필시 일각 안에 발각돼 죽었으리라.
알고 그랬을까, 아니면 무탈하다는 것을 알리고자 진무린이 기운을 낸 것이 장 노대의 생명을 구한 것일까.
어느 쪽이면 어떠랴.
진무린이 전해준 기운이 장 노대를 구한 것은 달라지지 않는데 말이다.
‘문주. 살을 찢고 뼈를 갈아대는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이 늙은이는 견뎌낼 것이오.’
장 노대가 각오를 다질 때 그림자는 지붕 위로 올라가 잠시 지체하더니 다시 담장 쪽으로 날아가 몸을 감췄다.
그 순간, 오래 쌓은 연륜이 장 노대의 감각을 깨웠다.
‘어째서 사당과 담을 허물지 않았지?’
사당의 뒤편에 있다는 것을 짐작한다고 했었다.
무공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사당이나 뒤편 담벼락쯤 손짓 하나로 허물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데 몸을 숨긴 것을 대강이나마 짐작하면서 왜 순순히 돌아갔을까.
‘이곳에 연결 고리가 있구나! 사당 혹은 이 뒤편이 무너지면 진이 파괴되는 것은 아닌가?’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으나 장 노대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움직이는 순간, 암연은 드러난다.
발목을 타고 올라온 지네가 소매 속으로 들어가 목을 향해 움직이는 데도 장 노대는 눈동자 한 번 흔들리지 않았다.
**
원예는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눈빛으로 움직임이 없었다.
귀혼곡을 출발한 백면호리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도 들었고, 진무린이 모려원, 종무헌과 함께 전중방으로 향했다는 보고도 받았다.
벽계는 노력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원예였다.
원예가 아는 한 벽계의 인물을 만나고도 살아날 방법은 진무린의 곁에 있거나 은천문 혹은 귀혼곡에 들어가는 것밖에 없었다.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일정하게 피어난 촛불이 방안을 밝히는데, 의자에 앉은 원예와 그 앞에 공손하게 서 있는 총관 백섭광, 바닥에 몸을 낮춘 두 명의 부루주 설란과 은향은 시간이 멈춘 공간에 던져진 사람들처럼 작은 움직임도 없었다.
정도맹에서 무인들을 보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벽계의 인물 한 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한순간, 정지됐던 시간이 흐른 것처럼 촛불이 흔들렸다.
그리고 창을 통해 사람의 형체가 소리조차 없이 방 안에 들어섰다.
총관은 여전히 공손했고, 두 명의 부루주 역시 낮춘 몸을 세우지 않는 가운데 원예만이 고개를 돌렸다.
“벽계에서 오신 분인가요?”
“구주의 후예라더니 기백이 대단하구나.”
들어선 중년 남성은 뒷짐을 진 자세로 원예를 노려보았다.
“이리 오신 것을 보면 태상께서 진 공자를 넘어서지 못한 거군요.”
“입을 조심하는 것이 그나마 고통을 줄이는 일이다. 또한, 이곳과 아래에 있는 수하들의 목숨을 구하는 길이기도 하고.”
냉정한 남자의 경고에도 원예는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구주의 후예인 것은 알고 계시죠?”
“무슨 수를 써도 네가 죽는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벽계의 안배가 깨지면 어떤 약점이 생기는지 저는 잘 알고 있답니다.”
눈 끝을 일그러트린 중년 남자가 원예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저와 함께 마지막을 택하시겠어요? 아니면 조용히 돌아가시겠어요?”
“흐하하! 얕은 수작으로 살길을 도모하다니! 구주의 후예라고 하기에 너무 치졸한 모습이 아니냐.”
중년 남자가 단박에 비웃음을 터트린 직후였다.
“설란.”
“루주를 모셨던 것에 감사합니다.”
여태 바닥에 엎드려 있던 설란이 비장한 인사를 건넨 뒤에 상체를 세웠다. 그녀는 작은 단지를 품고 있었다.
“은향.”
“루주를 모셨던 것에 감사합니다.”
역시나 작은 단지를 품은 은향이 몸을 세운 직후였다.
“이런 개 같은 것들이.”
지금까지 점잖았던 모습과 달리 중년 남자가 거친 말을 쏟아냈다.
