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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91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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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91화

은천검제

제91화

 

빛줄기가 목을 스친 직후였다.

시선을 내리던 구양강의 머리가 그대로 떨어졌고, 버둥대던 몸뚱이가 머리에서 서너 걸음 앞에 널브러졌다.

‘진인. 조금이나마 원통함을 푸십시오.’

진무린이 나직하게 숨을 내쉴 때, 은혼과 화산의 제자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구양강의 머리와 몸뚱이를 내려다보았다.

“진 대협. 힘겨운 것은 알고 있으나 본파도 사부님을 잃은 원한을 갚을까 합니다.”

아미의 현절이 내놓은 바람이었다.

점혈을 통해 발목의 피를 멈춘 무랍이 도움을 바라는 눈으로 하후도를 바라보았다.

현절이 굳이 진무린에게 요구를 전한 이유를 모두 알고 있었다. 진무린 외에는 하후도를 막을 자가 없는 까닭이었다.

당면한 문제 역시 눈치챈 상태였다.

구양강의 목을 가른 진무린은 한눈에 보기에도 낯빛이 좋지 않았다.

“흥! 기혈이 엉킨 몸으로 내 눈을 속였고, 이어 구 관주의 목과 무랍존자의 발목까지 잘랐으니 그 점은 칭찬해주마.”

하후도는 뒷짐을 진 자세로 보란 듯이 임운령이 밀리면서 바닥에 생겨난 흔적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너희와 나의 실력 차이가 이 정도다.’

그의 시선과 거만한 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한순간, 하후도가 번득, 시선을 들어 진무린을 찾았다.

“네놈이 어떻게 비공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더는 어림없다.”

기혈이 엉켜 속이 답답했으나 진무린은 덤덤한 표정으로 하후도를 대했다.

은천문과 화산, 아미의 모두가 달려들어도 하후도는 버거운 상대였다. 게다가 구양강과 무랍을 동시에 베며 무리한 터라 진무린 역시 하후도를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더라도 말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사부의 원한을 갚겠다는 아미의 바람을 외면한 채 삶을 구한다면 은천문은 비겁한 무리라는 평가를 피하지 못한다.

비록 문주 임운령이 여기에서 쓰러지고, 진무린이 피를 뿌린다 할지라도 은천문에는 사부 전도위가 있고, 사매와 사제가 있으니 오늘 일을 교훈 삼아 더욱 발전하리라.

진무린은 실제로 독한 각오를 세웠다.

죽을 거라면 하후도 역시 가만 두고 싶지도 않았다.

“벽계의 일원이 강호에서 무공을 사용하면 구주가 나설 명분이 된다고 들었소. 그 정도면 억울할 것 없으니 어디 붙어봅시다.”

하후도의 눈이 꿈틀했으나 당장 판관필을 내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기회를 노린 무랍이 양쪽 발목을 번쩍 들었다.

소능산에서 붙들었던 곽가 역시 저런 식으로 발목을 들어 피를 뿌리고는 삽시간에 몸을 감췄었다.

‘놓칠 것 같으냐!’

진무린이 번득 몸을 날렸으나 어느 틈에 하후도가 앞을 막았다.

기혈이 엉킨 진무린의 움직임이 둔한 탓도 있었고, 하후도가 그만큼 우위에 있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젠장.’

무랍을 걷어차려던 진무린은 아쉬움을 삼켰는데 한 가지 알아챈 것이 있었다.

앞을 막아섰던 하후도가 진무린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확실히 그가 구주를 염려하고 있다는 증명과 같았다.

도주한 줄 알았다.

“끄아-악!”

그런데 발목을 들었던 무랍이 이마를 감싼 채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그가 감싼 이마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났는데 무랍은 실제로 고통을 이기지 못한 채 버둥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당황스러운 장면의 연속이었는데 이유는 바로 밝혀졌다.

“원시천존. 노도가 이마에 부적을 붙여 놓은 까닭에 그대는 노도의 반경 안에서 술법을 발휘하지 못하오.”

