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30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78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30화
그의 침상은 혼자 쓰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컸다. 원래 부인과 함께 쓰던 침상이었으니까.
다른 여자를 맞아들인다 해도 욕할 사람은 없지만 그는 십 년 넘게 침상을 혼자 썼다.
자신의 옆에 다른 여자를 눕히고 싶지 않았다.
딸의 표정이 더 차가워지는 것도, 가슴이 얼어붙는 것도 원치 않았고, 딸이 자신을 증오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도 원치 않았다.
애증에 찬 눈빛을 마주하는 것은 지금도 충분히 괴로웠다.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그는 눈을 감았다.
딸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어릴 때, 안아든 자신을 남 쳐다보듯 멀뚱거리며 바라보던 그 표정.
부인이 죽은 후, 원망과 슬픔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볼 때의 그 표정.
삼 년 전, 긴급한 일로 부인의 기일에 참석하지 못했을 때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묵묵히 돌아설 때의 그 표정.
그러고 보니 딸이 웃는 것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요즘은 가끔 웃기도 한다던데.’
소연추가 말하길, 장천운이라는 호위무사 때문이라고 했다.
총사가 추천해서 호위무사가 되었다는 젊은 놈.
자세히 알아보니 제법 마음에 드는 놈이었다. 이번 습격에서도 그놈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하지 않던가.
돌아오면 그놈에게 깜짝 놀랄 만큼 큼지막한 선물을 줄 생각이다.
이미 우문각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놓았다.
‘어떤 상황에서든 경아를 지킬 수 있는 놈으로 만들어야겠어. 그러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겠지.’
그런 놈이 딸의 곁에 있다는 걸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경아야, 너는 이 아비의 모든 것이란다. 너를 위해서라면 세상의 무엇이든 아까울 것이 없단다. 사랑한다, 내 딸.’
그때 머릿속에서 강력한 번개가 쳤다.
찌이이이잉!
‘크으윽!’
두통을 겪은 게 한두 번이 아니거늘, 이번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비명이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몸이 허공에 붕 떠있는 기분.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서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사마중천은 공력을 모조리 끌어올려서 고통을 눌렀다. 아니, 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머리를 터트려버릴 것 같은 강렬한 고통은 절대경지에 오른 그의 공력으로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불길한 느낌.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사력을 다했다.
‘뭔가 이상해. 일어나야 해!’
얼마 전부터 약이 점점 쓰게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좋은 약이니까 쓰겠지 했는데 아무래도 수상쩍게 느껴졌다.
‘설마 그 약에다가……?’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기이하게도 별다른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의 통증 때문에 감각이 무뎌진 것인가?
그뿐이 아니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눈앞이 점점 어둠으로 물들었다.
‘이대로 잠들면 안 돼! 일어나서 경아를 기다려야 돼!’
그는 일어나기 위해 온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발버둥 칠수록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 추졌다.
정신도 흐릿해졌다.
‘오오오, 하늘이시여! 너무 하십니다!’
이제 겨우 딸아이의 눈빛이 따뜻해지고 있거늘!
그는 하늘을 원망하며 사력을 다해서 정신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한 가닥 남았던 정신마저 뇌리의 까마득한 끝자락에 있는 시커먼 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상태로 조용히 잠들었다.
영원히.
***
자정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정유의 떨리는 목소리가 우문각의 잠을 깨웠다.
“총사아아!”
“무슨 일인데 이 밤중에 그리 다급한 목소리인가?”
“서, 성주께서…… 성주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뭐야?”
우문각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비가 성주께서 드실 차를 밤에 가져다 놓곤 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그만…….”
우문각은 보고를 받으며 다급히 겉옷을 걸쳤다.
‘안 돼! 아직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성주!’
그가 뛰듯이 방을 나서며 물었다.
“현재 상황은?”
“철혈단과 경천단이 구천무원을 에워싸고 율검당과 벽호당이 나서서 무사들의 동요를 막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오단 중 철혈단과 경천단은 대장로 나극의 수족과 같다. 그들이 나섰다면 선수를 빼앗겼다는 뜻이다.
자정 무렵.
어둑어둑하던 구천성 전체에 화톳불 수백 개가 새롭게 피어났다.
구천무원 주위는 아예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곳으로 구천성의 모든 장로와 간부들이 불나방 떼처럼 모여들었다.
“허락받지 않은 자는 구천무원으로 들이지 마라!”
“지금부터 모든 무사들의 외출을 금해라! 경비무사들을 제외하고는 무기소지를 금지한다!”
“함부로 움직이는 자들은 가차 없이 잡아들여서 뇌옥에 처넣어라!”
밤하늘을 울리는 명령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대부분의 간부들과 무사들은 구천무원 앞에 모여서 굳은 표정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구천무원 안, 구천호령(九天護靈)이 둘러싸고 있는 사마중천의 방에는 이미 삼십여 명이 들어서 있었다.
모두 구천성의 장로와 호법을 비롯한 고위급 간부들이었다.
청색비단장포를 걸친 백발백염의 중후한 노인은 대장로 나극이었고, 그 옆에는 백리호, 경천단주 독고태 등 십여 명이 서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각진 얼굴에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칠순 노인, 태상호법 여철숭과 우문각, 풍혼단주 엽가승 등 간부 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황사중의 조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은연 중 둘로 나누어져서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그때 한 사람이 구천무원으로 들어섰다.
