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76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76화
은천검제
제176화
조용히 다가온 청년이 말을 하지 않은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여서 운진은 잡아당기는 손을 따라 순순히 움직였다.
막말로 목숨을 담보하기 위해 잡혀 있는 몸이었다.
거칠게 대해도 항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청년은 이리저리 돌아가는 토굴을 안내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운진을 끌었다.
대략 백 보쯤 걷고 난 뒤였다.
토굴의 안쪽에서 너무도 그리운 빛이 보였다.
어둠에서 생활하는 이들답게 물속에 내리쬔 햇살처럼 결로 갈라진 빛살이 길게 늘어져 안을 비추었다.
“앉으세요.”
빛줄기 아래에 거대한 천을 깔아놓았고, 신의 계시를 받은 모양새로 붉은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관을 머리에 쓴 여인이 운진에게 자리를 권했다.
여인의 권유대로 운진은 토굴의 벽을 타고 일정한 높이로 쌓은 단에 자리했다.
“조금 전에 술법을 부리셨습니다.”
“알기 어려운 귀기가 서려 그것을 물리치고자 함이었소.”
“문주께서 술법을 부린 이후 토굴이 흔들렸어요. 귀기라는 것의 정체를 알아냈나요?”
운진은 먼저 토굴의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외람된 말씀이나 술법에 대항하는 반응으로 보아 유광에서 대접하는 요물이 아닌가 싶소.”
단조로운 관, 목에 길게 늘어진 목걸이, 황토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복장을 한 여인이 운진을 잠시 노려보았다.
“문주께서는 귀기라 하셨고, 요물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 그리 부르는 연유를 말씀해 주시지요.”
“노도가 보기에 저런 요물은 수시로 사람의 생을 갉아먹어야 존재하는 법, 필시 유광에는 기괴한 증상으로 정신을 잃거나 급작스럽게 죽는 아이들이 있었을 게요.”
여인은 좀 더 매섭게 운진을 노려보았을 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요물을 없애보려 했으나 그리하면 어떤 형태로든 유광에 영향을 미칠 터라 함부로 손을 쓰지 못했소. 함부로 나섰다면 미안하오.”
“혹여 요물이 있는 척 토굴을 흔들어 탈출하려는 계획인가요?”
여인의 날카로운 눈매를 향해 운진은 넉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밖에서 들으니 성주라 부르던데 노도가 그리 불러도 되겠소?”
“편할 대로 하시지요.”
“성주. 노도는 이미 죽었어도 할 말이 없는 몸이나 은천문 진무린 대협의 배려로 여태 이리 숨을 쉬고 있소. 진 대협이 바라는 것이 또 강호의 평화요, 혈사를 막는 일이라오. 이 늙은 목숨을 던져 도움 된다면 노도는 더 바랄 것이 없다오.”
운진의 음성은 성주를 다독이는 것처럼 나직하고 덤덤했다.
“모산은 원래 요물을 제압하기 위해 술법을 수련하는 곳이라오. 문주인 노도가 어찌 멀쩡한 사람의 생기를 잡아먹는 요물을 느끼고 모른 척하겠소?”
숨을 고른 운진은 바로 말을 이었다.
“또한, 저런 요물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생기라 그 점이 더욱 안타까워 나섰을 뿐이오.”
“우리가 요물을 대접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리 판단했는지 설명해보세요.”
“대개 요물들은 노도와 같은 도사를 만나면 도주를 하게 마련이오. 그런데도 이곳의 요물은 휴식을 방해했다고 땅을 흔들며 큰소리를 쳤으니 분명 그만한 대우를 받기 때문이라 여겼소.”
“우리는 땅이 흔들리는 것만 느꼈을 뿐, 누군가 다른 사람이 큰소리치는 것을 못 들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겠소.”
내내 냉정한 태도를 유지했던 성주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섬묘와 지추를 데려와.”
그런 뒤에 성주는 짧은 지시를 내렸다.
잠시 뒤였다.
성주와 운진이 앉은 중간 벽이 무너지며 여섯 명이 토굴 안으로 들어섰다.
유광의 사람들은 체격이 작았다. 그런데도 여섯 중 네 명은 단단한 몸과 매서운 눈빛을 지녀서 성주를 호위하는 수신호위로 보였다.
만약 운진이 성주에게 달려들거나 탈출하려 했다면 저들이 토굴을 뚫고 나와 손을 썼을 것이 분명했다.
네 명의 수신호위가 성주의 앞을 막아서자 가장 뒤에 들어선 두 명의 여인이 운진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열여섯, 일곱쯤 되는 두 명의 여인은 각자 얇은 천에 싸인 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리된 지 얼마나 되었소?”
“나흘 되었습니다. 두 아이 모두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며 혼절하더니 어제부터는 젖마저 거부한 채 의식을 찾지 못합니다.”
