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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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37화
은천검제
제137화
태양이 산에 걸치며 붉어진 하늘 아래로 어둠이 스며들었다.
정상교는 뻔뻔하게 여러 개의 모닥불을 피운 채 저녁을 즐겼는데 힐끔거리는 눈빛과 앉은 자세를 봐서는 진무린을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다.
진무린은 동굴 안쪽에 앉아 어깨에 검을 걸친 자세로 밖을 경계했다.
“자네라도 떠나게.”
더는 지켜보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반걸음쯤 뒤에 앉은 정동추가 나직하게 뜻을 전했다.
“어차피 제자 놈도 살아나기 어려운 상황일세. 그러니 이 싸움은 본교의 권력다툼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좋아.”
진무린이 슬쩍 돌아본 곳에서 정동추는 마교 교주의 위엄을 되찾은 얼굴이었다.
“조만간 연락이 있을 겁니다.”
“자네의 사매와 사제가 움직이리라 기대하는 건가?”
“한 곳이 더 있습니다.”
“그들이 신의라 불리지 않은 다음에야 이놈을 살리기 어려워.”
“신의도 있습니다.”
진무린의 대꾸에 정동추는 눈빛이 무겁게 돌아왔다.
“대체 왜 이러나?”
“다음 대 교주가 될지 모를 인물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해두십시오.”
멈칫했던 정동추는 속내를 들킨 사람처럼 한숨소리 같은 짧은 웃음을 토해냈다.
“짐작했던 모양이로군.”
“아들이 반란을 일으킨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대라구환단을 먹였고, 마지막 순간에 제자만 데리고 가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단순히 제자를 위한 것치고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하게.”
진무린의 반 보쯤 뒤에 앉은 정동추는 차라리 후련하다는 투였다.
“아들 역시 미끼였습니까? 장로들의 눈을 가리는?”
“그렇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지. 저놈에게는 정말 재능이 있었으니까. 다만, 심지가 부족하고, 겁이 많아서 위기를 만나면 교활해지는 약점이 있었다.”
저 앞에서 일렁이는 모닥불에 시선을 둔 정동추가 말을 이었다.
“나는 강호일통 따위 바란 적 없다. 그런 미친 짓 보다는 마공이라 일컬어지는 본교의 무공을 바르게 익힐 방법과 본교의 사람들도 대우받으며 사는 세상을 바랐다.”
이미 깨져버린 소망이라 생각했는지 정동추는 나직하게 숨을 토해냈다.
“본교가 바르게 가느라 얌전해도 감히 넘볼 수 없도록 힘을 비축하는데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랬더니 그 힘으로 강호일통을 해야 한다는 멍청이들이 나오기 시작하더군.”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궁금하던 내용이어서 진무린은 잠자코 정동추의 말을 들었다.
“아들놈을 먼저 교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강호일통을 주장하는 늙은것들을 정리해 버릴 생각이었고. 그런데 저 모양으로 설치니 어쩌겠나.”
정동추의 답이 떨어진 직후였다.
멀리 있던 흑룡대 대원 하나가 급히 와서 무언가를 보고했고, 이호살과 삼호살, 수라항천대 대주 둘이 바삐 움직였다.
“혹시 자네의 사매나 사제가 도착한 건 아닌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진무린은 의아한 얼굴로 정상교 무리가 움직이는 것을 살폈다.
저 너머를 살피고자 해도 정상교 무리가 뿜어내는 진득한 마기 탓에 제대로 기운을 읽기는 어려웠다.
그 사이 일호살이 재차 무언가 지시를 내렸고, 다시 수라항천대 대주 두 명이 더 움직였다.
**
삼호살과 함께 움직인 이호살은 경사가 별로 없는 산 아래를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략 오십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몰려들었는데 하나같이 괴팍하기로 소문난 인물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이 추운 겨울날 부채를 펼치고 흔드는 혈수사선 추송완, 서른 중반으로 보이나 실제 나이는 여든아홉인 음정산생 금진표, 팔에 다섯 자 길이의 채찍을 감고 불진을 든 불문선자 현소조는 이호살도 가볍게 보기 어려운 고수였다.
그들 뒤로 역시나 이름을 떨치는 노괴와 사파의 고수들이 지금도 하나둘씩 그 숫자를 더하고 있었다.
“이곳은 본교의 중요한 행사가 있으니 특별한 용무가 없다면 다음에 다시 찾아주시오.”
“중요한 행사라!”
추송완이 부채를 흔들며 시구를 읊듯 이호살의 말을 배배 꼬았다.
“마교는 어찌 삼보를 말도 없이 얻으려 하시오?”
추송완의 질문에 이호살은 눈가를 좁혔다.
삼보라니?
그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도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오.”
“오해라.”