장대한 체구, 가슴까지 늘어진 풍성한 회색 수염, 중후함이 느껴지는 모습. 공손백이었다.
성주의 사형이며, 한때 구천성을 좌지우지했던 그가 나타나자 간부들의 눈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도대체 무슨 말이오? 성주께서 돌아가셨다니?”
그가 벌게진 얼굴로 방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경악과 불신과 당황함이 복잡하게 버무려진 표정이었다.
“대사형, 성주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황 당주의 말에 의하면 지난 몇 년 동안 고질병을 앓고 계셨는데, 그 동안 저희들이 걱정할까 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고 약만 드셨다 합니다! 크흐흑흑. 보약으로 알았던 그 약이 고질병을 치료하는 약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백리호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끝내 억눌린 울음을 터트렸다.
“성주!”
공손백이 외치면서 사마중천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사마중천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던 황사중이 착잡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공손백이 그를 다그쳤다.
“어떻게 된 건가, 황 당주? 정말 성주께서 병으로 돌아가셨단 말인가?”
황사중이 착잡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예, 장로.”
“그게 말이 되는가! 아무리 고질병이 심하다 한들, 낮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성주가 어찌 이렇게 갑자기 숨이 끊어진단 말인가?”
“그간 약을 꾸준히 쓰긴 했습니다만 머릿속에 든 병이어서,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저 역시도 예측할 수가 없었습니다.”
“허어!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한쪽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우문각은 이를 앙다문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졌다.
천궁마신 사마중천.
천하제일세의 주인이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잠자던 그대로.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차라리 무력으로 공격해 왔다면 그에 따른 대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밤에 혼자서 잠을 자다 숨을 거두는 바람에 손 쓸 시간조차 없었다.
정말 자연사인가, 아니면 철저한 음모에 의한 살해인가?
우문각은 후자라 생각했다.
‘저들은 성주의 죽음이 알려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성의 요지를 장악했어.’
그뿐이 아니다. 기다렸다는 듯 무사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주요지점을 장악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저들의 짓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다.
아무런 증거가 없는 지금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봐야 의심만 산다. 죽음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이상 검을 들면 거꾸로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힐 뿐.
일단은 의당의 주인인 황사중의 조사를 기다리는 수밖에.
‘하루만 더 시간이 있었어도 놈들의 배후를 밝혀낼 수 있었을 텐데…….’
양호와 곽채응을 잡아들인 이후 추원교에 대한 추적명령을 내리고 용평마저 불러들이자 암중의 동요가 커졌다.
그 중 수상쩍은 몇은 날이 새기 전에 잡아들일 작정이었다.
이대로 하루만 흐르면 반역자들의 중심까지 파헤칠 수 있는 상황. 그런데 하필이면 중요한 기점에 도달했을 때 성주가 숨을 거두다니.
‘대백(大伯), 그대는 또 어떤 역할을 한 거요?’
우문각의 시선이 공손백을 향했다.
그는 워낙 조용히 살아온 데다, 성주의 자리를 물려준 후 한 번도 반발다운 반발을 하지 않았다.
반발은커녕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반발을 몇 번이나 막아주었다.
그런데 막상 성주의 죽음을 대하자 그의 비중이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현재 구천성에서 양 세력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공손백 뿐이다.
게다가 후계 순위를 따져도 소성주 다음이다.
그런데 왜 그런 공손백을 소홀히 생각했는지 자신이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십오 년의 세월이 그에 대한 경계심을 녹여버린 건가? 멍청한 우문각.’
우문각이 자신의 머리를 쪼개버릴 것처럼 후회하고 있는데, 공손백이 방안의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 그 어떤 세력다툼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만약 이를 어기는 자가 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 공손백이 용서치 않을 것이오!”
우문각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말인 즉 지금까지 해온 조사를 중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철저히 짜놓은 계획에 따라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
여태껏 나극이 성주의 반대세력을 움직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모든 계획을 짤 때 나극을 중심에 놓았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극의 뒤에 공손백이 있었다면?’
그럼 처음부터 잘못된 계획을 세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손끝이 잘게 떨렸다.
‘이런 멍청한…….’
그때 공손백이 그를 바라보았다.
승리자의 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질릴 정도의 무심함만 있을 뿐.
“총사가 많이 도와줘야할 것 같네. 성주의 죽음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구천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슬픔을 참고 내일을 생각해야 하네.”
손끝만이 아니라 가슴까지 떨렸다.
“아마 성주의 장례를 치르고 나면 할 일이 많을 거야. 앞으로 어린 소성주가 이 구천성을 물려받으려면 많은 것을 배워야 하겠지. 자네가 곁에서 도와주게나.”
우문각은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걸 느꼈다.
소름끼치는 두려움.
소성주가 이 상황에서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몇 달? 잘하면 일 년?
공손백은 그녀가 엄청난 중압감에 짓눌려서 스스로 자멸할 때를 기다리겠다는 생각이다.
그녀가 자멸하면 구천성이라는 작물을 한 톨도 흘리지 않고 수확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 우문각의 두 눈 깊은 곳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그래, 이제야 알 것 같군.’
우문각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