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9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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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7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90화
은천검제
제190화
먼동이 터오는 시간에 눈을 뜬 진무린은 앞에 앉은 모려원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언제 깨어났는지 모를 모려원이 진무린을 빤히 바라보고 있어서였다.
“내상은 어떠세요?”
“최근 이토록 오랫동안 편안하게 운기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답을 한 진무린은 모려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에 진무린을 가득 담은 모려원이 또한 손을 뻗었다.
진무린과 모려원 모두 알고 있었다.
전중방을 찾아 나서 태상과 벽계의 일원을 상대하는 순간, 누가 살아서 돌아올지 장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은천문의 문주와 문도로서 피하지 못할 길이었다.
아쉽고 안타까워서 어쩌면 더 애틋한지 모른다.
사매를 만난 것이 지금까지의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가슴에 늘 품고서 흑사련을 상대하러 나섰을 때, 객잔에 기억을 잃은 사매를 찾아 나섰을 때, 그 어떤 순간에도 사매를 잊은 적은 없노라 말해주고 싶었다.
진무린은 가슴에 담긴 수많은 말 대신 부드럽게 웃었다.
어떤 말로도 감정을 제대로 전할 수 없다고 여겨서였다.
“맹주를 만나 삼보를 사제에게 사용하겠다고 말할 참이다. 그런 뒤에 바로 전중방을 향해 갈 계획이고.”
진무린은 모려원의 손을 당겼고, 다가온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든 모려원의 안타까운 눈을 향해 진무린은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
밤을 꼬박 의자에 앉았던 태상은 동이 틀 때 벽계의 모든 이를 불렀다.
그는 피 묻은 수염을 닦지 않았고, 옷마저 갈아입지 않아서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구주가 멸망했다고 하나 진중탈구검이 강호에 퍼졌다. 삼보의 구관을 통과한 아홉 명이 진을 형성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감당하기 어렵다.”
오른쪽 팔걸이에 몸을 기댄 태상은 어젯밤과는 달리 초연한 모습과 덤덤한 음성이었다.
“물론 구관을 열지 못하도록 막아설 수야 있겠다만, 진무린이란 놈의 발전이 내 수준에 이르러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를지 모를 일이다.”
말을 마친 태상은 나직하게 숨을 내쉰 뒤에 앞에 선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우리는 강호에 새로운 세상을 열 때까지 죽지도, 늙지도 않는 삶을 약속했었다. 그리고 기다렸지. 허나 우리가 숨죽이는 동안 세상이, 강호가 바뀐 모양이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였다.
“나는 이제 그 벽을 열겠다.”
앞에서 고개를 숙였던 수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 정도로 놀라운 태상의 발언이 있었다.
“태상!”
앞에 있던 수하가 불렀을 때, 태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 나를 제외하고 쉰셋이 있다. 이 중 열셋이 강호로 나선다. 나선 이들은 벽계라는 이름을 잊고 강호에 나가 각기 가문을 일으켜라. 그리해서 새롭게 바뀐 세상에 맞춰 강호를 손에 넣어라.”
결국, 이렇게 되는가.
수하들이 비통한 눈으로 태상을 지켜보았다.
“열셋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다시 열 명이 강호로 나선다. 강호에 나선 열 명은 정도맹, 귀혼곡을 중심으로 진무린에게 협조하는 이들을 조용하게 처리해라. 이후 내 죽음을 알게 되는 순간, 앞서 나간 열셋의 수하로 들어가라.”
확실하게 각오를 세운 태상의 지시였다.
“남은 서른은 이곳에서 나와 함께 진무린을 상대한다.”
이 정도라면 절대 돌이키지 못할 지시였다.
진무린이 이리 만들었다.
놈이 그 오랜 세월을 기다린 벽계의 숙원을 물거품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진무린을 상대한다는 말에 수하들이 독기를 잔뜩 올린 눈으로 태상을 지켜보았다.
“진무린이란 놈은 반드시 이곳을 찾을 게다. 내 부상이 심상치 않다. 나와 남은 서른은 놈과 함께 이곳에 묻힌다.”
고개를 든 수하들을 천천히 돌아본 태상은 팔걸이에 기댔던 몸을 세웠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벽을 타고 서 있는 흉상들을 가리켰다.
퍼석! 퍽! 퍼서석! 퍼석!
대전을 지키던 형상들이 폭발하듯 부서진 뒤에 파편들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이로써 우리도 늙기 시작하고, 세월을 이기지 못해 죽음을 맞는다. 너희는 나가 새로운 가문을 일으킬 열셋과 뒤에 나설 열 명을 추려라.”
말을 마친 태상은 손을 다시 들어 오른손을 밖으로 저었다.
명을 받았다느니 하는 말은 없었다.
