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6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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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6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66화
은천검제
제166화
저녁을 먹는 동안 방법을 찾기는커녕 대화조차 이어지지 않았다. 음식을 탐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사투의 끝에 이어진 자리라 다들 입맛만큼이나 말을 잃은 눈치였다.
누구보다 오늘 하루가 힘겨웠을 임운령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앞으로 들었다.
희생자를 기리는 의미로 한 잔, 엄소동의 도움에 감사하는 뜻으로 한 잔, 그리고 벽계를 물리치는 데 목숨을 걸겠다는 다짐으로 한 잔, 모두 석 잔의 술을 나눈 것으로 짧은 저녁 자리가 끝났다.
“문주. 조용히 의논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자리가 끝나기 무섭게 진무린은 임운령을 찾았다.
“그렇다면 잠시 걷는 것이 좋겠다. 잠시 사저와 엄 대협께 양해를 구하마.”
답을 한 임운령은 양소소와 엄소동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전각을 나섰다.
달빛이 은은한 은천문의 밤은 이전과 다를 바 없건만, 어둠 사이로 비통한 심정이 짙게 깔린 탓에 바라보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임운령은 내성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언덕을 향해 걸었다.
“무슨 일이냐?”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에 사매에게 공력을 전해주었습니다.”
진무린은 먼저 모려원에게 공력을 나눠준 일과 그녀의 발전에 관해 털어놓았다. 이어 운진을 통해 알게 된 고어의 뜻도 임운령에게 전했다.
“검에 새겨진 글귀가 그런 의미였다니 기회를 봐서 전 사부와 의논해 볼 일이구나.”
“그 외에도 엄 대협에게서 진중탈구검을 얻었는데 그것이 또 은천수호검과 결이 같다고 느꼈습니다.”
뒤편의 동산에 오르는 길이었다.
임운령과 전도위, 양소소가 어린 시절에 올랐고, 다음으로 진무린, 모려원, 종무헌이 함께하던 장소였고, 가장 추억이 깃든 곳으로 꼽힐 만큼 의미 깊은 장소이기도 했다.
여유 있게 동산에 오른 임운령과 진무린은 불을 밝힌 은천문을 내려다보았다.
상등의 화려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품위와 규율을 품은 정갈함이 있었다.
“원하는 것이 혹시 제자들을 골라 공력을 전하겠다는 것이냐? 그런 뒤에 문주에게만 전해지는 은천수호검을 개방하자?”
“그렇습니다.”
진무린은 임운령의 질문에 순순히 생각한 바를 털어놓았다.
“강변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병장기와 권각을 익힌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저 하늘의 별만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사라지지.”
임운령은 하늘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고수가 되는 것은 자질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법이니, 비록 공력을 받았다 해도 려아의 발전은 그 아이가 쌓은 수련과 영특함, 거기에 자질이 더해져 가능한 일이다.”
시선을 내린 임운령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호한 눈빛이었다.
“네가 공력을 전해주는 것은 기연의 일종이다. 자질을 타고난 데다 그를 깨우칠 영민함을 갖춘 이들이 효과를 얻지. 그렇지 못한 제자에게 공력을 주었다가는 주화입마로 남은 생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임운령은 야경을 보며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문의 위기를 보았으니 많은 제자들이 공력을 받겠다고 나서겠지. 그리해서 몇은 깨달음을 얻겠으나 대신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제자들이 주화입마에 들어 폐인이 된다.”
“공력을 조절한다면 적어도 주화입마에서는 피할 것 같습니다.”
임운령은 고개를 저었다.
“정종무공이 깨우치는 데 오랜 세월이 드나 부작용이 없는 반면, 마공은 바로 효과를 얻으나 부작용이 크다. 고수의 공력을 이용해 하수를 이끄는 방법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체계적으로 만든 곳이 마교다.”
임운령의 말을 들은 진무린은 새삼 깨달은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정작 급한 마음에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궜다.
“제자가 짧은 생각에 교만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네 마음을 왜 모르겠냐. 그러나 문주인 나는 본문이 무너지더라도 너와 같은 제자, 그리고 본문의 정신을 남기는 것이 편법으로 살아남는 것보다 중하다고 여긴다.”
진무린을 향해 옅게 웃은 임운령이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밤공기에 봄의 냄새가 묻었다. 본문에도 다시 평온한 시절이 올 게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 모두 너와 려아를 목표로 더욱 정진할 것이다.”
