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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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02화
은천검제
제102화
뜸을 들이던 남굉모의 첫 마디는 역시나 엉뚱한 질문이었다.
“술이 있느냐?”
“아시다시피 함께 화산에서 출발한 길입니다. 기다리시면 근처의 반점에 가서 구해 오겠습니다.”
“네놈을 어찌 믿어?”
올곧게 바라보는 진무린의 눈빛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놈의 눈빛까지 어쩌면 그리 같은지! 가자. 마침 식사 때도 되었으니 적당한 반점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다.”
“근처에는 모두 화산과 관련 있는 반점뿐입니다. 여기 계시면 이각 안에 술과 만두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흠. 그렇다면 술만 가져와. 내가 적당한 산짐승을 잡아놓을 테니.”
마지못해 허락한 남굉모가 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진무린은 작정하고 몸을 움직였다.
길을 따라나서면 화산을 찾는 이들을 위한 반점이 여러 곳 있는 터라 술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양손에 단지를 안은 진무린이 도착했을 때, 남굉모는 마른 나무를 꺾어 불을 피우고 그 위에 토끼를 세 마리 꿰어 굽고 있었다.
운암정이라 불리는 동굴에서 그가 평소에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진무린이 단지를 두 개나 내려놓자 남굉모는 흡족한 모양으로 입가를 뒤틀었다.
“다오.”
손을 뻗어 단지 하나를 받은 그는 봉인을 뜯기 무섭게 입으로 기울였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술이 입 주위로 튀었는데 그는 마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커흐!”
입가를 닦은 남굉모가 진무린에게 불쑥 단지를 내밀었다.
목이 마르던 참이었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답답한 속을 풀어내는 심정으로 진무린은 단지를 기울였다.
남굉모만큼은 아니더라도 입에 담기지 못한 술이 튀었는데 확실히 통쾌한 맛은 있었다.
“흥!”
술을 마시는 모습이 못마땅했을까.
손을 뻗어 단지를 가져간 남굉모가 다시 한 번 크게 마시고 난 뒤에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기껏 잡은 고기가 탄다. 먹고 나서 이야기하자.”
남굉모는 토끼가 꿰인 가지 하나를 집어 고기를 옆으로 뜯었다.
세 마리나 되는 토끼를 사양할 일은 없어서 진무린 역시 고기를 먹으며 간간이 술을 들이켰는데 반 시진쯤 지나서 고기도 술도 모두 떨어졌다.
겨울의 태양이 높은 산의 위에 걸린 오후의 중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먼저 간 네놈의 아비 이름이 진용선이다. 낙일검이라는 별호로 불렸지.”
한숨을 푹 내쉰 남굉모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술기운처럼 풀어냈다.
“그를 가르친 사부는 양세종이라 한다. 은천문의 전대 사부로 네게는 사조가 되는 그놈이 내 사위다.”
복잡한 듯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뜻밖의 전개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소소는 양세종과 남유려가 낳은 내 외손녀다. 양세종이 은천문 사람이라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자랐지.”
진무린의 표정을 본 남굉모가 같잖다는 투로 눈꼬리를 비틀었다.
“네놈이 강호에서 배필을 만나더라도 결국 은천문에 들어가 살 것이 아니냐.”
“아직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으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기는 합니다.”
“흠.”
못마땅한 숨을 뱉어낸 남굉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소는 네 아비 진용선을 마음에 담았는데 지병이 있어 뜻을 밝히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걸 모르는 네 아비가 다른 여자와 결혼해 너를 낳았고, 그때…….”
모친의 사망을 언급하기 싫었던지 말을 하던 남굉모는 쓴 입맛을 다시며 끝을 흐렸다.
“아무튼! 그리돼서 홀로 된 낙일검이 키우던 너를 소소가 애지중지 살폈다. 그리고 너를 보며 용기를 얻었는지 그때쯤 마음을 밝혔던 게고.”
토끼를 굽던 모닥불이 잔불만 남아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는 가운데 남굉모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낙일검이 생사대적을 상대하기 위해 나선다고 하더라. 소소가 그때 내게 왔었다. 등룡창천을 얻었으니 상단전을 깨우칠 가르침을 달라고. 내 답을 짐작하느냐?”
“거절하셨겠지요.”
“그렇다. 유일하게 남은 소소가 애 딸린 홀아비에게 가겠다는데 외할애비인 내가 그것을 선뜻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원래 지병이 있어 반대한 것이기도 하고. 아이를 가지면 버티기 어려웠으니까.”
진무린이 나직하게 숨을 내쉬는 것을 보며 남굉모는 남은 말을 털어냈다.
“그 뒤에 소소는 은천문을 나서 은거했다. 이후로 나도 보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때의 일이 미안하고, 하나밖에 없는 외손녀가 죽는 꼴을 볼 수 없어 영약을 구하는 일에 매달렸지. 그리고, 결국 이렇게 되었다.”