천에 싸인 아이들은 옅은 빛줄기에 보기에도 혈색이 파랗게 변해 죽음을 목전에 둔 형국이었다.
운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성주. 이 아이들을 위해 술법을 발휘하고자 하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노도가 술법을 부린 순간부터 지금껏 대접하던 요물과의 싸움을 피할 길이 없다오.”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에게 피해가 있나요?”
“지축이 흔들리거나 혼절하는 이가 속출할 수 있소. 또한, 노도가 토굴을 이동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면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오.”
“결국, 문주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군요.”
“그렇지 않소.”
비웃음 묻은 성주의 음성에 운진은 주저하지 않고 대꾸를 냈다.
“만약 이 두 아이를 살려내면 요물은 더한 것을 요구하게 된다오. 두 배의 숫자, 네 명의 아이가 바로 목숨을 잃을 텐데 어찌 그 사실을 알면서 성주와 이곳의 사람들을 속일 수 있겠소?”
성주는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노도가 목숨을 담보로 이곳에 있으니 더 맡길 것이 없소. 혹여 묘책이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테니 노도에게 어떤 금제라도 걸어주시오.”
운진의 요구에도 성주는 쉬 답을 내놓지 못했다.
특별한 묘책이 없는 눈치였다.
이미 목숨을 건 상황에서 술법을 부려 지상으로 나갈 것을 담보할 만한 것을 지니지 못한 점은 운진도 마찬가지였다.
어쩔까.
흥분한 요물이 생기를 당겨간 바람에 이미 낯빛이 파랗게 질린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기 답답한 운진이 갑갑한 심정을 숨에 담아 토해 낼 때였다.
“이부대공과 무인이 돌아왔습니다.”
높고 가느다란 음성이 토굴을 달려와 성주와 운진에게 들렸다.
“토굴을 여세요.”
성주가 지시가 떨어졌다.
부스스, 토굴 앞의 흙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더니 느닷없이 강렬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소매를 들어 앞을 가린 운진이 소매를 조심스럽게 내렸을 때 저 멀리에서 종무헌과 백면호리의 모습이 보였다.
두 명의 여인은 토굴의 벽에 바싹 붙여 몸을 숨겼고, 성주와 수신호위는 속눈썹을 길게 내려 빛을 가렸다.
신기하게 눈썹 위로 흙을 두텁게 쌓아 빛을 가리는 모양이었다.
“토황패를 가져왔나요?”
“뜻을 이루지 못했소!”
성주가 물었고, 터무니없이 당당한 음성으로 백면호리가 답했다.
운진에게 시선을 주었던 성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더 마주할 이유가 없군요. 이부대공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성주가 대화를 끝내는 순간이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겠소! 문주를 놓아주시오!”
종무헌의 음성이 유광 전체를 울리며 토굴 안으로 달려왔다.
“성주. 노도가 종 소협께 전하고자 하는 말이 있소.”
양손을 잡아 청을 한 운진은 종무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종 소협! 노도는 이미 진 대협의 대업을 위해 이 몸을 던졌소. 그러니 종 소협은 어서 가셔서 강호의 혈사를 막는 일에 힘을 쓰시오!”
간곡한 운진의 당부가 토굴을 나서 종무헌을 향해 달렸다.
“문주를 희생한 대가로 흑판을 가져가면 대사형께서 저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물을 찾는 것은 제가 맡은 임무입니다! 그러니 마지막을 책임지는 것도 저의 몫입니다!”
말을 마친 종무헌은 작정한 듯 걸음을 옮겼다.
“멈춰라!”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경고했고, 그 직후에 토굴 앞에 여러 개의 구덩이가 파였는데 종무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종 소협! 멈추시오!”
“문주!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문주를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대사형을 뵙거든 제가 마지막까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고 전해주십시오!”
종무헌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부스스스.
바로 발 앞의 흙이 무너지며 종무헌의 몸이 아래로 기울었다.
경공을 발휘하면 얼마든지 빠져나가련만, 종무헌은 아예 각오한 모양으로 구덩이에 빨려 들어갔다.
“종 소협!”
운진이 벌떡 일어선 순간이었다.
흐릿하게 변한 백면호리가 이미 허리까지 빠진 종무헌의 어깨를 잡아채 뒤로 훌쩍 날았다.
“무슨 짓이야! 죽고 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대사형과 나를 위해 나선 문주의 죽음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흑판을 돌려주면 되잖아!”
“강호를 지킬 유일한 길이라 들었습니다. 대사형께서 제게 맡겨주신 임무입니다.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백면호리가 버럭 지른 고함에 종무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운진은 급히 토굴 안쪽을 향해 몸을 돌린 뒤 성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성주. 요물과 싸우겠소. 요물이 지면으로 튀어 오르면 종 소협이 상대하면 된다오. 대신 청이 있소.”
“요물을 해치우는 조건으로 풀어달라는 건가요?”
