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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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8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53화
은천검제
제153화
아침 준비를 마쳤노라는 말을 들었으나 급한 일들이 워낙 많았다.
먼저 엉망이 된 방을 치워야 했고, 다음으로는 정동추를 눕혀야 했다.
소식을 들은 총관 백섭광이 시비와 종복들을 이끌고 급히 달려왔다. 홍화루의 일이 그런 것인지 시비와 종복들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방을 새로 꾸몄다.
이어 정동추가 자리에 누웠고, 이안공자가 그의 상처를 새로 치료해주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데 반 시진이 채 걸리지 않았으니 이 부분에서만큼은 홍화루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이제 내가 알아듣게 설명을 좀 해주겠나.”
침대에 누운 정동추는 가장 먼저 운진에게 원하는 바를 내놓았다.
“모 소저의 말씀이 뜻밖이긴 하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오. 오래 지속될 술법을 부릴 때면 파훼 될 것에 대비해 매개를 이용한다오.”
어렵지 않은 설명이었다.
“모 소저는 아까의 말을 다시 한 번 해주겠소?”
“왼눈을 안대로 가린 노인이 마선 이상의 마기가 있어야 술법을 부술 수 있다고 했어요.”
정동추가 눈가를 좁힌 채 모려원과 운진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니까 저 아이의 말은 술법을 부린 혈교의 수장이라는 놈이 본교의 마기를 매개로 썼다, 그런 말이오?”
“시험해 보면 바로 알 일이오. 모 소저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납타이를 찾고, 다음으로 소저가 잃었던 남은 기억을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이오.”
“흠.”
정동추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선이절과 구양봉이 연결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풍령관, 혈교, 구양봉이 얽혔으니 마기를 매개로 썼다는 추측도 충분히 타당한 이야기였다.
“도대체 어디까지 본교를 팔아먹었는지 죽은 놈들의 몸뚱이를 찾아 갈기갈기 찢어놔야겠군.”
이를 부드득 간 정동추가 결심한 표정으로 눈을 치켜떴다.
“마기만 있으면 되는가?”
“마선이라 불린 이들보다 더 강한 마기여야 하오.”
“흥! 진정한 마기가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지.”
조금은 자제해달라고 당부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정동추의 눈매가 매섭게 빛났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정동추의 성급함에 놀란 운진이 급히 소매에서 부적을 꺼내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먼저 짧게 주문을 외운 그는 왼손에 들었던 부적을 방의 가운데로 던졌다.
화르륵.
불길이 일었고, 방의 한가운데서 금방 비라도 뿌릴 것처럼 검은 구름의 형상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마기를 부탁드리오.”
“흥.”
정동추가 입술을 꿈틀한 직후였다.
눅눅한 마기가 피어나 곧바로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진무린은 조용하게 내공을 일으켜 운진을 감쌌고, 모려원 역시 적당하게 기운을 펼쳐 몸을 지켰다.
눈을 감은 운진은 마기가 퍼지는 것과 동시에 주문을 외웠다.
천장에 펼쳐진 구름이 금방이라도 천둥과 번개를 터트릴 것처럼 꾸물대는 가운데 운진의 주문은 계속 이어졌다.
한순간, 번쩍 눈을 뜬 운진이 오른손에 들었던 부적을 뿌렸다.
화르르륵!
불길이 치솟은 다음이었다.
“저 노인이에요!”
모려원이 먼저 외쳤고,
“이런 개 같은 것들이!”
정동추가 거친 욕설을 터트렸다.
왼눈을 안대로 가린 납타이가 기다란 의자에 앉았는데 그의 뒤로 커다란 목각판이 놓여있었다.
“저놈 뒤에 있는 목각판은 본교의 상징물이다. 아수라의 손에 들린 것이 활이니 저곳은 하북의 분타이다. 아직 본교에 배신자가 남았다는 의미이고, 하북 분타 역시 그들에게 동조한다는 뜻이겠지.”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납타이가 의아한 듯 상체를 천천히 세웠다. 그는 먼저 주변을 둘러보았고, 멈칫한 뒤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화르르륵.
그 순간, 불길이 다시 피어나며 납타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가 우리의 존재를 알아낼 수 있어서 끊었소. 진 대협. 교주께서 말씀하신 하북의 분타에 가려면 얼마나 소요되겠소?”
전의 경공이라면 하루 반나절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그러나 오행의 기운을 얻은 데다, 등룡창천을 대성했으니 그것으로 운진을 돕는다면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으리라.