이제 남굉모가 왜 처음 보았을 때 진무린을 그토록 미워하는 눈빛이었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제 선친이 마지막으로 상대했던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은천문에 돌아가게 되거든, 문주나 사부에게 들어. 내가 알기로는 동귀어진이라 해서 원수라 부를 자들은 살아 있지 않은 것으로 안다.”
대강의 얼개는 그려졌다.
그렇더라도 선친의 일이 뒤얽힌 터라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였다.
“이제 암연을 불러 소소를 찾아내.”
이 모든 일이 진무린의 잘못이라는 투로 남굉모의 독촉이 있었다.
“문주가 이런 사연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왜 제게 사고를 찾아뵈라 하셨는지 짐작하십니까?”
“갑갑한 구석이 있었겠지. 소소는 어릴 적부터 재능이 뛰어나 무공에 대한 식견이 대단했었으니까. 너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을 테고.”
“선배께서는 어떻게 화산의 정수를 그리 깊게 깨달으셨습니까?”
“네놈이 지금 나를 심문하는 게냐?”
“그런 것이 아니라 얼마 전에 등선한 청강 진인께서 남기신 말씀과 거의 유사한 가르침을 주신 터라 궁금해 드린 질문입니다.”
“흥! 물이 있고, 그것을 담을 그릇이 있다. 물이 아무리 많아도 그릇이 작으면 담을 수 없고, 그릇이 아무리 크다 해도 물이 부족하면 채우지 못하는 법.”
무공을 논해서 그런지 지금까지와는 달리 남굉모의 눈이 또렷하게 빛났다.
“그 둘의 조화를 깨닫게 되고, 오랜 기간 구대문파의 검법을 연구하다 보면 자연 얻는 게 있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파천신군이라는 별호를 얻었겠느냐.”
궁금한 것은 대강 풀렸다.
“사고를 찾아달라 당부하겠습니다. 찾는 대로 운암정으로 향할 테니 선배께서는 이만 돌아가 계십시오.”
“그럴 일 없다. 소소를 찾을 때까지는 함께 있을 테니 그리 알아.”
마음을 굳힌 진무린이 생각한 바를 꺼내 들었으나 제안을 단박에 걷어찬 남굉모는 함께 다닐 것을 강요했다.
“선배. 암연이 움직이는 동안, 저는 딱히 할 일이 없습니다. 또한, 청강 진인의 복수를 위해 마교로 향할 생각입니다. 화산과 아미에게 이미 약속한 터라 그때까지는 수련에 매진해야 합니다.”
“고작 마선이절에게 당하는 실력으로 마교의 본진을 찾아가겠다? 그것도 검법마저 놈들이 손에 쥔 마당에?”
“그래서 수련이 필요합니다. 아직 녹지 않은 영약의 기운도 녹여야 하고요.”
눈을 삐뚜름하게 치켜뜬 남굉모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진무린을 잠시 노려보았다.
“아까 화산에서 꼬마 아이를 보며 생각난 건데 말이다. 이미 은천문의 검법은 강호에 퍼졌다. 혹시 문주는 네가 새로운 검법을 만들어주길 바라는 게 아니냐?”
전혀 짐작하지 못한 질문이라 진무린은 당장 대꾸를 내지 못했다.
“너도 머리라는 게 있으니 생각이란 것도 해 봐.”
단박에 진무린을 생각 없는 사람으로 만든 남굉모가 답답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소소는 원래 재능이 뛰어났으나 지병이 있어 검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대신 치료를 위해 내공의 수련에 치중했고, 익히지 못하는 억울함을 풀기 위해 강호의 검법을 연구했지.”
“혹시 화산의 검법에 정통하신 이유가 사고의 연구 덕분입니까?”
“나도 그 정도는 해!”
버럭 부인하는 남굉모의 반응을 보며 답을 짐작했으나, 굳이 파고들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니 소소를 찾는 것이 더 급한 일이 아니냐.”
“암연이 답을 줄 때까지 선배와 제가 마주 앉아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영약도 받아야지. 네 개. 그리고 다시 말한다만, 네놈을 어찌 믿어?”
마치 꽉 막힌 벽을 앞에 둔 느낌이었다.
진짜 벽이라면 검기라도 원 없이 쏟아볼 테지만, 남굉모는 양소소의 외조부이며, 얌전히 검기를 받을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진무린은 갑갑한 심정을 감추려 잠시 시선을 돌렸다.
구주는 아예 밀어둔 숙제처럼 돌아보지도 못했고, 그동안 어떻게 얌전히 지낸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전대, 전전대의 노괴들이 줄을 서서 나타나는 형국이며, 마교를 향하는 일은 요원하기만 했다.
그뿐이랴.
당장 은천문은 검법이 유출됐고, 돌아오는 가을이 한계라는 양소소는 남굉모가 미워 자취를 감췄으니 어디에서 무슨 일을 먼저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네놈은 지금 얼마나 강한 것 같으냐?”
생각에 잠겼던 진무린을 남굉모의 거친 말투가 깨웠다.
