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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65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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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165화

은천검제

제165화

 

은천문이 급한 정리를 마쳤을 때는 이미 저녁 시간이었다.

진법이 복구되며 은천문의 입구는 옛 모습을 찾았으나 희생된 제자들을 되돌릴 방법은 없어서 문주 임운령을 비롯해 살아남은 이들의 표정은 침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리가 끝난 뒤였다.

양소소와 엄소동을 찾을 시간인데도 임운령은 희생된 제자들의 손과 얼굴을 일일이 매만지며 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런 임운령의 뒤를 지키며 진무린은 나름으로 희생된 제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내가 늦은 탓이다. 못난 대사형을 용서해라.’

수련 태도로 모려원에게 꾸중을 들었던 사제, 초식을 이해하지 못해 진무린에게 어렵게 청을 넣던 사제, 종무헌을 무작정 따르던 사제까지, 은천문의 특성상 모두 가족처럼 지내던 사제들이었다.

마지막 제자의 손과 어깨, 볼을 오래도록 만지고, 쓰다듬은 임운령이 비통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침울한 진무린과 눈시울이 붉어진 모려원을 돌아보았다.

“고작 일곱이 침입했을 뿐인데 본문의 미래 서른둘을 잃었다.”

“제자가 너무 늦었습니다.”

“사방신이란 자들을 이겨내고 달려온 길인데 어찌 네 잘못이라 하느냐. 너와 려아가 없었다면 더 큰 희생이 있었을 테니 그런 생각은 버려라.”

웃음기가 전혀 담기지 않은 얼굴로 임운령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마 너와 려아가 보여준 경지가 있어 희망을 품는다. 방심하지 말고 수련해서 부디 등룡창천이 후대에 이어질 수 있도록 남은 아이들을 살펴다오.”

“문주의 명을 받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임운령은 모려원의 팔을 가볍게 두드린 후에 걸음을 옮겼다.

곁을 걸으며 진무린은 처음으로 그의 처진 어깨를 보았다.

“삼보를 찾으러 가는 길이라 하지 않았냐?”

“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귀혼곡에 있는 사제가 유광으로 움직일 터라 제자 역시 사매와 서둘러 출발해야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임운령은 억지로 어깨를 세운 뒤에 은천문의 외성으로 들어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겨웠을 문주의 고통과 늘 여유를 놓치지 않고 농을 던지는 이면에 그가 짊어지고 있던 문주라는 직책의 무게를 진무린은 처음으로 실감했다.

할 수 있다면 힘을 주고 싶었다.

부족하나마 이런 제자가 있으니 기운 내시라 말하고 싶었다.

진무린의 생각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기운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전각에 들어서기 전에 걸음을 멈춘 임운령이 진무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놈. 이 중한 시기에 어찌 함부로 공력을 낭비하느냐.”

꾸중처럼 말을 건넸으나 임운령의 음성에 담긴 것은 고마움과 대견함,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자부심이었다.

“들어가자.”

진무린을 다독인 임운령이 아프게 웃은 뒤에 몸을 돌렸다.

앞서 걷는 그의 어깨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

 

황종관과 대화를 마친 정동추는 어둑어둑한 시간에 힘겨운 몸을 이끌고 민가를 나섰다.

골목을 타고 걸어간 그는 사람들 틈에 섞여 소능산의 입구에 도착했다.

“힘들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만들 나타나.”

그가 돌계단 옆에 놓인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는 순간이었다.

검은색 무복을 입은 두 명이 수풀 사이에서 뛰어올라 그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교주를 뵙습니다.”

거대한 도와 왼쪽 무릎을 세운 두 사람은 오른쪽 무릎과 손을 바닥에 붙여 자세를 낮췄다.

“본교는 어떠냐?”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내가 말했던 놈들은?”

“모두 참살했습니다.”

민가에서 보였던 편안한 모습을 버리고 교주의 날카로움을 되찾은 정동추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교에 내 지시를 전해라. 섬서의 전중방에 정도맹의 비월단주 윤고성이 있다. 그놈이 유광의 보물을 소지했다는 소문을 퍼트려.”

“교주의 명을 받습니다.”

수하의 답을 들은 정동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조만간 유가장의 보물을 손에 넣을 참이다. 그리하면 반드시 남은 잔당들이 머리를 쳐들 게다. 혹여 상교가 그쪽에 이용당할 것 같으면 주저하지 말고 녀석의 목을 잘라 본교의 기강을 잡아.”

아들 정상교의 목을 자르라는 지시에 수하는 답을 하지 못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지시를 내리면 판단을 먼저 한 뒤에 답을 하는구나.”

나직하나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정동추의 한 마디가 있었고,

“속하, 교주의 명을 받습니다.”

