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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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3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81화
은천검제
제81화
임운령은 답답한 얼굴로 집무실의 창 앞에 섰다.
벌써 닷새째였다.
진무린이 화산의 장문인 은혼을 돕고, 마교의 인물로 추정되는 흉수 둘을 상대한 것까지는 들었다.
그 길에서 은혼은 함께했던 진충무관의 표충량을 제자로 삼아 화산으로 돌아갔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진무린은 이후 닷새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하후도에게 중단전을 다쳐 피를 토했다는 말이야 황종관도 알고, 보우도 아는 사실이니 임운령 역시 모르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진무린이 누군가에게 당했다면 그 근처에 엄청난 흔적이 남아야 할 텐데 도통 짐작 가는 일은 없었다.
임운령은 입술에 힘을 꾹 준 채 무거운 눈으로 은천문을 내려다보았다.
가뜩이나 모려원을 처벌하라 날뛰는 상황이었다.
만약 진무린마저 모려원처럼 기억을 잃고 나타난다면 백승과 원고성이 들고일어날 것은 불을 본 것과 같았다.
“흐음.”
생각이 없는 제자라면 그러려니 한다.
무공이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겠다.
마교가 나섰다면 흔적이 요란할 테고, 풍령관은 홀로 진무린을 상대하기 어렵고, 구대문파는 더더욱 아닐 테고.
하후도가 나선다 해도 흔적 없이 진무린을 눕히기는 어려운 일이다.
‘혹시 얻은 것이 있었더냐?’
임운령이 먼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문주. 백승 장로와 원고성 장로가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들어선 제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
짐작했던 일이고, 피하기 어려운 자리였다.
“두 분께 집무실에서 뵙자고 말씀드려라.”
“예, 문주.”
제자가 나서고 난 뒤에 임운령은 몸을 돌렸다.
“이렇게 속을 썩이는 놈이라니.”
혼잣말을 뱉은 임운령이 잠시 서류를 살피고 있자니 백승과 원고성이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임운령이 권하는 자리에 두 사람은 바로 앉았다.
“바쁘실 두 분이 어쩐 일이십니까?”
“모르지 않으실 텐데 그리 말씀을 돌리시니 이 몸이 나서리다. 문주는 정녕 우리를 포함한 네 개의 가문을 버리실 참이시오?”
“두 분 장로와 네 개의 가문을 버릴 요량이었으면 지금 이리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겠습니까?”
“허어.”
답답하다는 투로 백승이 탄식을 쏟아냈다.
“무리한 요구가 아니잖소. 등룡창천의 초식을 익히고도 보고는커녕, 칠주야가 다되도록 잠적 중이오. 게다가 엉뚱하게 기보를 찾는다는 말이 있었고, 모산의 술법에 관여하였으니 그런 제자를 벌해 달라는 것이오.”
“백 장로의 말씀에 덧붙이자면 려아는 검을 잃었고, 본문의 무공을 유출한 혐의가 있는데 그에 대한 처벌도 뒤로 미루고 있음을 상기해 주시구려. 언제까지 싸고도실지는 모르나 이제 문주께서 결단을 내리실 때가 되었다고 믿소.”
백승의 말을 문 것처럼 원고성이 말을 덧붙였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은천령을 내려 무린이의 목이라도 가져다 드리리까? 아니면 강호의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제자 셋을 도륙하길 바라시는 겝니까?”
대꾸가 없는 두 사람을 보며 임운령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났다.
“하나 더 다시 알고 계셔야 할 것이 있으니 그 아이의 무공은 이전에도 홀로 은천령을 내린 제자들과 동귀어진할 수준이었소. 거기에 등룡창천마저 얻었으니 은천령이 과연 먹히겠소?”
“허!”
“이 판국에 은천령이 힘을 발휘하려면 나와 전 사부까지 모두 나서야 할 텐데 두 분 장로가 바라는 것이 그것입니까? 문주와 사부가 나서 제자와 동귀어진하는 참극?”
“그렇다면 제자의 일탈을 그냥 지켜보시겠다는 말씀이오? 이래서야 본가의 기강이 살겠는지 문주는 책무를 돌이켜 보시구려.”
“은천령을 내려드리리다.”
화들짝 놀라는 백승을 향해 임운령은 말을 이었다.
“본가를 나서겠다는 네 가문의 제자를 모두 동원하겠소.”
한순간 기대에 부풀었던 백승의 입이 암팡지게 비틀렸고, 원고성은 그럼 그렇지, 하는 기색으로 임운령을 보았다.
“우리를 포함한 네 개의 가문이 나가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소?”
“다른 가문의 희생은 당연하고, 손을 잡은 네 개의 가문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권리만 요구하겠다면 나도 더는 말리지 않겠소. 대신 한 가지만 명심하시오.”
말투까지 바꾼 임운령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 개 가문이 본가를 나서는 순간, 이후에 어떤 이유에서도 이곳을 들어올 수 없소. 또한, 본가를 나선 이후에 은천문라는 이름을 앞세워 일을 벌인다면 나와 전 사부가 인솔하는 은천령을 마주하게 될 게요.”
