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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06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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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106화

은천검제

제106화

 

일찌감치 객잔을 찾아 편안한 밤을 보낸 진무린과 남굉모는 다음 날 새벽같이 달리기 시작해 오후에 독곡의 입구에 도착했다.

손가락을 길게 펴서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다섯 개의 봉우리 아래로 말라버린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는데 계곡 틈이 워낙 깊어 안이 쉬 보이지는 않았다.

언덕을 내려가면 바로 항아리 형태의 독곡이 시작되고, 그중 두 번째 봉우리 앞에 나탑사와 양소소가 있다고 들었다.

남굉모는 긴장한 눈치였다.

독곡은 그에게 외면했던 지난 삼십 년의 세월이고, 그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던 그가 가장 이기기 힘든 여인 양소소와 지난 세월 내내 무겁게 자리 잡았던 여인 나탑사가 있는 장소였다.

“가보자.”

잠시 독곡을 내려다보던 남굉모가 마침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비장한 표정을 보자 혹시라도 두 여인이 다른 곳으로 옮겼으면 어떻게 하나 싶은 염려마저 들 지경이었다.

일각쯤 걸었다.

마른 가지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한 나무 틈을 지나자 거대한 바위 암벽 앞에 나무로 단단하게 지은 목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울타리도 있었고, 마당 한구석에 돌로 만든 화덕이 보였으며, 정면에 창과 목옥에 들어가는 출입구가 두 사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흐음.”

이럴 때 시간을 끌면 공연히 생각만 많아진다.

남굉모의 숨소리를 들은 진무린은 목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고. 제자 진무린입니다.”

정적을 깨며 진무린의 음성이 울렸고, 잠시 후에 목옥이 열렸다.

문을 통해 나선 여인은 금색 머리칼에 초록색 눈, 하얀 피부를 지녔으니 필시 빙궁의 소공주가 분명했다.

아름다운 외모에 세월을 덮어쓴 그녀가 남굉모를 본 뒤에 동상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쯤 문을 통해 나선 양소소 역시 남굉모를 보고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본문에 암연이 있음을 알았지만, 외조부와 함께 올 줄은 몰랐다.”

따지는 것처럼 양소소가 시선을 주었는데 남굉모는 나탑사에 고정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세요?”

양소소의 독한 음성이 나오고서야 남굉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난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다만, 네가 말한 대로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양소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눈가를 좁힐 때였다.

“선배께서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화산에 침입한 마선이절과 교주의 셋째 제자 구정봉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진무린의 설명을 들은 양소소가 확인처럼 남굉모를 보았고, 이어 나탑사의 뒷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이 여인을 어찌하겠느냐는 질문과 같은 행동이었다.

“나는 이미 백 살이다. 아무리 내공이 정순하다고 하나 언제 세상을 등질지 모른다. 빙궁의 풍습을 들었음에도 강호에 와서 새 삶을 살길 바라 외면했다만, 지금도 마음이 같다면, 그리고 외손녀가 용납한다면 앞으로 함께 지내고 싶다.”

“제가 여기 있는 것을 보고도 모르시겠어요? 저는 이미 외조모로 섬기고 있어요.”

양소소의 대꾸에도 남굉모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무거운 얼굴로 답을 기다렸다.

머리칼과 수염을 정리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순순히 따르더니 그때쯤 이미 결심했던 모양이었다.

“용서하기 어렵다는 것은 안다. 지난 세월을 돌이키지 못하지만…….”

나탑사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본 남굉모가 말끝을 삼켰다.

툭. 툭. 툭. 툭.

말없이 다가선 그녀는 힘없는 손짓으로 남굉모의 가슴을 때렸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고, 남굉모의 가슴을 때리는 동작 역시 멈추지 않았다.

“미안타.”

남굉모가 나탑사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준 직후였다.

겨우 버티던 그녀가 남굉모의 가슴을 향해 무너졌고, 곧이어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보세요, 외조모. 소녀가 행운을 가져다줄 거라 그랬죠?”

한 살 어린 여인에게 건네는 것으로는 어딘가 어색한 대화였는데 양소소, 나탑사, 남굉모가 받아들였다면 이는 그저 축하할 일이었다.

잠시 설움을 쏟아낸 나탑사가 길게 편 손바닥으로 눈과 볼을 닦았다.

“점심은 어떻게 하셨어요?”

“오는 길에 간단하게 먹었다.”

“가가께서 좋아하시는 술을 담가놓았는데…….”

“허허. 그렇다면 산짐승이 몇 마리 필요하겠구나.”

말을 잇지 못하는 나탑사를 대신해 남굉모가 산을 둘러보았고,

“제자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가자.”

진무린과 양소소가 주거니 받거니 한 뒤에 목옥을 빠져나왔다.

경공을 발휘할 필요 있겠나.

느긋하게 걸어도 바로 앞이 울창한 나무숲이었다.

“외조부를 어찌 설득했니?”

