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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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42화
은천검제
제42화
진무린은 원래 자만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얻었다고 으스대는 모습은 더더욱 아니고.
그런데 항천압지를 펼친 가운데 달려든 마교삼절을 예상외로 쉽게 물리치자 얼떨떨한 심정인 것만은 분명했다.
원예가 엄청난 고수라면 또 이해하겠다.
그러나 그녀는 생사현관조차 타통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그런 원예의 내공을 녹였고, 느끼기로는 오래된 사당을 무너트린 것으로 빠져나갔다고 여겼다.
그런데 사실은 그 소수음공이 진무린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린 모양이었다.
귀혼곡을 빠져나온 진무린은 화도곤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부좌로 앉았다.
항천압지, 마교삼절, 그들의 제자와 수하들, 시시각각 변하는 기운, 그 모든 순간을 되돌리며 진무린은 당시를 복기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한 점도 있었다.
좀 더 능숙하게 대응했다면 훨씬 효과적인 공격과 방어를 할 수도 있었다.
상황을 복기한 진무린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뒤에 운기에 들었다.
귀혼곡에 오는데 단축된 시간도 있었고, 돌아가는 길 역시 비슷하게 걸린다고 가정하면 어느 정도의 여유도 있었다.
당장 급한 것은 힘의 근원을 확실하게 느끼는 과정이었다.
불쑥 나타난 것처럼 언제 사라질지 모를 힘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진무린은 진득하게 시간을 들였다.
눈을 감고 운기를 시작하자 안개처럼 뿜어진 검은 기운이 널따랗게 펼쳐졌는데 진무린은 그를 깨닫지 못했다.
운기를 마치는 순간이었다.
들키지 않겠다는 것처럼 검은 기운이 삽시간에 몸에 빨려 들어갔고, 그 뒤에 진무린은 눈을 떴다.
기운에 대해 얻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운기를 통해 피곤함을 털고 새로운 활력을 얻었으니 헛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
원예는 새롭게 올라온 정보를 확인했고, 읽고 난 내용을 불태웠다.
정보를 넘겨주며 얻는 돈이 홍화루의 영업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만큼이나 큰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사업이었다.
강호의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챌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귀혼곡을 노리는 이들의 동태를 잡아내는 효과도 있었다.
다만, 정보를 다루는 일은 늘 위험했다.
힘으로 정보를 요구하는 자들의 위협이 늘 존재했고, 다음으로 자신의 정보가 새나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원예를 노리는 이들도 있었다.
소수음공은 그래서 필요했다.
언제 달려들지 모를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데 필요했고, 한편으로는 귀혼곡의 위기를 직접 책임질 능력을 지니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촛불에 작은 종이를 태운 원예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교삼절을 상대해달라는 요청에 진무린은 바로 달려갔다.
얼마나 다쳐서 돌아올까.
어쩌면 지금쯤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을지 모르고, 또 혹은 심하게 다쳐 치료를 받고 있을지 모른다.
부친인 이안공자의 의술이 있으니 치료야 염려할 바 없지만, 너무 무리한 청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내일쯤이나 소식을 듣게 될 텐데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어둑하게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이었다.
촛불을 바라보며 원예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
소림의 보우는 심기가 편치 않았다.
맹주 황종관이 평소와 다르게 강경하게 나오는 이유야 당연하게 있겠다. 그리고 그가 만나본 소강명과 약연은 분명 켕기는 것이 있는 눈빛이었다.
상황도 대충 알겠다.
황종관과 청강의 태도도 이해한다.
그렇더라도 구대문파의 체면과 위세가 바닥에 떨어지고서는 강호에서 정도문파는 존재감을 잃는다. 그리고 그 효과는 정도맹의 단결이 와해되는 것으로 돌아온다.
보우가 나직하게 불호를 외웠을 때였다.
제자 한 명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사숙. 조연명 장로께서 오셨습니다.”
“홀로 오셨더냐?”
“그렇습니다.”
황종관의 처사에 분개하던 조연명이라 방문이 있을 것을 짐작하기는 했다. 다만, 밤이 깊어가는 시각이라 누군가와 동행할 줄 알았더니 과연 아미는 당찬 구석이 있었다.
“모셔라.”
“예, 사숙.”
제자가 나서고 잠시 뒤에 아미의 승복을 입은 조연명이 들어섰다.
뾰족한 눈매와 콧날은 물론이거니와 인상 자체가 날카로운 조연명은 성격마저도 자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수행을 방해한 듯싶어 송구합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빈승을 책망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앉으십시오.”