“마선이절을 동시에 상대해 한 놈을 눕히고, 다른 하나를 도주하게 했지. 두 번이나 검기를 뿌렸는데도 피를 토하거나 기혈이 뒤집히지도 않았고.”
영약을 생색내려고 이러나.
진무린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내가 보기에 화산은 검이 퇴보했다. 거기에 어쩐 일인지 제대로 검을 쓰는 제자들의 숫자도 부족했고.”
“전에 흑사련의 농간에 빠져 매화검수를 열둘이나 잃었습니다. 화산검이라 불리는 청강 진인께서 등선한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네놈 말대로 화산은 당장 마교를 찾아가자고 해도 어려운 형편이다. 복구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아니라면 네놈이 저들을 보호해야 하는데, 지금 실력으로?”
질문을 던진 남굉모가 어림도 없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나와 한 달만 함께 지내자. 암연이라면 그 안에 소소가 있는 곳을 알아내겠지.”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주십시오.”
“소소를 찾게 된다면 내가 직접 너를 찾은 것은 물론이고, 화산에서 가르침을 주었노라고 말해.”
“사고께서 선배의 말씀을 믿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저와 꼭 동행해야 한다고 하시는 겁니까?”
혹시나 싶어 던진 질문이었다.
그런데 불쾌한 듯 눈꼬리를 비튼 남굉모는 부인하지 않았다.
남굉모의 눈꼬리를 보며 진무린은 양소소의 눈과 입술에 묻은 고집을 떠올렸다.
한 달이라면 암연은 충분히 양소소를 찾을 만했다.
무엇보다 문주 임운령이 지켜보던 사람이라 어쩌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수련에 매달릴 참이고, 남굉모가 불편하지만 방해될 인물은 아니었다. 게다가 은천문에 오늘 있었던 일과 앞으로의 계획을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암연에 연락하려면 길을 나서시는 것이 좋습니다.”
“어디로?”
“조금은 번화한 곳에서 기운을 펼쳐야 합니다.”
“오냐. 내 함께 가주마.”
기가 턱 막힐 뻔뻔한 대꾸였는데 저런 모습이 바로 남굉모의 특성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몸을 일으킨 남굉모는 순순히 진무린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먼저 장사로 향해 옷을 한 벌 갈아입으시고, 그곳에서 암연의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이 옷이 어때서?”
“워낙 낡아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수준입니다.”
“인면지주를 비롯한 온갖 영물들을 잡느라 이리됐으니 부끄러울 일 없다.”
“공연히 입에 오르내릴 필요가 있습니까?”
“크흠.”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화산의 앞쪽 장사에 도착한 진무린은 가장 먼저 암연을 부르는 기운을 뿜어냈고, 이어 상점을 찾아 남굉모의 바지와 마고자, 외포를 사주었다.
일단 지켜보겠다는 생각인지 그는 묵묵하게 진무린의 선택을 받아들였고, 심지어 옷이 마음에 드냐는 간단한 질문에도 대꾸가 없었다.
사람의 모습이란 것이 참.
기껏 옷을 새로 입혔더니 반대로 제대로 다듬지 못한 머리와 수염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뭔지.
그러나 머리와 수염은 객잔에 들어야 그나마 손질이 가능했다. 당장 이곳에서 더 묵을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방향을 정할지 몰라 진무린은 먼저 사람의 왕래가 적은 곳의 다점을 골라 차를 주문했다.
눈매와 인상이 고약한 노인과 제법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데 천으로 감은 것은 검이 분명하니 차를 파는 노파는 오늘이 무탈하기만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남굉모는 원하는 바를 이뤄 말이 없고, 양소소와 무공에 관한 이야기 외에는 진무린 역시 궁금한 점이 없어 두 사람은 묵묵하게 차만 번갈아 마셨다.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도 그렇지만 밖에서만 지내던 남굉모는 실내가 답답한 모양이었다.
“흐음.”
그가 못마땅한 심기를 쏟아낼 때, 암연이 보내는 특별한 기운이 진무린을 찾았다.
“뭐냐?”
“기다리던 연락입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사람 틈은 정신없고, 이 안은 갑갑하던 참이다. 함께 가자.”
“외부인과 함께 만나지는 못합니다.”
쓴 입맛을 다신 남굉모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일으키던 몸을 주저앉혔다. 은천문의 규율을 아는 터라 더는 우기지 못하는 눈치였다.
모산의 문주 운진은 사람들 틈을 그리 좋아하더니, 이번에는 사람들을 질색하는 괴팍한 노인과 함께였다.
그동안 노괴들을 줄줄이 만났고, 오늘만 해도 둘을 상대했다.
언제부턴가 강호가 노괴들의 세상이 된 건지.
밖으로 나선 진무린은 건물들을 벗어난 곳으로 방향을 잡았고, 느긋하게 걸었다.
낮은 둔덕들이 물결치듯 이어진 근처였다.
걸음을 멈춘 진무린은 덤덤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찾으셨습니까?”
암연이 분명한 중년 남자가 나타나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