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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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0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14화
은천검제
제114화
점심을 먹은 진무린은 요정의 운기를 살폈고, 이후 내공의 운용을 살펴주었다.
점심과 저녁의 중간쯤이었다.
요정을 부른 진무린은 얼추 만족한 심정이었다.
“이제 기본은 모두 갖췄다. 남은 것은 배운 대로 수련을 지속하는 것이니 사부의 말씀을 따라서 노력한다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사숙.”
요정의 인사를 받은 진무린은 가볍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잠시 나갔다 오마.”
요정에게서 몸을 돌린 진무린은 곧장 민가를 빠져나왔다.
“진 대협.”
그리고 요정을 의식했던 모양인지 문을 나서기 무섭게 백면호리가 진무린을 불렀다.
“진심으로 감사하네.”
“안 어울린다고 했었지?”
“이 인사까지만 받아주게.”
백면호리가 진심을 담아 건네는 포권이었다.
진무린은 비슷한 자세로 백면호리의 인사에 답례했다.
고개를 든 백면호리는 그의 말대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뭘 하려나?”
“오후에 모산으로 출발할까 해. 그곳에 들렀다가 본문에 가서 문주를 뵐 생각이고.”
“이곳에 혈교 놈들이 들이닥치면?”
“오늘 오후에라도 루주에게 말하고 귀혼곡으로 가서 지내.”
“정아 혼자 수련이 되겠나?”
“기본은 모두 갖췄어. 저 정도라면 남은 것은 운기와 반복하는 수련밖에 없으니 한 달에 한 번 정도 루주에게 보이는 것으로도 충분해.”
근심을 덜어낸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백면호리는 뭔가 아쉬운 투로 입맛을 다셨다.
“잘하는 거겠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정아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일 말일세. 괜히 상승무공을 가르쳐서 엉뚱한 일에 말려드는 건 아닌지 이제는 또 그게 걱정되네.”
“그럼 여기에서 수련을 그만두라고 하면 되지.”
“미쳤어? 그리고 저리 열심히 하는 애가 그만하란다고 따르겠냐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을 해놓고도 미안했는지 백면호리가 힐끔 진무린의 눈치를 살폈다.
“여협 요정. 듣기 좋지 않아?”
“그게 싫을 리가 있나.”
“그렇다면 고민할 게 없잖아. 전에 했던 말대로 강호에 어차피 발을 들인 거라면 제대로 된 상승무공을 익히는 게 더 좋은 거고. 이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돌아가는 것이 아니니까.”
마음이 편해졌는지 백면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진무린은 걸음을 옮겨 소능산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서 진무린은 암연을 부르는 기운을 뿜어냈다.
이유는 분명했다.
모산과 은천문, 그리고 황종관과 양소소의 소식을 들어볼 참이었다.
겨울이라도 햇살은 참으로 따듯한데 대신 차가운 공기가 코를 얼리고 볼을 파헤칠 정도로 날은 추웠다.
웅크린 이들 사이를 걸은 진무린은 계단을 올랐고, 마침내 소능산에 도착했다.
새벽에 도착했을 때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사당은 새 단장을 마친 모습으로 상등을 내려다보고, 겨울을 맞은 상등은 고개를 깊게 집어넣고 봄을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홍화루, 빼곡하게 늘어선 기와지붕까지, 상등은 변함이 없건만 강호의 정세는 소용돌이치는 물처럼 급변하고 있었다.
‘벽계라.’
적은 분명했다.
그렇다고 구주를 무턱대고 믿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어서 갑갑한 심정을 진무린은 나직한 한숨에 토해냈다.
그때였다.
“찾으셨습니까?”
암연의 기운을 풍겨낸 중년 남자가 진무린의 뒤편 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모산에 들렀다가 본문으로 갈까 합니다. 본문과 모산에 특별한 일은 없는지 알고 싶습니다.”
진무린은 먼저 궁금한 내용을 꺼내 들었다.
“모산은 문주가 산에서 내려와 감숙으로 향하고 있는데 복장은 전과 다를 바 없으나 왼손 검지와 중지를 다쳤는지 천으로 싸맨 모습이었습니다.”
진무린의 표정을 본 중년 남자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다만, 모산은 하나뿐인 계단을 오르지 않는 한, 안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알기는 어려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산을 내려왔는지는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이 어찌 암연의 잘못이겠습니까? 이런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진무린의 말을 들은 중년 남자가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종횡주를 이용하면 움직이는 속도가 대단할 텐데요?”
