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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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2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92화
은천검제
제92화
반 시진 가량 운기한 진무린이 운진과 함께 일어서고 그만큼의 시간이 더 걸린 뒤에야 풍령관의 정리가 마무리되었다.
폭렬공을 익힌 수하들 서른 남짓은 점혈을 통해 내공을 가두었고, 화산과 아미가 돌아가는 길에 정도맹에 인계하기로 했다.
“이렇게 어려운 고비에 나서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본파의 원한을 진 대협 덕분에 절반쯤 내려놓았습니다. 마교로 향하실 적에는 반드시 연락을 주리라 믿고 준비하겠습니다.”
은혼이 먼저 진무린에게 감사를 표했다.
“진 대협. 마교는 강시술로 본파의 어른을 농락한 자들입니다. 마교로 향하신다면 본파에게도 연락을 부탁합니다.”
현절 역시 몇 번이나 고마움과 당부를 전했고, 이어 운진을 향해 비슷하게 뜻을 전했다.
두 곳이 물러가자 그나마 홀가분하게 이야기 나눌 여유가 생겼다.
“어쩔 참이냐?”
“몸을 살핀 뒤에 마교로 향하고자 합니다.”
“오늘만 해도 하후도란 자가 물러나는 득이 있어 무사히 넘겼다. 그런데 마교는 또 달라서 전전대, 전대의 고수들이 즐비하고 교주 정동추의 무공은 가벼이 볼 상대가 아니다.”
임운령이 무거운 얼굴로 염려하는 바를 내놓았다.
풍령관의 일로 깨달은 바가 컸다.
은천문이 자신하지 못할 정도로 강호의 무공이 발전했다는 사실과 감춰진 세력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었다.
“익힌 것을 손에 넣은 뒤에 움직이겠습니다.”
“그러려면 본문에 있는 것이 좋지 않겠냐?”
“모산의 문주와 잠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진무린의 눈을 들여다본 임운령이 졌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전 사부조차 네게 조언하기 힘들 테니 뜻을 받아주마. 다만, 검기를 사용한다는 말은 분명 돌 게다. 강호의 온갖 고수들이 이름을 떨치겠답시고 너를 찾을지 모르니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나직하게 숨을 내쉰 임운령이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은천수호검을 받은 터라 더 가릴 것이 없겠다. 혹 적당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 길로 호북과 사천의 경계에 있는 팔경산으로 가라.”
진무린은 처음 듣는 곳이었다.
“팔경산의 앞을 흐르는 하천을 따라가면 심사장이란 작은 장원이 나올 텐데 그곳에서 얻는 것이 제법 있을 게다.”
은천령을 발령한 임운령은 문주 자리를 진무린에게 넘길 계획을 품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암연조차 모르는 비선이 바로 팔경산 앞에 있다는 심사장이 아닐까.
덜컥 문주가 되는 길에 들어서는 것은 아닌가 싶어 진무린은 쉬 답을 못했다.
“정도맹은 물론이고, 구대문파와 마교 역시 너를 찾아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텐데 어설프게 상등이나 귀혼곡에 간다면 공연히 다른 이들을 힘겹게 할 수 있음을 명심해.”
“주의하겠습니다.”
다짐을 받은 임운령은 운진과 인사를 나눈 뒤, 서운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길을 나섰다.
**
풍령관의 일은 하루 뒤부터 소문이 일었고, 곧바로 덩치를 부풀리더니, 다음 날에는 치장까지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화산의 장문인이 부족하나마 이기어검을 보였다는 말이 도는가 하면, 마교의 장로들이 수하를 이끌고 지원 나왔다는 설이 떠돌았고, 술법을 부리는 아수라가 등장하자 신선이 내려와 제압했는데 생김새가 청강과 닮았더란 믿기 어려운 소문도 있었다.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풍령관을 출발했던 화산과 아미가 이틀 만에 정도맹에 도착했는데, 그 직후에 맹주는 부맹주 소강명과 약연 장로, 자경을 지하뇌옥에 넣어버리는 초강수를 단행했다.
소림과 무당이 만류했다는 소문과 맹주를 배출한 황가장이 가신들을 보내 황종관을 지킨다는 말이 조심스럽게 흘러다니면서 정도맹 주변은 살벌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황종관의 강단은 그에서 그치지 않았다.
곽가와 풍령관 수하 전원의 단전을 부순 뒤에 정도맹이 소유한 광산으로 보내는 단호한 조치를 마저 취했다.
점창과 공동이 어찌할까.
시선은 그 두 곳으로 몰렸다.
**
밤새 달린 임운령은 날이 밝기 직전에 은천문에 복귀했다.
그때도 전도위는 문주의 집무실 전각에서 검에 왼손을 얹은 자세로 서 있다가 임운령 일행을 맞았다.
은천령이었다.
문주가 풀지 않으면 방법이 없으니 장로들은 해당 가문의 전각에서 나서지 못했는데 임운령은 가장 먼저 전도위를 집무실로 불렀다.
“고생하셨습니다.”
“나야 전각에서 망와 구실이나 했을 뿐 고생이랄 것도 없었소.”
