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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70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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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170화

은천검제

제170화

 

함락궁이 사용하는 미약에 관해 익히 알고 있던 진무린이었다. 야릇한 향을 느끼기 무섭게 내공을 일으켰고, 몸에 담긴 향을 뱉었다.

“후-.”

진무린이 내공을 이용해 입으로 숨을 뱉어내자 앞에 있던 십여 명의 머리칼과 옷자락이 확연하게 휘날렸다.

“호호호. 진 대협께서 본녀를 농락하시는 건가요?”

미약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앞에 선 여인의 태도는 여유만만이었다.

진무린을 도발한 여인의 시선이 모려원에게 향하는 것을 보면 능히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모려원은 이미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매는 자리에 앉아 운기해라.”

“대사형.”

지시가 있었음에도 모려원은 촉촉하게 젖은 눈과 홍조를 띤 고개를 돌리며 진무린을 불렀다.

이제 어찌할 테냐?

오십여 명의 여인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가볍게 웃은 진무린은 오른손을 들어 모려원의 머리칼과 볼을 조심스럽게 쓸어주었다.

“사매. 이미 내 마음을 사매에게 보였다. 비록 죽을 길에 선다 할지라도 홀로 남아 고통받느니 함께 죽기를 맹세했고. 지금은 본문이 위태롭고, 문주와 사부, 사제들이 위험하다.”

미약에 휘말렸던 모려원의 이성이 그녀의 눈 안에 힘겹게 피어나고 있었다.

“내가 사매를 생각하는 마음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해와 달처럼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사매는 내 말에 따라 운기해.”

진무린의 눈을 또렷하게 바라보던 모려원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내공을 일으킨다고 하나 미약에 흔들린 마음을 다잡기가 그만큼 힘든 까닭이었다.

“어려움이 커 보이니 공력을 전해줄게.”

“아니에요, 대사형.”

아름다운 모려원의 얼굴에서 볼이 가볍게 움직였다.

의지를 지키기 위해 이를 깨문 모양이었다.

“합락궁의 미약 정도는 소매가 이겨내겠어요.”

총명함을 되찾아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빛으로 답을 한 모려원이 진무린의 옆에서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는 앞에 선 여인을 매섭게 노려본 뒤에 손을 다리에 얹고 눈을 감았다.

“무례하게 찾아온 점을 고려해 이번은 넘어가겠다. 다만, 못된 행동을 한 탓에 더 이상 존중은 없다. 사매가 일어서기 전에 궁주를 부르지 않는다면 직접 본궁으로 올라가겠다.”

혹여 운기하는 모려원에게 약을 놓을까 염려한 진무린은 말을 하는 동안 내공을 일으켰고, 지닌 기운을 감추지 않고 뿜어냈다.

후아아아악-.

바람이 부는 것처럼 오십여 명의 머리칼과 옷자락이 거세게 흔들렸고, 가장 앞에 있던 십여 명은 숨이 막히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참으로 무례하군요!”

비웃음을 토해낸 여인이 뒤에 선 오십여 명을 돌아본 뒤에 천천히 손을 들었다.

또다시 약을 쓰려는가.

진무린이 눈가를 좁히는 순간이었다.

투두둑.

여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앞섶을 뜯어내 가슴을 드러냈다.

투둑. 투두둑.

그와 동시에 뒤에 섰던 오십여 명이 역시 같은 모습으로 상의를 뜯어내고는 걸음을 바삐 옮겼다.

“호호호호-.”

요란한 몸동작으로 움직인 여인들이 일제히 요사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가슴을 매만지던 손이 배를 지나 사타구니를 스치듯 움직이고, 눈매는 약에 취한 듯 몽롱한데, 웃음에는 묘한 기운이 담겨 마음을 흔들었다.

전각을 발휘해 땅을 흔들면 좋겠으나 그리하면 운기에 든 모려원이 내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진무린은 가볍게 검을 꺼내 두 방향으로 그었다.

쉐에에에엑! 쉐에에엑!

검기가 바닥을 깊게 파자 진무린의 좌우로 두 줄기 선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경고한다. 경계를 넘는 자는 모조리 목을 베겠다.”

합락궁의 미혼진 따위 먹히지 않는다는 매서운 경고였다.

“차라리 목을 잘라서라도 이 뜨거운 몸을 식혀주세요!”

“호호호! 대협! 본녀의 목을 먼저 잘라주세요!”

그러나 섣불리 건드린 독사처럼 여인들은 아예 치마의 옆을 길게 찢었다.

“대협! 본녀의 몸이 어떤가요?”

현란한 몸짓으로 몸을 뒤틀 때마다 벌어진 치마 사이로 은밀한 부위가 얼핏얼핏 드러나고, 상체를 기울일 때마다 가슴이 고스란히 보이는 통에 시선을 두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자칫 방심하는 사이 저들이 다시 약을 쓸 수도 있었다.

