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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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94화
은천검제
제94화
저녁은 밥과 채소볶음,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생선 요리로 양소소가 말한 대로 소박했다.
처음 심사장을 방문할 때, 임운령을 남몰래 돕는 비선이 바로 양소소가 아닌가 싶었다.
암연조차 모르게 정보를 구해주고, 숨겨진 일들을 전해주는 문주만의 조직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니?”
“풍령관으로 출발했습니다.”
“모산의 문주란 자와 둘이서?”
그런데 식사하는 동안 양소소는 강호의 정세에 관해 전혀 모르는 눈치로 연신 진무린에게 질문을 던졌다.
“고작 둘이서 풍령관을 감당했어?”
“문주께서 은천령을 발령하고 달려와 주셨고, 이후에 화산과 아미의 장문인이 제자들을 이끌고 힘을 보태주었습니다.”
“은천령을 발령했다고?”
뒤의 소식을 전하느라 식사 후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바느질거리를 앞에 둔 양소소는 분주하게 손을 놀리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아서 진무린은 역시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세세하게 들려주었다.
다만, 벽계와 하후도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았고, 또 등룡창천과 상단전을 깨달은 내용도 일단 내놓지 않았다.
무공이 어느 수준일까.
바늘을 움직이는 그녀의 오른손을 보았으나 진무린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피곤하겠다. 이제 그만 방에 들어가 쉬렴. 뒤에 있는 방을 사용하면 돼.”
“괜찮으시면 잠시 운기를 할까 합니다.”
“방에 들어가 하는 운기까지 허락받을 것이 뭐가 있어. 편하게 지내. 알았지?”
초저녁이 막 지나 밤이 제대로 깔릴 시간에 양소소는 바느질감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편히 쉬어.”
“쉬십시오, 사고.”
인자한 미소를 전한 양소소가 맞은편 방으로 들어갔다.
홀로 대청에 있기도 뭐해서 진무린은 그녀가 정해준 방으로 들어섰다.
평범한 방이었다.
안쪽에 침상이 있고, 각이 분명한 의자와 커다란 나무의 밑동을 잘라 만든 탁자가 전부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뭔가 있으리라 기대했던 진무린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고 침상에 가부좌로 앉았다.
운기를 마치고 잠에 들 생각이었다.
**
날이 밝았을 때, 은혼은 전에 없이 분노한 얼굴로 앞에 선 제자들을 노려보았다.
“네놈들이 그러고도 화산의 제자라 할 수 있느냐.”
그는 목청을 높이지 않았는데 어찌나 냉정한 음성인지 저러다가 검을 내는 것은 아닌지 두려울 정도였다.
“사숙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농락하는 놈들이 있다니. 그것도 장문인인 내가 너희의 사형들과 함께 사부님의 원한을 갚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은혼은 독한 눈빛으로 시선을 왼쪽으로 돌렸다.
“이대 제자 전원을 파문하겠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파문이라니.
이대 제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지시를 들은 은혼의 사제 문혼마저 감히 답을 내놓지 못했다.
“사제마저 장문인의 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단 말이냐.”
“장문인. 이 모든 것이 자리를 비우시는 동안 제자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소제와 주동자를 벌하시고, 다른 아이들에게는 여유를 주십시오.”
“필요 없다!”
은혼의 고함이 쨍하고 울려 나왔다.
“악행을 묵인한 것은 그에 동조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저놈들의 팔을 자르지 않는 것만 해도 크나큰 배려이니 다시 입을 여는 자가 있다면, 장문인의 명에 항거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설마 했던 장로들조차 숨을 죽인 채 정황을 살폈다.
항거로 간주한다는 말이 나왔다면 누구도 함부로 반대 의견을 내기 어렵다.
장로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린 뒤였다.
“장문인.”
“예, 사백.”
청강의 사형되는 종선 진인이 무거운 표정으로 두 걸음을 나섰다.
“장문인의 권위를 상하게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이대 제자들 모두 파면당하는 꼴을 보기도 어려우니, 본 사백이 이렇게 읍소하겠네.”
“사백! 어찌…….”
내달리듯 움직인 은혼이 급히 종선 진인의 팔을 붙들고 고개를 조아렸다.
은혼이 감히 그림자도 밟기 어려운 사부가 청강이요, 그의 사형이 종선 아니던가.