양손을 잡아 고개를 숙인 수하들이 비통한 얼굴로 대전을 빠져나갔는데 태상은 그 모습을 뇌리에 담듯 움직임이 없었다.
수하들이 모두 나간 뒤였다.
“나와 네놈의 무덤으로 삼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냐. 내 너와 함께 이곳에 묻혀 영원히 구천을 떠도는 원귀로 함께 지낼 것이다.”
진무린에게 전하는 혼잣말을 털어낸 태상이 만족한다는 투로 잔인하게 웃었다.
**
아침을 맞은 진무린은 일행과 함께 간단하게 식사를 마쳤다.
“사제는 밖에 말해서 내가 맹주를 잠시 뵈었으면 한다고 전해다오.”
“예, 대사형.”
종무헌이 몸을 일으킬 때였다.
황종관이 가신 둘을 데리고 별채의 대청으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몸은 좀 어떤가?”
“운기를 충분히 한 덕분에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잠시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나?”
진무린은 일행을 돌아본 뒤에 몸을 일으켰다.
모려원과 종무헌, 운진, 섬도곤을 모르지 않는 황종관이고, 가신이나 수하를 시킨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자고 할 정도면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해서였다.
“잠시 걸었으면 하네.”
“그러십시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마.”
“편히 하시오, 진 문주.”
일행에게 양해를 구한 진무린은 황종관과 함께 별채를 나섰다.
황종관은 전각과 전각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마른 가지에는 파란 잎이 돋았고, 햇살은 완연한 온기를 품은 계절이었다.
“삼보를 통해 구관을 얻는다고 들었네. 문주가 괜찮다면 나는 구관에 들어갈 아홉 명을 선발하는 영웅대회를 개최할 생각이네.”
덩치가 커다란 황종관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구대문파와 세가 두 곳에서 정한 후계자와 달리 선발된 이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어려움이 있고, 또 벽계가 어떻게 나설지 모르지만, 당장 삼보에 쏠린 관심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가장 좋을 듯하네.”
아침의 햇살을 어깨에 담은 황종관이 의견을 묻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천서유기, 유광록, 보양진서를 건네드리겠습니다. 다만, 세 가지 보물은 사제를 위해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별개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책자에 구관의 위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소림과 무당의 덕망 있는 분들을 모시면 충분히 알아낼 것입니다.”
황종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가지 보물을 사제에게 사용하려는 이유가 벽계를 찾아 나서기 위함인가?”
황종관의 질문에 진무린은 어젯밤에 의논했던 내용을 들려주었다.
“왜 은천문이 모든 것을 책임지려 하는가? 필요하다면 나라도 직접 나서겠네.”
“언짢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강호의 고수와 함께한다고 해도 사매, 사제처럼 호흡을 맞추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제가 벽계의 인물들을 모조리 쓰러트리는 동안, 태상을 막을 인물이 강호에 몇 분 되지 않습니다.”
진무린은 덤덤하게 설명을 내놓았다.
“말씀은 고마우나 지금 정도맹에는 맹주가 반드시 계셔야 합니다. 구대문파의 수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벽계가 강호에 발호했을 때, 진중탈구검으로 그들을 상대할 최후의 보루가 있어야 저 역시 사매, 사제와 마음 놓고 저들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걷는 동안 나눈 대화였다.
길의 끝에서 저 멀리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담이 나왔고, 파릇파릇한 잎을 품고서 길게 늘어진 나무와 그 아래로 놓인 정자가 보였다.
“차를 한잔 할 생각이네.”
“경치가 참으로 좋군요.”
함께 정자에 오른 진무린은 황종관과 함께 중앙에 놓인 탁자에 자리했다.
준비해 두었던 모양이었다.
무인 둘이 움직여 진무린과 황종관 앞에 차를 놓아주었다.
“은천문은 어쩔 참인가?”
황종관은 벽계를 향한 뒤의 일을 염려하는 눈치였다.
문주인 진무린이 흉한 일을 당하면 은천문이 당장 어려움에 놓이지 않겠느냐는 의미의 질문이었다.
“원래는 제가 맡을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는 사부께서 계시고, 전임 문주께서 제자들에게 특별한 검법을 지도하고 계십니다.”
“은천문의 입구를 막았다더니 그때 이미 각오를 세웠던가?”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신 뒤에 진무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본문은 홀로 벽계를 상대하며 제자들을 잃었고, 말씀드렸던 분들과 사고, 파천신군 내외분께서 중한 부상을 당하셨습니다.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답이었다.
그러나 황종관은 길게 숨을 내쉬며 진무린의 답을 받아들였다.
어떤 경우에도 가장 현명한 선택을 했고, 그것이 어려움을 만나면 마치 미리 알고 한 것처럼 결과를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진무린은 늘 일희일비하지 않았고, 다른 이 앞에 나서지 않아 돋보이는 일이 없었는데 반대로 궂은일은 모두 도맡다시피 했었다.
