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6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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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0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69화
은천검제
제169화
날이 환하게 밝아 해가 완연하게 떠올랐을 때였다.
산과 산이 첩첩이 둘러싸고, 발아래 구름이 놓인 것처럼 운무가 자욱한 곳에 도착한 진무린은 그제야 걸음을 멈추었다.
“저곳인가요?”
운무에 싸인 맞은편 절벽을 보며 모려원이 물었고, 진무린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깎아지른 절벽의 중간을 편평하게 자른 것처럼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 전각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오르는 길 역시 절벽에 뜨문뜨문 꽂아 넣은 통나무가 전부여서 어지간한 경공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아예 올라설 엄두조차 나지 않는 구조였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개방적이네요.”
“저것은 본문의 외성과 같다. 절벽을 넘어서면 산의 정상이 움푹 파인 곳이 있다 들었는데 그곳이 내성이며, 진짜 합락궁이라 할 수 있지.”
“보기에는 저렇게 아름다운데…….”
기암괴석과 그 틈에서 자리 잡은 나무들, 전각과 건물, 모든 것을 감싸는 운무까지, 합락궁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여인의 세상인 합락궁은 임신을 위해 일정 기간 강호에 나오는 풍습이 있었고,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절벽 아래로 던지는 끔찍한 규율을 지녔다.
“운기를 한 뒤에 찾아가자. 혹여 물이나 음식을 주더라도 절대 입에 넣어서는 안 된다.”
“그건 또 왜 그런가요? 본문에서 읽은 합락궁에 관한 서적에 그런 내용은 없었어요.”
“합락궁은 미약을 통해 방문자의 이성을 잃게 하고, 그 뒤에 몸과 정신을 지배하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고 들었다. 남자의 경우에는 저들이 펼치는 미환진을 견디기 어렵다고도 들었고.”
“명심할게요, 대사형.”
대화를 마친 진무린과 모려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깊은 산이었고, 암석이 많아서 앉을 자리는 충분했다. 또한, 거대한 바위의 뒤에 앉자 합락궁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몸을 감출 수도 있었다.
건량을 나눠 먹은 두 사람은 곧바로 달려오느라 소모한 공력을 채우기 위해 운기에 들었다.
**
신도황은 벽계에 소속된 백여 명의 행적을 일일이 뒤졌고, 그 끝에서 우득보를 찾아냈다.
대전을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이루어진 건물 중 우득보가 거처하는 곳에 들어선 신도황은 함께 온 이들과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가 집무실에 있던 그를 둘러쌌다.
“기별도 없이 이리 방문하시니 특별한 연유가 있습니까?”
집무실의 중앙에 앉아 있던 우득보는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이었다.
“자네가 사방신의 출정 뒤에 급한 걸음을 했더군. 변명할 생각 말게. 그 당시에 자네 외에는 외부로 나간 사람이 없네.”
은천문으로 향하기 위해 추려놓은 서른 명이 냉정한 얼굴로 둘러싸고 있어서 우득보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보였다.
“솔직히 말하게.”
신도황의 점잖은 추궁에 우득보는 몸을 일으키며 씁쓸한 웃음을 그려냈다.
“알고 오셨으면 그만이지 굳이 답을 들어서 무엇에 쓰려 하시오?”
“구주를 위해 일했던가?”
“편한 대로 생각하시오.”
가라앉은 눈을 돌린 우득보는 둘러싼 서른 명을 쭉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신 장보께서 임무를 맡으신 모양이오?”
“자네를 찾느라 이틀을 허비했으니 서둘러야 하지.”
“그렇구려. 내 편한 대로 하자면 자결로 끝내고 싶으나 밖에서 애쓸 친구를 외면할 수 없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참이오. 그 점을 이해해주시오.”
말을 마친 우득보가 늘어트린 오른손을 흔들자 소매에서 중검이 흘러나와 그의 손바닥에 걸렸다.
그 직후에 서른 명이 기운을 뿜어냈고,
쉐에엑! 쉐엑! 쉐에엑!
삽시간에 몸을 돌린 우득보는 뒤편에 서 있는 인물을 향해 검을 뿌렸다.
카앙! 캉! 카앙!
급하게 우득보의 검을 막은 벽계의 인물 둘이 힘을 감당하지 못해 밀려났고,
쉑! 쉐에엑! 쉑!
멈추지 않은 우득보의 검이 오른편에 있던 이의 어깨를 갈랐다.
기회를 잡은 우득보의 검이 왼편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카앙! 캉!
왼편에 있던 벽계의 인물이 그의 검을 막으며 밀려났고,
쉬이익! 퍼억!
그 직후에 신도황의 손이 우득보의 옆구리에 손목까지 박혔다.
“푸훅.”
피를 뿜어낸 우득보가 고개를 돌려 신도황을 돌아보았다.