운진의 넉넉한 음성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끄으! 설마 내 분신을 상대로 이런 술법을 부렸단 말이냐!”

“혈교가 강호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모산이 있기 때문이었다. 술법이 생겨난 이유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아미의 현절과 제자들이 존경스럽고 고마운 눈빛으로 운진을 바라보았다.

어쩔 테냐, 하후도?

진무린의 시선을 받은 하후도가 무랍을 살핀 뒤에 입을 열었다.

“무랍 존자와 함께라면 물러가겠다.”

“진 대협! 본파는 이 자리에서 모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본파와 사부를 욕보인 흉수를 내줄 수는 없습니다.”

하후도의 조건이 있었고, 그것을 붙잡는 것처럼 현절의 말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저렇다는데 어쩌겠소?”

“정말 죽고 싶으냐? 여기 모든 이와 함께?”

“죽음이 두려웠다면 풍령관을 이렇게 왔겠소? 봐서 알겠지만, 화산과 아미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고 왔던 참이오. 그러니 먹히지도 않는 협박 그만두고 얼른 판관필을 내시오.”

하후도의 대꾸를 기다리지 않은 채 진무린은 기혈이 뒤엉킨 가운데 기운을 일으켰다.

우우우우웅.

검이 울기 무섭게 아미, 은천문, 화산의 제자들이 움직여 하후도와 무랍을 둘러쌌으니 남은 것은 죽음을 각오한 일전밖에 없었다.

은천수호검이라면 검에서 크게 밀리지 않는다.

‘문주. 저와 함께 하후도의 검을 감당해주셔야 합니다.’

‘오냐. 최선을 다하마.’

임운령과 시선을 주고받은 진무린은 아미의 현절을 향해 또렷하게 시선을 주었다.

‘기회를 봐서 무랍을 해결하십시오.’

‘고맙습니다, 진 대협.’

누구보다 아미 제자들의 눈이 파랗게 빛났고, 임운령의 눈에서는 진무린을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화산의 제자들은 들어라. 진 대협 덕분에 사부님의 원한을 풀었으니 우리는 더 바랄 것이 없다. 행여나 구차하게 삶을 바라서 화산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해라.”

“장문의 명을 받습니다!”

의지에서 밀리기 싫다는 투로 은혼이 각오를 전했고, 화산의 제자들이 자부심 넘치는 답을 내놓았다.

하후도가 이를 뿌드득 갈 때였다.

운진마저 자세를 바로잡은 뒤에 가슴에 손을 얹고 주문을 외웠다.

더 무엇이 남았겠나.

긴장한 시선들이 진무린이 검을 내는 순간을 기다렸다.

죽은 자의 옷깃을 흔든 바람이 팽팽한 긴장에 놀라 얼른 진무린의 앞을 달려간 직후였다.

“정녕 구주와 접촉했단 말이냐?”

시간을 벌겠다는 투로 하후도가 질문을 냈다.

“올해 팔십이라 하던데 맞소? 앞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아이라 경망스럽고 나대기를 좋아한다고도 들었고.”

“감히 나를 그렇게 평가했단 말이냐!”

“나야 들은 바를 전했을 뿐이오.”

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한 진무린은 분명하게 보았다.

하후도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말이다.

“너희 따위 모두 죽이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내 검을 먼저 넘어야 할 거요!”

쉐에에엑!

진무린이 내민 검을 피해 하후도가 급히 몸을 돌렸다.

쉐에에에엑! 

그러나 그는 방향을 짐작한 듯 날아드는 임운령의 검에 화들짝 상체를 비틀었고, 이어 달려드는 화산의 검을 단숨에 쳐낸 뒤에 훌쩍 뒤로 빠져나갔다.

“멈춰!”

그는 혹여 달려들지 모를 진무린과 임운령을 경계하는 투로 왼손을 들어 앞을 막았다.