다급하게 수하의 답이 있었다.

답을 들었음에도 정동추는 구부러진 눈 끝을 펴지 않았다. 날카로운 그의 눈매와 무거운 침묵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다.

대답을 미룬 수하를 죽일 것이냐, 기회를 한 번 더 줄 것이냐.

삶과 죽음을 결정할 두려운 침묵이 흐른 뒤였다.

“꼴도 보기 싫으니 물러가.”

짧은 지시를 내린 정동추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정도 무림은 영웅이 태어나는데 본교는 머저리들뿐이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로다.”

수풀로 사라진 수하들을 향해 혼잣말을 뱉은 그는 민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누군가 뿌린 물을 얼굴에 맞은 것처럼 태상은 치욕을 감내하는 표정이었다.

“하나씩 다시 들어보세. 그러니까 양소소란 계집을 향해 갔던 지숙은 구주의 엄소동에 죽었다. 그리 말했었지?”

“송구합니다, 태상.”

“애송이를 죽이라고 보낸 사방신은 오히려 그놈과 사매라는 계집에게 또 모조리 죽었고?”

보고를 위해 서 있던 수하가 차마 답을 하지 못한다는 투로 고개를 깊게 숙였다.

“허허허허.”

나직하게 터진 태상의 웃음이 분노라는 것을 앞에 도열한 이들은 모두 알았다.

“손명과 함께 간 여섯 역시 보잘것없는 은천문의 아이들 서른둘을 쓰러트린 뒤에 모두 죽었다. 게다가 애송이란 놈은 검광으로 용의 형상을 그리는 단계다?”

고개를 비스듬하게 돌린 태상은 벽을 타고 줄줄이 서 있는 조형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옥으로 깎은 인물들이 벽계의 초식들을 펼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서 당장에라도 태상의 명령에 나설 것처럼 보였다.

“결국, 아까운 열둘을 잃고 얻은 것은 구주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과 은천문의 하수 서른둘의 목숨이라는 게로군.”

“송구합니다, 태상.”

태상은 보고를 한 이에게 물러나라는 의미로 가볍게 손짓을 보였다.

그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다음이었다.

태상은 두 줄로 늘어선 이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들 역시 분노에 차 있었고, 한편으로는 수치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진무린이란 아이에게 가장 큰 고통은 은천문의 멸문이라 여긴다.”

태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열한 자들이 기대에 찬 시선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신도황은 앞으로 나서라.”

태상의 선택은 신도황이었다.

“신도황이 태상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양손을 앞으로 잡고 나선 신도황을 향해 태상은 바로 입을 열었다.

“서른을 주마. 마음이 맞는 이들과 함께 은천문으로 가 살아 있는 것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전각을 모두 태울 것이며, 가장 중앙에는 웅덩이를 만들어 벽계라는 이름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보이라.”

“태상의 명을 받습니다!”

신도황의 음성이 낭랑하게 대전을 울린 다음이었다.

“지숙과 손명이 나간 것을 구주가 어찌 알았을지를 고민해보면 이 안에 쥐가 있음이 분명하다. 신도황은 출정 전에 반드시 그자의 머리를 내게 보여라.”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신도황이 태상의 명을 받습니다!”

신도황의 답을 들었는데도 태상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만큼 그의 분노가 대단하다는 의미였다.

 

**

 

임운령은 객을 위해 사용하는 2층으로 올라 기다리던 양소소와 엄소동을 찾았다.

전도위까지 들어와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눈 뒤였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운기를 마쳤으니 문주는 염려를 놓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도록 해.”

먼저 양소소의 안부를 물었던 임운령은 다음으로 진무린에게 지난 일을 들었다.

어차피 진무린의 행보에 엄소동과의 만남이 들어 있어서 일각쯤 지난 뒤에 일행은 어제와 오늘 벌어진 일들에 대해 모두 알게 되었다.

설명이 끝난 뒤였다.

“엄 대협. 말씀하셨던 구주의 진법을 본문의 제자들로 구성할 수 있습니까?”

진무린은 혹시나 싶은 생각을 꺼내 엄소동에게 질문했다.

“답을 하기 전에 문주께 양해를 구해야 하네. 이는 내공의 깊이를 말함이라 혹여 언짢은 부분이 있더라도 결코 은천문을 무시하려는 뜻이 아님을 알아주게.”

엄소동의 요청을 받은 임운령은 바로 양손을 맞잡았다.

“사저의 목숨을 구해주셨고, 어려운 본문을 위해 먼 길을 달려와 도움을 주셨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이미 접했으니 엄 대협께서는 편히 말씀을 주십시오.”

임운령의 답이 있고 난 다음이었다.