“서른 명의 기운을 뚫고 어깨를 가르다니, 진중탈구검은 과연 무섭군.”
답을 하지 못하는 대신 우득보는 피를 가득 머금은 입술을 비틀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없네. 이제 그만 끝내세.”
신도황이 손을 뽑자 휘청했던 우득보가 뻣뻣하게 바닥에 엎어졌다.
“이자의 목을 잘라라. 태상께 보고하고 바로 은천문으로 향하겠다.”
지시를 마친 신도황은 소매에서 수건을 꺼내 오른손을 닦았다.
**
은천문은 두 가지 준비를 어느 정도 갖추었다.
먼저 뿔피리 소리가 울리면 제자들이 노약자를 보호해 수련동으로 달리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기다리던 양소소가 흙을 덮은 뒤에 진법을 발동하는 일이었다.
다음은 은천문의 입구를 지키기 위한 준비로 엄소동은 두 번에 걸쳐 진중탈구검의 묘리를 임운령, 전도위, 남굉모, 나탑사, 양소소에게 전해주었다.
“진법을 파헤치는 순간이 가장 확실한 기회일세.”
엄소동의 지시에 따라 일행은 검을 들고 진법의 안에서 자세를 잡았다.
진법의 중간에 걸쳐 선 엄소동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양소소가 오른편에 있는 기물을 움직이자 안쪽에 서 있던 임운령, 전도위, 남굉모, 나탑사가 일제히 뛰어나왔다.
쉐에에에에에엑!
네 사람이 각자 다른 초식을 펼치는데 소리가 하나로 들릴 만큼 날카롭고 매섭게 검이 떨어졌다. 게다가 모두 중앙을 집중해서 노렸다.
이후 네 사람은 신묘한 보법을 이용해 등을 맞대고 바깥을 향해 둥그렇게 원을 그렸다.
“훌륭하네.”
네 사람의 합공을 본 엄소동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준비가 끝났다.
“방금 공격으로 몇 명이나 쓰러트린다고 보세요?”
“쓰러트리기는 어려울 테고, 넷에서 다섯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으리라 기대하네.”
“여섯이 와서 모두 당했으니 최소 스물은 오겠지요?”
“그 정도겠지.”
“그나마 바로 달려올 줄 알았더니 이렇게 여유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질문의 끝에서 양소소가 안도하는 음성으로 의견을 냈고,
“이유가 있지 않겠나.”
의미를 알기 어려운 대꾸를 쏟아낸 엄소동은 애달픈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종무헌의 질주는 무서웠다.
그는 짧게 두 번 휴식한 것을 제외하고는 밤새 달려서 아침나절에야 걸음을 멈추었다.
“이 지독한…….”
그나마 백면호리가 멈추라고 악을 쓴 덕분이었지 그대로 두었으면 아직 달리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라니? 죽고 싶은가? 아니지. 자네는 죽을 사람이 아니니 문주와 나를 죽일 셈인가? 이 숲을 벗어나면 바로 유광이야. 붉은색 황야가 쭉 이어지고 그 끝에 절벽이 벌떡 서 있는 유광. 알고 있었나?”
“유광에 들러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 급한 종무헌의 눈썹이 올라가자 백면호리가 뜨끔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좀 쉬면서 운기라도 하고 나서는 게 현명하다, 뭐 그런 말일세.”
듣고 보니 백면호리의 말이 백번 옳았다.
“제가 식견이 부족해 생각이 짧았습니다. 현명한 길을 알려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이 사람이? 우리 사이에 무슨 현명이고, 감사야. 그러지 말고 얼른 운기를 좀 하게. 문주도 어여 명상하시고.”
손을 뻗어 나무 아래를 가리켰던 백면호리가 그 사이에 표정을 바꾸었다.
“아니지. 먼저 먹고 합시다. 먹고.”
그는 객잔에서 챙긴 만두와 눌러놓은 밥을 꺼내 앞에 놓았다.
“유광을 상대하다가 밥 먹겠다고 물러날 것도 아니고, 얼른 듭시다.”
사실 세 사람 중에 가장 핼쑥한 이가 백면호리였다. 내공을 사용하기는 하나 운기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보충되는 특이한 방식이라 딱히 회복할 방법도 없었다.
“유광에 도착해 부르면 나오기는 하오?”
“절벽 앞에 서기만 해도 토굴에서 사람들이 죄 나옵니다. 사투리가 심해서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하지요.”
운진의 질문을 받은 백면호리가 우물거리는 입으로 답을 내놓았다.
“이봐, 종 소협. 함부로 저들을 거슬러서는 안 돼요. 자칫 저들이 토굴 속으로 몸을 감추면 전혀 방법이 없어. 알겠나?”
“진 대협께서는 노도의 술법을 이용하라 하셨소. 그것이 노도가 종 소협을 따라 이곳에 온 이유요.”