“나는 이만 돌아가겠다. 다만, 이곳에 있는 자들이 오늘 일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답을 다오. 그렇지 않다면 나 역시 물러서지 않겠다.”

어찌할까.

진무린 홀로 놓아주는 것과 화산과 아미, 심지어 임운령의 약조를 받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은천문이라면 문주인 내가 보증하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풍령관에서 하후도란 인물과 대결한 적은 없소. 됐소?”

임운령이 나선 마당이었다.

“화산은 보지 못하였소.”

“아미는 오로지 악적을 잡기 위해 풍령관의 수하들과 생사를 겨뤘을 뿐, 다른 이를 본 적은 없습니다.”

“노도는 술법을 발휘하느라 무랍 외에는 지켜볼 겨를이 없었소.”

내용은 제대로 모르나 은혼을 시작으로 각파의 장문인과 문주가 눈치껏 답을 내서 진무린의 고민을 풀어주었다.

“회주! 저자의 말에 속지 마시오!”

무랍의 애처로운 바람이 터져 나온 다음이었다.

그를 돌아본 하후도가 볼을 씰룩이며 시선을 들었다.

“네놈은 어째서 약조를 안 하느냐?”

“문주께서 답을 하셨으니 문도인 나는 따를 뿐이오.”

“그렇더라도 답을 다오.”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어찌 벽계라는 곳의 인물이 이리 의심이 많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임운령의 수고를 망치고 싶지 않아 진무린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본문의 문주를 모신 앞에서 약속하겠소.”

진무린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회주! 어찌 함께했던 이를 외면하려 하시오!”

무랍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시간을 끌수록 추해 보이오.”

진무린의 재촉을 들은 하후도가 매섭게 눈알을 부라린 뒤에 훌쩍 몸을 날렸다.

“회주! 회주-우!”

무랍의 애처로운 부름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풍령관의 본채에 있었고, 곧바로 산 너머로 사라졌다.

가장 염려했던 인물치고는 참으로 허망할 정도로 어이없는 퇴장이었다.

“진 대협. 이제 나서도 되겠습니까?”

“아미는 한을 푸십시오.”

진무린은 자리를 비키는 것처럼 임운령의 곁으로 움직였다.

화산과 아미, 운진이 지켜보는 앞이었다.

“본승이 알려줄 것이 있다! 은천문에서 나와 결탁했던 자를 알려주마!”

마음 급한 무랍은 은천문의 치욕적인 일을 입에 담았다.

“본문의 일은 이미 정리되었다! 아미의 바람이 아니었다면 내 손으로 너의 목을 잘라 벌했을 테니 너는 그 입을 다물어라!”

진무린이 쩌렁, 내지른 고함의 뒤에서 현절은 있는 내공을 모두 주먹에 담아 치켜들었다. 

“악적! 너를 죽여 마지막까지 본파의 이름을 지키느라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하시던 사부님의 원한을 갚겠다!”

“안 돼!”

퍼억!

현절의 주먹을 피해 상체를 비트는 바람에 무랍의 왼쪽 어깨가 움푹 들어갈 정도로 무너졌다.

퍼억!

재차 상체를 튼 옆구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입을 쩍 벌린 무랍이 피를 게워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잘린 다리를 버둥거리며 상체가 무너진 무랍이 피를 게워내면서도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모습은 그랬다.

퍼억!

그러나 더는 피하지 못하여 수박처럼 위가 부서진 무랍의 머리가 옆으로 꺾였고, 이어 그의 몸뚱이가 길게 늘어졌다.

“사부님. 못난 제자가 이제야 흉수를 잡았습니다.”

복수를 마친 현절은 죽은 무랍을 보며 비통한 심정을 토해냈다.

길었던 풍령관에서의 싸움이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

 

사부와 함께했던 시절을 떠올릴 정도로 귀혼곡에서 지내는 백면호리의 삶은 여유롭고 편안했다.