그런 종선이 양손을 잡고 고개 숙이는 터라 은혼은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본파는 흑사련을 상대로 매화검수를 잃었고, 화산을 대표하는 청강을 연달아 떠나보냈네. 이대 제자들의 죄는 처벌받아 마땅하나 장문인은 본 사백의 간절한 청을 봐서 파문만은 고려해주게.”
무공이 높지 않아 이름을 떨치지는 못했으나 인품과 학식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종선의 청이었다.
“사백께서 어찌 제자 앞에 몸을 숙이십니까. 어서 일어서십시오.”
“청을 받아주게.”
“제자가 사백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몸을 일으키십시오.”
“고맙네, 장문인. 참으로 고마워.”
그제야 종선이 몸을 일으켰는데 그는 눈이 붉어진 은혼을 보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은혼은 분명 청강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사백께서 이리 나서시니 파문은 취소하겠다. 다만, 이대 제자는 앞으로 30일간 매일 인시에 낙안봉에 오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일과를 마치면 다시 다녀오도록 해라.”
“장문인의 명을 받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앞으로 한 달간 이대 제자 모두 아침과 저녁을 걸러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쯤 죽었다고 할 만큼 강한 처벌이었다.
“보기 싫다! 물러가라.”
은혼의 냉정한 지시가 떨어지자 제자들이 분분히 거처를 향해 움직였다.
이로써 화산의 모든 이는 알게 되었다.
표충량이란 아이를 은혼이 얼마나 아끼는지 말이다.
보통은 오히려 역효과가 생겨 따돌림을 당하곤 하는데 은혼은 아예 파문을 언급해 누구도 표충량을 가벼이 여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형. 소제에게도 벌을 주십시오.”
제자들이 물러가자 은혼의 사제 문혼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다면, 내 맹세코 팔을 자를 참이니 사제는 그 점을 명심해라.”
평소라면 다정한 음성을 냈을 은혼이 오늘은 여전히 냉랭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부의 원한을 갚겠다며 풍령관에 다녀온 직후에 표충량의 왼쪽 팔이 퉁퉁 부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따돌림은 눈 감으려 했다.
그러나 검술을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사숙되는 표충량의 팔을 때려 움직이기조차 어렵게 만든 제자를 용서하기는 어려웠다.
“성품이 바르지 못한 제자는 반드시 독이 되나니. 한낱 장난이라고 치부하여 기강이 해이해지는 꼴을 묵인한다면, 화산은 장차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
“장문인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사제의 답을 들은 은혼은 멀리 있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
백면호리는 요정과 함께 백섭광이 알려준 민가에 들었다.
무공을 가르치겠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홍화루에서 머무는 줄 알고 떨떠름했었다.
그런데 민가에서 지내며 틈틈이 봐준다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 아닌 진무린이 당부했다는 말까지 들은 백면호리는 더 고민할 것 없이 냅다 요정을 안고 뛰었다.
“매일 봐주시나?”
“기본 초식과 내공의 운용을 알려주는 데 보름가량 걸려요. 그때부터는 다시 귀혼곡으로 가서 수련하는 거로 하세요.”
“참으로 현명한 방법이로세.”
민가에 나타난 원예의 설명에 백면호리는 더할 수 없이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럼 말이지. 저…….”
그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리는 터라 원예는 시선만 주었다.
“루주가 정아의 사부가 되시나?”
“사부가 안 되고 무공을 전수할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그렇지! 그건 당연히 그래요.”
원예의 뾰족한 대꾸에도 백면호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에 흔한 삼류무공이 아니라 소수음공이었다.
그것도 은천문의 최고수 진무린이 청했단다.
앞으로 누군가 요정을 건드리면 당장 홍화루와 귀혼곡이 나서고, 뒤에 진무린과 은천문이 달려든다.
“흐히히히.”
경망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던 백면호리가 원예의 시선을 받고는 얼른 표정을 바꿨다.
“정아야. 뭐하냐. 얼른 나와 사부님을 뵈어야지.”
이리저리 구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무공을 얻게 된다는 생각에 백면호리는 참으로 행복한 음성이었다.
**
닭죽으로 아침을 먹은 양소소는 호미를 챙겨 들었다.
“겨울에도 밭일이 있습니까?”
그녀를 따라 뒷마당으로 향하며 진무린이 건넨 질문이었다.
