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67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67화
은천검제
제167화
의논을 마친 임운령은 장로들과 함께 희생된 제자들을 기리는 제단을 만들었고, 전도위, 양소소와 함께 아침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마음 같으면야 위령제가 끝날 때까지 꼬박 자리를 지키련만, 언제 벽계가 다시 침입할지 모르는 것이 은천문의 현실이었다.
식사시간이 지나서야 일어선 세 사람은 엄소동을 초빙해 수련장으로 향했다.
벽계의 무공을 파훼하는 진중탈구검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먼저 검을 보게.”
엄소동은 진무린에게 보였던 진중탈구검의 초식을 느리게 한 번, 빠르게 한 번, 연속해서 두 번 보였다.
진무린은 진중탈구검이 은천수호검과 결이 같다고 했었다.
그 덕분에 익히기 수월하지 않을까 기대했던 임운령은 기가 막힌 심정에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아름답다는 말이 화려한 꽃에도 어울리지만, 미녀를 보며 떠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두 가지가 결이 같다고 느끼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임운령이 느끼기에 은천수호검과 진중탈구검은 꽃과 미녀처럼 확연하게 달랐는데 진무린은 그 안에 담긴 오묘한 변화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임운령과 진무린이 지닌 재능의 차이를 단적으로 증명해준 일이리라.
어쩌랴.
재능이 부족한 임운령, 전도위, 양소소는 진중탈구검의 기본을 익히는 데 한 시진을 훌쩍 보냈다.
“오후에 다시 한 번 한다면 기본식을 마치리라 보네. 은천문이 대단하다더니 이렇게나 빠르게 익힐 줄은 몰랐네.”
엄소동이 나름 만족한 얼굴로 검을 집어넣은 다음이었다.
“무린이는 얼마나 걸렸나요?”
양소소가 질문을 건넸고,
“그 아이는 시간이 필요 없었네. 본 자리에서 바로 익혔지.”
“내공의 변화를 보고 익혔다는 말씀이세요?”
질문의 끝에서 엄소동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당시에는 나 역시 놀랐네. 초식의 흐름을 보며 내공의 운용을 짐작하는 느낌이더군. 그 뒤에 내 앞에서 검을 내는데 기의 흐름에 나무랄 구석이 없었네.”
설명을 하던 엄소동은 임운령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진중탈구검과 흐름이 같은 검법을 익혔던 게지. 그렇지 않은가?”
“본문에 문주에게만 전해지는 검법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두 검법이 결이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럴 것 같았네.”
엄소동의 답을 끝으로 일행은 수련장의 끝으로 움직여 탁자에 자리했다.
궁금한 것이 많았다.
벽계와 구주의 근원은 무엇인지, 왜 이런 구도가 생성되었는지, 그리고 엄소동이 홀로 남은 이유는 무엇인지.
다만, 엄소동이 입을 열지 않는데 질문하기도 어려워서 일행은 각자 생각에 빠졌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자네의 지병은 중단전이 태생적으로 약한 데서 기인했으니 검진의 기운이 쏠리는 순간을 감당하기 어렵네. 검법을 익혔다 해도 양 소저는 검진에 포함될 수 없으니 이점을 반드시 지켜주게.”
생각을 깨는 것처럼 엄소동이 생각한 바를 무겁게 내놓았다.
그의 의견은 분명했다.
혹여라도 검진에 들어올 생각하지 마라.
지금 있는 세 사람, 엄소동, 임운령, 전도위 외에 반드시 다섯 명이 있어야 검진이 유지된다.
양소소가 침울하게 고개를 떨굴 때였다.
땡땡땡땡땡. 땡땡땡땡땡.
날카로운 종소리가 은천문을 깨웠다.
“벽계인가?”
“침입자라면 뿔피리 소리가 나야 합니다. 급한 호출이라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임운령과 전도위가 몸을 일으켜 단박에 수련장을 박차고 입구를 향해 달렸다.
**
오전의 중간에서 섬도곤이 마침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심할 텐데 보름 정도만 조심한다면 무탈하실 게요.”
“치료에 감사합니다.”
이안공자에게 인사를 전한 섬도곤은 고통스러우리란 조언을 무시하는 것처럼 씩씩하게 걸어 방을 나섰다.
대청에 앉아 있던 정동추는 섬도곤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인사드려라. 정도맹의 맹주 황종관 대협이시다. 이놈이 내 대제자요. 내 손에 죽지 않는다면 아마 다음 대 교주가 될 게요.”
