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7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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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78화
은천검제
제178화
임운령과 전도위가 객당으로 돌아간 다음이었다.
진무린은 엄소동의 제단 앞에 석상처럼 앉아 시간을 보냈다.
임운령은 은천문의 문주요, 전도위는 대사부였다.
그런 두 사람이 하얗게 변한 낯빛으로 몸 곳곳이 찢기고 파인 채 피를 흘리는 것이 현재 은천문의 모습이자 현실이었다.
제자들의 모습은 또 어떤가.
지난번 혈투에서 많은 희생이 있었고, 오늘은 수련동에 몸을 숨겼다.
말하지 않았으나 제단 앞을 지키는 제자들의 표정에는 억울함과 분함, 자괴감이 서려 있었다.
여기에서 끝일까?
벽계는 절대 이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은천문만 없다면 벽계의 두 사람만 달려가도 소림이든, 무당이든, 얼마든지 무릎 꿇릴 무위였다. 그러니 저들이 진정 강호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은천문을 무너트리는 것이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서른으로 안 된다면 오십을 보내서라도 말이다.
진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단을 바라보았다.
향로의 뒤에서 엄소동은 머리만 왔다는 그의 친구와 함께 관에 담겼다.
제단 위에 놓인 위패와 그가 사용하던 검 한 자루가 엄소동의 죽음을 증명하는 전부였고, 얼마의 세월이 지나면 그마저 기억하는 이가 얼마 되지 않을 거다.
‘무엇을 위해 그 긴 시간을 숨어서 지내셨습니까?’
강호의 평화? 벽계의 야욕을 막는 일?
꼿꼿하게 서서 죽음을 맞는 순간에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진무린은 한숨을 내쉬며 그가 전해준 진중탈구검을 떠올렸다.
진중탈구검은 벽계의 야욕을 막아달라며 진무린과 은천문에게 그가 전한 당부였다.
입가에 머금은 피, 부러진 어깨, 가슴과 옆구리, 등 아래를 커다랗게 뚫은 상처까지, 어지간한 의지가 아니었다면 몸을 세우기조차 어려웠을 상태에서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진무린이 엄소동의 처참한 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지그시 깨물 때였다.
제자 네 명이 움직여 진무린의 뒤에 섰다.
“호위 섭중관이 신임 문주를 뵙습니다.”
뜻밖의 인사였다.
“문주께서 말씀이 있으셨냐?”
“운기에 드시기 전에 발표하셨습니다. 장로 분들의 임시 승인이 조금 전에 있은 터라 호위가 늦었습니다.”
이미 끝난 이야기고 이제와 임운령의 지시를 거부할 것도 아니었다.
진무린은 사제인 섭중관을 보며 고맙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린이 시선을 제단으로 돌린 다음이었다.
장로회의를 주관하는 일곱 명의 장로가 줄줄이 제단을 차린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몸을 일으킨 진무린 앞으로 곧장 다가왔다.
“장로 진구용이 신임 문주를 뵙소.”
“부족한 제자가 버거운 자리를 맡았습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포권을 하는 장로에게 진무린은 양손을 맞잡고 공손하게 몸을 숙였다.
신임 문주에게 인사를 올리는 자리였다.
그러나 일련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라 누구도 축하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나마 진무린을 찾은 장로들 모두 이번 결정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훗날 나누기로 하세.”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이미 문주가 되었네. 본문을 대표하는 분이 장로를 찾아 인사하는 것은 스스로 본문의 위상을 깎는 일이라는 점을 명심하게.”
좋은 말로 진무린을 다독인 장로들이 돌아간 다음이었다.
장 노대가 힘겨운 얼굴로 진무린 앞에 나섰다.
‘얼마나 힘겨우십니까, 진 대협.’
그는 눈과 표정에 분명한 감정을 담은 채 양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암연의 장 노대가 문주를 뵙습니다.”
“노대의 헌신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부족한 이 사람을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문주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 사람은 예전과 같이 본문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장 노대가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으면 어린 시절 힘겨웠을 때처럼 그를 졸라 동산에 오르련만, 현실은 그런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수일 뒤에 뵙겠습니다.”
“문주께서는 편히 하십시오.”
눈빛으로 진무린을 다독인 장 노대가 제단을 나섰다.
홀로 남은 진무린은 엄소동의 제단을 말없이 바라본 뒤에 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따르는 네 명의 호위 앞에서 진무린은 이전에 희생된 제자들의 위령패를 세워둔 장소로 걸었다.
