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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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1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97화
은천검제
제197화
태상의 머리와 몸뚱이가 바닥에 떨어진 다음이었다.
극명하게 기운을 쏟아냈던 진무린은 그 여파로 피를 뱉어냈다.
“소제가 적당한 민가를 찾겠습니다.”
종무헌이 득달같이 근처의 민가를 향해 움직인 다음이었다.
“잘 견뎠다.”
진무린은 옅게 웃으며 모려원의 입가를 소매로 닦아주었다.
기혈이 엉켜 낯빛이 하얗게 변한 진무린과 모려원이 비슷한 의미로 웃었다.
비록 입에 피를 물었으나 힘겨웠던 사투에서 적을 물리쳤고, 세 사람 모두 살아남았다.
이보다 더 감사한 웃음이 세상에 있을까 싶었다.
웃음의 끝에서였다.
“내부가 단정한 민가를 찾았습니다.”
급히 달려온 종무헌의 앞쪽에 놓인 민가를 가리켰다.
벽계의 세상에서 나갈 수 있다면 굳이 이곳에서 운기할 필요가 있을까.
“대사형. 밖에 둔 기물을 말씀하셨는데 언제고 문을 열 수 있나요?”
걸음을 옮기기 전에 모려원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아무래도 수상해서 기물을 그곳에 놓기는 했다만, 장 노대가 애써줘야 진법을 풀어낼 수 있을 거다.”
태상에게 장담했던 것과는 다른 답변이었다.
의아해하는 모려원과 종무헌을 향해 진무린은 다시 입을 열었다.
“태상이 흐뭇하게 죽게 둘 수는 없지 않으냐?”
“그러시면…….”
“진법을 여는 것에 난관이 있다만, 지기 싫었다. 그래서 약간 과장되게 말했지.”
늘 진중하던 진무린이 부풀린 말을 했다니?
진법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말에 허탈해하던 태상을 떠올린 모려원이 기가 막힌 웃음을 터트렸고, 종무헌은 급히 얼굴을 틀었다.
“웃음을 감출 게 뭐가 있어?”
진무린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죽음의 문턱을 지나친 대결의 긴장감이 풀린 데다, 모두 무사하다는 안도감에 세 사람은 턱없이 나오는 웃음을 마음껏 쏟아냈다.
죽음의 문턱을 함께 건넌 이가 아니고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웃음이 지난 뒤였다.
“장 노대가 향로를 움직이면 바로 나갈 수는 있을까요?”
모려원이 건넨 질문에 진무린은 고개를 저었다.
“본문의 진법을 장 노대의 몸에 심었다. 그가 아니라면 당장 본문을 열 방법은 없지.”
은천문과 마찬가지로 진법 안에서도 해는 뜨고 지는 모양인지 참담했던 하루가 붉은 노을과 함께 기울고 있었다.
“기물이 혹여 장 노대의 역할을 대신해 줄지 모른다. 그렇다고 향로를 움직이는 것으로 진법이 열리지는 않을 테고, 장 노대 역시 함부로 움직일 분은 아니다.”
노을을 등진 진무린이 붉은빛에 싸인 모려원과 종무헌에게 설명을 이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장 노대가 본문으로 가서 양 사고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아!”
진무린의 설명 끝에서 모려원이 감탄을 뱉어냈다.
양소소라면 진법을 열 방법을 찾아내리라는 믿음이 담긴 탓이었다.
“문제는 다른 이가 나타나 혹여 손을 대지 않을까 하는 점이고, 장 노대가 나선다 해도 언제가 될지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진법의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러시면 운기를 먼저 하지요?”
“사제는 앞장서라.”
모려원이 권했고, 진무린이 받아들여서 세 사람은 민가를 향해 걸었다.
들어선 민가는 종무헌의 말 대로 단정했다.
작은 탁자와 의자, 책상, 몇 가지 서책이 전부였다.
“사제가 앞을 지켜다오.”
“안심하고 운기하십시오, 대사형.”
종무헌에게 호법을 당부한 진무린과 모려원은 곧바로 바닥에 자리하고 눈을 감았다.
**
백면호리에게서 상황을 소상하게 다시 들은 황종관은 구대문파에 급한 전갈을 보냈다.
또다시 벽계의 흉수가 침입할 수 있으니 경계에 만전을 기하라는 조언이었다.
백팔나한조차 막아내지 못한 흉수를 경계한다고 물리칠 수 있을까마는 그나마 대비하라 전하는 것이 정도맹의 역할이란 판단에서였다.
이어 황종관은 정도맹의 청룡단을 상등으로 급히 보냈다.
