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6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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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0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64화
은천검제
제164화
진무린의 몸에서 뿜어진 묵빛 기운을 보며 전도위는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고, 임운령은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등룡창천을 대성했을 때 보인다는 기운이었다.
이십 년을 넘게 간절히 바랐고, 깨닫는 제자가 나오길 위해 애써온 두 사람의 심정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매는 나서라.”
“예, 대사형.”
위험하지 않으냐!
저들은 강하다!
말려야 할까를 염려했던 임운령은 모려원이 뿜어내는 기운에 놀라 전도위를 돌아보았다.
‘려아 역시 등룡창천입니다, 전 사부.’
‘분명하오. 분명 등룡창천이오.’
두 사람이 시선을 돌릴 때였다.
또다시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를 울리며 엄소동과 양소소가 은천문의 입구에 내려섰다.
임운령, 전도위와 짧은 눈인사를 나눈 양소소는 주변에 쓰러진 제자들을 보며 눈매를 매섭게 치켜떴다.
“본문이 위기를 맞았으니 인사는 뒤로 미뤄라.”
몸을 돌리는 진무린에게 뜻을 전한 양소소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그대로 둔 채 외포와 치맛자락을 잡아 허리에 꽂았다.
진무린과 모려원의 등장도 놀라운데 엄소동과 양소소마저 가세하자 손명은 확실히 당황한 눈치였다.
“그대는 누군가?”
“감히 침입자가 문도의 이름을 먼저 대라는 건가요? 벽계는 진정 예의를 모르는 자들의 집단이군요!”
손명의 질문에 양소소의 쨍하는 대꾸가 넘어갔다.
괘씸했던 모양이었다.
후욱, 하고 손명이 기운을 뿜었는데,
후아아악-!
진무린의 기운이 단숨에 손명의 힘을 눌러 흙먼지와 바람을 거세게 일으켰다.
임운령과 전도위는 이때 등룡창천의 기운만 알아차렸으나 손명과 벽계의 인물, 엄소동은 바닥에 깔려 넓게 퍼지는 불과 금의 기운을 분명하게 느꼈다.
“네가 혹시 진무린이란 아이냐?”
“직전에 사고께서 말씀하신 바가 있는데도 아직 예를 모르니 대답할 이유가 없다!”
진무린의 음성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기운을 가득 담은 터라 손명과 벽계의 인물은 볼을 씰룩이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위급한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대결을 길게 끌어서는 곤란했다.
주변에 쓰러진 제자들을 뒤로 빼고 나자 진무린은 곧바로 검을 꺼내 들었다.
이어 엄소동과 모려원이 동시에 검을 꺼내 들면서 은천문의 입구에서는 다시 살벌한 기운이 맴돌았다.
“제가 저자를 맡겠습니다.”
손명을 노려본 진무린의 말에 엄소동은 시선만 주었다.
짧은 순간 고민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몰려있는 여섯을 노렸고, 모려원, 임운령, 전도위, 양소소가 함께 자세를 잡았다.
“사방신은 어찌 되었느냐?”
“내가 이곳에 온 것을 보았다면 이미 짐작했어야 할 일이다.”
믿기지 않는다는 손명을 향해 진무린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네 차례다!”
쉐에에에엑!
진무린의 검이 날았고, 그와 동시에 대치하던 이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카앙!
손명이 진무린의 검을 막은 직후였다.
쉐에에엑! 쉐엑! 쉐에엑! 쉑!
진무린의 검이 재차 손명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내내 전도위를 상대로 여유를 보이던 손명이 처음으로 다급하게 몸을 틀었고, 상체를 뒤틀었으며, 손과 발을 바삐 움직였다.
임운령과 전도위, 양소소와 모려원이 벽계의 인물들을 상대하는 참이었다. 엄소동이 가세했다고 하나 숫자가 모자라 제자들이 남은 한 명을 감당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쉐엑! 카앙! 쉐에엑! 캉!
시간을 줄이겠다고 다짐한 진무린은 내공을 있는 대로 끌어올린 채 진중탈구검의 초식들을 연달아 쏟아냈다.
검에서 용이 빛을 발한다면 손명쯤 어렵지 않게 쓰러트릴 것이고, 그리하면 안타까운 제자들의 희생을 줄인다.
쉐엑! 쉑! 쉐에엑!
그러나 강한 의지를 담았고, 내공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도 용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쉐에에엑! 쉑!
다만, 진중탈구검의 위력은 대단해서 손명은 이미 어깨와 상체를 베였고, 허벅지에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쉐에에엑!
더구나 진무린이 검 끝에서 검기가 뻗어 나와 휘두른 방향으로 땅이 파이고 나무가 갈라지는 터라, 손명은 이전처럼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시간을 끌며 기회를 노렸다.
