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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88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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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188화

은천검제

제188화

 

은천문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다.

언제 출입구가 열릴지,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길이 없는 상태에서 임운령이 펼쳐주는 은천수호검을 익히는 데 최선을 다했다.

누구나 차기라 예상했던 진무린이 실제 문주의 직에 올랐고, 은천문의 숙원이던 등룡창천을 대성했으며, 벽계의 고수들을 상대로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참이었다.

제자들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은천수호검을 익혔고, 언제가 될지 모르나 진무린이 은천령을 발령할 순간에 대비했다.

물론 세상사가 다 그런 것처럼 불만을 품은 사람이 한둘은 있기 마련이어서 은천문에도 표정이 좋지 못한 인물이 분명히 있었다.

“늘 자유롭게 살던 이 몸을 가둬두는 게 말이 되느냐!”

점심을 마친 파천신군은 오늘도 편치 않은 얼굴로 불평을 털어놓았다.

“가두긴 누가 가둬요? 지금은 어디 가시라고 해도 문제 아니에요? 완치될 때까지는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되죠.”

꿩 잡는 게 매라고 양소소의 날카로운 지적이 떨어지고서야 파천신군의 불평이 잠시 멈췄다.

“외조모의 상태도 보셔야죠.”

“누가 뭐라냐.”

입이 틀어막힌 파천신군이 수염을 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나저나 너는 어쩔 참이냐? 지닌 영약을 모두 그 아이에게 먹였으니 오는 가을에 대한 대책은 있어?”

“여름이 되면 문주와 의논할 참이에요.”

뒷짐을 진 파천신군이 흘기는 것처럼 양소소를 보았다.

“영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저 사람과 가던 길이었다. 앞으로 두 달을 기다려주겠지만, 그 이상 시간을 끈다면 은천문의 진법을 부수는 한이 있어도 나는 길을 나설 게다.”

“그전에 끝날 거예요.”

“어찌 장담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목숨이 달린 일을 왜 그리 쉽게 생각하냐고?”

파천신군의 질책에 발끈할 줄 알았던 양소소가 애잔한 미소를 그려냈다.

“뭐냐, 그 웃음은?”

“고마워요, 외조부.”

차라리 거친 말을 퍼부었다면 적응했을 파천신군이 눈을 껌벅이며 양소소를 보았다.

“지난 세월 영약을 구하기 위해 암벽에서 홀로 지내신 것도 고맙고, 본문의 위기에 달려와 주신 것도 고맙고, 외조모와 강호 유람을 핑계로 영물을 찾아다닌 것도 고마워요.”

“너 혹시 몸에 열이 심하게 나거나 헛것이 보이거나 정신이 혼미하거나 그런 거냐?”

“외조부!”

양소소가 앙칼지게 부른 다음이었다.

양소소가 먼저 웃었고, 파천신군이 비슷하게 따라 웃었다.

“그렇게 말해주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본문에 들어와 있어 그런 모양이에요. 외조부께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파천신군은 입을 내밀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세요?”

“외조모를 들여다봐야지. 그렇더라도 기억해라. 아무리 네가 고운 얼굴로 부드러운 말을 내놓는다 해도 두 달이다. 그 안에 문을 열지 않으면 내가 진법을 부술 테니 그리 알아.”

투덜대며 빠져나간 파천신군의 뒷모습을 보며 양소소는 기가 막힌 미소를 그려냈다.

 

**

 

이안공자를 홀로 안은 백면호리는 힘겹게 귀혼곡에 당도했다.

바위를 두드리자 섭성이 나타나 진을 열어주었는데 진법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백면호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생이 많았소.”

“많았지. 많았어. 갈 때는 문주가 도움이라도 줬지. 유광에 다녀오자마자 홀로 공자를 챙기느라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

백면호리의 한탄 앞에서 이안공자는 두 개의 얼굴을 가렸던 커다란 갓을 벗었다.

“후우-.”

갓을 벗은 홀가분함, 모처럼 돌아온 귀혼곡의 정겨움을 이안공자는 긴 숨으로 표현했다.

“다른 일은 없었고?”

“정아 외에는 없었어요.”

“정아? 우리 정아가 왜?”

섭성은 대답 대신 이안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경공을 익힌다고 번쩍번쩍 뛰어다녀요. 지금은 저 이안애에 올라갔을 텐데 한 번씩 찾으려면 정말 힘들어요.”

섭성의 말에 백면호리는 고개를 번쩍 들어 이안애를 보았다. 그러나 경공만 특출나게 재능 있는 백면호리가 이안애에 올라선 요정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험.”