말을 마친 임운령은 각오를 세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는 대로 인사를 고하고 출발해.”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을 담은 문주의 지시였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벽계의 위험에서 촌각이라도 빨리 나가라는 뜻도 담겼다. 그러나 어떤 이유라 해도 눈앞에 선 문주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었다.
“문주의 명을 받습니다.”
진무린은 고개를 숙이며 이를 지그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검에서 피어난 용의 형상을 확실히 손에 넣겠다.
그때 벽계를 찾아가 오늘의 수모를 반드시 되돌려주리라.
다짐을 삼킨 진무린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
종무헌은 해가 떨어질 무렵 도착한 백면호리와 운진에게서 상등의 일을 전해 들었다.
“해서 진 대협께서는 종 소협과 노도가 함께 유광에 가 보물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셨소.”
“언제 출발하십니까?”
운진의 설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종무헌의 질문이 있었다.
그는 시간을 끌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매서운 얼굴이었다.
“이봐, 종 소협. 지금 막 도착했어. 우선 저녁도 먹어야 하고, 아무리 급해도 조금이나마 쉬어야 달릴 힘이 있지.”
보다 못한 백면호리가 나선 다음이었다.
“진 대협을 생각하는 종 소협의 마음을 왜 모르겠소. 노도는 종횡주를 사용하는 터라 긴 휴식이 필요하지 않으니 저녁을 드시고 바로 출발합시다.”
“문주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운진이 종무헌을 다독였다.
“에이, 좀 쉬어야 한다니까.”
“염려는 고마우나 노도와 종 소협은 마음이 급해 쉬는 것이 오히려 고통스럽소.”
“그게 아니라…….”
주변을 둘러본 백면호리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진 대협이 당부한 일인데 내가 어떻게 여기 편히 있겠냐 이 말씀이지요.”
“함께 가시려오?”
“하여간 나는 사람이 너무 선해. 갑니다. 가요. 아무렴 두 사람보다야 셋이 낫지 않겠소?”
슬쩍 시선을 돌린 백면호리가 종무헌을 보았다.
“왜? 설마 거절할 셈인가?”
“그보다는 대사형께서 함께하란 말씀이 없으셨다는데 굳이 나서실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말했잖아. 내가 사람이 선하다고. 내가 말이야. 작고하신 사부님을 제외하고 살면서 이렇게 받아본 적이 없어. 차라리 대가를 달랐으면 또 몰라. 그러니까 함께 가보자고. 내가 이래도 토굴 같은 거 뒤지는 데는 문주나 자네보다 한 수 위일걸?”
말을 마친 백면호리가 몸을 일으켰다.
“아, 뭐해? 얼른 저녁을 먹어야 출발하지.”
툴툴대며 몸을 돌린 백면호리를 보며 운진과 종무헌이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
위기에 놓인 은천문을 두고 떠나는 것은 고통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 올지 모를 벽계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황종관, 정동추와 약속한 일인 데다, 귀혼곡에서 종무헌이 출발할 터라 시간을 끌기는 어려웠다.
“서둘러 합락궁의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오겠습니다.”
“삼보를 얻어 구관을 열면 검진을 형성할 아홉을 얻을 수 있네. 검진의 숫자가 둘은 되어야 하니 나는 이곳에서 방법을 찾겠네.”
“엄 대협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엄소동과 인사를 마친 진무린은 다시 임운령, 전도위, 양소소에게 고개를 숙인 뒤에 모려원과 함께 전각을 나섰다.
건량과 벽곡단을 준비한 두 사람은 내성을 지나 외성을 빠져나갔고, 곧바로 은천문의 입구에 도착했다.
경계를 서던 사제들이 진무린과 모려원을 향해 고개를 숙였는데 그들의 눈에 담긴 것은 울분과 분노였다.
‘본문을 당부한다.’
그들에게 안타까운 심정을 전한 진무린은 모려원과 함께 은천문을 나섰고, 곧바로 경공을 발휘했다.
달을 품은 하늘 아래에서 나무의 끝을 밟으며 달리는 길이었다. 새처럼 나무와 바위를 밟고 솟구치면서도 진무린의 마음은 돌을 담아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기대했던 구주의 능력은 엄소동이 전부였다.
이를 알아차렸을 벽계가 은천문이 아니라 다른 곳을 노린다면 당장은 속수무책이었다.
당장 구관을 연다고 해도 그곳을 지키기 위해 검진이 필요했다.
은천문, 정도맹, 마교, 구대문파는 또 어떤가.
검에 담긴 용을 제대로 얻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꼴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진무린은 모려원을 위해 공력을 전했다.
기운을 알아차린 모려원이 짧게 시선을 주었다.