“언제 출발할 생각인가?”
“맹주께 말씀드렸으니 세 가지 보물을 사제에게 적용해 보고 효능을 보았다고 여기는 순간,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전중방의 진법을 확인하지 않았잖은가?”
황종관의 질문에 진무린은 가볍게 웃었다.
뭔가 확실한 것이 있나?
그러나 진무린이 더는 입을 열지 않아 황종관도 묻기 어려웠다.
“맹주께 청이 있습니다.”
“말하게. 아니. 편하게 부려주게.”
“벽계는 태상이 중상을 당했습니다. 분명 그들 나름으로 복수를 계획할 테니 구대문파와 의논해서 귀혼곡, 홍화루, 그리고 관련된 곳들을 살펴주십시오.”
“반드시 그렇게 하겠네.”
“맹주께서도 안위를 좀 더 살피십시오. 죄송한 표현이나 벽계가 작정하고 나선다면 그들을 막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최소한 도피할 계획은 세워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입술에 힘을 꾹 주었던 황종관이 잠시 뒤에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위험한 순간을 만나면 몸을 피해서라도 정도맹을 지키라는 명이라고 생각하지.”
대화는 거기에서 멈췄다.
두 사람은 봄의 기운을 품은 햇살과 나무 아래에서 실제로 차 한 잔을 즐겼다.
나뭇가지 사이를 파고든 햇살이 정자 바깥으로 일렁이고, 불어오는 바람이 진무린과 황종관의 옷깃을 간질이며 달렸다.
고작 벽계의 한 사람을 막지 못해 구대문파와 세가 두 곳이 후계자를 잃는 현실에서, 진무린은 태상이란 이의 가슴을 베고 다시 그를 쓰러트리기 위해 나서는 참이었다.
당대 최고수를 꼽으라면 황종관은 당연하게 진무린을 꼽을 것이고, 이는 구대문파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황종관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진무린을 바라보았다.
양손으로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진무린은 기품이 있었고, 그의 곁에 놓인 검은 의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황종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인물이 지금 강호에 있는 것에 감사하는 심정에서였다.
**
아침을 간단하게 먹은 백면호리는 이안공자가 전해준 기물을 보자기에 싸서 허리에 둘렀다.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나서는 길이었다.
“정아야. 아빠가 한번 안아보자.”
백면호리가 아쉽게 팔을 벌리자 고맙게도 요정은 곧장 달려와 품에 폭 안겼다.
“무공 열심히 수련해서 강호의 여고수가 되는 거야.”
“응. 아빠처럼 영웅이 될 거야.”
“아빠는 영웅 아니야.”
품에 안겼던 요정이 상체를 젖히며 고개를 빼냈다.
“아빠는 영웅이야. 나를 이만큼 키워줬잖아. 나를 위해 귀혼곡을 찾았고, 무공을 익히게 하려고 애썼잖아. 아빠, 나 다 알아. 그래서 아빠는 내게 진 숙부만큼 영웅이야.”
“에효효!”
무슨 말을 하겠나.
백면호리는 이상하게 아린 가슴을 탄식으로 털어내며 딸 요정을 품에 꼭 안았다.
이 팔을 놓으면 다시는 품지 못한다.
지금 눈에 담는 것이 어쩌면 이 예쁜 딸의 마지막 모습일지 모른다.
자꾸만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낸 백면호리가 팔을 풀고는 몸을 일으켰다.
“정아야. 아빠가 강호를 구하기 위해 달리느라 한동안 못 올 수도 있어. 강호를 구하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거든.”
요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내년 이맘때도 아빠가 못 오게 되면 유광을 찾아가.”
“유광?”
“이안공자가 알아. 그때까지는 절대 물어보면 안 돼.”
“아빠가 내년까지 안 와?”
“오지! 그런데 강호를 구하는 영웅이 되는 게 어디 그렇게 쉬운가? 그러니까 못 오게 되면 따로 만날 곳을 준비를 해두는 거지.”
“응.”
답을 한 요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면호리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부대공의 딸이라고 해. 누구의 딸?”
“이부대공.”
“그래. 그럼 알아서 해줄 거야.”
“아빠가 특별한 사람이야?”
“응? 그렇지! 그래! 아빠는 사실 특별한 신분인데 그걸 감추고 있었던 거지.”
신기해하는 요정을 다시 한 번 꼭 안은 백면호리가 마침내 몸을 세웠다.
“아빠 간다. 내년 이맘때까지는 절대 아빠가 말한 거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돼.”
“알았어. 일찍 와!”
“그래.”
숨을 한 번 커다랗게 들이마신 백면호리는 요정을 뒤로 한 채 걸음을 옮겼다.
전에 비할 바 없이 비장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