딸자식의 이야기에 힘을 얻은 백면호리가 무릎을 짚어가며 몸을 일으켰다.

“공자. 한마디 해도 되겠나.”

“무슨 말씀인데 그리 어렵게 시작하시오?”

섭성을 돌아본 백면호리가 이안공자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내 나이쯤 살아보면 말일세. 말하지 않아도 짐작 가는 것이 있지. 벽계니 구주니 깊은 내막을 나는 몰라. 그러나 자네에게 뭔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겠어.”

백면호리답지 않은 눈빛과 어투였다.

섭성이 눈치를 살폈고, 이안공자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진 대협은 삼보를 손에 넣고도 강호를 위해 그것을 내놓았지. 이쯤 되면 어떤 형태로든 결판이 나지 않겠나? 마른 장작을 쥐고 있을 때는 말이지. 모닥불을 붙일 때 내놓는 게 좋아. 불이 활활 타오른 뒤에는 그다지 고맙지 않거든.”

말을 마친 백면호리는 더 볼 것도 없다는 투로 걸음을 옮겼다.

“살다가 백면호리의 조언을 받는 날이 있군.”

우안이 먼저 입을 열었고,

“틀린 말은 아니지.”

좌안이 대꾸를 내놓았다.

“어쩌면 삼보를 손에 넣는 순간에 이미 불이 붙은 것인지도 몰라. 지금 내놓아도 늦은 것일지도 모르고.”

좌안이 또다시 말을 내놓았는데 섭성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가자.”

“예, 공자.”

섭성의 궁금한 시선을 알았으련만, 이안공자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저녁이 어스름하게 내려앉는 시간에 진무린은 정도맹에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이미 정도맹을 둘러싼 기운을 익히 짐작했던 진무린은 멀리서 모여든 이들을 확인했다.

강호의 소문이 빠르다는 것을 이보다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일이 있을까.

부르지도 않았고, 소문을 낸 것도 아닌데 정도맹의 정문은 그야말로 사람의 물결이라 부를 상황이었고, 동문과 서문 또한 혹시나 하는 심정에 몰려든 이들로 가득했다.

내려앉은 어둠을 이용해 진무린은 담장 위를 날았고, 곧바로 맹주의 집무실 전각에 내려섰다.

“누구냐!”

“은천문의 문주 진무린이라 하오. 맹주를 뵐 테니 길을 열어주시오.”

진무린의 말에 도를 든 무인이 앞으로 나섰다.

“기억하십니까? 황가의 가신 황삼입니다.”

“물론입니다. 정도맹의 문이 모두 막히다시피 해서 담을 넘었으니 맹주께 안내를 부탁합니다.”

진무린을 익히 아는 황삼은 망설일 것 없이 맹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 사람아!”

진무린을 본 황종관의 반가움은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걸 몰라서 묻나? 어서 앉게.”

진무린에게 의자를 권한 황종관은 그 맞은편에 앉았다.

먼 길을 달려온 참이었다.

“사매와 사제는 도착했습니까?”

“거빈각의 별채에 머물고 있네. 문주와 섬도곤도 체력을 얼추 회복했고. 차부터 들게.”

급한 마음과 달리 황종관은 진무린에게 차를 권했고, 목을 축일 동안 기다리는 인내를 보였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되네.”

“구대문파와 세가의 후인들이 흉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흐음.”

황종관은 먼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런 뒤에 모려원에게 세 가지 보물을 보관하게 한 일부터 정문 성곽에서 있었던 일을 차례대로 전했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일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내 잘해오셨습니다.”

황종관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구대문파와 세가가 당한 것을 보며 깨달은 것이 많아. 저들이 은천문과 자네를 상대하느라 시선을 안 돌려서 그렇지, 작정하고 나섰다면 정도맹이나 구대문파는 아예 적수가 되지 않았던 게지.”

“맹주. 어려울 때일수록 기운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오해하지 말게. 무인 황종관은 어려움이나 두려움에 고개 숙이는 사람이 아닐세.”

진무린이 문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배려해서인지 황종관의 어투는 분명 이전과 달랐다.

“다른 것은 몰라도 벽계라는 적을 앞에 두고 내가 앞장서기 어렵다는 현실을 깨달았다는 것으로 받아주게.”

“정도맹이 있어야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하나로 모입니다. 세 가지 보물의 처리 역시 정도맹의 이름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승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무린의 말에 황종관은 그나마 여유를 찾은 모양으로 가벼운 웃음을 보였다.