“유유자적 걷고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이기도 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서 급할 것이 없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진무린은 운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강호의 경험이라고 진무린과 함께했던 것이 전부인 늙은 도사가 홀로 길을 나섰다면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일이었다.
“맹주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축성산을 가로지르고 계신 데 가신들의 경계가 삼엄해 함부로 다가가기 어렵습니다. 아직 목적지가 어디인지, 왜 나섰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속도나 방향으로 봐서는 분명 정한 바가 있는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진무린은 이어 양소소 일행과 은천문의 소식을 물었고, 별다를 것 없는 내용을 들었다.
“혈교가 강호에 나선 게 아닌가 싶은데 혹여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암연이 혈교의 교주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천과 호북에서 보았다는 보고는 있는데 현재 위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교주가 직접 나섰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혈교의 교주 납타이는 왼쪽 눈에 안대를 했고, 귀가 턱까지 늘어져서 한눈에도 바로 알아볼 정도인데 두 곳에서 불현듯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바람에 종적만 알뿐 경로나 목적을 알아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흐음.”
“전에는 무랍을 조사하기 위해 모 소저와 종 소협이 나섰으나 지금은 본문이 출입을 금해 암연이 행적만 살피는 중입니다.”
중년 남자의 말을 들은 진무린은 모산의 문주 운진을 떠올렸다.
다시는 강호에 나설 일 없다던 운진이었다.
혼자서 나서기에는 세상 경험이 부족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손가락을 천으로 감싸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모습으로 걷는다면 이는 필시 혈교와 관련 있을 확률이 높았다.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진 대협.”
“마교의 제자 구정봉의 위치를 확인해서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더불어 운진 문주의 현재 위치까지 부탁합니다.”
“최대한 서둘러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임무를 맡은 암연의 중년 남자가 포권을 보인 뒤에 산으로 들어갔다.
“후-.”
진무린은 상등을 향해 길게 숨을 뱉었다.
과거와 똑같이 진행된다는 것은 이미 생각했던 일이었다.
흑사련과 마등의 역할을 마교와 구정봉이 맡은 것이 다르고, 풍령관을 대신해 점창과 공동이 움직이는 것이 다를 뿐, 구조나 움직임은 같았다.
아무리 마등을 두 번씩 죽이고, 잠시도 쉬지 않은 채 달리고 뛰어다녀도 청강을 지키지는 못했다.
지금도 그렇다.
화산의 위험을 막고 바로 상등에 왔더니 이번엔 운진이 위기에 놓인 꼴이었다.
넓디넓은 강호에 곳곳에서 적이 날뛰는데 홀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등의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진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남굉모와 나탑사, 양소소는 황룡을 떠나 귀주를 향해 걸었다.
돈 있겠다, 무공이 있어 걸음 빠르겠다, 뒤따르며 신경을 거슬리는 구철환만 아니라면 정말이지 속 편한 걸음이었다.
길을 고민한 세 사람은 주통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산세가 좀 험해 그렇지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고, 보름 이상 길을 단축하는 터라 굳이 또 돌아갈 이유도 없었다.
산에 들어선 세 사람은 겨울 산의 정취를 만끽하며 유유자적 걸었다.
“출출하다. 술로 목을 축인 뒤에 가자.”
길의 중간에서 남굉모가 말을 꺼내자 나탑사와 양소소가 움직여 술병과 건량을 준비했다.
“가가.”
행복한 표정으로 남굉모의 잔에 술을 채워준 나탑사가 양소소와 본인의 잔에도 술을 따랐고, 이어 세 사람은 동시에 잔을 비웠다.
두 번째 잔을 채운 다음이었다.
“언제까지 함께 다닐 테냐?”
남굉모가 양소소에게 묘한 질문을 건넸다.
“세상에서 네 성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와 은천문의 문주일 게다. 불편해. 그러니 이리 함께 다니는 이유를 말해.”
나탑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양소소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진정 이 외조부와 강호유람을 다닐 생각이었다면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그러니 너는 산에서 내려가는 대로 피음향으로 돌아가도록 해.”
“제 몸을 생각하시는 거라면 괜찮아요.”
“내가 불편하다니까. 경지로는 상단전을 이미 깨달은 네가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이유를 꼭 들춰야겠어?”
그런 사연이 있었어?
나탑사가 확인처럼 돌아보았을 때 양소소는 입술을 내밀며 곤란한 얼굴이었다.
“저 표정을 보라지.”
“무엇 때문에 그러세요, 가가?”
“바라는 것을 손에 못 넣으면 저러지.”
남굉모의 답이 떨어진 뒤였다.
“무공을 주세요.”
양소소의 대꾸가 있었다.
“뭐라? 뭘 달라고?”
