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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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2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49화
은천검제
제49화
누군가 내려선 것은 느꼈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 다가왔는지를 알지는 못했다.
돌아선 진무린은 매서운 눈으로 앞에 선 마흔 중반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굉장한 미남이었다.
무엇보다 짙은 눈썹과 가로로 긴 눈, 인상을 결정짓는 코와 입술이 매력적이었다. 세 갈래의 수염은 길지 않아도 충분히 어울렸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호남형의 인물도 눈에 담긴 야비함과 교활함은 감추지 못했다.
순백의 학사복에 학사모를 걸친 남자는 손을 뒷짐을 지고 진무린의 위아래를 천천히 살폈다.
“누구십니까?”
진무린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천천히 뿜어져 범위를 넓혀가는데도 남자는 태연했다.
한 단계 위? 아니면 두 단계?
선인의 경지인 진무린에 비해 남자는 세상의 기운과 동화되었다는 화경이거나 그 위 단계인 것이 분명했다.
“오호! 선인의 경지인가?”
“누구냐고 물었소?”
“나?”
뒷짐 진 손을 풀어낸 남자가 왼손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오른손에는 길이 한 자 반, 재질은 한철로 보이는 판관필을 들었는데 붓처럼 생긴 끝이 몹시도 날카로웠다.
“하후도라 한다. 그리고.”
말을 멈춘 하후도가 생긋 웃었다.
“너를 죽이러 온 사람.”
후아아아악.
하후도의 말과 동시에 엄청난 기운이 진무린을 꽁꽁 묶었다.
‘끄응.’
진무린은 이를 악물며 기운을 뿜어냈다.
서서히 펼쳐나가던 검은 기운이 빠르게 뻗쳐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는데 놀라운 현상은 그다음에 있었다.
마치 다가서면 안 된다는 것처럼 검은 기운은 하후도의 앞에서 갈라지며 그를 덮지 못했다.
번득이는 하후도의 눈을 바라보며 진무린은 천천히 검을 꺼내 들었다.
검은 기운 안에서 검을 피할 자는 없다고 들었다.
그러니 하후도란 남자를 기운 안에 가두면 승패를 가늠하지 못한다.
진무린의 생각을 읽었을까.
아니면 눈빛에 담긴 의지를 보았을까.
우우우우웅.
기운에 반응한 검이 울자 하후도는 퍼뜩 표정을 바꾸었다.
쉬이이익!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말끝에서 하후도는 이미 진무린의 앞에 있었다.
목을 노린 판관필을 피해 진무린은 상체를 뒤로 젖혔다.
아직 서 있는 진무린의 환영이 남을 정도로 빠른 동작이었다.
이제 일어서서 검을 내지르면…….
불쑥!
사람이 이렇게 빠를 수 있을까.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몸을 젖힌 진무린의 위에 하후도가 나타났다.
쉬이이익!
그리고는 이번에도 판관필로 진무린의 목을 노렸다.
눈 한 번 깜박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익!’
무릎에 의지해 허공에 누웠던 진무린은 아예 허리를 접듯이 머리를 발목으로 꺾었다.
부웅!
그리고는 한 바퀴를 돌며 발로 하후도의 배를 노렸다.
휘이이익!
거꾸로 한 바퀴를 돌아 몸을 세운 진무린은,
‘왼편!’
섬뜩한 감각에 검을 왼편으로 내밀었다.
카아아앙!
불꽃이 번쩍 튀었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때부터였다.
카가가강! 쉬익! 카앙!
판관필은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직선인가 싶으면 휘어져 들어왔고, 단순한가 싶으면 현란하게 끝을 흔들었다.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덕분에 피할 수 있었다.
등룡창천을 깨닫기 전이었다면 벌써 판관필에 목을 잘렸을 정도로 하후도의 무공은 대단했다.
쉬익! 카가가강! 쉬이이익!
일방적인 대결이었다.
카아아앙!
게다가 판관필을 막을 때마다 엄지와 검지 사이가 뜯어지는 것처럼 통증이 몰려왔고, 손목이 후들거릴 정도로 내공에서도 밀렸다.
쉭! 카가가강! 쉬익! 카앙!
진무린의 몸 곳곳이 피로 물들었는데 아직 쓰러질 정도로 크게 베인 곳은 없었다.
쉬에엑!
한순간 판관필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달라졌다.
그리고 빛을 번득이며 길게 선을 그리던 하후도의 판관필이 뚝뚝 끊어지는 것처럼 느닷없이 눈과 목, 명치 앞에서 나타났다.
쉬에엑! 카아앙!
진무린이 다급하게 판관필을 막아낸 뒤였다.
퍼어억!