“밭에 묻어 두었던 것이 있는데 한두 개만 꺼내려고.”
심사장의 뒤편은 야트막한 산이었다.
본채와 산의 중간에 놓인 밭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그런 규모였다.
“제자가 돕겠습니다.”
“아서라. 힘든 일이라면 몰라도 묻어 둔 것을 꺼내는 일이 전부인데 뭘 너까지 나서?”
밭의 중간으로 움직인 양소소가 자세를 낮췄다.
딱딱하게 언 땅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호미를 찍어 뒤집자 흙이 두부처럼 쉽게 일어났다.
서너 번 호미로 땅을 파던 양소소가 왼손으로 흙을 파헤친 뒤에 무언가를 붙들고는 눈으로 확인했다.
만족한 모양이었다.
호미로 주변을 다독인 양소소가 흐뭇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진무린을 향해 움직였다.
“가자.”
걸음을 옮긴 양소소는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고, 잠시 후에 깨끗하게 씻은 약초를 진무린에게 내밀었다.
“이대로 씹어 먹으면 된다. 쓰기는 할 텐데 네가 못 참을 정도는 아니고, 혹 약초의 기운이 올라오면 가벼운 운기로 갈무리해.”
“예, 사고.”
손바닥 안에 쏙 잠길 정도로 작은 약초는 새끼손가락 크기의 뿌리와 또 그 정도 길이의 갈색 이파리를 달았다.
“어서 먹어.”
“감사합니다, 사고.”
진무린은 왼손으로 입을 가리며 약초를 입에 넣었고, 조심스럽게 씹었다.
그 직후였다.
정신이 번쩍 드는 쓴맛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곧바로 혀와 목이 마비될 정도로 강렬하게 바뀌었으며, 아무리 삼키려 해도 구토가 올라와 견디기 어려웠다.
지금껏 살면서 쓴맛 때문에 식은땀이 올라온 것은 진정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몇 번이나 올라오는 구토를 참느라 진무린의 가슴이 움찔거렸는데 양소소는 그 모습을 대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어찌나 강렬한 쓴맛인지 독약이 아닐까 싶었고, 다음으로 물이라도 한 모금 마셨으면 싶었다.
말을 하려해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또한, 약초를 잘 아는 양소소가 물을 권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일각쯤을 버틴 뒤에야 진무린은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목과 혀의 감각이 돌아왔는데 아직 얼얼한 감은 그대로 남아서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코에 남은 쓴 냄새가 역겹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뱃속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면서 진무린의 이마에 식은땀이 솟았다.
“얼른 앉아 운기하려무나.”
“예, 사고.”
입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어눌하게 답을 한 진무린이 대청의 바닥에 앉은 다음이었다.
“상단전을 사용하다가 얻은 내상은 가라앉은 듯해도 바로 재발한단다. 지금 먹은 오선라미초 외에는 그 증상을 잡기 어렵다.”
진무린의 옆에 놓인 의자에 앉은 양소소가 자상한 음성으로 약초를 설명했다.
알고 있었나?
아니면 진무린을 보면 깨달았던가?
상단전을 사용해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양소소는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약초마저 권했다. 그것도 어제 등룡창천과 상단전을 이용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기운을 먼저 갈무리하렴.”
후끈한 기운이 올라오는 터라 진무린은 답을 할 틈도 없이 운기에 들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쓴 냄새가 내공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청아한 향으로 바뀌어 온몸을 휘감는 것이 말이다.
단전과 혈도는 말할 것 없고, 머릿속까지 청아한 기운이 감돌아 진무린은 마치 봄날 그늘 속에서 선선한 바람을 즐기는 느낌마저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봄날의 감각이 저 멀리 사라지면서 진무린은 퍼뜩 눈을 떴다.
대청 바깥을 바라보던 양소소가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며 진무린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고. 제자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밭에 두었던 약초 한 뿌리에 뭐 그리 거창한 인사를 하니. 비록 본문을 떠났으나 모처럼 만난 조카에게 고모가 줄 것이 별로 없어 그 점이 오히려 아쉽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양소소가 대청을 나섰다.
“점심은 나가서 먹자.”
“예, 사고.”
아침을 먹은 뒤에 밭에 나갔고, 그 뒤에 바로 약초를 먹었다. 그런데 대청을 나선 진무린이 하늘에 걸린 해를 확인한 결과 실제로 점심나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