일이라고는 이안공자가 필요로 하는 약재를 사다 주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나마 염려하던 정도맹과 소림, 무당의 추적마저 흐지부지해진 터라 어려울 것도 없었다.

누가 불쑥 잡으러 올 것을 염려하지 않아서 잠을 푹 잤고, 노반이 차려주는 음식 역시 입에 맞았으며, 무엇보다 나날이 발전하는 요정을 바라보는 재미가 더할 수 없이 쏠쏠했다.

진무린이 재능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혈도를 만져주고, 제대로 된 길을 알려준 덕분인지 불과 며칠이 되지 않았는데도 요정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정아야! 약 먹을 시간이다!”

그뿐이랴.

이안공자가 하루에 한 번, 탁기를 제거하고 몸을 보한다는 환약을 먹이는 것은 물론, 진법과 천문, 그 외에 필요한 지식을 전수해 주니 그야말로 더 바랄 것이 없는 삶이었다.

그렇다고 사람 사는 일에 어떻게 걱정이 없겠나.

“이거 큰일이네.”

그는 전에 없이 불룩 나온 배를 만지며 입맛을 다셨다.

“내일부터는 음식을 좀 줄이든가 해야지. 이 정도는 이틀에 한 번 홍화루에 다녀오면 바로 잡힐 텐데.”

바깥소식이 궁금한 그는 엉뚱한 핑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약재를 산다고 해봐야 당장 벌어지는 일을 바로 듣는 것이 아니어서 강호의 변화를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

한숨을 내쉰 그는 멀쩡한 하늘을 보며 재차 입맛을 다셨다.

“사람이 뭐 이리 무심해? 어딜 가면 좀 데리고 가든가, 아니면 연락은 좀 하고 살아야지.”

귀혼곡에 있느라 외부 소식을 못 듣는 것이 가장 아쉬운 백면호리의 투정이었다.

 

**

 

풍령관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화산과 아미는 죽은 제자들을 먼저 수습했고, 이어 살아남은 풍령관의 수하들을 한쪽으로 몰았으며, 마지막으로 구양강과 무랍의 머리를 보자기에 담았다.

임운령은 은천문의 제자들에게 명해 팔관교를 끊게 하고, 풍령관의 죽은 자들을 모으게 지시했다.

제법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너는 어서 운기를 해 잠시라도 기혈을 다스리는 것이 어떠냐?”

“예, 문주.”

다른 파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문주의 지시를 가볍게 대할 수 없었고, 실제로도 운기가 필요해 진무린은 적당한 곳에 가부좌로 앉았다.

“문주께서도 잠시 몸을 살피십시오.”

이때 임운령은 운진에게도 같은 권유를 해서 진무린의 옆에 자리하게 했다.

강호에서 검기를 진무린과 같이 보이는 자는 없었다.

그것도 다수의 적을 상대했는데 그 숫자가 백에 달하였으니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화산과 아미는 그 점에 관해 묻고 싶은 것이 많을 일이었다.

우스운 것은 진무린 역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등룡창천을 통해 보지 못하는 곳의 모습을 뇌리에 담을 수 있었다.

그것이 완성인 줄 알았다.

눈을 감은 진무린은 진용선의 말을 떠올렸다.

 

“등룡창천 역시 과정이더구나. 아비는 보았지만, 도달하지 못했다.”

 

그랬다.

등룡창천으로 상대의 위치를 가늠하고, 상단전을 통해 쏟아낸 기운을 검에 담으면 그것이 곧 검기로 발현된다.

계산해서 내놓은 것이 아니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동전이 있어 사용한 것처럼 급한 마음에 쏟아낸 기운이었다.

공연히 운기 중에 퍼지는 묵빛 기운을 화산과 아미에게 보일까 염려된 진무린은 가벼운 운기로 몸을 달래며 검기를 쏟아낼 때를 복기했다.

임운령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었다.

어떻게 은천수호검이 하후도의 무공과 궤가 같은가 하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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