신임 문주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앞을 지키던 제자 둘이 이전과 다르게 극진한 태도로 진무린을 맞았다.
위령패 하나가 은천문의 제자 한 명의 희생을 의미한다.
벽계가 다시 온다면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를까.
묵묵하게 위령패를 살핀 진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제. 본문을 위해 죽는 일이 두렵다고 여긴 적이 있었냐?”
“제자 섭중관이 문주께 말씀드립니다. 제자는 천지신명께 맹세코 본문을 위해 나선 길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숨는 것보다는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것이 낫겠지?”
숨는 것이 굴욕적이라고 답을 하면 명을 내린 임운령을 비난하는 꼴이 된다.
“제자는 명에 따를 뿐입니다.”
임운령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섭중관은 적당한 답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위령패를 향해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벽계가 강한 것은 인정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제자들의 희생을 감수해가며 당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당장만 해도 그렇다.
교주 정동추는 당연히 천서유기를 얻었을 테고, 합락궁의 보양진서는 이미 모려원이 가지고 상등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유광에 달려간 종무헌이 걱정이었으나 백면호리와 운진이 달려간 마당이라 어떤 수단을 발휘하든 흑판을 가져오리라 믿는다.
그 세 가지 보물로 아홉 가지 관문을 열었다고 치자.
아홉 가지 관문을 찾아 아홉 명의 인재를 넣는 일 또한 쉽지 않아서 벽계가 그 일을 막아선다면 진무린 홀로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어쩌면 가장 멍청한 문주가 될지 모르겠다.”
진무린은 위패를 향해 말을 건넸다.
“전인 문주께서는 본문을 지키기 위해 힘쓰셨으나 나는 벽계를 부수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너희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겠다. 그곳에 지켜봐다오.”
위패를 향해 의지를 밝힌 진무린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누가 객당으로 가서 문주와 사부께서 일어나셨는지 확인해다오.”
“제자 명을 받습니다.”
가장 뒤에 있던 사제가 날 듯이 달려갔다가 얼마 걸리지 않아 돌아왔다.
“다섯 분 모두 운기를 마치시고, 탁자에 함께 계십니다.”
“고생했다.”
진무린은 그 길로 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자의 말대로 운기를 마친 다섯 명은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이 어쩐 일이야?”
“몸은 좀 어떠십니까?”
“내상도 그렇고, 아무래도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릴 모양이다.”
그나마 임운령과 전도위는 낯빛을 많이 회복한 상태였다. 양소소와 남굉모도 얼추 낯빛을 찾았는데 나탑사만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비록 내상을 어느 정도 다스렸다고 해도 다섯 명은 몸 곳곳에 천을 감아서 당분간 무공을 발휘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앉아.”
임운령의 권유에 진무린은 자리에 앉았다.
“의논드릴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냐?”
아무래도 은천문의 사람이 아닌 남굉모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걸린 모양이었다.
“이미 본문을 위해 애써주셨는데 내외할 것이 있겠습니까? 들어보시고 부족한 점을 메워주신다면 더할 수 없이 감사하겠습니다.”
진무린의 대꾸가 흡족한 모양으로 남굉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굉모를 살폈던 임운령이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문주가 의논할 내용이 무엇이냐?”
“허락하신다면 은천수호검을 제자들에게 전할까 합니다.”
답을 들은 임운령의 낯빛이 단박에 가라앉았다.
“그 검법의 의미를 알고 있지 않으냐?”
“문주의 안위를 위한 마지막 배려로 압니다.”
“너라면 은천수호검이 딱히 필요하지 않겠지. 그러나 누가 될지 모를 후임 문주는 경우가 다르지 않을까? 그가 몸을 지킬 최후의 비기를 빼앗는 것과 같아.”
“그 점에 관해 많이 고민했었습니다.”
진무린은 밤새 고민했던 점을 털어놓았다.
“위기를 넘겼다고 하나 벽계는 반드시 다시 본문을 찾으리라 봅니다. 이번보다 무공이 뛰어난 이들이 올 테고, 숫자 또한 더 많을 것입니다.”
반박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타당한 추론이어서 임운령은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삼보를 찾은 터라 구관을 열기 위해서라도 제자는 다시 강호로 나서야 합니다. 혹여 그런 상태에서 재차 습격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제자들이 희생될지 가늠하기도 어렵습니다.”
“벽계를 상대할 계획이라면 은천수호검보다 진중탈구검을 가르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니?”
“사고께 말씀드립니다. 제자는 은천수호검과 진중탈구검이 같은 결을 지닌 검법이라 여겼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익히기에 은천수호검이 월등히 수월하리라 판단했습니다.”