“사고께서 떠나신 것을 알고 생각이 많으셨던 모양입니다.”

“저 고집을 꺾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 화산의 일은 또 뭐고?”

숲을 지나며 진무린은 화산에서 이곳까지 오며 있었던 일을 모두 들려주었다.

물론 부친과 얽힌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양소소는 앞뒤를 짐작하는 눈치였다.

“옛날이야기를 들었겠구나.”

“죄송합니다, 사고.”

“그게 어째서 네가 죄송할 일이냐. 인연이 거기까지였던 게지.”

“영약이 사고의 병중을 이겨내는 것인 줄 몰랐습니다. 제자는 그 점이 더 송구합니다.”

“네가 얻었다니 됐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진무린은 홀로 나서 일각 만에 토끼 다섯 마리를 잡아 돌아왔다.

“개울이 있습니까?”

“고기는 안에 충분해. 빙궁에서 자란 분이라 사냥에 능하시거든.”

손질하려는 진무린을 향해 양소소가 짓궂은 표정으로 목옥을 가리켰다.

삼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밝은 표정이었다.

 

**

 

요정에게 초식과 내공의 운용을 가르친 원예는 위력을 보여주지 못해 몹시도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소수음공을 대부분 잃은 데다 다시 수련하는데 최소 삼 년에서 최대 오 년까지 기다려야 하는 탓이었다.

하늘이 내린 재능으로 따라오던 요정은 익히는 속도만큼 벽도 빨리 만났다.

손이 하얗게 변하는 단계에 이르려면 시범을 보이거나 내공을 도인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불행하게 원예는 두 가지 모두 행하기 어려웠다.

“이 이상은 공자께서 도움을 주셔야 하겠다. 너는 우선 초식을 반복해 익히고, 내공을 쌓는 수련에 최선을 다해. 알았지?”

“예, 사부님.”

원예의 오후 수련이 끝났다.

“아이의 몸을 보하는 약이 떨어졌다고 들었어요. 귀혼곡에서 필요한 약재를 구해달라는 연통이 왔으니 그걸 전해주신 뒤에 올 때 정아를 위한 약을 가져다주세요.”

“그래? 그럽시다.”

다른 사람 아닌 딸을 먹일 약을 가져오라는데 백면호리가 마다할 일이 무엇이 있겠나.

가뜩이나 무료하던 참이라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총관 백섭광이 전해주는 목록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말이오.”

출발하기 전이었다.

상체를 기울인 백면호리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잘하는 건가? 수련 말이오. 이 정도면 발전이 빠른 거 맞지?”

어쩌면 오해할 수도 있는데 백면호리의 성품을 익히 아는 터라 원예는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명색이 사부인 제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에요. 이대로 십 년만 꾸준히 수련하면 강호에 여고수로 소문난다는 데 홍화루를 걸죠.”

“흐엑? 홍화루를?”

“좋으시겠어요. 약속대로 되면 정아가 초고수가 되는 거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홍화루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에헤이! 또 뭘 그렇게까지. 내 후딱 다녀오리다. 후딱!”

입과 눈을 헤벌쭉하게 만들었던 백면호리가 날 듯이 몸을 날렸다가 곧바로 다시 문으로 돌아왔다.

“정아야. 다녀올게. 사부님 말씀 잘 듣고, 혼자 밖에 나가면 안 돼.”

원예가 앞에 있는 터라 요정은 고개만 끄덕였다.

 

**

 

은혼은 표충량이 이전에 얻은 기연이 범상치 않은 것임을 알아차렸다.

구궁심법을 가르쳤는데 한 시진을 지켜본 바로 절대 이룰 수 없는 경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혹여 짚이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라는 권유에 표충량은 또 진무린이 혈도를 바로잡아 준 것이 전부라 답했다.

표충량은 은혼에게 거짓을 말할 아이가 아니다.

반대로 고작 혈도만 바로잡아 준 도움으로 이런 성취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는 진무린이 이 아이 모르게 무언가 배려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이래서 제자로 들이라 하셨구나. 진 대협은 진정 사부님의 전언을 이 아이에게 전해줄 요량이었고, 실제로 그리하셨던 게지.’

고개를 끄덕인 은혼은 눈을 감은 표충량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화산에도 검기를 발현할 수 있는 내공심법이 있으니 문주에게만 전해진다는 자하심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은혼 역시 익혔으나 검기를 발현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청강이 그토록 바라고, 은혼이 목을 매다시피 원했던 재능이 얽히고설킨 인연을 타고 마침내 화산의 품에 안겼다.

‘이 녀석아. 네가 장문인이 되려면 족히 삼십 년은 기다려야 할 테니 이 사부가 물러난 뒤에도 꽤 오래도록 지켜줘야 하지 않느냐.’

표충량을 보며 은혼은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실패한다면 자하심법을 함부로 전수했다는 죄명으로 남은 평생을 동굴에서 지낼 독한 각오였다.

다행히 성품이 바르다.

