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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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2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07화
은천검제
제107화
구정봉이 기대했던 것보다 궁도의 방문은 빨랐다.
구정봉은 먼저 수하가 데려온 궁도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런 뒤에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맞은편에 앉은 객을 살폈다.
“들었던 분과 다른데? 나는 하후도 회주라는 분이 오시는 것으로 알았소.”
“일이 있어 본인이 앞으로 회주를 맡게 되었소. 궁도라 하오.”
팽팽한 대화였다.
구정봉은 뻣뻣한 반면, 궁도는 느긋한 것이 달랐을 뿐이었다.
“풍령관 관주의 일은 유감이오.”
“원하시는 바를 말씀하시오.”
이번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부친의 죽음을 애도하는 말마저도 외면한 채 구정봉은 대뜸 본론을 꺼내라고 요구했다.
“풍령관이 몰락하였으니 처음부터 일을 재정비할 생각이오. 그전에 구 대협의 의중을 듣고자 방문한 길이니 함께 하실 의향이 있는지 답변을 부탁하오.”
“터무니없는 강호일통 따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쯤 하시는 것이 좋소. 나는 선친과 달라 그리 아쉬울 것이 없다는 사실도 떠올리시고.”
상대의 말투를 흉내 내는 것처럼 뻑뻑한 대화가 이어진 뒤였다.
“하하하.”
구정봉의 날선 반응에 궁도는 웃음으로 답했다.
“마교를 손에 넣을 구 대협에게 강호일통이라는 먼 미래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겠지요. 그러나 구 대협의 대사형 되는 섬도곤이 준비하는 일을 안다면 생각이 달라지실 게요.”
무슨 수작이냐?
구정봉은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강시술과 잠력대법, 그리고 하위라고 하나 폭렬공까지 외부로 유출한 일이 조용하게 넘어가리라 기대하신다면 너무 순진한 바람이 아니겠소?”
“흥. 대사형과 연줄이 닿은 모양인데 풍령관에 파견한 흑랑대가 잠력대법과 폭렬공을 유출하였으나, 그나마 흑랑대 대주와 관련자들이 화산에서 모두 죽는 바람에 벌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게 좋을 거요.”
“강시술은 어찌 변명할 참이오?”
“그런 일까지 내가 굳이 회주께 말씀드려야 하오?”
날카로운 구정봉의 대꾸에 궁도는 이해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을 찾아간 일은 죽은 부양곽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노라 변명하면 되겠으나 강시술의 유출은 빠져나오기 어려우실 듯한데? 어떻게 묘안이 있소?”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궁도의 말에 구정봉은 눈에 힘을 주었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마천강기가 필요하시지 않으시오?”
기세를 잡은 궁도는 곧바로 구정봉이 가장 바라는 일마저 툭 하고 던졌다.
“강호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이를 강호삼보라 한다오. 물론 그것을 찾아 나서면 무림공적으로 지정되는데 그야 뭐 정도맹에 속한 자들이나 떠들 일이지 마교가 어디 그런 것에 신경 쓸 것이 있겠소?”
“새로 오신 회주께서 고작 하신다는 말씀이 강호삼보라?”
“세 가지 보물에 무공과 내공이 숨겨졌다는 사실은 코흘리개 아이들조차 다 아이는 이야기이니 더 언급하지 않겠소. 그러나 세 가지 무공과 내공을 바탕으로 아홉 개의 관을 통과하면 아홉 개의 검법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소.”
그런 게 있어?
구정봉의 눈이 번득하고 올라갔다.
“그 아홉 가지의 검법을 얻는다면 능히 마천강기를 누를 것이고, 천하에 적수가 없으리라 감히 장담하오.”
속을 보인 것이 민망했을까.
구정봉은 애써 눈매에 담긴 욕망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이전 회주께서는 내내 강호일통이라는 명분만 내세웠지 삼보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아홉 가지 무공을 꺼내 드시니 의도가 심히 의심스럽소.”
“그야 그릇과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 이해하시면 되지요. 강호일통이란 풍령관이나 혈교가 탐낼 것이지 마교를 움켜쥘 구 대협께 내세울 조건은 아니지 않소?”
구정봉이 마른침을 삼키는 것을 본 궁도가 마저 말을 이었다.
“조만간 천하영웅대회가 열릴 거요. 그 대회를 통해 강호무림맹이란 새로운 단체가 결성되는데 덕분에 구대문파를 비롯한 정도문파가 둘로 나뉘게 되지요.”
이거 봐?
구정봉의 눈에 올라온 탐욕과 궁금한 심정을 확인한 궁도가 넉넉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강호삼보가 어디 있는지 흘릴 참이오. 아! 놀라지 마시오. 내가 원하는 것은 혼란이니 비슷한 정보만 흘릴 뿐이고, 그 혼란은 구 대협이 삼보를 찾는데 좋은 명분이 되어줄 것이라 믿소.”
“천하영웅대회는…….”
