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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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0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80화
은천검제
제180화
운기를 마친 모려원이 대청으로 나왔을 때, 맞은편 방에 들었던 종무헌과 운진은 아직 운기와 명상에서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혹시 몰라 들여다본 방에서 백면호리는 또 고슴도치가 된 양 전신에 침을 빼곡하게 꽂은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기다리면 나올 사람들이니까.
대청으로 나온 모려원은 정동추가 뿜어내는 마기를 알아차렸고, 가뜩이나 독해 보이는 인상에 화가 잔뜩 올라와 있음을 눈치챘다.
물론 모려원은 백면호리와 달라 정동추에게 거침이 없었다.
“무슨 일이세요?”
질문을 던진 그녀는 섬도곤에게 시선을 주었으나 제자인 그도 영문을 알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왜 그러고 계세요? 이 마기는 또 뭐고요?”
하늘을 노려보던 정동추가 모려원을 돌아보았다.
혹시 보물을 강탈하려고 이러나?
하마터면 모려원이 검을 뽑았을 정도로 정동추의 눈매와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매서웠다.
“너는 특별한 공력을 받았고, 그 영향 아래에 있었다. 굳이 추측하려 애쓸 것 없이 대사형이라는 진무린이 주었겠지. 공력의 반발이 없으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가 주는 기운은 물결과 같다. 너는 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와 같고. 진무린이 준 공력을 네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조만간 위험할 수 있다.”
살벌한 눈빛으로 전하는 묘한 가르침이었다.
눈매를 좁힌 모려원은 의아한 가운데서도 정동추의 말에 온통 신경을 집중했다.
“몸이 진무린의 기운을 요구하지. 스스로 그 공력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꿀을 탐하는 것처럼 계속 갈증을 느끼다가 결국 주화입마에 든다.”
“운기했을 때 기운이 일어남을 느꼈어요.”
“진무린과 있을 때 십성을 얻었다면 지금은 칠성 아래다. 네가 더 잘 알겠지?”
대꾸조차 못 할 정도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어설프게 중단전과 상단전을 열었다. 진무린은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그 정도로 충분했겠지. 그래서 너 역시 그렇게 깨달으리라 기대했을 테고.”
“자꾸 대사형의 이름을 언급하시는데요. 대사형은 오늘 새벽 문주의 직에 오르셨어요. 이제는 호칭에 주의해주세요.”
모려원이 당차게 요구를 내놓은 다음이었다.
날카롭게 눈매를 빛내던 정동추가 의미를 알기 어려운 옅은 웃음을 그려냈다.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 마천강기가 들끓었던 게지.”
“대사형과 함께하시겠다는 것 아니었어요?”
픽 웃은 정동추는 섬도곤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만약에 말이다. 내가 진무린, 아니 은천문의 새로운 문주를 살려낸다면 은천문은 반드시 내 제자를 위해 한번 힘을 실어다오.”
평소에 농을 잘하는 정동추였다.
그런데 그는 지금 고리눈의 끝을 치켜세워서 허튼소리가 아님을 확실히 내보였다.
“천서유기와 옥환을 이 아이에게 건네라.”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 걸까.
정동추가 지시했고, 거리의 상인에게서 산 노리개를 전하는 것처럼 섬도곤이 책자와 옥환을 모려원에게 내밀었다.
분위기에 밀려 두 가지를 받아든 모려원은 의미를 알려달라는 투로 시선을 들었다.
“이곳에서 일이 벌어진다면 내 제자 놈과 네 사제를 데리고 정도맹으로 달려라. 명심해라, 정도맹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돌아보지 말고 헛되이 힘을 쓰지 마라.”
“무슨 일인지 말씀을 해주셔야죠. 대사형께서도 이리 오고 계세요.”
“나중에 보면 알 게다. 너는 지금 들어가서 다시 운기를 해. 그것만이 유일한 살길이니 절대 중도에 멈추지 마라.”
“어떤 운기를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알아야 하죠.”
“중단전과 상단전에 담긴 진무린의 기운을 네 것으로 바꿔. 같은 기운이라고 여기는 모양인데 지금 너는 공력을 메울 방법이 진무린에게서 얻는 것 외에는 없다.”
그랬나?
고개를 갸웃했던 모려원이 반짝이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교주. 이곳에 달려오느라 공력을 모두 소모했었어요. 조금 전에 운기를 통해 회복했고요. 그것이 어떻게 대사형의 공력이라 하세요?”
“총명한 줄 알았더니 당황하면 길을 잃는구나. 칠성 아래의 공력으로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냐? 진무린이 곁에 없는데도 네가 원하는 검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고 자신하냐?”
또다시 ‘진무린’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데도 모려원은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정동추는 천서유기와 옥환을 맡긴 참이었다.