넉넉하게 대꾸한 보우가 조연명에게 자리를 권했다.
“내일 대결을 어떻게 하실지 궁금해서 찾아뵈었습니다.”
“대결을 어떻게 하다니요?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소.”
“듣자니 맹주께서 비룡방의 호법에게 공력까지 전해주며 나선 모양인데 이대로 내일 대결을 지켜보고만 계실지 그 점이 궁금합니다.”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조연명은 말을 이었다.
“약연 장로가 구금된 것은 물론이요, 대결의 당사자인 자경마저 같은 처지입니다. 내일 대결이 어떻게 공평할 수 있을까요?”
보우의 표정이 덤덤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조연명은 말투마저 바꾸어 의견을 냈다.
“함께 접견하시지 않았소? 빈승이 보기에 약연 장로와 자경이 풍령관의 수하를 만난 것은 분명해 보이오. 말씀대로 상황은 안타까우나 맹주의 의견이 일견 타당하여 달리 방법이 없을 듯합니다.”
“대사. 그렇다고 얼굴도 모르는 진무린이란 자의 말만 듣고 구대문파의 중심인물을 구금한 것은 지나친 처사이지요.”
“생각이 있으신 모양인데 뜻을 밝혀주시면 빈승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내일 대결을 미루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으니…….”
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맹주인 소강명과 공동의 약연이 떠들어서 사람들을 불러모은 꼴인데, 본인들의 불미스러운 행동 탓에 미루었다가는 오히려 비난이 가중되기 좋았다.
“자경을 대신해 다른 사람을 내보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지금 뭐라 하셨소?”
“구금된 자경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니 자경과 배분이 같은 다른 제자를 내보내는 것이 어떨까 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흐음.”
아무리 보우가 구대문파의 입장을 대변한다 해도 억지에 가까운 제안이었다.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는 보우를 보며 조연명이 급히 입을 열었다.
“물론 자경이 나서기로 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경과 함께 배분이 같은 다른 제자를 내보내겠다고 말하면 됩니다. 자경이 승리하면 그것으로 끝내되, 만에 하나 패하게 된다면 배분이 같은 다른 제자를 내보내 공평한 대결이 되도록 하자는 말씀이에요.”
앞에서 했던 제안보다 설득력은 있으나 억지에 가까운 주장임은 변함이 없었다.
“저들이 그 제안을 받으리라 보시오?”
“거절한다면 우리 또한 공평한 대결이 아니라 주장하면 되지요. 그리하면 연기한 것에 대한 책임이 맹주에게 돌아갑니다. 대사께서 양보해 주신다면 빈니가 내일 일찍 맹주를 만나겠습니다.”
보우는 답을 하지 않았다.
“이미 무당과 의논을 마쳤습니다. 대사. 빈니가 나설 테니 한 걸음 양보해 주세요.”
조연명이 다부지게 뜻을 밝혔고, 보우는 쉽사리 답을 내지 못했다.
아직 진무린이란 무인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맹주 황종관과 청강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들이 진무린이란 무인을 그토록 신뢰하고 따른다면 아직 보우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부분이 있을 테고 그 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
임운령은 새벽을 맞아 또다시 높다란 곳에 자리 잡았다.
그의 시선은 오늘도 저 아래를 걷고 있는 모려원과 전중방의 이남일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붉게 물든 해가 완연하게 떠오른 다음이었다.
장포 자락이 날리는 소리를 울리며 젊은 무인이 임운령의 앞으로 내려섰다.
“제자 종무헌이 문주를 뵙습니다.”
고개를 돌린 임운령은 기가 막힌다는 투의 웃음을 터트렸다.
“강호에 나서더니 예법의 중요함을 깨달은 모양이다만, 하던 대로 해라.”
“제자는 늘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대사형이란 놈이 있을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임운령의 장난스러운 인사에 종무헌은 어색한 웃음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종무헌은 한 마디로 검으로 만든 인간과 같았다.
눈이며, 코며, 입술이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평소에도 눈썹이 치솟아 머리에 걸릴 정도인데 화가 나면 점점 더 위로 들릴 정도로 단순한 면도 있었다.
“강호에 나서면 그 날카로운 성미를 고칠까 했더니 어째서 여태 그리 뾰족해?”
“제자는 대사형과 달라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말은 이놈이고, 저놈이고 잘도 한다.”
