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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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8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47화
은천검제
제47화
진무린은 청년을 보며 픽 웃었다.
“언제 나왔어?”
“지금 막 나온 길이지.”
“얼굴이나 좀 바꿔.”
“크흠. 이것도 괜찮은데.”
청년은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단박에 중년의 평범한 인상으로 바뀌었다.
“이제 좀 백면호리 같네.”
“그래?”
주변을 둘러본 백면호리가 시선을 가져왔다.
“귀혼곡에서 부탁받은 약초를 사서 다시 돌아갈 거거든. 이안공자가 마교삼절을 물리쳐준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다고 전해 달라더군.”
진무린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백면호리의 말을 받았다.
“자네를 봤으니 루주에게 서신을 하나 전하고 돌아가면 되지. 혹시 전할 말 없나?”
“누구에게?”
“누군 누구야, 귀혼곡으로 돌아가는데 이안공자밖에 더 있나? 앞으로도 귀혼곡은 걱정하지 말라는, 뭐 그런 인사쯤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귀혼곡을 지키게 한다고 큰소리친 건 아니지?”
“에이! 내가 어디 그럴 사람인가.”
과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던 백면호리가 한순간에 진지한 얼굴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런데 말이야. 이번에 귀혼곡을 나선 이후로 계속 누군가 나를 따라다니는 느낌이 들거든.”
진무린은 눈가만 좁혔다.
“일부러 넓은 장소를 달려 보고, 혹은 잠시 숨어서 지켜보기도 했는데 아무도 없어. 그런데도 뒤통수를 잡힌 것처럼 끈적한 느낌이 계속 따라와. 이럴 때 무슨 방법이 없을까?”
진무린은 살피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감각은 늘 펼쳐져 있었다.
심지어 백면호리가 나타나기 전에 고개를 돌릴 정도이니 혹시라도 정말 누군가 주변에 있다면 진무린조차 감당하지 못할 고수라는 의미였다.
원래 쫓기는 사람이라 그럴지 모른다고 백면호리의 말을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경공에 있어서는 청강만큼이나 뛰어난 데다, 워낙 도망 다니는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지닌 그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경계하는 것이 좋았다.
“조심하고. 혹시 위태롭다 생각되면 무조건 내게 달려와.”
“이상한 거지?”
진무린은 먼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암중 세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마교, 구대문파의 일부까지 아우를 정도로 대단한 것도 사실이고. 지금은 조심하는 게 최선이야.”
“젠장.”
턱없이 거친 말을 뱉어낸 백면호리가 고개를 돌렸다.
“당분간 귀혼곡에 있을 테니까 그리 알게.”
“알았어.”
뭔가 서운한 얼굴로 백면호리가 돌아섰다.
**
대결을 마친 자경은 정도맹의 무인들과 함께 먼저 돌아갔다.
구금될 처지인 데다, 패한 터라 달리 나눌 말도 없었다.
승자인 철비완은 가장 먼저 황종관과 청강에게 움직여 인사했고, 다음으로 보우를 비롯해 대결을 참관한 무당과 아미의 장로들에게 고개 숙였다.
“방주께 가 있겠습니다.”
철비완이 방주인 등평을 향해 움직인 뒤였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보우가 황종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맹주. 호법의 재능이 어느 정도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강호에 익히 알려진 일단악, 종횡무변, 거웅귀산을 이용해 공동의 자경을 물리쳤으니 이는 재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 그렇소.”
철비완을 돌아본 보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파훼법인가 싶어 그 장면을 돌이켜 보았는데 절대 그렇지는 않았소. 그렇다고 우연이라 하기에는 철 호법의 수법에 연습한 흔적이 가득하니 참으로 놀랍고 당황스럽소.”
“제가 가르쳤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보우는 그럴 리 없다는 투의 눈빛이었다.
“만약 맹주께서 그 수법을 가르치셨다면 대결을 이리 길게 끌지는 않았겠지요. 솔직히 철 호법에게 네 번의 위기가 있었는데 그것을 모면한 것조차 운이 좋았다고 할 정도였소.”
“대사께서 말씀하신 대로 운이 좋았습니다. 몸에 익은 초식을 꺼내 들었는데 그것이 자경에게 제대로 먹혔다고 봅니다.”
“흐음.”
긴 숨을 내쉰 보우가 뭔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젊은 대협의 가르침이오?”
“우연입니다.”
“그렇구려. 우연이어야 하겠구려. 그럼 빈승은 먼저 출발하겠소.”
궁금해하던 점을 해결한 것처럼 보우가 몸을 돌렸고, 무당과 아미가 그 뒤를 따랐다.
“정말 진 대협이 준 가르침이오?”
그 뒤에 내내 지켜보던 청강이 궁금한 얼굴로 질문을 건넸다.
“첫날입니다. 철 호법의 무공을 보자고 했던 때 진 대협이 가르친 수법입니다.”