가짜를 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려원과 종무헌을 죽이면 죽였지, 정동추는 그런 야비한 수법을 쓸 사람은 아니었다.
“명심해라. 일이 벌어지면 내 제자 놈과 셋이서 정도맹으로 달려. 혹여 그곳에서 저놈을 핍박하거나 달려드는 놈들이 있다면 네가 앞을 막아주고.”
“제자 분을 해할 사람이 많지 않을 텐데요?”
“그것이 문제지. 저놈이 정도맹에서 구대문파 장로의 목이라도 뽑아봐라.”
그건 또 그렇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려원 앞에서 정동추가 또다시 의미를 알기 어려운 웃음을 픽 웃었다.
“들어가. 들어가서 운기해.”
그런 뒤에 모려원이 거부하기 어려운 지시를 내렸다.
어떤 이유인지, 왜 저리 다급해 하는지 알기 어려우나 무공에 관한 조언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다.
종무헌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싶었으나 모려원은 정동추의 의견대로 안쪽으로 움직였다.
“삼보를 함부로 내놓지 마라. 정도맹주도 믿지 말고.”
곁을 지나는 모려원에게 당부를 전한 정동추가 다시 시선을 하늘로 들었다.
더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투여서 모려원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
표충량의 발전은 화산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부에서는 백 년, 혹은 이백 년 만에 나온 기재라는 평가였는데 그때부터 은혼은 표충량의 수련장 출입을 금하였다.
굳이 그럴 필요 있냐는 생각을 모은 원로들과 장로들이 은혼을 찾았을 때였다.
“사형과 사제들 앞에서 늘 칭찬받는 것이 오히려 오만함을 만들까 염려하였습니다. 또한, 자칫 과한 소문이 밖으로 퍼지면 쓸데없는 관심이 몰릴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명심해 주십시오.”
방문한 원로와 장로들에게 은혼은 진심 가득한 당부를 전했다.
“장문인의 염려는 충분히 알았다. 그렇더라도 노파심에 당부하니 냉정한 태도로 일관했다가는 량아를 위축시키는 일이 없도록 장문인은 이 늙은이의 말을 명심해다오.”
“사백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량아는 등선한 청강 사제의 안배라고 믿는다. 나의 작은 도움이라도 필요하다면 언제고 편히 말해다오.”
“사백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청강의 사형이 되는 진강 진인이 은혼을 이해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인 장문인의 마음이 가장 기쁘고, 또 그만큼 근심도 크겠지. 화산의 미래를 보았으니 더 바랄 것이 있을까마는 그렇더라도 장문인이 올곧게 키워주게.”
표충량을 찾는 것이 최근 가장 행복한 일이라던 원로와 장로들이었다.
영특함은 기본이요, 멈추지 않는 노력, 거기에 진중한 성품마저 갖추었으니 글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자가 표충량이었다.
“이제 무슨 낙으로 하루를 보낼꼬.”
그런 표충량을 바라보는 재미로 지내왔던 원로들과 장로들의 안타까운 탄식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장문인이 외부의 시선을 염려하는 것은 그에 관한 어떤 소문이 있기 때문이냐?”
“아직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다행이구나. 혹여 그런 일이 있다면 이 늙은이를 가장 앞에 세워다오. 사제가 발굴한 화산의 미래를 위해 나설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없을 것이다.”
“사백의 말씀에 감사합니다.”
은혼이 양손을 맞잡아 인사를 올리며 원로들과 장로들이 몸을 일으켰다.
밖의 시선을 염려할 정도로 뛰어난 제자를 얻었으나 아직 영글지 않은 탓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혹여 교만해지지는 않을까?
속을 알 길은 없지만, 사질들을 대하는 표충량의 태도로 보아 그런 염려는 접어두어도 괜찮았다.
워낙 빠른 깨달음을 얻는 터라 혹시 벽을 만나지는 않을까?
마른 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아서 청강과 같은 고수가 없는 것이 아쉬울 뿐, 표충량은 정체된 적이 없었다.
위로는 어른을 어렵게 대하고, 아래로는 사질들의 무공을 살피는 일을 마다치 않으니 원로들 보기에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가.
원로들과 장로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 은혼은 몸을 일으켜 낙안봉으로 향했다.
표충량을 지켜보며 알았다.
발전이 빨라도 걱정, 안색이 조금만 이상해도 걱정,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당최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거라.
사부인 청강 진인은 제자 은혼을 보며 어떤 염려를 품었을까.
언젠가 강호를 돌아보고 돌아온 청강이 은혼을 조용하게 부른 적이 있었다.
아직 은혼이 장문인이 되기 한참 전의 일이었다.
“따라오너라.”
사부 청강은 어둑한 시간에 낙안봉으로 올랐다.