청강 진인을 늘 그리워하고, 사부인 은혼을 하늘 같이 따르며, 팔이 붓도록 때린 이대 제자들과 함께 달리는 배려마저 지녔다.

언젠가 화산제일검이 다시 탄생하리니 그는 분명 검기를 내는 강호의 최고수 중 한 명일 테고, 성 씨는 표 씨일 것이며, 다음 대나 그다음 대 화산의 장문인이리라.

표충량을 보며 흥분된 심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은혼은 나직하게 숨을 가다듬었다.

 

**

 

한겨울 바람에 말린 토끼와 사슴 고기를 찌고, 볶고, 또 불에 구워 준비한 저녁상이었다.

“가가.”

삼십 년을 기다린 술을 나탑사가 따랐고, 남굉모가 그녀의 잔에 답례의 술을 채웠다.

“사고께 제자가 술을 올리겠습니다.”

“조카와 술잔을 기울일 수 있으니 나야 마다할 일이 없지.”

진무린과 양소소가 잔을 채우기를 기다린 뒤에 네 사람은 참으로 유쾌하게 술을 넘겼다.

나탑사가 몇 차례 눈시울을 붉혔으나 그것이 전부여서 두 시진이 넘도록 자리는 즐거웠다.

행복한 저녁을 마친 다음이었다.

마당에 불을 놓아 네 사람이 둘러앉았는데 누구 한 사람 추위를 느끼는 이는 없었다.

“사고. 귀혼곡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이안공자가 의술에 능통해 사고께 도움이 될 듯하니 제자를 믿고 한번 가보시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이안공자가 실존하는 사람이니?”

“그렇습니다, 사고.”

양소소가 놀라 물었고, 진무린이 분명하게 답을 주었다.

“너는 하루쯤 이곳에서 함께 지낸 뒤에 출발해. 나는 다행히 돌아오는 가을까지는 여유가 있으니 외조부, 외조모와 함께 강호를 유람하다가 귀혼곡에 도착하는 방향으로 고민하마.”

“너무 늦지 않아야 방법을 찾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안에 제자도 영약이 있는지 수소문하겠습니다.”

“걱정할 것 없다. 마침 외조모께서 간직하던 빙궁의 영약이 하나 있으니 내년 가을까지는 무탈할 게다. 그렇죠, 외조모?”

“이미 외손녀에게 준다고 약속했던 물건이에요.”

“외손녀에게 존댓말을 쓰는 할머니는 세상에 없어요.”

양소소의 말에 나탑사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눈을 하고 웃었다.

무인들이라 그럴까.

그 뒤에 이어진 대화는 자연스럽게 강호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내용으로 흘렀다.

“지금 보이는 사건들은 모두 단편적인 것들이라 봐야지. 마등이 다시 살아난 것에는 마교의 강시술, 혈교의 술법이 들어있는데 그 두 곳을 묶은 누군가가 있겠지. 아미의 장로와 제자들이 강시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일렁이는 모닥불 앞에서 양소소가 짐작하는 바를 꺼내 들었다.

“점창의 장로이자 정도맹의 부맹주인 소강명, 공동의 약연과 자경이 본인들이 몸담은 문파를 두고도 사욕에 달려들 정도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었다는 뜻이겠고.”

남굉모와 진무린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나탑사는 이야기를 이해하려 귀를 쫑긋 세운 채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앞에서 마교와 혈교를 엮어냈고, 다시 점창과 공동의 장로들을 설득했으며, 마지막으로 본문에까지 손을 뻗친 세력, 그들을 찾아내 야욕을 꺾는 것이 진정 강호의 혈사를 막는 일일 게다.”

말을 듣는 순간, 진무린은 하후도를 떠올렸다.

한낱 심부름꾼이라는 그를 상대하는데도 은천수호검법을 사용해 겨우 동수를 이룰 정도였다.

최근 얻은 검기 덕분에 하후도를 다시 만난다 해도 뒤지지 않을 자신은 생겼다. 그러나 그보다 강한 자가 나온다거나 그런 자들이 십수 명 뛰쳐나온다면 진무린 홀로 감당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쯤에서 하후도와 엄소동에 관해 솔직하게 털어놓고 벽계와 구주를 상대할 방법을 의논해 볼까.

진무린이 잠시 고민할 때였다.

“이 아이의 무공이 지금 어느 정도인가요?”

“자연의 경지에 접어든 것은 분명한데 성취로 보면 대략 육 할 정도라 하는 게 적당하겠다.”

양소소가 질문했고, 남굉모가 무겁게 답했다.

“조카는 우선 자연의 경지를 대성하는 데 집중해. 본문의 무공이 유출된 것은 내가 문주와 의논해서 방법을 찾아보마.”

“감사합니다, 사고.”

밤이 깊었다.

대강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터라 진무린은 굳이 무거운 주제를 꺼내지 않았다.

만약 엄소동의 이야기를 꺼낸다면 문주에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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