“오호!”
“진인과 제가 이러고 있으면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으니 걸으면서 말씀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럽시다.”
황종관과 청강이 몸을 돌리자 정도맹의 무인들이 정도맹과 맹주를 상징하는 깃발을 앞세워 길을 열었다.
“그런데 왜 보우 대사에게는 우연이라 하셨소?”
“그 친구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습니다.”
“의도를 알아챈 보우 대사의 처세가 놀랍구려.”
청강의 탄식이 쏟아진 다음이었다.
“맹주! 정도맹을 더욱 강하게 이끌어주십시오!”
“진인!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좌우로 늘어선 이들이 마주 잡은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그들을 향해 답례하는 바람에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늘어선 이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황종관이 청강에게 입을 열었다.
“일이 마무리되면 진 대협은 은천문으로 돌아갑니까?”
“그것까지는 빈도도 알지 못하오. 왜 그러시오?”
“곁에 붙들어놓을 적당한 핑계가 없을까 해서 그렇습니다.”
청강은 먼저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려냈다.
“이미 패를 두 개 주었으니 진 대협은 맹주를 외면할 분이 아니오. 게다가 노도와 조손의 연을 맺을 일이 남지 않았소?”
“오호라! 그 방법이 있었습니다!”
크게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인 황종관이 앞을 확인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미가 마지막까지 조용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노도 역시 경계하는 마음을 놓지 않았소. 부맹주와 약연 장로의 처리에 어려움이 많을 텐데 부디 굳건하게 버텨주시오.”
“최선을 다할 테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걸으면서 나눈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
호북 안평의 주인인 비룡방은 철비완이 공동의 자경을 물리치면서 단박에 이름을 드높였다.
상등에서 벌어진 대결이 입을 타고 번지면 안평 근처에서는 말할 것 없고, 호북 전체에서 뭔가 아쉬운 일을 만난 이들이 비룡방을 찾아 중재를 부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계산이야 그런데 지금 비룡방의 방주 등평과 소가주 등소옥의 기쁨은 글자 그대로 순수한 것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다음이었다.
자리에 앉은 등평은 결국 올라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붉어진 눈을 끔벅였다.
“또 소제를 처음 보셨을 때를 떠올리십니까?”
“사부님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겠나.”
길게 숨을 내쉰 등평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길에서 배를 곯고 쓰러진 아이와 마주친 것이 벌써 사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어려운 시대요, 비룡방의 초창기라 하루를 버티기도 버거운 시절이었다.
사부 철지광은 느닷없이 업고 들어온 아이를 내치라 했고, 등평은 무릎을 꿇고 앉아 사흘을 버텼다.
“이런 고약한 놈! 저리 버려진 아이가 세상천지에 천이요, 만을 헤아린다! 그런 놈들을 죄 거둬 먹이자는 말이냐!”
“저 아이만 살펴주십시오!”
“이유를 말해 봐라. 타당하면 내 받아주마.”
“제자의 잃어버린 동생과 닮아서 그렇습니다.”
“허어!”
탄식을 뱉어낸 철지광은 고개를 비튼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등평이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감사를 올린 것으로 이름 없는 빼빼 마른 아이는 망가질 뻔했던 삶을 구했다.
아이는 놀랍게도 근성이 있었고, 흉년 수수에 매달린 알갱이 정도의 재능도 지녔다. 게다가 눈치와 눈썰미 또한 나쁘지 않아 점차 철지광의 눈에 들었다.
“너는 내 성씨를 받아서 철비완으로 이름한다.”
꼬박 한 해를 지켜본 뒤에 철지광은 두 번째 제자를 들이며 이름을 주었으니 그가 사제인 철비완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모두 아는 철비완은 다섯 살 터울인 사형 등평을 심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따랐다. 그리고 그 세월이 벌써 사십여 년이었다.
철비완에게 혼인을 권한 적도 있었다.
“방주. 제가 가족을 이끌면 필시 꼬드기는 자가 나올 테고, 그리하면 모시는 마음에 흠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제게는 방주가 부모요, 소가주가 가족입니다.”
십 년을 권하던 등평이 포기하면서 철비완은 여태 홀로 지냈다. 그러면서 그는 친자식 대하듯 등소옥에게 정성을 쏟았다.
지금도 그렇다.
방주 등평이 수모를 당했다며 나서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나.
그 과정에서 이리 고수가 되었으니 등평은 실로 본인이 한 단계 오른 것보다 더 기쁘고 반가웠다.
“진 대협께는 인사 올렸나?”
“아직 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야 도리가 아니다. 사제는 지금부터 맹주의 거처 앞에 있다가 반드시 진 대협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오게.”
“예, 사형.”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우직한 성품은 그대로여서 방주가 내린 다부진 지시를 나이 든 사제는 순순히 받아들었다.