“문주께서 종횡주를 사용한다면 반나절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정동추가 퍼뜩 돌아볼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본교의 분타에 너와 문주만 갔다가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부상이 심하셔서 당장 움직이기는 것은 곤란합니다.”
“대라구환단을 먹은 데다 운기를 마쳤으니 그 정도 거리를 달린다고 해도 크게 상하지 않는다. 나보다는 네가 고생이 심하겠지.”
정동추의 마지막 말에 담긴 뜻은 분명했다.
‘운진을 돕는 것처럼 나도 도와라.’
진무린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대사형. 납타이만큼은 소매의 검으로 벌하고 싶어요.”
모려원마저 강한 의지를 담은 눈으로 진무린을 바라보았다.
“문주. 사매의 지난 기억을 되돌리는 일은 언제 가능한 일입니까?”
“납타이를 벌한 뒤에 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게요, 진 대협.”
답을 들은 진무린은 모려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납타이는 문주께서도 죽음을 각오했을 정도로 술법이 뛰어난 자다. 이곳을 비우는 것도 그렇고, 검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니 우선 아침을 먹으며 방법을 모색하자.”
“예, 대사형.”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진무린의 제안에 모려원은 나직하게 답을 냈다.
사실 가장 급한 것은 벽계의 다음 움직임에 대비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구주가 어쩐 일인지 지금껏 움직이지 않는 점이 무엇보다 걸렸다.
‘구주가 벽계를 직접 노리고 있을까?’
그렇다면 몰라도 만에 하나 원예와 이안공자가 구주에 관해 함구하는 이유가 힘을 잃은 탓이라면 정말이지 위급한 상황이었다.
**
태상은 손가락만큼이나 긴 눈썹을 늘어트린 채 분노하고 있었다.
대전은 넓었다.
좌우로 이십 명씩, 도합 사십 명이 도열한 안쪽에 나무로 짠 틀이 놓였고, 그 위에 사령과 궁도가 나란히 누웠는데 태상은 그곳을 오래도록 노려보았다.
그의 입가가 씰룩한 다음이었다.
사령의 몸 위에 놓였던 검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해 한 길 위에서 손잡이를 위로 한 모양으로 멈췄다.
“저 검을 내가 주었지. 그토록 아끼던 사령이 엉뚱한 물건을 감당하지 못해 차갑게 돌아왔구나.”
그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기운을 회수했는지 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구주의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궁도의 말대로 그들에게 변고가 생긴 것은 분명하다.”
눈을 돌린 태상은 오른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방신은 나서라.”
그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이남이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구주가 사라진 강호라면 이미 우리의 것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사령과 궁도를 잃은 것에 대해 응징하지 않는다면 강호의 보잘것없는 것들이 진무린이란 물건에 의지해 결속할 것이다. 가서 놈의 목을 가져오너라.”
“태상의 명을 받습니다.”
네 사람이 양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아직은 우리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도록 조용하게 가져와.”
“예, 태상.”
나직하게 팔을 든 태상이 손을 바깥으로 저었다.
그것을 신호로 사방신은 조용하게 몸을 돌려 대전을 빠져나갔다.
“손명은 나서라.”
태상이 다시 명을 내리자 오십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한 걸음을 앞으로 나섰다.
“놈의 근거지가 은천문이라 했다. 여섯을 데리고 가서 그들을 몰살해라.”
“태상의 명을 받습니다!”
손명이 고개를 숙인 뒤에 몸을 돌려 대전을 나섰다.
“지숙.”
태상이 다시 호명하자 이번에도 오십으로 보이는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양소소라 했던 물건의 목을 가져와라.”
“태상의 명을 받습니다.”
그가 몸을 돌리자 이제야 분이 반쯤 풀린 것처럼 태상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직 구주가 움직일 가능성이 남았으니 지금 나간 이들의 주변을 살피는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시오.”
“태상의 명을 받습니다!”
남은 이들이 한목소리로 답을 내자 태상은 손을 밖으로 저었다.
**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친 진무린은 정동추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구주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이야 원래 말만 무성했지, 실력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들의 침묵이 벽계의 행동에 날개를 달아준다고 계산해야 합니다.”
“문주와 둘이서 하북 분타에 갈 생각이라면 접어두는 것이 좋아.”
정동추는 예상외로 차분하고 냉정한 태도였다.