언제 뻗었는지 모를 왼손에 가슴을 얻어맞았고 뒤로 밀려났다.
보지 못했다.
그저 느낄 뿐이다.
쉐에에에엑! 파바바바박!
감각이 전하는 방향으로 검을 휘두르자 허공을 가른 기운이 바닥에 길게 선을 그렸다.
기가 막히게도 하후도는 서너 걸음 앞에서 여유롭게 서 있었다.
호흡을 고른 진무린이 앞을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야비한 눈빛으로 하후도가 바닥을 가리켰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심정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必死(반드시 죽는다)!’
살아보겠다고 내지른 검의 기운으로 반드시 죽는다는 글자를 완성했으니.
검의 기운을 이용해 바닥에 글을 쓰는 일, 진무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결 중에 저렇게 글자를 쓸 생각은 하지 못했고, 하후도를 상대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사람을 가지고 놀아?
자존심이 제대로 상한 진무린은 픽 웃었다.
“웃어?”
“늘 궁금했소. 감각을 통해 적을 상대한다는 것이 어떤지 말이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투로 하후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도의 적수를 만나지 못했는데 오늘 당신의 목을 자르면 제대로 얻을 것 같으니 나타난 준 것이 오히려 고맙소.”
피식.
하후도는 독하게 변한 눈을 하고서 기가 막힌 웃음을 그려냈다.
“이제 그만 죽어라.”
쉐에엑!
달랐다. 지금까지 보았던 것보다 월등히 빠르고 강한 기운이 진무린을 향해 날아들었다.
카아앙!
진무린은 감각이 전하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카아아앙! 카앙! 카아아아앙!
어둠이 내려앉은 소능산의 오래된 사당 앞에 불꽃이 요란하게 튀었고, 그럴 때면 진무린의 몸에 상처가 하나둘 늘어났다.
이때 판관필이 날아드는 궤적은 참으로 신묘해서 검을 감듯이 당기기도 했고, 어떤 때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던 곳을 파고들었다.
카가가강!
손목을 흔들어 화려하게 빛나는 판관필을 막아낸 뒤였다.
카가각!
검을 타고 파고든 판관필이 진무린의 심장 아래를 찍었다.
‘끄윽!’
송곳을 찌른 뒤에 후벼대는 듯한 통증에도 진무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휘리리리릭!
오히려 세차게 춘설난무를 펼쳐 하후도의 팔을 노렸다.
언제 물러났는지는 보지 못했다.
감각으로 알아채지 못했다면 정말이지 물러난 것조차 뒤늦게 알았을 정도로 하후도는 빨랐다.
“그놈 참.”
온다!
진무린은 빠르게 호흡을 조절하며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이었다.
심장 바로 아래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훑었다. 갑자기 단전에서 기혈이 솟구쳐 목으로 쏠렸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급하게 뿜어졌다.
“푸훅!”
결국, 진무린은 피를 토해냈다.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하후도는 진무린의 가슴께에 시선을 주었다.
심장 바로 아래에서 피가 제대로 번져 나와 있었다.
승리를 짐작한 하후도가 비릿하게 웃은 직후였다.
“호오-오!”
저 멀리에서 청강의 휘파람이 들렸다.
“벌레 같은 것들이 기를 느꼈나 보군. 오늘은 이 정도만 하자.”
상등을 힐끔 보았던 하후도가 훌쩍 몸을 띄웠다.
그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진무린의 곁으로 청강과 황종관이 옷자락을 요란하게 날리며 내려섰다.
긴장이 풀어져서 그럴까.
“푸후-욱!”
진무린은 거세게 피를 토해냈다.
“진 대협!”
“이 사람아!”
청강과 황종관이 붙들어주지 않았다면 바닥에 주저앉았을 정도로 진무린은 기운을 모두 잃었다.
고작 백여 수를 나누고 이렇게 망가질 거라곤 진무린조차 생각해 보지 못했다.
다가선 두 사람 역시 꽤 놀란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가? 누가 자네를 이렇게 할 수 있어?”
“하후도라 들었습니다.”
“하후도?”
황종관이 청강을 보았으나 두 사람 모두 모르는 모양이었다.
“우선 자리를 옮기세.”
황종관과 청강은 진무린의 양쪽을 붙들고 곧장 거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저녁을 먹던 참이었을까.
아직 음식이 놓인 커다란 식탁이 마당에 있고, 소림의 보우와 보광, 무당의 진섭자와 진호자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오?”
놀란 보우가 황종관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급히 진무린을 살폈다.
몸 곳곳에 찍히고 갈라진 흔적이 가득했고, 심장 바로 아래에서는 제법 피가 배어나와 있었다.
“하후도라는 자를 소능산에서 맞았습니다.”