워낙 빠르게 달리는 도중이라 시선을 오래 두지 못했으나 공력을 나눠주는 것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미안하다, 사매. 부담되겠으나 하루라도 속히 등룡창천을 대성해줘. 우리의 안위보다 본문과 강호를 먼저 생각해야 할 때라 그래.’
모려원의 염려를 가슴에 담으며 진무린은 공력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
밤을 꼬박 달린 종무헌은 새벽녘에 운기에 들었고, 운진은 가부좌로 명상에 들었다.
백면호리는 타고난 체력에 책에서 익힌 내공을 더한 특이한 경우라 얼굴이 누렇게 떠서 널브러졌는데 운기를 하지는 않았다.
유광은 황토색 산을 절반으로 잘라놓은 것 같은 절벽에 셀 수 없이 많은 토굴을 파고 사는 부족을 일컫는 말이었다.
유광은 또한, 강호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집단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다.
이는 어지간한 고수라도 그들이 만든 토굴에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어려운 데서 기인한 일이었다.
가장 흔한 방법으로 유광은 침입자가 들어서면 토굴을 무너트려 그대로 매장해버렸다.
혹여 침입자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느껴지면 미로로 유인해 지하 깊은 곳까지 끌고 들어간 다음 입구를 막아버리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녔다 해도 토굴 안에서는 함부로 힘을 쓰지 못했다.
토굴이 무너지는 탓이었다.
깔리면 죽는다.
게다가 유광의 부족이 흙더미 사이로 몸을 감추면 미로를 헤매다 허무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찬란하게 하루의 해가 솟아오르는 순간에 나무에 기대 늘어진 백면호리는 근심 가득한 눈으로 종무헌과 운진을 돌아보았다.
‘너희가 유광을 알아?’
진무린의 지시라는 말에 눈썹을 치켜세운 종무헌은 토굴 안에 백 번을 파묻힌다 해도 뛰어들 인간이고, 운진은 또 그것을 돕는답시고 부적을 날리며 함께할 고지식한 인물이었다.
“에효. 어쩌나.”
시선을 돌려 밝아진 세상을 바라보던 백면호리가 혼잣말로 걱정을 쏟아냈다.
토굴에서 죽는 것을 가장 기쁘게 생각하는 부족이었다.
절벽을 무너트려도 누구 한 사람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흠.”
백면호리는 그답지 않게 긴 한숨을 쏟아냈다.
**
진무린과 모려원도 새벽녘에 운기에 들었다.
다른 이의 눈을 염려해 절벽의 중간을 택해 앉은 진무린이 운기를 시작하자 곧바로 묵빛 기운이 뿜어져 나와 모려원을 함께 뒤덮었다.
진무린의 공력을 받은 덕분이었는데 이미 운기에 든 두 사람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한 시진쯤 지난 뒤였다.
운기에서 깨어난 진무린은 막 눈을 뜨는 모려원을 새삼스러운 얼굴로 보았다.
“대사형도 느끼세요?”
“분명 어제와 확연하게 다르다. 사매가 영특한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발전이 빠를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기쁘고 놀란 모려원의 등을 진무린이 부드럽게 다독였다.
“어젯밤 내내 대사형이 주신 공력 덕분이에요.”
“공력을 주었다고 해도 사매의 기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잖아. 나라도 지금의 사매처럼 운기 한 번에 이리 발전하기는 어려울 거다.”
운기 도중에 묵빛 기운이 모려원을 감싼 사실을 알지 못한 탓에 오간 대화였으나, 기쁘고 반가운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출발을 앞두고 모려원은 검지와 중지를 붙인 크기의 건량을 꺼내 진무린에게 건넸다.
허기만 감추고 다시 달리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건량을 잘게 찢어 입에 넣었다.
작은 건량을 먹는 그 짧은 순간에 진무린은 사방신을 상대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모려원을 잃을 뻔한 순간에 고어의 풀이가 떠올랐고, 이어 용의 형상이 피어났었다.
건량을 삼킨 진무린은 고개를 돌려 묵룡검을 내려다보았다.
말을 알아듣는다면 품고 있는 용을 불러낼 방법을 알려달라고 묻고 싶었다.
“본문은 무탈하겠지요?”
모려원의 염려에 진무린은 확신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짐처럼 묵룡검을 꺼내 검면을 보았다.
‘반드시 너를 얻겠다. 그리고 너와 함께 벽계의 인물들을 상대하겠다.’
여의주를 대신해 검에 비친 태양을 움켜쥔 용의 모습이 의지에 답하는 것처럼 강렬하게 진무린의 눈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