거리를 좁히면 손을 쓴다.

진무린이 독하게 마음먹는 순간이었다.

“감히!”

운기에서 깨어난 모려원이 앉은 자세에서 그대로 솟구쳤다.

퍼러러럭!

팽이처럼 돌며 떨어진 모려원은 가장 가까이 있던 여인 넷의 머리를 연달아 걷어찼고, 내려서기 무섭게 검집을 휘둘러 다섯을 쓰러트렸다.

무공으로만 따져볼 때 여인들은 모려원의 적수가 아니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모려원은 잠깐 사이에 오십여 명의 여인을 모조리 쓰러트렸다.

퍼러럭!

그리고는 멋지게 몸을 비틀어 진무린의 곁에 내려섰다.

검집으로 때렸고, 발길과 손에 사정을 두어 죽이지는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여인들이 고통을 이기기 위해 애쓰는 얼굴로 모려원을 노려보았는데,

“너희 따위가 넘볼 분이 아니다.”

모려원은 자부심 가득 담긴 한 마디로 쓰러진 여인들을 꾸짖었다.

“본궁으로 가자.”

“예, 대사형.”

진무린은 보란 듯이 손을 내밀었고, 모려원이 기쁜 얼굴로 그 손을 잡았다.

퍼러러럭.

진무린이 발을 구르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의 모습이 산의 정상을 향해 솟구쳤다.

 

**

 

운기를 마친 종무헌은 운진, 백면호리와 함께 다시 길을 달렸다.

백면호리의 말대로 십여 리를 달려가자 바로 황야가 나타났고, 다시 오 리를 더 달린 뒤부터는 흙이 황토색으로 바뀌며 멀리 줄줄이 이어진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각쯤 달린 뒤였다.

종무헌 일행은 마침내 끝이 없는 것처럼 이어진 절벽 앞에 당도했다.

흙이 얼마나 고운지 바람이 불 때마다 치솟아 주변이 온통 황토색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푸후. 이놈의 땅은 변함이 없어.”

백면호리가 불평을 털어놓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가지 그의 말과 다른 점도 있었는데 앞에 놓인 절벽 그 어느 곳에서도 토굴은 보이지 않았다.

“토굴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재촉하지 않아도 잠시만 기다리면 바로 아실 거요.”

백면호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부스스스.

절벽의 앞이 무너지는 것처럼 흙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바람에 날린 흙가루가 주변을 온통 붉게 물들인 뒤, 놀랍게도 절벽에 촘촘하게 박힌 것처럼 토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지. 이래야 유광이지.”

머리칼과 눈썹, 수염에 온통 붉은 흙가루를 뒤집어쓴 백면호리가 혼잣말을 터트렸는데 종무헌과 운진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운진이 나직하게 숨을 토해냈다.

끝없이 이어진 절벽과 그곳에 촘촘히 박힌 토굴들이 주는 위압감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목적을 말해야지.”

백면호리의 답을 들은 종무헌이 절벽을 둘러본 뒤에 내공을 가득 담아 입을 열었다.

“용무가 있어 왔소! 유광의 주인을 뵙고자 합니다!”

종무헌의 음성이 우르릉 울리며 흙가루가 쏟아졌고, 첩첩이 이어진 절벽들 틈에서 메아리가 연달아 울려 나왔다.

대꾸는 한참 뒤에 있었다.

“어디에서 오신 분이기에 본성을 번거롭게 하는가?”

짐작하지 못했을 정도로 높고 가느다란 남성의 음성이었다.

“은천문에서 온 종무헌이라 합니다! 성주를 뵙고자 합니다!”

또다시 내공을 가득 담아 종무헌이 답을 건네자 흙가루가 이전과 같이 떨어져 내렸고, 절벽들은 오래도록 메아리를 토해냈다.

“이제 어떻게 되오?”

궁금한 얼굴로 운진이 질문을 넣었고,

“저들이 판단하는 대로 결정 나지요. 불쑥 토굴이 사라질 수도 있고, 누군가 나올 수도 있는데 아무튼 저들이 결정할 문제요.”

백면호리가 답을 한 다음이었다.

“본성은 우환이 있어 외부인과 교류하기 어렵다!”

다시 또 얇은 음성의 대꾸가 있었다.

“종 소협! 우환이 뭔지 돕겠다고 말해. 얼른! 토굴이 닫히면 앞으로 저들을 절대 못 봐!”

“우환이라 들었소! 지닌 무공이 부족할지 모르나 도울 방법이 있다면 나서겠소!”

백면호리의 말에 따라 종무헌이 급하게 말을 전했다.

