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47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4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47화
은천검제
제147화
기다란 의자에 앉은 원예 앞으로 시비가 탁자와 의자를 놓아주었다. 곧바로 가져다준 차와 원예의 표정까지 홍화루는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리라 기대는 안 했지만, 가끔은 반가운 척이라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이 반가워하는 표정이에요.”
저 말이 진심이라면, 진무린은 확실히 원예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편이었다.
“공자께서는 분위기가 바뀌셨네요. 어깨를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여요.”
“실제로 홀가분하니까.”
진무린의 대꾸에도 그녀는 무엇 때문에 홀가분해졌는지 묻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대화에서만큼은 확실히 원예가 한 수 위였다.
그 외에도 무공을 놓고 본다면 원예는 정동추의 발끝에도 닿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녀는 진무린의 변화를 다른 방식으로 알아보는 능력을 보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벽계의 인물인 궁도를 만났다.”
이야기를 시작한 진무린을 궁도와의 대화, 정동추의 계획, 혈교를 향하리라는 생각을 차례로 전했다.
시비가 가져다준 차가 미지근하게 식을 때쯤 이야기가 끝났다.
“공자께서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를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요?”
“늘 같은 소리지만, 내 속이 보이나?”
“제게는요.”
“루주에게 올 때는 조심해야겠군.”
“그래서 제게 마지막 계획에 필요한 점을 요구하시려는 건가요?”
“이번에 구주를 함께 상대할 계획이거든.”
변화가 없던 원예의 눈이 반짝하는 느낌이었다.
“터무니없는 벽계의 야욕을 상대하는 것도 지치지만, 신비의 집단인 양, 숨을 죽인 구주에 대한 기대도 버릴 생각이고.”
“구주가 드러나면 벽계를 감당할 이들이 없어요.”
“루주.”
진무린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를 담아 원예를 불렀다.
“강호를 손아귀에 쥐겠다는 집단은 언제고 있었지. 그 바람에 헛되이 흘린 피를 모으면 황하를 대신할 정도쯤 될 테고. 그렇다고 이 강호를 차지한 자가 있었나?”
원예는 속을 알 수 없는 특유의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물론 수년에 걸쳐 강호를 쥔 이들은 있었지. 그러나 거기까지다. 이 강호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문파와 그 안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인재들이 성장해서 그들의 야욕을 부수는 순간까지.”
진무린이 말이 끝난 직후였다.
“강호를 하나로 묶으실 계획이군요. 점창과 공동을 봉문시켰고, 나머지 칠대문파에서 화산과 아미가 동조하며, 마교까지 아우르셨지요. 그동안의 행보가 이 계획을 위해서였던가요?”
정말이지 무서울 정도로 놀라운 원예의 짐작이 있었다.
“강호를 하나로 묶을 생각은 맞다. 그러나 움직이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계획했던 일은 아니다.”
진무린의 대꾸가 실망스러웠을까.
“다른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다고 말씀하세요. 그편이 훨씬 듣기 좋고, 또 동조하게 만드니까요.”
“그 점은 고민해 보지. 아무튼 힘을 모아 벽계를 상대할 계획인데, 가능하다면 그 전에 구주의 능력을 확인해 볼까 싶은 거지, 우리와 손을 잡을 의사가 있는지도.”
“소녀에게 바라시는 것은요?”
“벽계나 구주의 움직임을 알아낼 방법이 필요해. 그 외에 개인적으로 청이 하나 있고.”
“말씀하세요.”
“상등으로 벽계가 들이닥칠 수 있어. 만약 이곳에서 대대적인 싸움이 벌어진다면 루주는 귀혼곡으로 가 있어.”
“이유는요?”
“벽계가 진심으로 나선다면 가장 먼저 제거할 것은 암연과 루주다. 정보를 얻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니까.”
입술을 움직여 묘한 미소를 그려낸 원예가 “알겠어요, 공자.”하는 답을 내놓았다.
“이안공자를 초빙해준 것은 고마워.”
“마교에 좋은 감정을 심어주는 것은 홍화루나 귀혼곡에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어요.”
고개를 끄덕인 진무린은 몸을 일으켰다.
설마 일어서는 것이 서운한 눈빛인가?
진무린은 어쩐지 원예의 감정을 표정에서 읽은 느낌이었다.
**
운진은 모려원과 함께 소능산에 올랐다.
진무린은 홍화루로 향했고, 갑갑한 호랑이 정동추는 표정이 좋지 않아서 모려원은 오히려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문주께서 산책을 위해 나선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세요?”