“하후도?”
보우나 보광, 무당의 두 도사의 역시 처음 듣는 이름이 분명했다.
“진 대협. 우선 급한 상처를 돌보고 운기를 먼저 하는 게 좋겠소.”
황종관의 지시에 따라 무림맹의 무인이 약재와 천을 가져왔고, 청강이 능숙하게 상처에 약을 바르고 맥을 눌러주었다.
급한 치료가 끝났다.
“안으로 들어가 얼른 운기를 먼저 하시오.”
“감사합니다, 진인.”
진무린은 청강의 도움을 받아 대청 안쪽의 방으로 들었다.
“어서 운기 하시오, 진 대협.”
사양할 일이 아니었다.
진무린은 자세를 바로잡고 단전에서 내공을 일으켰다.
숨을 고르면서 진무린은 하후도와 그가 휘두른 판관필을 떠올렸다.
세상은 넓다.
숨은 고수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은천문과 진무린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몸을 감춘 문파와 집단도 있겠다.
진무린은 하후도와의 대결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진무린을 아이 다루듯 가지고 놀았다.
심지어 땅에 반드시 죽는다는 글자를 써놓고 마지막 획을 진무린이 완성하게 만드는 여유까지 보였다.
자꾸만 달려드는 잡생각을 떨쳐낸 진무린이 호흡을 고르며 숨을 조절할 때였다.
“맹주!”
밖에서 누군가 황종관을 부르는 거친 음성이 들렸다.
“무슨 일이냐?”
“길을 나섰던 아미의 사태 두 분과 제자들이 모두 절명하였습니다!”
“뭐라? 지금 뭐라 했느냐!”
“호북을 벗어난 관도의 옆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하여 조사하였는데 아미의 사태 두 분과 제자분들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진무린은 울컥 올라오는 기혈을 억지로 삼켰다.
아미파 전원이 죽었다면 분명 하후도의 방문과 관련이 있겠다.
뭐냐?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느라 양쪽에서 이토록 요란한 일을 벌인 거냐?
짧은 침묵이 흐른 뒤였다.
“보우 대사와 무당의 진인께서는 저와 함께 현장을 살펴주시겠습니까?”
“당연한 일이오. 맹주께선 앞장서시오.”
정신을 수습한 듯한 황종관의 말이 들렸고, 보우의 대꾸도 있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청강에게 건넨 듯한 한 마디와 함께 몇 사람이 거처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진무린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현실을 잠시 미뤄두고 지금은 뒤집힌 기운을 다스릴 때였다.
감정을 다스린 진무린은 천천히 내공을 일으켰다.
그러나 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중단전에 자연스럽게 모이던 기운이 느닷없이 들끓으며 온몸을 헤집었기 때문이었다.
“크흑.”
“진 대협!”
진무린이 요란하게 피를 토해내는 소리에 청강이 급하게 뛰어들었다.
“이런!”
청강은 곧바로 진무린의 뒤에 앉아 손을 뻗었다.
“진인!”
“괜찮으니 기운을 받으시오!”
“제 몸에 내공이 섞여 있어 자칫하면 진인과 제가 모두 위험에 빠집니다.”
진무린의 말에 청강은 그제야 손을 내렸다.
“기운을 우선 가라앉혀야 하니 잠시만 이대로 있겠습니다.”
“도대체 하후도란 자가 얼마나 고강하기에 진 대협이 이리 당한단 말이오?”
진무린은 먼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설프게 운기하다 주화입마를 맞느니 잠시라도 몸을 추스를 생각이었다.
“학사 복장이었는데 마치 강호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온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청강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짐작 가는 것이 없는 눈치였다.
“이 밤이 예사롭지 않소.”
청강의 말 대로였다.
진무린은 하후도에게 당했고, 아미의 사태 두 명과 제자들은 돌아가는 길에 몰살당했다.
숨을 내쉬던 진무린은 섬뜩한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마등이 알 정도라면 다른 이도 분명 은천문의 검법을 알지 않을까?
만약 아미파가 은천문의 검법에 당했다면 진무린 또는 모려원에게 덤터기를 씌우기 이보다 좋은 방법도 없으리라.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오?”
“진인. 춘설난무의 초식을 맹주께서 알아보십니까?”
“마등의 몸에 난 상처를 살폈으니 맹주뿐만 아니라 보우 대사와 무당의 도사 두 분도 알아볼게요. 왜 그러시오?”
질문을 던졌던 청강이 뒤늦게 놀란 눈으로 진무린을 보았다.
“혹시 아미가 춘설난무의 초식에 당했다고 여기시는 게요?”
지나친 생각일지 모른다.
그러나 진무린은 아니라는 답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