전도위를 치하한 임운령은 풍령관에서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들려주었는데 세상이 뿌옇게 밝아올 때쯤 이야기가 끝났다.
“어쩔 참이오?”
“백승 장로와 원고성 장로를 참수하고, 두 가문의 모든 권한을 회수하겠습니다.”
“흐음.”
천하의 전도위가 나직하게 숨을 토해낼 정도로 과감하고 무서운 결단이었다.
“두 사람이 반기를 들면 어찌하시려오?”
“대항하는 자는 모조리 참수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그들의 전각을 무너트린 뒤에 그 자리에 호수를 만들어서라도 본문의 무공을 외부에 전한 죄를 처벌할 것입니다.”
전도위가 굳은 눈초리로 임운령을 보았다.
“방법은 결정하셨소?”
“원로 회의를 소집한 뒤에 그 자리에서 죄상을 밝히고 참수하는 것, 아니면 직접 찾아가 목을 베는 것, 둘 중 하나를 고민 중입니다.”
전도위의 눈빛이 깊게 내려앉았다.
첫 번째 방법은 소위 도부수를 숨겼다가 목을 자르는 전통적인 방식이요, 두 번째는 임운령과 전도위가 각각 한 가문씩을 찾아가 죄명을 불러준 뒤에 목을 가르는 식이었다.
어느 쪽을 택하든 후폭풍이 적지 않은 방식이었다.
그나마 원고승은 정보를 취급하는 가문이라 부담이 적다. 대신 백승은 무력의 한 축을 담당했던 가문답게 적지 않은 피를 흘릴 수도 있었다.
“시기는 언제로 하실 게요?”
“은천령은 길게 끌지 못합니다. 바로 움직일 참입니다.”
“문주께서는 이미 물러날 결심을 하셨구려.”
“녀석에게 문주만이 지닌 검법을 전해주고 왔습니다.”
“그런데 왜 홀로 오셨소?”
“심사장으로 가라 일러주었습니다.”
바쁘게 오간 대화 끝에서 전도위는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벽계에 속한 하후도란 자를 보았습니다. 이번 일을 정리한 뒤에 본문은 당분간 출입을 금할 생각입니다.”
임운령은 이어 하후도가 얼마나 강한지, 그가 돌아선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 자세하게 전해주었다.
“어쩔 수 없이 물러갔다면 후에 그 아이를 노리지 않겠소?”
“녀석도 그 점을 염려해 무공을 대성하려는 눈치였습니다.”
“흐음.”
전도위는 깊은 한숨을 대답 대신 쏟아냈다.
“이미 은천검법과 섬전검법이 세상에 풀렸습니다. 등룡창천을 깨우치지 못한 제자를 강호에 내보내는 것은 적의 칼날 앞에 목을 내밀어 주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 아이가 대성하여 새로운 길을 열지 않는다면 은천문 역시 이대로 문을 닫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 되겠구려.”
참담한 심정으로 말을 꺼낸 전도위가 임운령의 결정을 기다렸다.
“본인이 백승 장로를 맡겠습니다.”
“알겠소. 그렇다면 내가 원고성 장로를 찾아가리다.”
대화가 끝났다.
더는 주저할 것이 없어서 두 사람은 무거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그동안 유연하게 가문을 이끌던 문주께서 갑자기 이리 독하게 나오시는 이유가 심히 궁금하외다.”
“제자를 내보내고, 뒤를 지켜주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백승과 원고성 장로의 일을 넘어간다면 남는 것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제자를 안고 후회하는 일밖에 없을 것입니다.”
임운령의 답을 들은 전도위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전각을 나선 두 사람은 대기하던 제자들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제자들은 들어라!”
“문주의 명을 받습니다!”
내성에 있는 각 가문의 전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일이었다.
“은성관의 제자들은 나를 따르고, 명성관의 제자들은 전 사부를 따라라. 이후에 나와 전 사부가 내리는 지시는 은천령이다.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든, 지위 고하를 가릴 것 없이 참하라!”
“문주의 명을 받았습니다!”
지시를 마친 임운령이 먼저 움직였고, 그 옆으로 전도위가 걷기 시작하자, 삽시간에 은천문 전체에 살벌한 긴장이 안개처럼 퍼져 나갔다.
임운령은 곧장 백승 장로가 머무는 전각 앞으로 움직였다.
“백승 장로는 나오시오!”
내공을 담은 임운령의 고함이 쩌렁, 울리기 무섭게 전각의 문이 열리며 검을 든 백승과 그의 혈족들이 밖으로 나섰다.
“문주를 뵙소.”
백승은 확실히 반항하는 기색이었다.
“백승 장로. 그대는 은천문의 소속으로 본가의 무공을 외부에 유출하였고, 제자들을 노렸으니 그 죄가 가볍지 않소!”
“증거가 있소?”
“백 장로. 구양강을 만난 일자, 그에게 전한 내용과 경로, 전달한 암연의 제자들이 증거로 있는 데도 부인할 참이오?”