“요물을 해치운 직후에 토굴을 닫아주시오. 그리고 종 소협이 이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주시오.”
성주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운진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 뒤에 노도를 벌하면 되지 않겠소? 내 기꺼이 목숨을 내놓으리다. 그러니 요물을 잡았다고 말하는 순간 토굴을 닫아주시오.”
절박하게 매달리는 운진을 성주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밖에 있는 무인이 술법을 아는 것 같지 않은데 어떻게 요물을 상대할 수 있죠?”
“노도가 그의 검에 힘을 싣겠소.”
성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진은 다시 종무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종 소협! 급한 청이 있으니 노도의 말을 들어주시오!”
이어 운진은 요물에 관한 이야기를 종무헌에게 전했다.
“검을 내시면 노도가 부적을 붙일게요. 요괴가 허공으로 솟을 때 형상이 보이게 할 테니 그때를 노려 반드시 제거해 주시오!”
“뭐야! 그렇게 하면 살려준다는 거요?”
뻔뻔한 백면호리의 질문에 운진은 잠시 틈을 준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요물을 상대하는 조건으로 나는 목숨을 연명할 수 있다오! 그러니 반드시 요물을 제거해 주시오!”
답을 건넨 운진은 고개를 안으로 돌렸다.
“성주께는 미안하나 이렇게 답하지 않으면 종 소협은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게요. 다시 말하지만, 요괴를 제거한 뒤에 토굴을 닫아주고, 이후에 노도를 벌하시오.”
말을 마친 운진은 부적 한 장을 꺼내 시선 앞으로 들었다.
“종 소협! 검을 내시오! 어린 생명을 구하는 일이 급하오!”
잠시 망설이던 종무헌이 검을 꺼내자 운진은 바로 부적을 앞으로 뿌렸다.
화르륵, 불길로 변한 부적이 종무헌의 검에 빨려 들어간 다음이었다.
“아이들을 내 뒤로 데려오시오.”
“문주의 말씀대로 해.”
운진이 거침없이 요구했고, 성주의 지시를 들은 여인 둘이 천으로 아이를 감싼 채 빠르게 움직였다.
가부좌로 앉은 운진은 부적 두 장을 꺼내 가슴 앞에 들고는 제법 길게 주문을 외웠다.
“가라!”
마침내 운진이 부적을 앞으로 뿌렸다.
불길로 변한 부적이 운진의 앞쪽 흙을 파고 들어간 다음이었다.
드드드드등!
지축이 커다랗게 흔들리며 흙가루가 비처럼 쏟아졌고,
“크아아-!”
유광의 사람들이 모두 들을 정도로 성난 음성이 황토색 땅을 뒤덮었다.
그 직후였다.
쿠우우.
토굴 앞의 흙이 분수처럼 솟구치며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종 소협!”
운진은 종무헌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다시 부적 두 장을 뿌렸다.
부적의 불길이 검은 연기를 휘감은 직후였다.
높다랗게 떠오른 종무헌이 연기를 향해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쉐에에에에엑!
허공을 가르는 검 소리가 요란한 다음이었다.
토굴 앞으로 양손에 가득 찰 정도의 검은 흙덩이 두 조각이 떨어졌다.
종무헌이 내려서 이쪽을 바라볼 때 운진은 급히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살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지금껏 파랗게 변해 죽기 직전이던 아이 둘이 삐죽이기 시작하더니 힘겨운 울음을 터트렸다.
유광의 풍습이겠으나 아이 엄마가 되기에 어려 보이는 여인 둘이 입을 틀어막으며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되었소. 아이들은 이제 무탈할 게요.”
신선을 마주한 듯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여인 둘을 다독인 운진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
“성주. 어서 흙을 내려 토굴을 닫아주시오.”
운진이 그 어느 때보다 간곡하게 성주에게 청을 넣었다.
“문주! 이제 근심이 해결되었다면 제가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유광은 들으시오! 원한다면 검을 맡기고 걸어갈 테니 나를 붙들고 문주를 놓아주시오!”
“성주! 제발 부탁이오! 요물을 처리한 공을 봐서라도 어서 토굴을 닫고 노도에게 벌을 주시오!”
“문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망설이는 백면호리에게 검을 내밀며 종무헌이 다시 소리치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겠으나 서로 죽겠다며 나서는 참이었다.
“성주!”
더구나 죽을 기회를 빼앗길까 다급한 사람처럼 운진이 간절하게 성주를 불렀다.
“성주! 신선께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아이를 안은 여인 둘은 운진의 처지가 애처로운 모양으로 성주에게 매달렸고, 그의 성품과 진심을 깨달은 수신호위조차 시선을 떨구는 참이었다.
물끄러미 운진을 바라보던 성주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문주는 길을 나서세요.”
그런 뒤에 놀라운 결정이 성주의 입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