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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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3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60화
은천검제
제160화
하필 정동추가 요정을 앉힌 곳이 탁자였다.
어느 쪽에 앉든 가운데 올라앉은 요정이 시야를 가리는 터라 진무린이 자리하기에는 곤란했다.
“오려면 일찍 오든가.”
상황을 알아챈 정동추가 엉뚱한 불평을 늘어놓았는데 그런다고 운기에 든 아이를 함부로 옮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큰소리가 나지 않도록 몸을 일으킨 일행은 정동추가 누워 있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진무린은 먼저 황종관에게 벽계의 준동을 알렸고, 기대했던 구주의 상황도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삼보를 얻는 일이 급하지 않은가?”
“유가장이야 교주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합락궁과 유광에서 보물을 내놓을지 그것도 문제입니다.”
황종관의 탄식 같은 질문에 진무린이 의견을 내놓았다.
현명한 판단이었는데 정동추는 입가에 비웃음을 달았다.
“강호의 존폐가 목전에 달했는데 무얼 고민할 것이 있어? 도움을 청했다가 안 되면 힘으로 해결해야지.”
“교주. 강탈한 보물로 영웅대회를 개최한다면 누구도 그것이 올바르다고 여기지 않을 겁니다.”
“좋은 말이다만,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당장 벽계가 전면에 나선 마당에 언제 합락궁과 유광을 설득할 것이며, 또 어느 세월에 구관을 확인할 참이냐?”
진무린을 향해 입을 열었던 정동추는 말끝에 황종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운 좋게 구관을 얻었다고 칩시다. 영웅대회를 개최하는 데 수개월이 걸릴 테고, 만에 하나 벽계가 그 장소를 급습하면 그나마 강호에서 내놓으라 하는 인재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갈 텐데 대책은 있으시오?”
황종관의 입을 틀어막는 것처럼 정동추는 눈앞에 놓인 어려움을 쭉 펼쳐놓았다.
“합락궁만 해도 그렇소. 여인으로 구성된 궁에 이 아이를 보내면 아예 문도 열어주지 않을 테고, 유광은 그곳에 있는 토굴을 모두 뒤지는데 한 해는 넘겨야 할 거요.”
“교주께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시오.”
“이 모든 것이 벽계가 예상보다 빠르게 준동해 일어난 일이오. 방법은 아직 떠오르지 않소, 그렇더라도 명분에 묶여 시기를 놓치지 말자는 뜻이오.”
말을 마친 정동추는 어디 이번에도 의견을 내놓아 보라는 투로 진무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어려운 일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정동추의 눈을 바라보던 진무린은 마음을 굳혔다.
“제가 먼저 합락궁으로 향하겠습니다.”
“말을 못 들었냐? 여인의 세계라니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무리하면 그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어.”
“사매와 함께하겠습니다.”
답을 들은 정동추의 눈 끝이 꿈틀했다.
그런 뒤에 그는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진무린을 노려보았다.
“벽계를 이용해 너의 사매를 훈련시키겠다?”
가끔 정동추의 명석한 판단에 놀랄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꼭 그런 때였다.
“이곳을 나서 합락궁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벽계의 인물들이 나설 겁니다. 그 기회에 사매가 새로 얻은 것들을 대성할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그 아이가 그 정도 수준이냐?”
“어려운 시기입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기회조차 얻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뒤늦게 정동추와 진무린이 생각하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대화를 듣던 황종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벽계가 자네를 노린다면 이미 이곳에 나타났어야 하지 않나?”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먼저 교주가 계시고, 이어 맹주께서 도착했기 때문이라 여깁니다.”
“그들은 나나 맹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교주께서 궁도를 상대했던 일을 알고 있으니 혹여 이번에도 도움을 줄까 염려하는 바가 있을 테고.”
정동추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고,
“맹주께서 힘을 보태신다면 그들도 함부로 달려들기 어려울 겁니다.”
“교주야 그렇더라고 나는 왜 그들이 피한다는 건가?”
“벽계가 굳이 본문과 양 사고, 그리고 저를 노리는 이유를 보고 짐작한 일입니다. 먼저 가장 힘겨운 적을 해결하고 보겠다는 뜻이며, 그 전에는 정도맹이나 강호 전체와 전면전이 부담스럽다는 의미로 보았습니다.”
“나를 공격하면 정도맹을 건드리는 꼴이 되고, 이미 관계가 불편해진 마교를 두 번 건드리지 않겠다?”
황종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동추의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갔는데 그는 대화에 빠져 ‘마교’라는 말을 뱉은 것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제가 버틸수록 벽계는 전면전에 부담을 느낄 것입니다. 이럴 때, 사매가 본문의 등룡창천을 얻는다면 더할 수 없이 큰 힘이 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살길을 찾는다! 나쁘지 않구나.”