강호에 나서 만난 문주와 제자가 모처럼 반가운 농을 주고받을 때였다.
이번엔 뒤편에서 장 노대가 조용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찾아온다는 연락은 없었다.
장 노대가 이리 나타났다면 필시 급한 일이라는 의미였다.
웃음을 지운 임운령이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본가에서 장로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장로회의? 누가?”
“백승 장로와 원고성 장로, 두 분입니다.”
“흐음.”
임운령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가 의심하는 두 명의 장로가 회의를 소집했다면 안건 역시 좋은 의도가 아니리란 짐작에서였다.
“내용을 확인했소?”
“문주께 은천령을 권유하리라는 안건이었습니다.”
“은천령을?”
은천문의 모든 힘을 동원하는 것이 바로 ‘은천령’이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거나.
임운령은 물론이고, 종무헌마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모 소저가 기억을 잃은 채 돌아왔으니 본문의 기밀과 무공을 유출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런 증거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해서 은천령을 내려 모 소저를…….”
차마 모려원을 척살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하지 못하고 장 노대가 말끝을 흐렸다.
임운령은 픽 웃었는데 종무헌은 벌써 눈썹이 치솟아 호랑이처럼 변해 있었다.
“전 사부가 두려워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니 대신 머리를 굴리시겠다?”
“암연은 들은 바를 전할 뿐입니다.”
임운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에 종무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장 노대와 본문으로 돌아가겠다. 너는 너의 대사형이 올 때까지 려아를 지키되, 목숨이 위태롭지 않다면 모습을 보이지 마라.”
“문주의 명을 받았습니다.”
간단하게 지시를 내린 임운령은 무릎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네 녀석이 때마침 와준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하다. 다만, 너의 기운을 려아가 알아챌 수 있으니 그 점에 주의해.”
“명심하겠습니다.”
가볍게 웃은 임운령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 모르는 모려원과 이남일녀는 저 아래에서 평탄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
진무린은 아침을 먹을 시간에 호북의 상등에 도착했다.
간단한 음식을 앞에 놓은 원예가 퍼뜩 상체를 세웠고, 준비하던 시비가 바라보는 앞에서 급히 창으로 움직였다.
그 직후에 창밖에서 진무린이 나타났는데 이때 원예는 언제 만들었는지 제법 냉정한 표정이었다.
“마교삼절과 제자들, 수하는 모두 처리했고, 백면호리와 섭성이란 아이를 만나 내용도 전했으니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쓰다, 달다, 대꾸없이 원예는 진무린의 얼굴과 상체를 재빠르게 살폈다.
“다친 곳은 없어.”
“대화로 해결하셨나요?”
“말 몇 마디로 마교삼절과 제자들을 죽일 정도라면 나는 이미 심검의 경지라고 해도 되겠지.”
“내상을 입으신 건 아니고요?”
“자꾸 실망하게 해서 미안한데 외상도, 내상도 전혀 없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던 원예가 아차 하고는 다시 냉정한 표정을 꺼내 들었다.
“한 가지 당부를 들어주기로 했으니 다른 말은 않겠다. 걱정해준 것은 고맙고. 이만 간다.”
“아침은요? 드시지 않았다면 간단하게라도 준비할게요.”
진무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왜 웃으세요?”
“루주가 직접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몰라도 시비가 준비해야 하는 아침은 사양이다. 그리고 오늘 대결이 있어서 맹주와 진인을 촌각이라도 일찍 뵙는 게 좋기도 하고.”
입술을 움찔했던 원예가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소림과 무당, 아미에서 일곱 분이 오셨어요. 오늘 대결이 불리하다고 새로운 제안을 할 생각인 듯한데 대표 격인 보우 대사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는 않은 듯해요.”
진무린은 먼저 맹주의 거처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자께서 오시기 전에 맹주와 진인을 독촉할 계획도 있는 듯 보였어요.”
급하게 말을 전한 원예가 의아한 시선으로 진무린을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거죠?”
“정보를 전해준 것이 고마워서. 그럼 간다.”
붙잡을 틈도 없이 진무린은 몸을 던졌다.
3층이었다.
그런데도 진무린은 한 마리 비조처럼 훌쩍 날아서 벌써 저 앞의 지붕 위를 달리고 있었다.
“귀혼곡을 지켜주셔서 감사해요. 가장 먼저 들려서 소식을 전해주신 것과 무탈하게 돌아오신 것도요.”
그런 진무린을 향해 뒤늦은 원예의 인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