사위는 어둠에 싸였고, 어슴푸레한 하늘에 촘촘히 밝힌 별과 달빛이 그나마 화산을 밝히는 시간이었다.
꾸중할 일이 있는 줄 알았다.
특별하게 걸릴 일은 없으나 사부인 청강이 돌아왔을 때 누군가 은혼의 행동을 문제 삼았나 싶기도 했다.
주변을 돌아본 청강은 소매에서 기름이 꾸덕꾸덕 묻은 종이를 꺼내서 내밀었다.
“사천에서 파는 만두로 기름에 튀겼는데 맛이 특별하더구나. 욕심껏 주문한 탓에 남는 것이 있어 가져왔다. 다른 아이들이 보면 공연한 오해를 살 일이니 이곳에서 먹고 내려가자.”
제자인 은혼이 맛있게 먹기를 바라는 청강의 눈빛이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부의 그 마음이 고마워서 은혼은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기름 만두를 먹었다.
“배를 곯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부님. 저녁을 양껏 먹었는데도 워낙 맛이 있어 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은혼의 마음을 들여다본 모양으로 청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삼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사부님. 량아가 올바르게 클 수 있도록 살펴주십시오.’
표충량이 성장하면 할수록 은혼은 청강에 대한 그리움이 뼈에 사무쳤다.
**
운기에서 일어난 종무헌과 명상에서 깨어난 운진은 이안공자가 준비한 환약을 한 움큼씩 먹었다.
“백면호리가 그렇더니 두 분 역시 혈도에 무리가 심해 잠시 다스리는 것이 좋겠소.”
이미 침상에 누운 백면호리는 얼굴에만 침을 이십 개쯤 찔러놓아서 입조차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 와중에도 거짓말처럼 기력을 회복한 낯빛이었다.
“사저를 먼저 뵙고 오겠습니다.”
“모 소저는 다시 운기에 들었으니 치료를 마친 뒤에나 보실 것이오.”
모려원이 재차 운기에 들었다는 데다, 기력을 회복해야 한다니 어쩌겠나.
시키는 대로 침상에 누울 수밖에.
대략 반 시진을 보낸 뒤에야 종무헌, 운진, 백면호리는 침을 뽑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안공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다음이었다.
“진짜 신기하지? 피로가 싹 풀려.”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백면호리가 동의를 구하는 얼굴로 종무헌과 운진을 돌아보았다.
“교주가 말이지. 신경이 날카로워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생사대적을 준비하는 느낌이더라고. 조심하는 게 좋아.”
상체를 기울인 백면호리는 침을 맞는 동안 들었던 교주와 모려원의 대화를 두 사람에게 전해주었다.
“천서유기와 옥환마저 맡겼단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일이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정도맹으로 달리라는 당부를 두 번이나 했어요.”
백면호리가 너스레를 떨 때 밖에서 모려원의 음성이 들렸다.
종무헌이 급히 일어섰고, 운진과 백면호리가 뒤를 따랐다.
“사저. 운기 중이셔서 인사를 제때 올리지 못했습니다.”
“고생했어, 사제. 두 분께서도 고생하셨어요.”
모려원은 종무헌과 두 사람을 다독인 뒤에 궁금한 시선을 들었다.
“다행히 유광록과 흑판을 가져왔습니다.”
“고생했어, 사제.”
네 사람이 반가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정동추는 굳은 것처럼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대사형께서 문주의 직에 오르셨다는 소식이 있었어.”
“정말입니까?”
모려원이 은천문의 소식을 전할 때였다.
내내 조용하던 정동추가 몸을 일으켰다.
당연하게 섬도곤을 포함한 다섯 명의 시선이 몸을 일으킨 정동추의 뒷모습에 꽂혔다.
무슨 일일까?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기운을 뿜어낸 정동추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려 모려원을 찾았다.
“내 말을 명심해라. 정도맹이다.”
눈썹은 이미 고리 형태로 구부러졌고, 그 아래 눈에서는 살기를 있는 대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섬도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 이 아이를 따라가. 수신호위에게 본교를 평정하라 지시해두었으니 일이 끝나면 너를 찾을 것이다. 본교를 강하게 만들되, 내실을 먼저 다져라. 그리고 반항하는 놈들의 목을 모조리 뽑아서 지금까지의 내 수고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해라.”
말을 마친 정동추는 걸음을 옮겨 마당으로 옮겼다.
정동추가 저 정도로 나설 만큼 강한 적이라면 기운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사제는 짐작 가는 것이 있어?’
‘아는 바가 없습니다.’
모려원과 종무헌은 시선을 마주치며 혹여 아는 바가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이었다.
정말이지 아무런 기운도 느끼지 못했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처럼 사람이 내려섰다.
“대사형!”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진무린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