“섬도곤이 맹주를 뵙습니다.”
“맹주 황종관일세.”
마교 교주가 제자이자 차기 교주를 소개하고, 무림맹주가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정도문파의 인사들이 보면 참으로 기가 찰 장면이었다.
“제자 놈이 일어났으니 나는 이만 유가장으로 가보리다. 연락을 위해 맹주께서는 이곳에 믿을 만한 수하를 한 명 두시오.”
“본가에서 온 가신 중 한 명을 전에 흑사련 지부로 사용하던 곳에 머물게 하겠소.”
“그 정도면 적당하겠지. 내 수하가 찾아갔을 때 무작정 칼질을 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말을 잘 전해주시오.”
몇 마디 말을 마친 정동추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 길로 문을 향해 걸었고, 짧게 손을 맞잡아 황종관에게 인사를 건넨 섬도곤은 당연하다는 투로 뒤를 따라서 두 사람은 바로 민가를 나섰다.
“반격의 서막이 열리는가.”
혼잣말을 흘린 황종관은 느긋한 표정으로 민가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후에 어떤 모습이 펼쳐질지 모른다.
진무린을 받치는 역할에 최선을 다한 뒤에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 황종관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있었다.
벽계가 마음만 먹는다면 진무린이 없는 틈에 정동추나 황종관을 얼마든지 제거할 텐데 어째서 이리 조용한가 하는 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황종관은 겸허한 심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소식을 전했으나 이토록 빠르게 도착하리라 기대하지 못했다.
입구로 달려간 임운령과 전도위는 평생에서 가장 반갑게 남굉모를 맞았다.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야? 혹시……?”
“사저는 무탈합니다. 다만, 본문에 위기가 있어 도움을 청하고자 뵙기를 청했습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오라가라 했다?”
남굉모의 눈매가 삐뚜름하게 틀어질 때였다.
“가가. 사정을 들어보신 뒤에 판단하세요.”
나탑사가 조곤조곤한 말로 남굉모를 다독였다.
괴팍한 성격이기는 하나 남굉모는 연륜이 깊었고, 무공 또한 자부심을 지닐 수준이었다.
외성에 도착할 때쯤 그는 은천문의 분위기가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아차렸다.
잠자코 임운령과 전도위를 따라 2층의 전각에 도착한 남굉모는 기다리던 양소소와 엄소동을 번갈아 보았다.
“어서 오세요, 외조부. 외조모.”
“뒤늦게 새사람이 생겨 나를 찾은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일이냐?”
“인사부터 하세요. 구주에 속한 엄소동 대협이세요. 엄 대협, 제 외조부, 외조모 되세요.”
남굉모는 엄소동을 보며 눈가를 좁혔다.
“겉보기와 달리 자네보다 나이가 많을 걸세.”
양소소를 돌아보았던 남굉모가 불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남굉모라 하오. 이 사람은 내자로 나탑사라 하고.”
“엄소동이네.”
뻑뻑한 인사가 오간 다음이었다.
자리에 앉은 남굉모와 나탑사에게 양소소가 지난 이틀간의 일을 설명했다.
“해서 검진을 형성할 고수 다섯 명이 필요해요. 외조부께서 도움을 주셨으면 싶어서 청했어요.”
“흠.”
남굉모는 들은 내용을 정리하는 것처럼 수염을 쓸며 답을 주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나와 내자가 힘을 합한다고 해도 네 명이 부족하지 않나?”
“그 점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딱히 도움을 청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남굉모가 낸 질문에 임운령이 답했다.
“문주에게 묻겠다. 자네는 결사항전을 생각하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진무린이란 아이가 돌아오지 못한 상태에서 최악의 상황을 맞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바쁘게 오간 문답의 끝에서 남굉모는 못마땅한 듯 고개를 비틀었다.
“모두 죽어버린 이곳에 올 그 아이의 심정은 생각하지 않나? 그 아이에게 평생 못다 할 복수라는 짐을 지우려는 거야?”
“가가.”
남굉모의 말이 듣기에는 ‘너희는 어차피 다 죽는다.’라는 투여서 불쾌할 수 있었다.
그 점을 염려한 나탑사가 조용하게 불렀는데 남굉모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고작 여섯에 서른둘이 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보기에 이곳에 있는 우리 중에 그 아이의 백 초를 감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런 아이를 보내고 도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겠다는 건가?”