“점창이 개최하고 공동파가 협조하는 것으로 결정됐소. 이미 두 곳의 장문인이 동의한 바요.”
구정봉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속을 들여다본 듯한 궁도의 답이 있었다.
“흠.”
구정봉은 잠시 시간을 끌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이전 회주도 그렇고 도대체 왜 직접 나서지 않소? 이 정도로 일을 계획할 수준이라면 은천문과 구대문파쯤 얼마든지 상대할 텐데?”
“암적이 있소.”
“암적? 숨은 적을 말씀하시오?”
궁도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조차 흔적을 찾기 어렵다오. 혼란이 이어지고, 구 대협이 진무린을 쓰러트릴 실력을 갖추면 그들은 반드시 놈을 돕기 위해 나설 게요.”
진무린이란 이름이 나오자 구정봉의 볼이 씰룩했다.
“암적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을 제거하여 숨은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이고, 구 대협은 바깥세상의 주인이 되는 게요.”
“흠.”
“강호일통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면 마교를 손에 넣은 뒤에 진정한 강호의 일인자가 되는 것은 어떻소? 누구도 앞길을 막지 못하고, 그 어떤 이도 구 대협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진정한 일인자.”
횃불처럼 선명한 욕망이 구정봉의 눈에서 거칠게 타올랐다.
“그렇다면 당분간 진무린이란 자는 그대로 두시겠다?”
“그래서야 되겠소? 구 대협이 소교주를 상대하는 것과 같은 방법을 이용할 참이오.”
“수족을 자른다? 본인이 마선이절과 달려간 화산조차 무너트리지 못했는데?”
“시간이 충분한데 급할 것이 무엇이오? 귀혼곡과 홍화루가 있고, 그곳을 왕래하는 백면호리라는 인간이 있으며, 당장 화산의 일을 망친 파천신군이 있는데.”
“오호라.”
“모산의 문주란 늙은 것도 벌을 줘야 하지 않겠소? 풍령관의 복수라는 좋은 명분이 그럴듯하오만?”
관심을 보이는 구정봉을 향해 궁도가 넉넉하게 말을 덧붙였다.
**
다음 날 하루를 독곡에서 더 머문 진무린은 그 다음 날 오전에 목옥을 나섰다.
“제자는 당분간 화산에 머물까 합니다. 혹 필요한 일이 있다면 암연을 통해 연락 주십시오.”
“외조부와 외조모를 모시고 강호 유람을 나서는 길에 번거롭게 찾을 일이 뭐가 있겠니. 함께 못 가 그것이 아쉽다만, 언제고 기회가 있겠지.”
양소소와 인사를 마친 진무린은 남굉모를 향해 몸을 돌렸다.
“주신 가르침을 깊게 새겨 반드시 이루는 것이 있도록 하겠습니다. 모처럼 나서시는 걸음이니 두루 둘러보시고, 훗날 인연이 되면 또 뵙겠습니다.”
“강호가 넓어 언제 마주칠지 모르겠다만, 혹여 들리는 소식이 있다면 귀를 기울이마.”
“뵙게 돼서 반가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제자는 사고의 조카뻘입니다. 말씀을 편히 하십시오.”
“다음에 그럴게요.”
나탑사와 인사를 마친 진무린은 마침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진무린이 숲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놈 참. 보면 볼수록…. 커흠.”
“낙일검과 똑같다는 말씀이죠?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의지를 담은 눈매가 특히요.”
입맛을 다시는 남굉모가 궁금한 얼굴로 양소소를 보았다.
“정말 유람을 나설 참이냐?”
“아무렴 지난 삼십 년을 이곳에서만 지내신 외조모에게 거짓말을 했을까요? 외조부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둘이 단출하게라도 출발할 생각이었어요.”
“가가께서 힘드시면 소녀는 이곳도 괜찮습니다.”
“외조모!”
양소소가 농담 반, 진담 반의 앙칼진 눈으로 돌아본 뒤였다.
“저 아이가 화나면 방법이 없다. 준비해서 출발하자.”
남굉모가 고개를 저어가며 답을 내놓았다.
**
독곡에서 멀어진 진무린은 느긋하게 화산으로 향했다.
걸리는 것이 두 가지 있어 그를 먼저 해결할 생각이었다.
먼저 마교를 상대한 후에 곧바로 길을 나선 터라 뒷일을 챙기지 못했고, 다음으로 표충량에게 몇 가지를 전해주겠노라 말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걸렸다.
다행히 급할 것 없는 걸음이었다.
가는 길에서 청강의 전언, 남굉모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화산에서 내었던 검기를 돌이켜 볼 계획이고, 동시에 아직 녹지 않은 영약의 기운을 풀어낼 운기도 여유 있게 해볼 참이었다.
반나절쯤 걸었을 때였다.
암연의 기운을 느낀 진무린이 시선을 들었을 때, 길의 저 앞에서 장 노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소식을 전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우선 반가운 마음이 먼저였다.