“최악의 선택을 피하고자 하신다면 말씀을 조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원예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이었다.
“소녀가 구주에서 받은 것은 남은 자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임무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할 상온독이 전부였습니다. 이런 삶에 미련 따위 없으니 선택하시지요. 함께 가시겠습니까? 돌아가시겠습니까?”
올라오는 분노를 씹는 것처럼 침입자는 볼을 씰룩였다.
그때 원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선택이 어려우시면 소녀가 선택하지요. 벽계의 일원을 제거하는 것은 구주의 후예 모두가 받은 임무입니다.”
“돌아가마.”
“약조를 하나 주셔야 가실 수 있습니다.”
“네가 감히…….”
“앞으로 백 일간은 소녀를 다시 노리지 못합니다. 그 약조가 없다면 돌아가실 수 없습니다.”
감정이 한 톨도 담기지 않는 원예의 눈은 마치 뱀의 눈처럼 차갑고 서늘했다.
“총관. 그동안 고마웠어요.”
“모시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중년 남자의 눈빛을 확인한 원예는 거침이 없었다.
“멈춰!”
시선과 시선이 마주친 직후였다.
“백 일이다. 그 이후에는 상온독에 기대지 못할 것이다!”
비수로 가르는 것처럼 날카롭게 원예를 훑어본 벽계의 인물이 창을 통해 튀어나갔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였다.
“이로써 벽계가 모종의 음모를 준비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네요. 추종향은요?”
“발바닥에 묻었고, 창을 통할 때 옷자락에 묻었으니 사흘 뒤부터 특유의 향을 뿜어낼 것입니다.”
여전히 감정이 담기지 않은 음성으로 원예가 물었고, 총관이 답했다.
총관 백섭광은 긴장이 풀려 지친 얼굴이었다.
침입자가 죽음을 택하면 실제로 독을 뿌릴 참이었고, 지금처럼 돌아갈 경우를 대비해 사흘 뒤부터 향을 풍기는 추종향을 발라놓았다.
모종의 계획이 있으리라 짐작한 것도 놀라운데 죽음을 앞두고도 초연한 태도로 벽계의 인물을 몰아붙이는 강단이라니.
원예를 살피던 총관은 깊숙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삶에 미련 따위 없다는 원예의 말이 진심이라고 느껴진 까닭이었다.
**
귀혼곡을 향해 달린 황종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백호단을 따라잡았다.
가뜩이나 최근 무섭게 변한 황종관의 지휘를 받게 되자 백호단 단원 오십 명과 단주는 바싹 긴장한 채 귀혼곡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걸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황종관과 가신, 백호단의 육십여 명을 막아선 한 명의 중년 여성 때문이었다.
중년 여인은 어둠 속에서도 확연하게 느낄 정도로 당당했고, 황종관 일행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유마저 흘렀다.
“혹시 벽계에서 오신 분이오?”
“맹주가 나서기를 기다렸던 참이지.”
“벽계에서 나오신 분이냐고 물었소.”
“짐작하면서 굳이 답을 들으려는 이유가 있나?”
생긴 것은 황종관의 동년배로 보였으나 중년의 여인은 한참 어린 후배를 대하는 것처럼 질문을 냈다.
“얼마나 독하게 상대해야 할지 각오를 세우느라 그랬소.”
말을 마친 황종관은 가신이 내민 도의 자루를 단단하게 움켜쥔 뒤에 느긋하게 뽑았다.
“나까지 노리는 이유가 구관을 막고자 함이오?”
“그보다는 강호에 바른 정신을 이을 사람을 줄이자는 뜻으로 이해하게. 우리에게는 강호의 혼란과 분열이 필요하다네. 맹주 자리를 놓고 다투고, 옳은 일을 해봐야 결과는 처참한 죽음밖에 없다는 증명이 필요하다고 여기면 될 걸세.”
차분하게 말을 건넨 중년의 여인이 천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맹주에 대한 예우는 조금 전의 대답으로 충분한 것 같으니 이제 목숨을 가져가겠네.”