임운령의 입을 틀어막는 것처럼 신랄한 비난이었다.
“외조부. 그럼 어떻게 하자고요? 다들 피하기라도 해요?”
“그래야지.”
따지듯이 입을 열었던 양소소가 대꾸조차 잊은 얼굴로 남굉모를 바라보았다. 엄소동을 제외한 임운령과 전도위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은천문이 지금껏 감당하지 못했을 정도로 강한 적이다. 근거지를 잠시 떠난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도 없다. 설혹 누군가 비난한다면 문도들의 귀한 목숨을 살려낸 대가로 문주가 감내해야 할 몫이고.”
남굉모는 전에 없이 진지한 눈빛과 표정을 말을 이었다.
“문주와 전 사부가 목숨을 걸어 끝나는 싸움에서 도주했다면 나는 두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게다. 대신 문도의 목숨을 담보로 결사항전을 하겠다면 그것에 힘을 보태지도 않겠다.”
딱 부러지는 남굉모의 답이었다.
앉아 있는 이들을 짓누르는 침묵 속에서 임운령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혹시 짐작하시는 장소가 있으십니까?”
“문주!”
양소소가 놀라 불렀을 때였다.
“피할 곳 말인가? 당장 떠오르는 곳은 없네.”
“귀혼곡이라면 이 인원으로 벽계를 감당할 만하네.”
남굉모의 답을 물고 나온 것처럼 엄소동의 의견이 있었다.
당연하게 시선이 쏠렸는데 엄소동은 임운령만을 또렷하게 보았다.
“문주는 혹시 문도들을 보내고 이곳에서 홀로 결전을 펼치려 한 건 아닌가.”
정곡을 찌른 질문이었을까.
임운령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
“그랬나 보군.”
임운령의 웃음을 본 엄소동이 이해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천신군의 의견이 합당하나 문주가 어찌 근간을 버리겠나. 그렇다면 혹시 문도들이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없나?”
이어진 질문에 양소소의 눈이 반짝였다.
“숨길 곳이 있다면요?”
“벽계가 재차 이곳을 노린다면 반드시 여섯 이상을 보낼 걸세. 이곳에 있는 다섯으로는 그들을 감당하기 어렵지. 어쩌겠나. 은천문의 명맥을 이을 제자들이라도 피하게 해야지.”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더라도 문도들은 살려보자는 엄소동의 제안이었다.
“진법이 부서질 때까지 시간이 있지 않은가. 그 정도면 문도들이 피하기에 충분하지.”
답을 내놓으라는 것처럼 엄소동은 양소소에게 시선을 주었다.
“수련동이 있어요.”
“수련동이라면 눈에 띄겠지?”
“문도들이 들어간 뒤에 출입구를 부수면 흙으로 덮이죠. 그곳에 입구와 같은 진법을 설치한다면 내부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벽계는 찾아내지 못할 거예요.”
“훗날 문도들이 나오려면 어찌해야 하나?”
“무린이와 려아라면 진법을 알아볼 거예요. 암연을 통해 내용을 전해도 되고요. 50일은 견딜 거고요.”
그 정도면 되겠다는 투로 엄소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논이 이상하게 달리더니 남은 것은 문주 임운령의 결정이었다.
“사저께서 진법을 설치하는 데 얼마나 걸리십니까?”
“하루.”
답을 들은 임운령은 의견을 묻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문주의 판단에 따르겠소.’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전도위의 답은 든든한 눈빛이었다.
“그렇다면 문도들을 숨기고 적을 맞이하겠습니다.”
결론이 나온 다음이었다.
“입구에 문도들이 없다면, 은천문의 진법을 이용해 적을 상대할 수 도 있네.”
임운령을 향해 엄소동이 말을 건넸다.
그 직후였다.
“나도 진중탈구검을 배워야 하오?”
남굉모가 질문을 건넸다.
“진법을 이용하려면 알고는 있어야 하네.”
“그렇다면 서두릅시다.”
“그러세.”
엄소동과 대화를 마친 다음이었다.
남굉모가 안쓰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가가. 강호에 살며 어찌 이런 순간을 각오하지 않았겠어요? 함께 있는 것에 감사할 뿐이에요.”
함께 앉은 이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나탑사의 대꾸가 있었고, 그 직후에 파천신군 남굉모는 전에 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