임운령이 일갈하자, 백승은 할 말을 잃은 채 볼을 씰룩였다.
분한 것은 임운령이 이리 빠르게 움직일 줄 짐작하지 못해 어어, 하다가 당한 것이고, 아쉬운 것은 당장 원고성 외에 동조 세력을 제대로 만들어 놓지 못한 것이었다.
“백 장로.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소. 자결하시오.”
“흥! 증거도 없이 자결을 강요하는 은천령이라니!”
다른 가문들의 전각을 둘러본 백승이 한 번 더 버텼다.
모두 내려다보고 있을 테니 혹여 부당하다고 나서 줄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화산의 청강 진인이 섬전검법에 당했고, 풍령관의 흉수들마저 섬전검법을 동네 무관에서 얻은 듯 사용하였소. 그곳에 있는 풍령관 구 관주는 또한 마교의 무공마저 얻었음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바요. 여기에서 더 밝힌다면 백 장로의 가문은 멸문을 맞을 텐데 그것을 원하시오?”
이번만큼은 뭐라 하기 어려웠던지 백승의 볼이 씰룩였다.
그의 침묵을 보며 임운령은 시선을 좀 더 뒤로 던졌다.
“뒤에 선 제자들은 은천령에 항거하겠다는 의미냐?”
질문은 매서웠다.
은천령에 항거하는 것에 대한 처벌이 죽음밖에 없기에 그렇다.
백승의 뒤에 선 가문의 일족들이 눈치를 살필 때였다.
“본인이 자결하면 우리 가문은 어찌 되오?”
“칠대 가문에서 탈락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겠소.”
백승이 질문했고, 곧바로 임운령의 답이 있었다.
백가는 더 이상 장로를 배출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백승은 임운령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속았다. 아니, 그보다는 너무 쉽게 보았다.
세 푼의 실력을 감추라는 강호의 가장 흔한 교훈을 임운령은 철저히 지켰고, 백승은 무시했는데 결과는 이렇게 극명하게 갈려 나왔다.
스으응.
백승은 볼을 한 차례 씰룩인 뒤에 검을 뽑았다.
오늘의 태양이 떠올라 전각의 꼭대기를 비추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휘릭!
그는 백승의 이름을 떨치게 한 그의 성명절기 혼수탈명의 초식을 이용해 검을 거꾸로 들었다.
“우습구나! 백승! 혼을 흔들고, 명을 빼앗는다는 초식의 마지막이 나 자신이 될 줄을 어찌 알았을까!”
그는 찬란하게 떠오른 아침 해를 보며 혼잣말을 내뱉은 뒤에 검을 목에 가져갔다.
“장로! 이리 포기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있으니 결단을 내리십시오!”
뒤에서 총관이 안타까운 음성으로 제지했는데 백승은 픽 웃는 것으로 받았다.
“이미 기울어진 일이다. 다만, 오늘 이후로 은천문은 성세를 잃을 테니 이는 모두 문주의 책임일 것이다! 너희는 오늘을 기억해 훗날 새롭게 도약해라.”
말을 마친 백승이 볼을 씰룩인 뒤에 단호하게 팔을 당겼다.
피윳!
살이 벌어지며 그의 목에 하얀 선이 피어났고, 그 하얀 선이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곧바로 피가 뿜어졌으며, 주춤대던 백승이 바닥에 쓰러졌다.
“문주!”
총관이 달려들어 그의 몸을 안았는데 꿈틀대는 백승은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백승 장로의 가문은 이후 백 일간 외부 출입을 금하며, 필요한 물품을 반입하는 것 외에 교류 역시 금한다.”
백승의 죽음 앞에서도 임운령은 냉정했다.
그렇게 명을 내린 임운령이 무거운 얼굴로 돌아섰을 때였다.
“아버지!”
비통한 외침이 은천문에 울려 퍼졌다.
원고성의 목이 잘렸거나, 아니면 자결했다는 의미인데 소란이 없는 것으로 봐서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임운령은 무거운 얼굴로 집무실을 향해 걸었다.
‘늦은 감이 없지 않다만, 내가 할 바를 마쳤다.’
전각에 들어서며 임운령은 진무린을 떠올렸다.
홀로 풍령관으로 향합니다.
아무리 강한 적을 맞아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사매의 기억을 찾았고, 그렇게 만든 범인을 찾아 벌하겠으나, 은천문 내부의 적과 장로와의 싸움은 제자들이 아니라 문주의 몫입니다.
풍령관에서 본 진무린의 모습이 임운령에게는 최선을 다해 던지는 항변처럼 보였다.
임운령은 창을 활짝 열고 은천문을 내려다보았다.
‘늦어서 미안하다. 그렇지만 증거가 필요했구나.’
잠시 뒤였다.
“원고성은 자결했소.”
전도위가 조용하게 들어와 결과를 전했다.
“이제 본문은 새로운 문주가 돌아올 때까지 봉문하고자 합니다.”
놀라운 통보였는데 전도위는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람처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본문을 개방하는 것은 새로운 문주의 몫이 되겠구려.”
그는 덤덤하게 느낀 바를 토해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