“홍화루에 벽계의 흉수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너희는 가서 목숨을 걸어 루주를 지켜라.”
맹주가 기루의 루주를 지키는 데 목숨을 걸라는 명을 내렸다.
이전 같으면 불만이 터져 나올 일인데 최근 황종관의 강단과 행보를 익히 하는 청룡단은 단단한 표정으로 명을 받았다.
황종관은 이어 백호단에게 또 하나의 임무를 맡겼다.
“귀혼곡으로 가서 입구를 차지하고 그곳의 경계를 늦추지 마라.”
진무린이 당부했던 일을 수행한 황종관은 도를 소지한 채 집무실 책상에 앉았다.
하루가 저물어 어둠이 내리는 시간이었다.
진무린 일행은 어찌 되었을까.
승전보도 들리지 않았고, 반대로 벽계의 도발에 관한 보고도 없어서 숨 막힐 것처럼 날카로운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어둠이 진하게 내려앉은 집무실에 촛불조차 켜지 않은 채 황종관이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맹주. 단주입니다.”
집무실에 들어선 비월단주 염기가 어두운 집무실과 매서운 황종관의 눈을 보고는 움찔했다.
“생각할 것이 있어 잠시 있었지. 불을 켜게.”
염기가 바삐 움직여 집무실 곳곳에 불이 일렁였다.
“무슨 일인가?”
“윤고성이 귀혼곡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귀혼곡을?”
“조금 전에 들어온 보고를 확인하면 분명합니다.”
염기의 보고를 들은 황종관은 잠시 눈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윤고성이 그곳으로 향한 이유를 짐작조차 못 하겠는데 혹시 아는 바가 있나?”
“죄송합니다, 맹주. 저 역시 보고를 서너 차례 확인할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입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윤고성과 귀혼곡의 연관을 알기 어려운 터라 염기의 답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수준이었다.
“오늘 점심쯤 이백 명의 백호단을 귀혼곡으로 파견한 것은 알고 있나?”
“보고를 받은 시간과 장소를 고려하면 윤고성은 이미 귀혼곡에 도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흐음.”
윤고성은 분명 벽계와 연관이 있다.
벽계는 또 강호의 주요 인물을 살해할 목적으로 수하를 내보낸 터고.
미간을 좁혔던 황종관이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백호단에 급하게 연락해서 몸이 날랜 이십여 명을 추려 먼저 귀혼곡으로 달리라 전하게. 윤고성을 보는 대로 생포하라 이르되, 만약 반항이 심하거나 놓칠 것 같으면 참살해도 무방하다고 전해주면 되네. 참살에 관한 명령서는 이미 작성해 놓은 것이 있으니 그것을 활용하도록 하고.”
“예, 맹주.”
염기를 내보낸 황종관은 책상에서 몸을 세웠다.
“거기 있느냐?”
“예, 맹주!”
집무실의 천장에서 듬직한 답이 있었다.
“귀혼곡으로 가겠다. 가신 전부를 소집하고 알려다오.”
“명을 받았습니다.”
주변을 경계하던 가신의 단단한 답이 있었다.
**
강시를 제조할 정도로 독특한 의술을 자랑하는 마교였다.
내상을 치유할 방법을 내놓으라 요구하는 정동추를 위해 마의는 참으로 특별한 처방을 준비했다.
동굴의 안쪽에 구덩이를 판 마의는 그 한가운데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돌을 담은 뒤에 약재와 물을 넘치도록 부었다.
“이곳에 들어가 이틀만 운기하신다면 내상을 말끔히 치유하시라 자신합니다.”
평소라면 장로랍시고 으스댈 마의였으나, 최근 반기를 든 수백 명의 목을 단숨에 자를 정도로 냉정한 정동추 앞에서 함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무엇보다 반기를 들었던 인물 대부분이 장로인 탓이 컸다.
동굴에 든 정동추는 뒤따르는 다섯 명의 수신호위를 돌아보았다.
“너희는 곁을 지키다가 만약 내가 주화입마에 들거나 피를 토하는 일이 있다면 이 자리를 준비한 자들 전부와 그 가족의 목을 잘라라.”
“교주의 명을 받습니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지시를 내린 정동추는 거대한 약탕 안에 들어가 운기에 들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흘렀다.
그 사이 약탕은 피처럼 붉어졌다가 다시 시커먼 색으로 변했는데 정동추는 그 뒤에 눈을 떴다.
약냄새를 풀풀 품기며 일어선 정동추에게 수신호위가 급히 장포를 덮어주었다.
정동추는 먼저 동굴의 입구에 몰려 있는 마의와 이십여 명을 돌아보았다.