“결국, 우리를 버릴 계획이셨던 게로군.”
임운령이 최악의 결과를 각오한 듯 강경하게 나오자 백승은 외마디 불평을 토해낼 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원 장로.”
“말씀하시오.”
백승을 외면한 임운령이 이번엔 침묵하던 원고성을 찾았다.
“문주가 바보로 보이시오?”
“하실 말씀이 있다면 바로 하시면 되리다.”
“암연의 보고를 뒤튼 일만으로도 원가는 봉문을 당하고 남소. 여기까지요. 이후로 더 추한 모습을 보이면 그때는 불편하게 마주하게 되리다.”
원고성은 대꾸하지 못한 채 애꿎은 볼만 씰룩였다.
지금 임운령이 진심으로 분노한다면 그를 감당할 이가 은천문에는 둘밖에 없으니 하나가 전도위요, 다른 하나가 등룡창천을 얻은 진무린이었다.
그 직후였다.
“조만간 은천령을 내릴 것이오. 두 분 장로는 그 점을 분명히 알아주시오.”
지금까지 대화와 전혀 다른 임운령의 말에 백승과 원고성이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임운령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은천령을 내린다 하셨소?”
“은천령을 내린다 하였습니다.”
“조만간이라면 얼마나 되겠소?”
“멀지 않을 것이오.”
임운령의 표정으로 보아 더 물어도 얻을 것은 없었다.
그러나 백승과 원고성은 반쯤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
진무린은 길고 길었던 운기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팔과 다리에 수북하게 쌓인 흙먼지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말라비틀어진 잡목과 넝쿨 너머의 밖은 환해서 운기에 들 때와 비슷한 시기로 보였다.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손에 넣었다.
그토록 궁금하던 내공과 도력의 차이를 알았고, 상단전을 통해 사물이 지닌 기를 느끼는 단계였다.
원하면 묵빛 기운을 뿜을 수도 있고, 내보이지 않고도 등룡창천을 펼칠 수 있는 경지를 얻었다.
가볍게 웃은 진무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수수 먼지가 흘러내리는 가운데 잡목과 넝쿨을 헤치며 밖으로 나온 진무린은 느긋하게 산 아래를 향해 걸었다.
은혼과 헤어진 근처의 개울을 찾은 진무린은 가장 먼저 손을 씻었고, 이어 물을 몇 모금 마셨다.
“도대체 며칠이 흐른 거지?”
기가 막힐 일이었다.
볼이 홀쭉하게 들어갈 정도로 말랐고, 수염은 덥수룩했다.
물을 마시자 몸이 원하는 것처럼 시장기가 돌았는데 물에 비친 눈은 맑았고, 정신은 전에 비할 바 없이 또렷했다.
또한, 눈매와 표정이 부드럽게 보여서 등에 멘 검만 아니라면 책을 보던 서생이나 얌전한 삶을 산 청년쯤으로 보였다.
몸에 쌓였던 흙먼지와 수염으로 봐서 족히 나흘은 넘어 보이는 터라, 진무린은 은천문과 운진을 떠올리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쯤 은천문은 속이 시끄러울 테고, 연락이 끊긴 진무린을 외로이 기다리던 운진은 서운한 심정으로 모산으로 향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몸을 일으킨 진무린은 가볍게 웃은 뒤에 시선을 한쪽으로 돌렸다.
이런 순간에는 그냥 두어도 좋으련만, 강호를 살아간다는 것이 원래 이런 터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진무린이 천천히 계곡 아래를 향해 돌아선 뒤였다.
퍼러러러럭!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처럼 키가 작고 동그랗게 보일 정도로 살집이 있는 노인이 진무린의 앞에 내려섰다.
퉁퉁하게 올라온 볼, 진무린의 목에 겨우 닿는 신장, 주먹코, 갈고리처럼 치솟은 눈과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됨직한 주먹까지.
나타난 이는 아홉 번의 주먹질로 강호를 울렸던 전전대의 마교 고수 고적구권 갈마천이 분명했다.
“네가 우리 아이들의 명을 끊어놓은 은천문의 그놈이냐?”
하다, 하다 이제는 백 살이 다 된 노괴가 튀어나오는 형국이라니, 진무린은 기가 막힌 심정에 옅게 웃었다.
진무린의 웃음을 확실히 보았을 텐데도 갈마천은 노괴답게 할 일을 하겠다는 투로 소매를 걷어붙였다.
진무린은 표정을 가라앉힌 채 그를 바라보았다.
마교에는 그 나름 수준을 넘어서는 괴물이 간혹 등장하곤 했는데 은거 기간이 길었던 만큼 확실히 갈마천은 마교에서 신선의 경지라 일컫는 마선에 다다른 것이 분명했다.
이전의 진무린이라면 필시 양패구상이었을 정도로 느닷없이 나타난 갈마천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선배라면 교주와도 필적할 수준인데 굳이 직접 나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누가 있기에 선배를 부릴 수 있습니까?”