재차 말꼬리를 붙드는 추송완의 반응에 이호살은 끌어 오르는 화를 누르기 위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칠호살의 두 번째를 차지한 이호살께서 참는다니, 지나가던 개가 놀랄 일이구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적당히 하는 것이 좋을게요.”
“적당히 하지 않으면?”
이호살은 고개를 비틀며 추송완을 다시 살폈다.
강호에서 굴러먹은 세월이 있는데 저 정도 되는 인물이 대놓고 마교의 행사에 시비를 거는 이유를 알지 못해서였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모여드는 숫자가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이호살께서 지금 지키고 있는 사람이 마교의 교주와 진무린 아니오? 나는 그들을 만나봐야겠소.”
“혈수사선이 교주와 인연이 없는 것은 분명하니 진무린이란 자와 친분이 있었단 말이오?”
이호살의 반문에 모여있던 이들이 술렁거렸다.
“진실이었군!”
“달려오길 잘했어!”
“삼보를 마교가 지녔던 게 사실이네!”
웅성대는 내용은 대개 그런 종류였다.
게다가 떠들던 이들의 눈에 탐욕의 광기마저 어렸다.
이호살은 이제야 추송완이 했던 말을 이해했다.
“혹시 혈수사선은 본교가 삼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요?”
“이제와 발뺌하려 해도 늦었소.”
저들은 이곳에 삼보가 있다고 믿는 것이 분명했다.
추송완의 말을 들은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확신할 수 있는 일이었다.
“터무니없는 소리요. 이호살이 이름을 걸고 맹세할 테니 이만 돌아가시오.”
“귀한 명예를 굳이 걸 필요 있겠소? 우리 세 사람이 직접 만나보고 확인하리다.”
추송완의 대꾸가 떨어진 직후였다.
“누가 너더러 그런 것을 허락했단 말이냐!”
거센 고함과 함께 옷자락을 펄럭이며 소매와 바짓단이 짧은 누더기 차림의 노인이 중간에 내려섰다.
‘귀령화자 목순?’
이호살은 오늘 밤이 예사롭지 않음을 짐작하고 낯빛을 굳혔다.
“늦게 오셔서 남이 얻은 공을 가로채시려는 게요?”
“혈수사선 따위가 감히!”
목순이 손을 뻗자 추송완이 급히 부채를 휘둘렀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울 줄 알았던 음정산생과 불문선자는 경쟁자가 곤경에 빠진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두 걸음을 물러나 흥미롭게 대결을 지켜보았다.
십여 수가 급하게 오간 뒤였다.
발을 쭉 내밀어 추송완의 발등을 밟은 목순이 연달아 양손을 뻗었다.
퍼억! 퍼벅!
내내 거만하게 굴던 추송완은 그 한 수에 미간이 터지고, 가슴이 움푹 들어간 모습으로 죽고 말았다.
“교주와 진무린은 어디에 있느냐?”
몸을 돌린 목순의 질문에 이호살은 복잡한 심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뭔가 일이 제대로 꼬인 밤이었다.
**
임운령은 무거운 표정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은천문을 내려다보았다.
삼보를 찾아가는가 싶어 말렸더니 교주를 지킨답시고 마교의 세력과 싸움을 벌인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삼보를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 날아들었다.
그깟 마교, 은천령을 내리면 진무린은 얼마든지 구해온다.
그러나 임운령은 이미 한 번 은천령을 내려서 권한이 없었고, 이럴 때 도움을 청할 전도위는 아직 수련동에서 나서지 않았다.
홀로 달려가는 것을 겁낼 임운령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출입마저 막아놓은 상황에서 문주가 홀로 진무린을 위해 나서는 것 역시 함부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고얀 놈.”
확실하지는 않지만, 장 노대의 보고를 통해 진무린의 판단을 유추할 수는 있었다.
정동추가 위험에 빠진 것을 보았을 거다.
어떨 때는 답답할 정도로 진중하나 욱, 속이 터지면 물불을 안 가리는 그 성격에 아들이 아비를 해하는 장면을 보았다면 결과야 뻔한 것 아니겠나.
“문주. 장 노대입니다.”
그때 생각에 잠겼던 임운령을 장 노대가 불렀다.
고개를 돌린 그의 뒤로 다가온 장 노대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삼보를 지녔다는 말은 확실히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소문을 퍼트리는 방법이 치밀하고, 조직적인 것으로 보아 정보를 다루는 조직이 개입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쪽에서 사실을 유포할 수는 없겠소? 아니면 관심을 돌릴 만한 다른 소문이라도 괜찮소.”