정동추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진무린의 의견에 찬성했다.
“백면호리에게 부탁해 귀혼곡에 있는 사제를 유광으로 보낼까 합니다. 문주께서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
“진 대협. 노도는 진 대협의 뜻에 무조건 따르겠소. 하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무공을 전혀 모르는 노도가 도움이 되겠소?”
“유광은 수많은 토굴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을 상대하기에 문주께서 보이실 술법이 크게 도움될 것이라 여깁니다.”
“그렇다면야. 최선을 다해 보리다.”
“어렵다 여겨지면 무리하지 마시고 시간을 벌어주십시오. 제가 사매와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의논이 끝났다.
“밤을 보내고 오더니 뭔가 바뀌었는데? 도대체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강호가 저를 믿고 의지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질문을 건넸던 정동추가 답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 출발할 생각인가?”
“사매의 준비가 끝나면 바로 나설까 합니다.”
지켜보기 곤란했던 모양이었다.
황종관이 화제를 바꾸며 의논을 마무리 지었다.
**
양소소는 파천신군 남굉모의 외손녀로 은천문에서 자랐다.
은천문과 남굉모의 무공이야 두말하면 입 아픈 수준이라 어지간한 무인은 양소소의 눈에 들지도 않는다.
그런 양소소인데도 지난밤 엄소동이 펼친 경공을 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나마 홀로 달리는 것이라면 이해하겠다.
양소소의 몸이 좋지 않음을 눈치챈 엄소동은 아예 기운으로 안다시피 해서 달리는데 험악한 산과 나무, 절벽에 구애받지 않았다.
세상이 뿌옇게 밝았고, 이어 날이 밝은 뒤였다.
절벽을 뛰어내렸던 엄소동은 중간의 바위에 내려앉아 처음으로 기운을 거두었다.
꼬박 하루의 절반을 달렸고, 낮보다 배로 힘들다는 밤을 달린 참이었다.
이미 기진맥진했어야 할 양소소는 오히려 기력을 보충한 사람처럼 더할 수 없이 몸이 홀가분했다.
느끼지도, 알아채지도 못했다.
그런데 밤새 달리는 동안, 엄소동은 심지어 양소소에게 기운을 담아준 모양이었다.
‘구주가 이 정도인가.’
절벽 멀리를 바라보는 엄소동을 양소소는 짧게 살폈다.
저럴 시간에 운기라도 했으면 싶은데 그는 생의 마지막 오전을 눈에 담는 사람처럼 먼 하늘과 산, 들을 바라볼 뿐 움직임이 없었다.
바람이 엄소동의 수염과 양소소의 외포 자락을 흔든 다음이었다.
생각난 것처럼 소매에 손을 넣었던 엄소동이 반듯하게 접힌 하얀 종이를 건넸다.
“이것으로 아침을 대신하게.”
“뭔가요?”
“벽곡단의 일종이라 여기면 틀리지 않을 걸세.”
엄소동의 손이 민망할 것 같아서 양소소는 하얀 종이를 받아들었다.
“이것밖에 없다면 양보하실 필요 없어요. 가야 할 길이 제법 남았으니 힘을 쓰실 분이 조금이나마 허기를 채우시는 것이 현명한 일이에요.”
“충분히 있으니 안심하고 들게. 나는 오전의 기운을 받는 것이 더 좋아서 지금은 생각이 없네.”
이미 절반쯤 신선이 된 몸일까.
어찌 사람이 음식을 섭취하는 것보다 오전의 해를 바라보는 것이 더 좋을 수가 있을까.
행여나 앞으로 가는 길에서 지칠까 싶어 양소소는 접어놓은 종이를 펼쳤다.
벽곡단은 예상보다 커서 새끼손가락의 마지막 마디만 했다.
양소소는 다섯 개쯤 담긴 것 중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곧바로 청량한 기운이 입안을 맴돌았고, 이어 새콤한 맛이 느껴지며 침이 가득 올라왔다.
‘물이 필요 없게 만들었구나.’
분명 부서질 정도로 바싹 말린 것인데 입안에서 느끼는 감각은 반쯤 말린 과일을 문 것처럼 부담스럽지 않았다.
벽곡단을 삼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작 하나를 먹은 양소소는 들고 있던 종이를 다시 곱게 접었다.
“입에 맞지 않는가?”
“식탐이 생길 정도로 좋았어요.”
그런데 왜, 하는 투로 엄소동이 시선을 주었다.