“흥, 그놈 참. 죽을 놈이 궁금한 것도 많다.”
“눈이라도 감고 죽어야 곱게 가지 않겠습니까?”
갈고리눈을 치켜뜬 갈마천이 죽을 놈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게 왜 쉽게 죽을 것을 이리 복잡하게 만들었느냐?”
“후배에게 죽을 고비가 있었습니까?”
“캬하하하.”
독특한 웃음이었다.
“되살아난 마등이 달려갔을 때 죽었으면 좋았을 테고.”
진무린의 눈빛이 가라앉은 것을 보며 갈마천은 오히려 그런 반응이 흡족하다는 표정이었다.
“네놈의 사매란 계집에게 술법이 발동하면 마음에 둔 자에게 검을 내게 되었는데 그 두 번째 기회에서 살아났고.”
그 상황은 본인이 생각해도 별로 신통치 않았는지 갈마천 역시 마뜩잖은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마교삼절이라는 아이들을 만났을 때나 아니면 쌍적을 마주했을 때 죽었다면 이리 번거롭지 않았을 테니 얼마나 서로 편안했겠냐.”
“그래서 선배를 부린 인물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어느 인간이 나를 부려? 내 젊었을 때 철없이 한 약속에 엮여 이리 번거롭게 나선 게지. 말이 길었다. 얼른 검을 내어라.”
“마지막입니다. 왜 선배까지 나서 나를 죽여야 합니까?”
“답답한 놈아.”
갈마천은 정말이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쏟아냈다.
“은천문이 무너지려면 중심축이 흔들려야 할 게 아니냐. 네놈이 그 시작이다. 그런데 문제를 일으키고 죽어야 할 네놈이 자꾸 버티니 나 같이 물러난 이가 수고를 하는 게지.”
“고작 그 이유입니까?”
“고작? 심지어 네놈이 속한 은천문이 기울어지는 것이 강호 일통의 시작인데 그리 말하면 듣는 노부가 섭하다.”
말을 마친 갈마천은 번거로운 일에 말린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이제 눈을 감고 죽을 만하냐?”
“그런데 어떻게 선배께서 본문의 일을 그리 잘 아십니까?”
진무린의 질문에 멈칫했던 갈마천이 히죽 웃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기운이 매섭게 솟구쳤다.
문답이 지겨웠든지 더는 말하기 곤란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이유야 어쨌든, 갈마천은 절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방심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스으응.
진무린은 검을 빼 들고 곧바로 묵룡심법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좋구나!”
외마디를 지른 그가 득달같이 달려들며 오른 주먹을 내질렀다.
손목 안쪽을 위로 들었던 그가 주먹을 비틀었는데,
후아아악!
그 한 수가 어찌나 매섭던지, 주먹에 말려든 공기가 매섭게 돌며 활처럼 진무린에게 달려들었다.
쉐에에엑!
진무린은 회전하는 권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파학!
권풍과 검이 부딪친 직후에 널따란 천을 때린 듯한 소리가 터졌는데 놀랍게도 그 여파로 바닥을 디딘 진무린의 다리가 세 치 정도 뒤로 밀려났다.
부응!
이어진 갈마천의 다음 주먹은 진무린을 속이는 헛된 것이었다.
그런 허수에 속을 진무린이 아니어서 상체를 뒤틀며 달려들자, 갈마천은 또다시 회전의 묘리를 섞은 두 번째 주먹을 날렸다.
한 번의 주먹에 세 번의 회전이 들었으니, 그의 이름을 강호에 처음 알리게 된 권법 고적삼권이었다.
진무린이 세 치나 밀려난 것을 보았던 갈마천은 권풍의 뒤에 숨은 것처럼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할까!’
진무린은 검을 돌려 고어와 용이 그려진 검면으로 갈마천의 권을 받았다.
카아앙!
검은 먼저 진무린을 향해 휘었다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갈마천을 향해 튀어나갔다.
쉐엑!
튀어나가는 검을 따라 진무린이 몸을 앞으로 뻗어내니, 갈마천은 삽시간에 앗, 뜨거라 하는 표정으로 상체를 비틀었다.
쉬이이익!
진무린의 검이 그의 목젖을 노리고 날아간 직후에,
촤아아아악!
마치 누군가 갈마천의 뒷덜미를 잡아챈 것처럼 그가 뒤로 물러났다.
휘릭!
진무린이 검을 빠르게 휘저어 공간을 잡아낸 맞은편에서 갈마천은 멀쩡한 자신의 주먹을 의아한 듯 내려다보았다.
“너무 오래 쉬었는가? 어찌 저런 애송이를 상대로 이리 시간을 끌꼬?”
주먹이 알아듣는다는 양 중얼거린 갈마천이 독하게 변한 갈고리눈을 치켜떴다.
“진무린이란 아이가 재능이 뛰어나 그를 죽이지 않고는 은천문을 손에 넣기 어렵다더니.”
변화무쌍하고 괴팍한 성격답게 혼잣말을 뱉어낸 갈마천이 상체를 비틀며 주먹을 뒤로 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