쉐에에엑! 카가강! 쉑! 카앙!
여섯을 상대하는 임운령 일행에서 돋보이는 사람은 단연 엄소동과 모려원이었다.
진중탈구검의 초식을 뿌리는 엄소동이 벽계의 인물들을 압박하면서 틈틈이 양소소의 위기를 막아주었다면, 모려원은 놀라운 무공으로 제자들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쉐에에에엑!
특히, 그녀가 휘두르는 검에서 은은하게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난 뒤로는 벽계의 인물들도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다.
쉑! 쉐에엑! 쉑!
진무린은 시종일관 진중탈구검으로 손명을 압박했다.
은천수호검과 결이 같아 어색함이 없었고, 무엇보다 손명이 뻗어내는 손을 효과적으로 막는 득이 있었다.
쉬익! 쉭! 쉭!
그러나 밀리는 와중에도 손명의 반격은 날카로웠고, 그가 뻗어내는 손에는 수많은 변화와 알아차리기 어려운 묘리가 담겨 있었다.
반나절을 겨룬다면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겠다.
문제는 그 안에 제자들이 얼마나 쓰러질지 모르고, 기운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양소소가 그때까지 견딘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데 있었다.
손명 또한 지금의 상황을 읽은 눈치였다.
진무린의 검에 곳곳을 베이고 있으나 시간을 끌면 옆에 있는 여섯 명이 승기를 잡아 이 혼전을 승리로 이끌리라 기대하는 것이 분명했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손명은 아직 등룡창천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시간이 촉박한 진무린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빠져나가는 손명이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한 수, 어려운 싸움 가운데 그 한 수를 펼칠 기회를 노렸다.
쉬익! 쉭!
손명이 매섭게 손을 날리며 몸을 뒤로 빼는 순간이었다.
쉐에에에엑!
진무린은 진중탈구검의 초식을 발휘해 물러나는 손명의 목을 노렸다.
상체를 젖힌 손명이 팔을 휘저어 기운을 휩쓸었고, 탄력을 이용해 진무린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쉐엑!
짧게 진중탈구검을 펼친 진무린은 불과 금의 기운으로 손명을 묶었고, 기운을 있는 대로 올려 검에 담았다.
진무린의 검이 어지럽게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휘릭! 휘리리리리릭!
대낮에도 눈이 아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 피어나 용의 형상을 이루었다.
쉬이익! 쉭! 쉭! 쉬이익!
놀란 손명이 달려드는 빛줄기를 향해 이제까지 보지 못했을 정도로 다급하고 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카가가가강! 콰가가강!
엄청난 충돌음이 터질 때였다.
“여기까지다!”
외마디 고함을 지른 진무린은 불과 금의 기운을 뿜어내며 또다시 검 끝을 흔들었다.
휘리리리리릭!
두 번째로 일어난 빛줄기는 위로 솟구쳐 용의 형상을 그려냈고, 불과 금의 기운을 삼킬 것처럼 떨어져 내렸다.
손명은 과연 대단해서 진무린의 기운을 모두 담은 빛줄기를 상대로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아아!”
그가 고함을 지르는 순간, 불과 금의 기운이 아래로 눌렸고, 위에서 떨어지는 용의 형상이 빛줄기로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직후였다.
쉐에에에에에엑!
세상을 가를 것처럼 날카롭고 섬뜩한 검소리가 손명을 향해 날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던 손명이 눈을 부릅떴다.
검기라면 그가 감당했을 것이다.
빛줄기가 만든 용의 형상이라면 비록 상처를 얻기는 하겠으나 위기는 모면했으리라.
그러나 지금 진무린의 검에서 쏟아진 빛줄기는 분명 검기를 대신한 것이었다.
서걱!
팔을 뻗어 빛줄기를 받았던 손명이 놀라고 당혹스러운 눈으로 진무린을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 뒤에 그의 몸이 꿈틀했고, 이어 가슴이 커다랗게 벌어지며 털썩,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너졌다.
손명을 쓰러트렸다고 만족할 틈이 있을까.
“사제들은 물러나라!”
진무린은 곧장 몸을 돌려 남은 여섯을 향해 뛰어들었다.
쉐에엑! 쉑! 쉐에엑!
진무린이 달려들면서부터였다.
모려원의 검이 극적이라 할 정도로 바뀌었다.
때론 같은 보법과 자세로 검을 내었고, 상체를 젖힌 진무린의 위를 타고 넘어가 상대를 압박했다.
진무린이 검을 내고 몸을 돌리면, 그 모습을 반복하는 것처럼 겨우 손을 빼는 벽계의 인물을 향해 모려원의 검이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쉐에에엑! 피이잇!