“마의가 왜 저러고 있어?”
“교주께서 피를 토하실 것에 대비해 붙들어 두었습니다.”
수신 호위 넷이 내민 도 아래에 몰려있는 마의와 수하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표정이었다.
“고생했다. 너희에게는 향후 극형에 해당하지 않는 죄에 대해 한 번의 사면권을 내려주마.”
“교주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사면권보다 당장 살아난 것에 감사한 마의와 수하들이 고개를 조아린 뒤에 동굴 밖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바깥의 일은 어찌 돌아가느냐?”
“은천문의 문주와 사매, 사제가 벽계의 태상을 상대하러 들어갔다는 소식까지 들었습니다.”
정동추의 입술이 꿈틀했다.
“섬도곤은?”
“본교로 향했다는 보고가 있은 뒤로 아직 행방을 알지 못합니다.”
날카로운 정동추의 시선에 수신호위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객잔과 주루, 상단, 표국을 물갈이한 터라 정보가 들어오는 것이 평소보다 늦습니다.”
“몸을 씻겠다. 그 뒤에 바로 식사할 테니 음식을 준비하라 일러라.”
“예.”
수신호위에게 지시한 정동추는 동굴의 한쪽에 있는 샘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
진무린은 하루를 꼬박 운기에 매달린 뒤에야 눈을 떴다.
민가의 안쪽은 어두웠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석상처럼 종무헌이 검을 옆에 들고 서 있었다.
“사제.”
“일어나셨습니까, 대사형?”
“얼마나 시간이 흘렀지?”
“꼬박 하루가 지났습니다.”
진무린은 고개를 돌려 아직 운기에서 깨어나지 않은 모려원을 살폈다.
혈색이 돌아온 것으로 봐서 크게 염려할 점은 없어 보였다.
“꼬박 하루를 그리 있었을 테니 사제에게 미안하다.”
“전혀 힘든 줄 몰랐습니다.”
“사매가 깨어날 때까지 여유가 있으니 잠시 바람을 쐬고 들어오자.”
“예, 대사형.”
진무린과 종무헌은 조용하게 걸음을 옮겨 민가의 바깥으로 향했다.
벽계의 진법에서 두 번째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었다.
민가를 중심으로 아직 몸을 감추지 못한 빛과 세상을 다 차지하지 못한 어둠이 뒤엉켜 다가올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민가 저 너머로 태상과 벽계의 인물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것까지 진법 안은 운기에 들기 전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진무린은 기운을 천천히 펼쳐보았다.
확실히 벽계의 진법은 은천문과 비슷해서 그 어떤 벽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에서는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밖에서 장 노대가 움직일 때까지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야 운기를 했다지만, 호법을 선 사제는 시장했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음식을 찾아볼까 했으나 혹여 일이 있을지 몰라 자리를 지켰습니다.”
종무헌을 향해 가볍게 웃은 진무린은 주변의 민가를 둘러보았다.
“어릴 적을 생각하며 주변을 한번 살펴볼까?”
“들어가 계시면 소제가 먹을 만한 것이 있나 찾겠습니다.”
“그럴 것이 뭐 있어? 함께 다녀보면 되지.”
종무헌이 민가를 힐끔 돌아보았다.
홀로 운기하는 모려원이 괜찮을까 하는 염려 탓이었다.
“조금 전에 기운을 풀어 살펴보았다. 다른 문제는 없을 테니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예, 대사형.”
진무린이 걸음을 옮겼고, 종무헌이 뒤따랐다.
“대사형. 얼마나 이곳에 있게 될까요?”
“글쎄. 알기 어렵지. 최소 사흘이라고 봐야 할 테고, 길면 수년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가까운 민가를 향해 걸으며 진무린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이 시간에도 본문은 발전한다. 은천수호검을 모두 익히고 나면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닐 테고, 묵룡검법을 깨닫는 제자들의 숫자 또한 많아질 거다.”
종무헌은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동안 사제까지 등룡창천을 깨닫는다면 우리 셋의 힘으로 진법을 부술 것도 같다.”
놀라는 종무헌을 향해 진무린은 보기 좋은 미소를 그렸다.
“그러다가 진법이 왜곡되면 영원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진다지 않더냐. 역시 무리하기보다는 양 사고께서 문을 열어주시는 것이 좋겠지.”
“어쩐지 대사형께서는 점점 전 문주를 닮아가시는 듯합니다.”
“한때 내 소망이 그것이었다.”
대꾸한 진무린이 가볍게 웃자 종무헌이 비슷한 표정으로 민가에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