“네가 본교의 분타를 무너트리는 것에 교도들이 지닐 앙심도 생각해야지. 그 상태로는 벽계를 함께 상대하자고 해봐야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기세가 오른 무인과 기가 꺾인 무인의 차이를 잘 아는 진무린은 정동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것이라면 너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안심되지 않겠냐. 네가 없는 이곳에 당장 궁도 수준의 두 놈이 온다고 가정해 봐라. 살아남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
“납타이가 왜 하북 분타에 있는지 짐작 가는 일은 없습니까?”
“풍령관과 구정봉 때부터 얽힌 놈들이 모두 뒈졌으니 속을 알 길이 있을까.”
“조금만 더 고민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편할 대로 해라.”
정동추의 방을 나선 진무린은 대청에 있던 모려원, 운진과 마주 앉았다.
“문주. 납타이를 이쪽으로 불러들일 방법이 없겠습니까?”
“전에 다점에서 그가 나를 노린 것을 기억하시오?”
“물론입니다.”
진무린의 답을 들은 운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뒤로 그는 흔적을 감추다시피 하였소. 무언가를 노린다는 뜻이지요. 만약 그가 그저 몸을 숨길 요량이라면, 하북 분타가 아니라 혈교로 돌아가 있어야 옳을 일이오.”
“유인한다 해도 움직이지 않으리라 보십니까?”
“그는 분명 목적이 있어 하북 분타에 머문 것일 테고, 그렇다면 어지간한 이유로는 꼼짝하지 않을게요.”
“그가 솔깃할 이유가 있다면 가능하다는 말씀이네요?”
“그야 당연한 일이오, 모 소저. 혹시 떠오르는 묘책이라도 있소?”
질문을 받은 모려원이 바로 입을 열었다.
“제게 아직 그의 술법이 남은 탓에 기억의 일부를 되찾지 못한 것이 아니겠어요?”
“그야 그렇소.”
“환상에서 본 그는 분명 제게 기대하는 것이 있는 눈치였어요. 그러니 문주께서는 교주의 마기를 이용해 제게 걸려있는 술법을 풀어주세요. 가능하세요?”
“어려운 일이나 가능하오. 다만, 납타이를 쓰러트리면 무난한 일이나, 반대로 그가 방해한다면 모 소저가 위험할 수 있소. 노도는 그 점을 완벽하게 막을 자신이 없구려.”
“어떤 위험이 있어도 술법을 먼저 풀어주세요. 그리고 그 사실을 그가 알게 해주세요.”
운진의 고개가 불쑥 들렸다.
“그건 또 어떤 이유요?”
“말씀드렸잖아요. 그는 제게 원하는 것이 있어요. 술법이 풀려 과거의 기억을 모두 찾으면 그가 불리할 뭔가가 있을 거예요. 그런 이유로 제가 술법을 풀어내는 것을 안다면 그냥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흐음.”
“문주. 그의 목을 제가 자를 수 있게 해주세요.”
무거운 숨을 내쉬는 운진에게 모려원이 청을 넣었다.
독하게 각오한 모양이었다.
진무린은 선뜻 뭐라 말을 건네기 어려웠다.
위험을 모려원이 모두 감당해야 하는 탓이었다.
그녀가 또다시 술법에 고통받을지 모를 일을 어찌 쉽게 허락할까.
침묵이 대청을 휩쓴 뒤였다.
“해봅시다.”
운진이 먼저 각오를 냈다.
“진 대협. 만약 그가 이쪽에 관심을 가져 기운을 풀어낸다면 노도가 최선을 다해 당겨보겠소. 뒤를 부탁드리오.”
“문주. 사매도 염려되지만, 제게 숨기시는 것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운진의 비장한 눈빛이 염려되어 진무린이 건넨 요청이었다.
분위기를 눈치챈 모려원까지 긴장한 표정으로 운진의 답을 기다렸다.
“위험할 수는 있으나 만약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손을 거두겠소.”
“분명하게 약조해 주십시오. 문주가 없는 상황에서는 납타이를 제대로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모산의 이름을 걸고 약조하리다.”
“알겠습니다. 불러주시면 저 역시 최선을 다해 납타이를 쓰러트리도록 하겠습니다.”
모려원과 운진이 위험을 감수하며 달려드는 일이었다.
“준비할 것이 있으니 반 시진 뒤에 시작하십시다.”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운진은 몸을 일으켜 섬도곤이 누워 있는 방으로 향했다.
진무린은 염려 가득한 시선으로 모려원을 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대사형.”
총명한 모려원의 눈을 바라보며 진무린은 옅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