“백팔나한을 앞세운 소림이 후계자를 잃었고, 검으로 적수가 없다던 무당마저 재능을 지키지 못했지. 이런 현실에서 대안을 만들어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러니 자네가 맡아주게.”

진무린은 황종관의 말뜻을 당장 이해하지 못했다.

맹주의 직을 넘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고,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를 비롯한 정도맹의 지휘권을 넘겨받는 것도 황종관이 홀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기 어렵습니다.”

“우리 둘이 결정하세.”

눈가를 좁힌 진무린을 향해 황종관이 바로 말을 이었다.

“절차를 따지기 좋아하는 장로들을 두고 자네를 내세우면 분명 말이 나올 테지. 그러니 자네가 나를 부리게.”

“맹주?”

“삼보의 처리부터 벽계를 상대할 방법까지 자네의 결정과 지시를 내가 따르지.”

황종관은 이미 결심한 눈치였다.

“마교의 교주조차 목숨을 내걸고 자네를 따르는 마당인데 정도맹의 맹주라는 직위에 연연해 위험을 자초한다면 이는 무인 황종관이 수치를 자초하는 일이지.”

황종관의 결심을 들은 진무린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맹주께서는 우선 삼보의 구관을 걸고 영웅대회를 개최하십시오.”

“시일이 꽤 걸릴 텐데?”

“저들의 이목을 끄는 일입니다.”

“계속해 보게.”

황종관의 재촉에 진무린은 다시 말을 이었다.

“벽계의 최고수라는 태상이 현재 부상 중입니다. 그와 제가 단둘이 마주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홀로 있을 리가 없잖은가?”

“사매와 사제의 도움을 받을 생각입니다.”

“고작 셋이서 벽계를 노린단 말인가?”

황종관의 질문에 진무린은 단단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흑사련을 상대할 때와 비슷합니다. 수괴인 마등을 잡고 나자 흑사련은 곧바로 힘을 잃었습니다. 태상을 해결하고 나면 남은 벽계의 인물들은 천천히 상대할 만합니다.”

“그 또한 방법이 있는가?”

“화산에 이미 벽계의 무공을 상대할 진중탈구검을 전해주고 오는 길입니다. 구대문파와 세가가 그것을 익힌다면 머지않아 태상을 제외한 인물들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태상이 부상을 회복해 지닌 힘을 모두 되찾게 된다면 그를 상대할 인물이 강호에는 없습니다.”

황종관은 희망을 붙들고 싶은 눈치였다.

“자네가 이미 그를 상대했잖은가?”

“대신 도움을 주던 교주가 죽음 직전까지 몰려 의식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진무린은 찻잔을 들어 식어버린 차를 천천히 넘겼다.

“전중방에 진법이 있다 하니 저들의 눈에 띄지 않게 확인할 생각이고, 통로를 확보한다면 사매, 사제와 함께 벽계를 공략할 계획입니다. 맹주께서는 그때까지 저들의 눈을 가려주십시오.”

“자네와 사매가 이곳에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 가장 좋겠군.”

“세 가지 보물을 걸고 영웅대회를 개최하십시오. 또한, 진중탈구검을 구대문파와 세가에 전해주십시오. 저들은 분명 그것들을 막고자 분주할 것입니다. 그때 저는 통로를 확보하겠습니다.”

계획을 이해한 황종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계자를 잃은 문파와 세가일수록 진중탈구검을 얻고자 달려들 것이라 봅니다. 맹주께서는 이 기회에 그들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도록 움켜쥐시는 것이 좋습니다.”

깊은 숨을 내쉰 황종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려냈다.

“문주가 되었다더니 사람이 아예 바뀐 것처럼 보이는군. 그동안은 일부러 의견을 말하지 않았던 겐가?”

“상황이 급해진 탓에 그리 보일 뿐, 저는 늘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리되는가?”

진무린과 이야기를 마친 황종관은 훨씬 홀가분해진 얼굴이었다.

“큰 틀은 잡았으니 우선 자네는 사매와 시제를 만나며 잠시 쉬게. 나는 우선 구대문파에 보낼 전서를 준비함세.”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몸을 일으킨 진무린을 따라 황종관은 전각의 입구까지 함께 걸었다.

이 또한 이전과 다른 대우였다.

“진 문주를 거빈각의 별채로 모셔라.”

“예, 맹주.”

황가의 가신에게 지시를 내린 황종관은 진무린이 움직이고 나서도 전각 앞에 계속 서 있었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진무린의 어깨에 모든 책임을 걸쳐놓은 것이 미안해서이고, 다음으로는 이 강호에서 가장 강한 무인을 예우하는 의미에서 나온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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