“밤새 달린 것으로 모자라 기운마저 나눠주신 분 앞에서 혼자 배를 채울 정도로 낯이 두껍지 않아요.”
웃는 건가, 싶었을 때 엄소동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일각 뒤에 출발하겠네.”
엄소동의 말을 들은 양소소는 자리에 앉아 운기했다.
이후에 달리는 동안, 조금이나마 짐을 덜어주겠노라는 다짐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빛살처럼 뻗어 나온 햇살이 앞에 선 엄소동을 살핀 뒤에 뒤편에 앉은 양소소를 비쳤고, 그 사이를 헤치고 달려든 바람이 이곳에서 비키라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옷자락을 흔들었다.
**
밖으로 나선 진무린은 먼저 백면호리를 찾았다.
“정아가 운기에서 깨어나면 함께 홍화루에 들렀다가 곧바로 귀혼곡으로 돌아가.”
“홍화루에는 왜?”
“여기까지 와서 사부에게 인사도 않고 갈 생각이었어?”
진무린의 눈빛이 엄하게 변한 것을 본 백면호리가 화들짝 표정을 바꾸었다.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래요. 정신이. 오자마자 마교…….”
목을 길게 빼고 안을 살핀 백면호리가 얼른 말을 이었다.
“교주가 애를 붙들고 피를 토하게 하는데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있어야지. 그나저나, 정아는 그냥 가도 되겠나?”
“구명환까지 먹였으니 기연을 두 가지나 얻은 것과 다를 바 없어.”
진무린의 설명에 백면호리의 입 끝이 귀에 걸렸다.
“귀혼곡에 가는 대로 사제에게 유광으로 향하라고 전해주고. 자세한 내용은 문주가 알고 계시니 그 정도만 말해주면 알아서 할 거야.”
“드디어 시작이군.”
“이미 시작했어.”
백면호리가 비장한 각오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아는 언제쯤 일어날까?”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염려할 것 없어.”
“이왕 운기를 하게 할 거면, 방에 넣어주지. 구경거리도 아니고 탁자에 저렇게 달랑 올려놓을 필요가 뭐가 있어?”
백면호리의 불평을 들은 진무린은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었다.
“왜 웃나?”
“음공의 기운을 끝까지 올려놓은 상태여서 차가운 냉기와 햇살이 정아에게 더 좋아.”
“오!”
백면호리가 감탄을 쏟아낼 때였다.
몸을 씻고 의복을 갈아입은 모려원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피부는 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가득했고, 눈은 정성 들여 세공을 마친 흑요석처럼 총명하게 빛나는데 무언가 근접하기 어려운 위엄마저 담아서 실로 고수의 풍모를 한껏 풍기고 있었다.
“사매. 아침을 먹은 뒤에 합락궁으로 출발할 참이다. 설명은 가는 길에 할 테니 그리 알고 준비해라.”
“예, 대사형.”
백면호리가 진무린과 모려원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딱히 꼬집기 어려운 탓이었다.
**
암연을 통해 내용을 들은 은천문은 경계를 서는 제자의 숫자를 늘렸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임운령마저 검을 소지한 채 일을 보았다.
마침 전도위가 새롭게 고안한 검법을 익히던 참이었다.
은천문을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각오까지 더해져서 무공을 익히는 제자들은 숙연해 보일 정도로 사명감에 불탔다.
집무실에 선 임운령은 검을 들고서 밖을 커다랗게 둘러선 외성을 내려다보았다.
‘벽계라.’
풍령관에서 보았던 하후도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한다. 그러나 은천문이 그 정도를 감당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너희가 함부로 넘볼 정도로 본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어 진무린을 떠올린 그는 옅게 미소를 그려냈다.
비록 위기에 임운령이 쓰러진다고 해도 진무린이라면 누구보다 은천문을 강성하게 만들고 바르게 이끌 것이다.
이런 날을 짐작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튼 진무린에게 은천수호검을 전한 뒤라 후일은 든든했다.
임운령이 각오를 다질 때였다.
뿌우-. 뿌우우-.
침입자를 알리는 고동 소리가 은천문을 뒤덮었다.
‘왔는가.’
외성에 있던 제자들이 지정된 장소로 집결하는 모습이 보였고, 곧바로 연무장에 있던 전도위가 담과 지붕을 타고 경공을 펼치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집무실을 한 번 돌아본 임운령은 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떨어진 그는 중간 기와를 밟아 방향을 바꾼 뒤에 그대로 날았다.
전도위는 범처럼 지붕을 달리고, 임운령은 칠 층 전각에서 뛰어내려 매처럼 방향을 틀었으니 은천문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두려움 없이 적을 향해 달리는 모습이라, 이를 지켜보던 제자들은 모두 피가 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