대꾸는 또 한참이나 없었다.

“의논 중인 거지. 어떻게 할지 결정하고 나면 답도 없이 스르륵 토굴이 닫히는 거고, 아니면 누군가 나타날 거야.”

말을 마친 백면호리가 종무헌을 돌아보고는 급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절대 뛰어들면 안 돼. 절대 안 돼! 절대로!”

눈썹이 치켜 올라간 데다 눈마저 부릅뜬 종무헌은 당장에라도 토굴을 향해 몸을 날릴 것처럼 보였다.

“토굴이 닫히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사형이 내리신 지시를 이행해야 합니다.”

“이행하는 걸 누가 뭐라나? 헛되이 죽으니까 그렇지. 헛된 죽음으로 끝나면 지시한 진 대협의 심정이 어떻겠어? 거기에 시체조차 못 찾아봐. 아마 진 대협 성격에 이곳을 다 무너트려서라도 찾겠다고 나설걸?”

백면호리의 조언이 먹혔는지 종무헌은 긴 숨을 내쉰 뒤에 볼을 씰룩였다.

“참으로 답답하구려.”

“이러니 삼보가 있는 것을 알아도 함부로 못 달려들지.”

“그런데 백면호리께서는 어떻게 이런 속에서 토황패를 찾으셨소?”

별것 아닌 질문이었다.

그런데도 백면호리는 바로 답을 못하고 얼버무렸다.

운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가장 아래에 있는 토굴에서 다섯 명이 앞으로 나섰다.

“세 분은 이리 오시오!”

종무헌은 이제야 알았다.

내공을 담지 않아도 가느다랗고 높게 말하는 남자의 음성이 절벽의 메아리를 타고 길고 멀리 퍼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앞으로 가겠습니다.”

종무헌의 말에 따라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세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흙이 부드러워 발이 밀려나는 느낌이었는데 그 속에서도 종무헌과 백면호리는 발자국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나마 운진의 발자국도 바람이 불면서 바로 사라져서 세 사람이 걸었던 흔적은 아예 남지 않았다.

토굴 앞에 도착한 세 사람은 앞에 있는 다섯 명을 살폈다.

햇살이 힘겨운 모양이었다.

황토색 옷에 비슷한 색상의 천을 커다랗게 머리에 둘러서 다섯 명의 인상을 제대로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처음 뵙는 분들이 본성을 돕겠다고 하셨어요.”

다섯 명 중 가운데 있는 사람의 음성은 뜻밖에도 여성이었다.

중년이 분명한 여성은 종무헌과 백면호리, 운진을 차례로 돌아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도움을 주고자 찾으신 것은 아닐 테고, 본성에 원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알려주세요.”

백면호리가 마른침을 삼킬 때였다.

“강호가 혈사에 휩싸였습니다. 그를 막기 위해 유광이 지닌 보물이 필요합니다.”

종무헌이 분명하게 답을 건넸다.

“그렇군요.”

의미를 알기 어려운 대꾸였다.

“우환을 알려주십시오.”

“본성은 아픈 사연이 있어요. 아무리 소협께서 우환을 해결해 준다 해도 보물을 드릴 수는 없어요.”

백면호리가 긴장한 눈으로 여인을 살필 때였다.

부스스스스!

절벽 위에서 걷잡을 수 없이 많은 흙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안쪽에 있는 다섯 명의 모습이 아련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이익!”

종무헌이 흙더미 안으로 뛰어들었다.

“야! 이……!”

백면호리가 놀라 소리를 지를 때,

“하아앗!”

운진이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랗게 기합을 지르며 부적을 휘날렸다.

화르륵! 화르르륵!

불길로 변한 부적이 쏟아지는 흙가루를 헤치고 날아가서는 거대한 이무기로 변했다.

콰드득! 콰드드득!

절벽이 못마땅한 것처럼 두 마리의 이무기가 요동쳤고, 그럴 때마다 흙무더기가 바깥으로 튀었다.

“종 소협! 나와! 나오라고!”

백면호리가 고함을 지를 때, 이무기를 묻어버리겠다는 것처럼 토굴 자체가 무너져 내렸다.

“야! 나오라고!”

부스스스스슷!

흙더미의 양은 엄청나서 이무기들마저 삼켰다.

콰득! 콰드득!

마지막 이무기의 몸부림에 흙더미가 재차 쏟아지는 순간이었다.

파하악!

절벽을 뚫고 종무헌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직후에 두 마리의 이무기를 흙더미가 뒤덮어서 흔적마저 감춰 버렸다.

“이 사람아!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

타박하는 백면호리를 향해 종무헌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이걸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

종무헌의 손에 들린 물건을 확인한 백면호리가 화들짝 놀란 질문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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