그 가운데 마침내 엄소동이 한 명의 목을 세차게 가르며 승부의 추가 확연하게 기울었다.
**
정동추에게서 전중방의 이야기를 들은 황종관은 번득, 깨닫는 것이 있었다.
‘윤고성!’
몸을 감춘 윤고성이 그곳에 있으리라는 확신이었다.
‘아직 이렇게나 뿌리가 깊게 남았구나.’
진무린이 무섭게 뛰어다니고, 마교 교주 정동추까지 움직이는 데도 벽계와 연결된 고리는 이런 식으로 강호에 연을 맺고 있었다.
확실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벽계가 직접 준동한 상황이라 윤고성은 이제 실 끊어진 연과 같은 처지가 되었으리라는 짐작이었다.
“무언가 얻으신 게 있는 모양이오?”
탁자의 맞은편에 앉은 정동추가 예리한 눈빛으로 질문을 건넸다.
어쩔까. 마교 교주와 속을 터놓고 의논할까, 정도맹 독자적으로 움직일까.
잠시 고민하던 황종관은 마음을 굳히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속한 곳의 치부를 드러내야 하는 일이라 잠시 고민했었소.”
황종관의 솔직한 답에 정동추는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반격의 실마리를 잡은 듯한데 도움을 주시겠소?”
“자칫하면 정도맹의 맹주가 무림공적이 되게 생겼구려?”
“누군가 그리하겠다면 이미 이렇게 마주 앉은 것으로 충분할 거요.”
“그건 그렇지. 어디 반격의 실마리가 어떤 것인지 들어나 봅시다.”
재미있다는 투로 웃은 정동추가 황종관의 말을 기다렸다.
**
엄소동이 한 명을 쓰러트린 이후로 진무린이 둘, 모려원이 한 명을 쓰러트렸다.
마지막까지 남아 저항하는 벽계의 둘을 진무린과 엄소동이 차례로 쓰러트리며 은천문의 입구에서 벌어졌던 힘겨운 사투가 막을 내렸다.
임운령과 전도위는 어깨와 허리에 상처를 입었고, 양소소는 지병이 도진 모양으로 낯빛이 하얗게 변해 힘겨웠다.
“은천문을 책임진 문주 임운령입니다. 먼저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안으로 모시고 대접하는 것이 도리이겠으나 제자들을 수습하고, 진법을 손보는 일이 급해 정리를 마친 뒤에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편하게 하시게.”
엄소동과 짧은 인사만 나눈 임운령은 제자들을 지휘해 입구를 정리했다.
함께 수련하던 사제들이었다.
진무린과 모려원도 나서 다친 제자들을 돌보았고, 진법의 정리에 힘을 보탰다.
다들 양소소가 염려되었다.
그러나 당장 생명이 촌각에 달린 제자들을 수습하는 일이 급해 그녀를 돌보기는 어려웠다.
상황을 짐작한 것처럼 엄소동은 양소소를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서 운기를 하게.”
“제자들의 희생 앞에서 무슨 면목으로 편안함을 바라겠어요?”
“더 강한 자들의 방문을 대비하는 것이 진정 은천문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게.”
엄소동의 조언에 양소소는 참담한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문주. 운기를 위해 먼저 안으로 들어갈 참이야. 객을 모시고 들어갈까 하는데 괜찮을까?”
“큰 도움을 주신 분을 어찌 그냥 가시라 하겠습니까? 사저께서는 편히 하십시오.”
임운령에게 허락을 얻은 양소소는 그제야 엄소동과 함께 은천문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려움과 아픔이 많은 하루였다.
그 와중에 진무린과 모려원의 발전을 보았으니 한편으로는 희망을 품은 하루이기도 했다.
은천문의 내성을 향해 걷는 길에서였다.
“어려운 시기가 오면 영웅이 난다고 하더니 은천문에서 진정 용이 일어나는 모양일세.”
엄소동이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처음 보았을 때는 조력자로 생각했었네. 시간을 끌어볼 생각으로 가벼운 도움을 주긴 했네만, 실제로 벽계가 준동하다면 적수가 되리라 기대하지는 못했지.”
엄소동의 음성에는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벽계와 구주는 늘 서로를 경계하는 처지였네. 벽계든, 구주든, 한쪽이 사라지면 남는 곳을 제어할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 가장 두려웠지.”
허탈하게 웃은 엄소동이 말을 이었다.
“구주가 먼저 무너진 꼴이라 하늘이 벽계의 세상을 만드시나 했었다네. 그런데 오늘 보니 하늘은 구주를 먼저 멸한 뒤에 벽계를 감당할 영웅을 내려 하셨던 모양일세.”
말을 마친 그는 높다랗게 서 있는 은천문의 전각을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