“진 대협이 혈교를 향한다고 하시지 않았소? 그 전에 납타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볼까 해서 오르는 길이라오.”
“그걸 알아낼 방법이 있으세요?”
운진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술법은 기운을 이용하지요. 강호에서 알음알음으로 소개받다 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의 기운도 얽히고설켜 빠져나갈 틈이 없소.”
단지 기운이 얽혀 있는 것으로 납타이를 찾는다?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 모려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게 내 술법을 심어두었으니 기운을 타고 들어가면 혹시 걸리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라오.”
“걸리지 않으면요?”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소?”
우문에 현답이라 모려원은 멋쩍게 웃었다.
“혹여 노도가 엉뚱한 기운을 뿜어내거나 눈이 붉게 변하면 기운을 풀어 꾸짖어 주시오. 피를 찾을 수도 있소.”
진지하게 하는 운진의 청에 모려원은 “알겠어요.” 하고 바로 답을 냈다.
소능산에 올라선 두 사람은 잠시 상등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뒤에 운진은 사당 앞에 가부좌로 앉아 눈을 감았고, 모려원은 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주변을 경계했다.
**
모려원과 운진이 민가를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섬도곤이 의식을 차렸다.
눈을 뜬 그는 먼저 거대한 갓을 쓴 이안공자를 경계했다.
“치료를 맡은 이안공자라 하오. 교주께서 밖에 계시니 놀라거나 경계할 것은 없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이안공자는 그후 문밖을 향해 “환자가 깨어났습니다.” 하는 소리를 높다랗게 질렀다.
곧바로 문이 열렸고, 정동추가 들어섰다.
“교주.”
상체를 세우려던 섬도곤의 상체에 붉은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누가 너더러 예를 갖추라더냐! 쓸데없는 짓으로 애써 붙여놓은 상처가 벌어졌으니 시간만 더 소비하게 생겼다. 네놈은 언제쯤 그 미련한 구석을 털어낼 테냐!”
깨어난 것이 못마땅한가 싶을 정도로 섬도곤을 꾸짖은 정동추는 품에서 환약 하나를 다시 꺼내 침상 위에 툭 던졌다.
“벌어진 상처는 여기 이안공자에게 맡기고 얼른 그거나 삼켜.”
정동추가 지닌 환약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누구보다 잘 아는 섬도곤이라, 그는 송구한 표정으로 환약을 집지 못했다.
“대라구환단을 처먹은 놈이 이제와서 구환단을 아껴?”
“제자가 대라구환단을 먹었습니까?”
“할 일이 많다.”
앞뒤를 뚝 자른 한마디를 던진 정동추는 이제 더 볼 일이 없다는 투로 방을 나섰다.
“제가 정말 대라구환단을 먹었습니까?”
“치료에 앞서 교주께서 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잠시 비장한 표정으로 환약을 바라보던 섬도곤은 굳은 표정으로 입에 넣었다.
“오늘까지는 약을 제외한 음식을 금해야 하오. 내일까지는 힘을 쓰는 그 어떤 행위를 해서도 안 되는데 큰일을 보는 것도 안 되오. 모레면 확연하게 몸이 달라진 것을 느낄 것이오.”
몸을 살피는 섬도곤에게 이안공자가 몇 가지 주의사항을 더 일러줄 때였다.
문이 열리고 진무린이 들어섰다.
“형님!”
“정신이 들었구나. 잘 됐다.”
“교주와 형님께서 살펴주신 덕분입니다.”
“여기 이안공자께서 애써주셨지.”
“아직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말끝에 진무린은 이안공자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인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형님.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흘렀기에 제가 여기 누워있습니까? 듣기로 대라구환단까지 먹었다는데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섬도곤의 답답한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당장은 이안공자와 의논을 하는 것이 먼저였다.
“이야기를 다 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린다. 그전에 이안공자와 의논할 일이 있어 건너편 방에 다녀올 테니 다른 생각 말고 회복에만 신경 써.”
“예, 형님.”
몇 마디를 더 나눈 후에 진무린은 이안공자와 함께 대청을 지나 맞은편 방으로 향했다.
**
전도위가 마침내 수련동을 나섰다.
은천문의 제자들이 일제히 달려와 고개 숙였고, 겹겹이 호위하듯 가주의 전각으로 함께 걸었다.
장로들이 하나둘 급하게 달려왔는데 문주인 임운령 역시 전각의 입구에서 전도위를 맞았다.
“애쓰셨습니다.”
“크게 얻은 것이 없어 송구할 뿐이오.”