“외조부의 무공이요. 어차피 제자도 없어서 외조부 대에서 맥이 끊기잖아요.”
“그래서? 이제 와서 내 무공을 배우겠다?”
“아니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지켜보던 나탑사조차 이해하지 답이었다.
“은천문의 검법 두 가지가 유출되었어요. 그러니 강호에 제자들을 내보내려면 무공이 필요해요.”
“허허! 허허허!”
“외조부. 은천문에 외조부의 무공을 전해주세요.”
“후우-.”
기가 막힌 웃음을 터트렸던 남굉모가 이번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강호유람을 이야기했던 게냐?”
“그렇지는 않아요. 지난 세월 반목하며 지냈던 것이 아쉽기도 했고, 외조부와 외조모를 모시고 이런 시간을 갖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드렸던 제안이에요.”
부러질 때 부러지더라도 양소소는 거짓말 따위 하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그녀의 눈빛과 태도로 보아 진심을 토해내는 것이 분명했다.
“오는 길에서 생각했어요. 조카의 뒤에 은천문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봉문하다시피 제자들을 내보내지 못하는 형편이라 홀로 얼마나 힘겨울까 하고요.”
“왜 하필 나냐? 왜 내 무공이냐고?”
“외조부밖에 기댈 곳이 없으니까요.”
양소소는 남굉모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터무니없이 들리시겠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외조부께서 낙일검을 깨우쳐주지 않은 것이 이런 날을 위한 하늘의 안배는 아닐까 하고요.”
“내 앞에서 또 그놈 이야기를 꺼내? 진무린이란 아이를 가르쳐준 것으로 털어낸다고 네 입으로 말한 것은 잊었냐?”
거칠게 날아든 남굉모의 질문에 양소소는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묻지 않으셨다면 유람이 끝날 때까지 입 밖에 내지 않았을 거예요. 이런 시간이 제게도 좋았거든요. 그런데 말이 나왔으니 더 이상 전처럼 즐거울 순 없겠네요.”
마음을 털어낸 것처럼 양소소는 잔을 시원하게 비웠다.
고개를 든 그녀가 남굉모를 바라보았는데 서운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외조부. 외조모께서 삼십 년을 기다리셨던 마음을 이해하세요?”
그런 뒤에 그녀는 뜬금없는 질문을 꺼냈다.
“삼십 년을 한결같이 외조부가 오실 날만을 기다리셨어요. 저는 그런 외조모가 부러워요. 기다리면 언젠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희망이 있잖아요.”
감정이 올라왔는지 어색하게 웃은 양소소가 술병을 집었다.
“드세요. 헤어지기 전에 석 잔은 채워야지요.”
“흐음.”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남굉모와 나탑사가 잔을 비우자 양소소가 두 사람의 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피음향에 있을 테니 제가 담근 술이 그립거나 유람이 지겨우면 언제고 오세요.”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운 양소소가 나탑사를 향해 잔을 들었다.
“외조모. 모처럼 자리가 저 때문에 불편해진 점 사죄드려요. 모쪼록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세요.”
말을 마친 양소소가 성격처럼 단호하게 잔을 비웠다.
“저는 올라왔던 길을 거슬러 갈 테니 두 분은 가던 길로 가세요.”
정말이지 깔끔한 마무리였다.
그런데 떠나는 양소소야 그렇다 쳐도 어디 남은 남굉모와 나탑사가 그러기 쉬운가.
“빙궁의 무공도 도움이 되나요?”
일어서는 양소소를 나탑사의 질문이 붙들었다.
“외조모. 말씀은 정말 감사해요. 그러나 그렇게 했다가는 빙궁에서 외조모를 그냥 두지 않을 테고, 또 내공이 전혀 달라서 도움 되지 않아요. 말씀은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나탑사에게 양손을 잡아 보인 양소소가 남굉모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무언가 말하려던 그녀는 대신 애잔하게 웃은 뒤에 남굉모에게 깊은 읍을 올렸다.
평생 처음 받아보는 공손한 인사였다.
그동안 아쉬웠던 시간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었고, 진무린에게 도움 준 덕분에 이렇게 마주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양소소의 심정이었다.
“젠장! 젠장! 제엔-장!”
인사하는 외손녀에게 건네기엔 너무도 거친 말이요, 분노 가득한 음성이 남굉모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평생 내가 마실 술을 담그고! 원할 때면 언제고 술을 가져와! 그 정도도 못하겠다면 나도 안 돼! 절대 못 해!”
남굉모가 내공을 얼마나 담았는지 주통산이 쩌렁쩌렁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