진무린은 가볍게 웃은 뒤에 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진 대협.”
“노대께서 직접 나오셨습니까?”
“진 대협의 얼굴이 그리워서 암연의 책임자라는 위세를 이용했습니다.”
장 노대의 넉넉한 대꾸에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곳이기는 하나 혹시 몰라 안쪽에 자리를 봐두었습니다.”
이어 장 노대가 권유해서 진무린은 잠자코 길을 벗어나 따랐다.
바위의 뒤편에 숨겨 놓은 것처럼 펼쳐진 작은 공간이었다.
네 사람 정도가 여유 있게 앉을까 싶은 아담한 장소에 도착한 장 노대는 진무린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래 봐야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는 정도였다.
“점창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공동과 주고받은 내용을 추려보면 천하영웅대회를 개최하겠다는 것인데 의도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장 노대가 바로 내용을 꺼내 들었다.
“소강명 부맹주가 점창의 장로가 아닙니까? 공동 또한 약연과 자경이 뇌옥에 갇힌 터라 영웅대회를 개최해봐야 모이는 이들이 별로 없을 듯한데요?”
“소림과 무당에 협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 두 곳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대회의 규모가 정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림과 무당이 나서 공인해준다면 점창과 공동은 오히려 망가졌던 체면을 세우는 꼴이 된다.
그렇더라도 이해 안 가는 점은 아직 많았다.
“영웅대회를 개최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신진들이 나설 계기를 마련한다는 취지로 보고 있습니다.”
“맹주께서는 이 일을 알고 계십니까?”
“아직 정도맹에는 정식으로 알리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비월이라는 조직이 있는데도요?”
“그들은 원래 구대문파의 속가제자들로 조직된 터라 주요 직위에 있는 자들은 현 맹주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장 노대의 답을 들은 진무린은 답답한 심정을 나직한 숨으로 토해냈다.
“진 대협. 앞으로의 일정을 어찌 되는지 알아오라는 문주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진무린에게 장 노대의 질문이 건너왔다.
“먼저 화산으로 가 잠시 머물고, 그 뒤에 특별한 일이 없다면 본문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혹 본문에 일이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전 사부는 계속 폐관수련 중이시고, 문주께서도 전과 다름없습니다. 다만, 무공이 유출된 상황을 염려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만 할 뿐입니다.”
은천검법과 섬전검법이 유출된 상황이었다.
은천문을 책임진 문주 임운령이라면 당연히 바깥에 있는 진무린이 걱정스럽기도 하겠다.
“사매와 사제는 어찌 지냅니까?”
“전에 없이 무공에 전념하는 터라 문주께서 무척 기뻐하십니다.”
모려원과 종무헌의 소식을 들은 진무린이 기분 좋게 웃은 다음이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짧은 대화의 끝에서 장 노대가 몸을 일으켰다.
“살펴가십시오.”
“진 대협, 무탈한 모습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장 노대가 안쪽으로 사라진 다음이었다.
다시 길을 나선 진무린은 곧장 화산으로 향했다.
점창과 공동이 영웅대회를 개최하겠노라 움직인다면 그 뒤에는 분명 벽계가 있으리라.
흑사련부터 풍령관, 마교까지, 하후도가 속해 있는 벽계를 그대로 두고는 강호를 어지럽히는 음모는 끊이지 않는다.
문제는 진무린 홀로 상대하지 못할 집단이라는 점과 구주라는 곳도 있는 대로 믿기 어렵다는 데 있었다.
‘화산에 들렀다가 본문으로 돌아간다. 가서 벽계와 구주에 관해 분명하게 말씀드린다.’
방향을 정한 진무린은 다시 청강의 전언과 남굉모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길을 걸었다.
양소소가 챙겨준 건량으로 점심을 대신하며 길을 걸은 진무린은 어둠이 내릴 때쯤 객잔에 들었다.
“방이 있습니까?”
“이 층이 괜찮으시다면 여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식사를 마치고 올라갈 테니 준비해주십시오.”
방을 청한 진무린은 객잔의 안쪽 자리로 움직여 의자에 앉았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여기 손님들이 많이 찾는 두 가지 요리와 밥, 그리고 술을 부탁합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주문을 받아 돌아가는 점소이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였다.
섬뜩한 감각이 칼로 찌르는 것처럼 진무린에게 달려들었다.
맹세컨대 등룡창천을 익힌 이후로 이 정도로 강렬한 기운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하후도?’
진무린이 고개를 앞으로 돌렸는데 탁자 앞에 제법 중후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앉아도 되겠나?”
“거절해도 됩니까?”
숨도 안 쉬고 나온 진무린의 대꾸가 재미있다는 투로 웃은 중년 남자가 여유로운 태도로 맞은편에 앉았다.
“하후도에게 들었던 것과 다른 것을 보면 그사이 또 발전이 있었던 모양이군. 참으로 대단하네.”
“벽계 분입니까?”
“궁도라 하지.”
진무린이 질문했고, 궁도가 묵직하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