“본문의 발전과 제자들의 안위를 위해 애쓴 전 사부의 모습을 제자들은 크게 배웠을 것이고, 헌신하는 모습은 오래도록 본문의 정신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어찌 얻은 것이 없다 하십니까.”
정리하지 못한 수염과 움푹 들어간 볼이 전도위의 모습을 초췌하게 만들었는데 눈빛만큼은 생사를 걸고 사투를 벌인 직후의 무인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우선 쉬시고, 편하실 때 더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무슨 큰일을 했다고 쉴 것이 있겠소. 마침 다들 모였으니 문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수련동에서 얻은 작은 수확을 보여드릴까 하오.”
밖으로 내지는 않았으나 다들 “오오!” 하는 표정이었다.
“전 사부께서 보이실 검을 마다할 이가 있겠습니까? 펼치기만 하신다면 눈을 씻고라도 보겠습니다.”
임운령이 반갑게 전도위의 뜻을 받아서 곧바로 주변에 있던 장로들과 제자들이 뒤로 물러났다.
전도위는 겨울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후에 호흡을 골랐고, 이어 검을 꺼냈다.
쉐에에에에엑!
그가 펼친 것은 은천검법이었다.
그런데 놀랍고 신기하게도 마치 진무린의 검을 보고 익힌 것처럼 초식이 끊이지 않은 채 이어졌고, 곧바로 섬전검법으로 내달렸다.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 역시 끊이지 않았는데 진무린과 다른 점도 있었다.
쉐에에에에엑!
“오오!”
섬전검법까지 마친 전도위의 검이 바뀌는 순간, 장로들과 제자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트렸다.
은천검법을 펼치던 전도위가 보법을 바꾸며 섬전검법을 보였고, 몸을 돌릴 때는 다시 은천검법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색한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은천검법의 곳곳에 번득이는 섬전검법이 튀어나오는 터라 그 날카로움에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됐다!
향후 십 년, 이십 년 뒤라면 몰라도 그때까지 은천문의 제자들이 당할 일은 없겠다.
쉐엑!
짧게 허공을 가른 검이 멈췄을 때,
“우와-아!”
제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고, 장로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는데, 임운령은 무언가를 짐작한 사람처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
진무린은 간단명료하게 현재 상황을 전한 뒤에 또 주저함 없이 원하는 바를 전했다.
“구주에 관해 듣고 싶었으나 루주의 말로 이곳은 위험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안공자도 그렇게 판단하십니까?”
“그렇소, 진 대협.”
“혹여 벽계를 상대하게 된다면 구주도 끌어들일 생각입니다. 도움을 바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확인하고 우리와 손잡을 의사가 있는지를 알고자 함입니다.”
갓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읽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안공자가 내쉰 한숨을 통해 놀란 감정을 정리한다는 것쯤은 짐작했다.
“진 대협. 이 몸이 알기로 벽계의 무공을 감당할 이가 강호에는 없소. 그런데도 진 대협이 궁도의 목을 치겠다 했으니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소?”
“그럴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단단한 진무린의 답이 있고나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안공자께 청이 있습니다. 물론 벽계를 끌어내는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진법과 의술로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까?”
“흐음.”
이안공자는 재차 큰 숨을 내쉬었다.
“진 대협께서 혈교를 정리하신다는 계획은 결국, 벽계가 이용했던 술법을 진 대협이 이용하시려는 것이로구려.”
“비슷합니다.”
잠시 갓을 앞으로 기울인 채 침묵했던 이안공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의술은 몰라도 진법은 도움 드리기 어렵소. 이에는 귀혼곡의 아픈 사정이 있는 탓이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진무린은 이안공자가 오히려 서운할 정도로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진 대협.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그런 것이오. 귀혼곡은 지금까지와 변함없이 교류할 것이고 이 정도 수준의 도움은 당연히 드릴 것입니다.”
“오해하신 모양인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태로운 일을 청하며 어찌 거절을 염두에 두지 않았겠습니까.”
진무린은 막힘없이 생각했던 바를 털어놓았다.
“거절하시면 부담이 줄어듭니다. 이안공자를 지켜야 하고, 혹여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평생 마음에 담아야 할 텐데 그 부담이 줄어든 것이라 나쁘지 않습니다.”
“진 대협. 그렇다면 혹시……? 청강 진인의 일을 아직 가슴에 담아두셨습니까?”
이안공자의 질문에 진무린은 먼저 아프게 웃었다.
“한 번 가슴에 담은 사람을 지울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저는 아직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진무린의 답을 듣고 난 이안공자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