“천라구합진을 형성하려면 나 외에 여덟 명이 더 필요하네. 아까의 결전을 봤을 때 그나마 가능한 분이 문주, 여기 양 소저, 전 사부, 그리고 자네와 모 소저가 전부일세.”

“익혀서 벽계를 상대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얼마로 잡아야 합니까?”

“자네 수준이라면 하루면 될 걸세. 다른 분들은 먼저 진중탈구검을 익혀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으니 아무리 서두른다 해도 대략 칠주야 정도 걸린다고 봐야겠지.”

방법을 찾았으나 수행할 방안이 쉽지 않은 탓에 무거운 침묵이 앉은 이들의 주변을 흘렀다.

“벽계가 어제와 오늘 세운 계획이 모두 틀어졌으니 그들은 분명 본보기를 보일 작정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자들을 보낼 것입니다.”

진무린은 무거운 침묵을 밀쳐내는 것처럼 입을 열었고,

“엄 대협. 본문에 진중탈구검을 전해주십시오.”

말끝에 청을 넣었다.

“자네의 뜻은 충분히 알고 공감하는 바일세. 그러나 진중탈구검은 운용할 기본 내공이 필요한 터라 가르친다고 당장 효과를 보기 어렵네.”

엄소동이 무겁게 답을 한 뒤였다.

“엄 대협. 그렇다면 문주와 전 사부, 제게는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양소소가 그의 말끝에 질문을 내었다.

“문주와 전 사부는 충분하네만, 자네는 어려워. 내공을 일으키는 순간 소모가 빠르고 회복이 되지 않는 몸으로는 진중탈구검을 내지 못하네.”

“오늘은 충분히 견뎠어요.”

“이곳에 당도하기 전에 내가 혈도를 짚었고, 공력을 계속 전해준 것을 잊어서는 곤란하네. 검을 들면 오늘 견딘 시간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쓰러질 걸세. 자네를 지키기 위해 나서야 할 문주와 전 사부를 돌아보는 현명함이 필요한 순간이네.”

점잖은 말투였으나 잔인할 정도로 냉정한 내용이었다.

양소소가 분한 얼굴로 눈매를 추어올렸으나 반박할 말은 없었다. 다른 것 아닌 지병 탓이라 위로하기도 어려워 다들 눈치를 살필 때였다.

“문주. 암연을 통해 외조부께 연락이 가능할까?”

뜻밖에도 양소소는 파천신군 남굉모를 꺼내놓았다.

“가능합니다, 사저.”

“그렇다면 외조부를 불러줘. 내가 경각에 놓였다는 말을 하면 하루나 이틀 안에 당도할 거야.”

“사저. 암연은 거짓 정보를 전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양소소는 눈매를 치켜 올렸다.

그러나 임운령의 답이 사리에 맞는 터라 그녀는 역시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위기를 맞아 내가 너무 흥분했었나 봐. 그렇다면 도움을 청하라는 연락을 먼저 처리해 줘.”

“알겠습니다, 사저.”

임운령은 밖에 있던 제자를 불러 양소소의 뜻을 전했다.

“외조부가 오신다고 해도 다섯 명이 부족하네. 외조모까지 힘을 더해주신다면 네 명이 부족하고.”

양소소가 안타까움 가득한 음성으로 혼잣말을 내놓은 다음이었다.

진무린은 황종관과 정동추를 떠올렸다.

정도맹의 맹주와 마교 교주를 불러 진중탈구검과 천라구합진을 익히라 할 수 있을까?

강호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천문의 안위를 위해서?

진무린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명분도 부족할 뿐 아니라 그리하면 나중에 정도맹은 물론이고, 위기에 빠진 마교의 도움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이는 은혼도 마찬가지였다.

벽계를 상대할 방법을 찾았다.

심지어 엄소동이 구주의 검법과 검진까지 내놓겠다는 마당인데 넷이나 다섯 명이 부족한 현실이 희망을 가로막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진무린은 마음을 굳힌 뒤에 입을 열었다.

“생사현관을 타통한 수준이면 가능합니까?”

“그 정도라면 검진을 버티는 것은 가능할 걸세. 짐작 가는 이가 있나?”

“당장은 아닙니다. 잠시 문주와 의논드린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하게.”

진무린의 답을 엄소동이 무겁게 받았다.

그 직후였다.

저녁이 준비되었다는 제자의 보고가 있었다.

입맛이 당기지 않아도 들이닥칠 적을 상대하기 위해 먹어야 했고, 엄소동이라는 객을 두고 저녁을 거르자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저녁을 드시면서 의논하십시다.”

임운령이 권유하자 일행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진무린이 생각하는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

저녁을 위해 걸으면서 모려원은 궁금한 시선으로 진무린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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