**
맹주의 거처에 도착한 진무린은 입구에 서 있는 철비완을 발견하고 그를 향해 움직였다.
“진 대협. 철비완이 드리는 인사를 받으십시오.”
나이 든 무인이 올리는 읍이 어찌나 경건하고 깊은지 진무린은 넉넉한 미소마저 그렸다.
그런 뒤에 얼른 손을 내밀어 양손을 맞잡은 철비완의 팔을 받쳤다.
“이미 인사는 넘치도록 하셨습니다. 게다가 오늘 어려운 대결을 승리로 이끄셨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 상황입니다.”
말귀를 이해 못 한 철비완이 눈만 끔벅였다.
“제가 만든 대결입니다. 혹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면 어떻게 방주와 철 호법을 뵙겠습니까?”
진무린의 말을 들은 철비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진 대협이 아니셨다면 흑사련 호북지부 추굉이 방문했을 때 이미 문을 닫았을 비룡방입니다. 진 대협은 그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단단하게 말을 건넨 철비완이 궁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진 대협. 마지막에 제가 구사한 초식을 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진무린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자경의 무공을 짐작하여 그 수법을 알려주신 것입니까?”
“호법께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초식이며, 반면에 가장 아쉬움이 많았던 동작들이었습니다. 철 호법께서는 이제 생사현관을 타통하기 전의 최상위 단계입니다. 초식에 매달리지 말고, 상대에 맞춰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펼치도록 수련하십시오.”
진중하게 말을 듣던 철비완이 깨우치는 것이 있는지 퍼뜩 놀란 표정으로 눈을 떴다.
“이리 눈앞이 밝았던 것은 처음입니다. 진 대협께서 주신 가르침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몇 번이나 인사한 철비완이 돌아선 뒤에야 진무린은 맹주의 거처 안으로 들어섰다.
대청에 앉아있던 황종관과 청강이 반가이 맞은 것은 말할 나위 없는 일이었다.
잠시 대결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고, 철비완이 앞에서 기다렸다가 인사를 마치고 돌아섰다는 내용을 두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한바탕 흐뭇한 대화가 지났다.
진무린은 원예가 알려준 풍령관의 구양강에 관한 내용을 두 사람에게 전했다.
“뭐라!”
황종관과 청강의 반응 역시 진무린과 다르지 않았다.
“구양강이 혈교의 제자 곽가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에 무언가 내막이 있겠다 싶었더니 숨겨놓은 아들이 마교의 제자일 줄은 몰랐네.”
“또 있습니다. 백면호리가 다녀갔는데 누군가 뒤에 붙은 것 같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황궁의 사건에 관해 들었네. 백면호리라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저보다 내공이 윗길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흐음.”
상황을 인식한 황종관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맹주. 부맹주와 약연 장로를 정도맹으로 압송하실 계획 아닙니까?”
“당연한 일이네. 구대문파의 여섯 이상이 모인 장로회의에서 결정해야 뇌옥에 가둘 수 있지.”
“그렇다면 가는 길에 습격이 있을지 모릅니다.”
“자네보다 윗길인 고수 말인가?”
“혈교, 풍령관이 모두 나서면 숫자로도 우리는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게다가 습격이 있을 때 소림과 무당은 몰라도 아미의 도움을 얻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청강이 무거운 얼굴로 지켜보는 앞이었다.
“진 대협은 아미마저도 점창, 공동과 같은 길에 들어섰다고 보시오?”
“그 부분에 대한 확신은 없습니다. 다만, 부맹주와 약연을 지키지 못했을 때 맹주께서 받을 비난을 감안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아미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청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적의 기습이 있다 해서 맹주께 큰 비난이 있을 리는 없소. 그렇다면 진 대협은 암중세력이 부맹주와 약연 장로의 목숨을 노린다고 생각하시는 게요?”
“뇌옥에 갇히기 전에 마음이 바뀔 것을 염려하지 않겠습니까? 뭐라 해도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입니다.”
질문을 연속해서 던졌던 청강이 표정만큼이나 무거운 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 이렇게 소식을 가져왔다면 대책도 생각해 보았겠지? 혹여 있다면 들려주게.”
진지한 황종관의 질문에도 진무린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뭔가? 뭔데 그러나?”
“제게 결정권을 주신다면 부맹주와 약연 장로를 소림과 무당, 그리고 아미에게 맡기겠습니다.”
멍했던 황종관이 놀란 표정으로 상체를 세웠다.
“정도맹까지 압송을 부탁하겠다?”
“구대문파의 일은 구대문파가 하게 두는 것이 가장 좋지 않겠습니까? 가는 길에 처우가 어떠니 하는 말도 나오지 않을 테고요.”
뭔가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있어서 그럴까.
황종관이 의견을 묻는 것처럼 바라본 곳에서 청강은 난처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