정말 그러냐는 의미의 시선들이 임운령에게 달려갔다.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은 했으나 결이 같다고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신임 문주와 제 무공의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솔직한 임운령의 답이 있은 뒤였다.
“저들의 행보로 보아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짧은 시간 동안 은천수호검을 제자들에게 가르친다고 벽계를 상대할 수 있다고 보느냐?”
이번 질문은 전도위가 내놓았다.
“방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은천수호검을 가르친 제자들을 꾸려 벽계를 공략할 생각입니다.”
남굉모가 멍한 눈으로 진무린을 보았다가 확인처럼 양소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워낙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라 다섯 명 모두 꽤 놀란 얼굴이었다.
“전중방에 있는 진법을 통해 벽계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은천수호검을 가르친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향해 벽계를 공략할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쩌고?”
참지 못한 남굉모가 질문을 던졌고,
“신임 문주는 제 몸에 진법을 설치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예 본문을 걸어 잠글 생각인 거지요.”
영리한 양소소가 진무린의 속을 읽은 것처럼 답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네가 바깥에 있어야 하잖냐? 몸도 성치 않은데 진법을 담은 채 떠돌면 영약 아니라 세상 없는 것을 먹어도 몸을 건사하지 못해.”
“문주를 보세요. 제 몸에 진법을 담는 계획이 아닐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진법을 누구 몸에 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과연 은천수호검을 익힌 제자들이 벽계를 감당할 수 있느냐를 먼저 따져봐야죠.”
현명한 양소소가 이리저리 튈 뻔한 대화의 줄기를 잡아주었다.
“네게 문주를 맡긴 것은 본문의 앞날을 정하라는 의미였다. 은천수호검을 가르치는 것 또한 문주가 결정할 일이다. 다만, 벽계를 치는 것은 장로회의를 거치는 것 하나와 은천령을 발동하는 것,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방법을 알려준 임운령이 나직하게 숨을 내쉴 때였다.
객당으로 제자 한 명이 들어왔다.
“장 노대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나를 말이냐?”
“그렇습니다.”
전갈을 들은 진무린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문주가 되면 일이 많다. 염려하지 말고 다녀오너라.”
“잠시 일어서겠습니다.”
예를 보인 진무린이 객당을 나선 다음이었다.
‘벽계를 공략할 생각을 하다니.’
그의 감정이 마치 글로 써놓은 것처럼 표정과 눈에 고스란히 올라와 있었다.
**
모려원은 해가 완연하게 떠오른 뒤에 민가에 도착했다.
소능산을 거쳐 지붕을 박찬 모려원이 마당에 내려선 직후였다.
“엄청나구나.”
정동추의 걸걸한 감탄이 모려원을 맞았다.
“은천문에 속한 이들의 발전이 본교의 마공을 넘어서니 도대체 무슨 수를 사용하는 게냐? 혹시 또 둘이서 뭔가를 나눈 게냐?”
“지금 엉뚱한 말씀을 하실 때인가요?”
“무인이 무공의 발전을 엉뚱한 말이라 표현하다니 은천문은 참으로 신비하구나. 그래. 엉뚱하지 않은 질문을 하마. 간 일은 어떻게 되었냐?”
“보양진서와 금편을 가져왔어요. 교주께서는요?”
“흥. 감히 내 능력을 의심한단 말이냐?”
답을 한 정동추가 뒤에 선 섬도곤을 고개로 가리켰다.
“기껏 달려와서 왜 그러고 있어? 그나저나 네 대사형은 어디 가고 혼자 왔냐?”
“본문으로 향했어요. 저 또한 가봐야 해요.”
“왜?”
모려원의 표정을 본 정동추가 눈매를 좁혔다.
“급한 일이에요.”
“벽계가 또 그곳을 노렸단 말이냐?”
상황을 통해 짐작하는 눈치여서 모려원은 아니란 말을 하지 않았다.
“흠. 그러니까 은천문에 급히 가야겠는데 내게 보물을 맡기기는 곤란하다, 그런 뜻이구나.”
이번에도 모려원은 답을 하지 못했다.
“정도문파란 것들은 왜 그리 의심이 많은지. 그리 내가 의심스럽다면 가지고 가면 되지 고민할 것이 무엇이냐.”
“만약 중간에서 벽계의 인물을 만나면요?”
“알아서 해라.”
벽계를 상대할 유일한 대책이자 강호의 세 가지 보물 중 하나를 처리하는 문제인데도 정동추는 아예 상관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모려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모려원이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