“지금은 백약이 무효인 상황입니다. 이런 소문은 그저 잠잠해지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며 들불 번지듯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 적이 없던 장 노대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진청검왕이 삼보를 지니고 있어서 그리 강했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확실히 진 대협을 노린 소행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점창과 공동을 봉문시켰으니 그쪽 관련자나 마교에서 일부러 공적을 만들기 위해 그랬는지도 모르는 일이오. 위험한 상황이니 암연 전체에 몸을 좀 더 조심하라 꼭 일러주시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문주.”
보고를 마친 장 노대가 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섰다.
**
모려원은 원예에게서 급한 내용을 들었다.
또한,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삼보를 지녔다는 소문까지 함께 접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당장 몸을 일으켜 달려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모려원은 그러지 않았다.
“대사형은 그 정도에 잡혀 계실 분이 아니에요. 혹시 큰 상처를 입었거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나요?”
“진 공자께서 부상이라는 정보는 없었어요. 확실치는 않은데 교주의 제자가 부상이 심해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짐작만 하고 있어요.”
잠시 시선을 떨어트린 채 생각했던 모려원이 바로 눈을 들었다.
“제자의 안위를 위해 교주와 대사형이 움직이지 못할 이유는요?”
“그것까지는 알 길이 없어요.”
모려원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주. 혹시 모르니 귀혼곡에 연락해서 이안공자를 이리 모셔줄 수 있나요? 사제와 백면호리도 청해주면 더 좋고요.”
“이안공자는 외부로 나오기 어려워요. 제자의 부상이라는 말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대사형은 그깟 포위에 갇혀 있을 분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다친 곳 없는 대사형이 그리할 정도라면 반드시 중요한 인물일 테고 몹시 위태롭다는 뜻일 거예요. 구해낸다 하더라도 치료를 못 하면 제가 달려갈 의미가 없지요.”
모려원은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루주. 대사형은 분명 루주와 귀혼곡을 믿고 그곳에서 버티고 계실 거예요. 부디 도움을 주세요.”
“방법을 강구할게요, 모 소저.”
진심에서 우러나온 모려원의 청에 원예가 결국 답을 내놓았다. 그 직후에 모려원은 바로 몸을 일으켰고, 망설임 없이 창을 향해 움직였다.
“모 소저.”
원예가 불렀고, 창 바로 앞에서 모려원은 고개만 돌렸다.
“조심하세요.”
답은 없었다.
대신 고맙다는 투로 고개만 끄덕인 모려원은 훌쩍, 창으로 몸을 날렸다.
“졌네. 완전히. 진 공자의 뜻을 저토록 확실하게 짐작하다니.”
혼잣말을 뱉어낸 원예는 바로 냉정한 표정을 되찾았다.
“설란을 불러.”
“예, 루주.”
시비가 급하게 연통줄을 당겼다.
**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나 그사이 불고 불어 지금은 백 명이 넘는 무인이 모여 마교에게 길을 열 것을 요구했다.
기가 막히는 것은 칠십 명을 넘으면서부터 어중이떠중이, 오합지졸까지 하나둘 가세한다는 점이었다.
보고를 받은 정상교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고, 일호살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산 아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몰려든 것들이야 수라항천대를 보내면 깨끗하게 정리한다.
문제는 뒤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진무린과 정동추가 튀어나오면 일대 혼전이 벌어진다는 데 있었다.
몰려든 놈들은 진무린과 정동추를 추적하겠답시고 일제히 날뛸 테고, 아차 했다가는 마교가 삼보를 지녔다는 헛소문에 말려들 수도 있었다.
“길을 열어주면 어떻겠소?”
그때 정상교의 엉뚱한 질문이 나왔다.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울컥 올라온 화를 억지로 누르며 일호살은 이유를 묻는 시선으로 정상교를 보았다.
“어차피 저들은 우리와 목적이 다르지 않소? 달려들면 진무린이란 자가 나설 테니 그 틈에 우리는 교주를 노리는 게요.”
“혼전이 벌어진 틈에 도주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왜 그런지는 몰라도 섬도곤을 지키고자 저러는 게 아니오? 그놈을 데리고는 곧 붙잡히게 돼 있소. 만약 진무린이 섬도곤만 데리고 도주한다면 우리야 더 좋은 게 아니오?”
교주를 두고 간다면?
일호살이 이거 봐, 하는 눈으로 동굴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또다시 싸움이 벌어졌는지 아래쪽에서 허공을 가르는 무기 소리가 울렸다.
“보시오. 욕심에 서로 죽고 죽이는 참이오. 우리는 아예 진무린이 삼보를 지니고 있다고 떠듭시다. 그러면 바깥에 몰려든 것들이 놈을 노리지 않겠소? 저놈이 실력을 보여주면 더 좋소. 검기를 뿌리는 것이 삼보의 무공이라 믿을 수도 있고.”
정상교의 계획을 들은 일호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