“어떤 술법을 부리려고 그러시나?”
궁금한 얼굴로 백면호리가 눈을 초롱초롱 떴다.
“자세한 것은 보아야 알겠지만, 불과 바람, 운무를 이용하면 동굴의 연결 부위를 정확하게 알아내지 않을까 싶소. 만약 저들이 토굴에 몸을 감춘다면 독한 연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소.”
“오호라!”
백면호리는 신기한 모양으로 눈을 끔벅였다.
“다 먹었으니 잠시 운기를 하겠습니다.”
“염려 말고 하게. 혹여 이상한 기척이 느껴지면 불러도 되지?”
“기척을 느끼면 제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거야 뭐.”
대화를 끝으로 종무헌과 운진은 가부좌로 각각 운기와 명상에 들었다.
“젊은 사람이 만두 반 개가 뭐야?”
눈을 감은 종무헌을 향해 백면호리가 혼잣말을 뱉고는 혀를 끌끌 찼다.
그가 왜 모르겠나.
배가 불러 혹여 시간을 끌게 될 것을 염려한 종무헌의 간절하고 다급한 마음을 말이다.
**
운기를 마친 진무린은 의아한 얼굴로 모려원을 돌아보았다.
매번 느끼지만, 마공이 아닌 다음에야 운기 한 번에 이토록 공력이 증진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공력의 증진이 등룡창천의 대성을 반드시 끌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최소한 깨달음을 얻을 기반을 단단하게 하는 것만은 분명해서 놀라운 반면에 한편으로는 무척 기쁜 일이었다.
호흡을 두 번쯤 고르고 났을 때 모려원이 눈을 떴다.
밤새 달린 피로는 물론이요, 잠이 부족해 느끼던 힘겨움마저 모두 털어낸 모양으로 눈빛이 참으로 맑았다.
숨을 길게 내쉰 모려원이 느낀 바가 있는 것처럼 눈빛을 반짝이며 진무린을 보았다.
“소매의 공력이 또 늘었어요.”
“공력이 늘어서 해가 될 것이 없으니 의논은 뒤에 하기로 하자.”
합락궁을 앞에 두고 급하지 않은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까닭에 나온 말이었다.
“기운을 차린 것 같으니 일어날까?”
“예, 대사형.”
진무린은 모려원과 함께 일어나 몸을 가려주었던 바위 옆으로 움직였다.
해가 높이 떴고, 맑은 날인데도 운무는 여전히 합락궁을 감싸고 있었다.
단숨에 건너기는 어려운 거리였다.
모려원을 돌아본 진무린은 바위 앞으로 걸음을 내디뎌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이어 중간의 바위를 밟아 속도를 줄이며 내려갔다가 건너편 절벽에 박힌 나무를 향해 솟구쳤다.
진무린이 밟은 자리를 확인하는 것처럼 뒤따른 모려원이 곧바로 솟구쳐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간발의 차이로 전각과 건물이 늘어선 절벽의 중간에 도착했다.
편평한 공간은 멀리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어서 이안애의 다섯 배는 될 정도였다.
진무린과 모려원이 도착하기 무섭게 전각과 단층 목조 건물에서 여인들이 몰려나왔다.
‘합락궁이라 하더니.’
나온 여인들을 보며 진무린은 낯빛을 가라앉혔고, 모려원은 찌푸려지는 눈가를 감추려 애써 평온한 표정을 그려냈다.
“두 분은 어떤 연유로 본궁을 방문하셨나요?”
오십여 명의 여인들 앞에서 스물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진무린에게 질문을 건넸다.
상의는 가슴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얇은 천 하나만 걸쳤고, 치마 역시 조금 짙을 뿐이지 안이 거의 보이는 천박한 차림이었다.
“은천문에서 온 진무린이라 하고, 이쪽은 사매인 모려원이오. 청이 있어 궁주를 뵙고자 합니다.”
“은천문이라 하셨나요?”
“그렇소.”
“본궁은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특히 남자는 본궁에 머물 수 없어요. 그러니 진 대협께서는 본궁에서 내려가셔서 기다려주세요.”
복장에서부터 머리에 꽂은 옥잠사까지, 오십여 명의 여인들은 전혀 차이가 없었다.
“성함이 어찌 되시오?”
“말씀드렸듯이 본궁은 남자가 머물 수 없어요. 본녀의 미천한 이름 또한 옆에 계신 사매 분에게 알려드릴 테니 진 대협께서는 이만 내려가 주세요.”
요구를 건넨 여인이 왼팔을 들어 절벽에 박힌 나무를 가리키는 순간이었다.
훅, 하고 야릇한 향이 진무린의 코를 파고들었다.
모려원도 맡은 모양이었다.
기운을 일으키려는 것처럼 모려원이 숨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