바닥에서 일어난 것처럼 달려드는 흙먼지를 보고도 황종관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내가 정도맹의 맹주 황종관이오. 마교의 교주가 벽계의 일원을 상대로 살아남은 것은 물론이고, 이미 한 명을 쓰러트린 적이 있으니 어찌 쉽게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소?”
“이곳에는 진무린이란 자가 없다.”
자존심을 다친 모양이었다.
중년 여인의 표정이 직전과 달리 딱딱했고 음성에는 노기가 묻었다.
“백호단에 당부한다. 오늘 이 싸움이 오래도록 정도맹의 평가를 좌지우지할 것이다. 내가 가장 먼저 목숨을 던지마. 당부하니 소속된 문파를 떠나 마교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다오.”
“맹주의 명을 받습니다.”
“너희에게는 당부 따위 하지 않아도 되겠지?”
“가신들은 가주의 손이요, 발이라 들었습니다. 손과 발에게 당부를 전하시면 백호단원들이 가주를 이상하게 볼 것입니다.”
가신의 답을 들은 황종관이 씨익 웃었다.
이미 도를 꺼내 든 가신들이 황종관의 뒤를 지켰고, 백호단이 빠르게 좌우로 벌려서 중년 여인을 포위할 태세를 갖췄다.
“맹주라고 예우를 해주었더니 참으로 건방지구나!”
“벽계의 인물이라고 너무 오만하신 것 아니오?”
한 마디도 지지 않은 황종관이 삽시간에 표정을 바꾸고는 눈빛을 빛냈다.
쉐에에에에엑!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달려나간 황종관이 도를 내리치며 싸움이 시작되었다.
카아앙! 쉬익!
여인의 손을 피한 황종관이 뒤로 물러나는 순간에, 가신들이 휘두른 도가 여인의 목과 허리, 무릎을 향해 날았다.
쉐엑! 쉑! 쉐엑! 쉭! 퍽!
수준 차이는 확연했다.
번득이는 도 사이를 미끄러지듯 움직인 여인은 마지막 순간에 가신 중 한 명의 가슴에 손을 꽂아 넣었다.
중년 여인이 남은 두 가신을 향해 팔을 뻗는 순간이었다.
쉐에에엑! 카아앙! 쉑! 캉!
황종관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도를 휘둘렀다.
쉑! 카앙! 쉐에엑! 카아앙!
피를 토하는 가신을 보고 분노했을까.
기운을 있는 대로 끌어올린 황종관은 중년 여인을 부술 것처럼 거대한 도를 매섭게 휘둘렀다.
목숨 따위 던졌다.
마교 정동추가 벽계의 한 명을 잡았다면 나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반드시 그 정도의 성과를 이루겠다.
벽계의 중년 여인을 향해 달려드는 황종관의 태도는 분명했다.
그가 죽으면 공은 살아남은 백호단의 몫이 된다.
가주 황종관의 각오를 알아챈 가신들은 중년 여인의 팔을 노리고 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가주에게 날아가는 손에 내 가슴을 밀어 넣겠소.
이 목숨이 떨어지는 순간을 이용해서라도 적의 목을 갈라주시오.
한 명의 가신이 피를 토하고 밀려난 직후부터 싸움을 느닷없이 처절하게 바뀌었다.
같은 도법을 수련한 가신들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한 세월이 있고, 황가의 이름값을 지키겠다는 각오와 가주를 위해 몸을 던지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쉑! 카앙!
황종관과 중년 여인의 손이 부딪치는 순간이면, 두 명의 가신이 단박에 달려들었다.
쉑! 쉐엑!
여인의 옆구리와 목을 향해 도를 날리면서도 그 두 명은 몸으로 손을 막아서겠다며 가슴을 넓게 벌렸다.
쉐에에에에엑! 카앙!
가신들의 죽음을 볼 수 없는 황종관이 눈을 부릅뜨고 도를 휘두를 때였다.
쉐에에엑! 쉐엑!
지켜보던 백룡단이 진심을 다해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쉭! 퍼억! 쉬이익! 퍽!
가신들과 달리 호흡이 맞지 않는 백호단원들이 중년 여인의 손에 맞아 멀찍이 떨어졌는데,
쉐에에엑!
그럴 때마다 또 황종관의 도가 중년 여인의 어깨와 팔뚝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