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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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9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38화
은천검제
제38화
비록 피를 토했다고 하나 약연은 공동의 장로였다.
그는 무섭게 몸을 날려 호북의 상등을 막 벗어난 곳에서 제자들을 따라잡았고, 이어 앞에서 가는 기운을 느꼈다.
이건 이상한데?
약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함부로 가까이 가지 못해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있으나 어쩐지 기운이 익숙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앞서가는 셋이 적당한 속도로 달리는 덕분에 제자들과 함께 급하지 않게 따라갈 정도였다.
산을 내려서는 길에서였다.
이 길을 넘으면 하남으로 들어선다.
제법 멀리 온 참이었다.
“멈춰라.”
나무 위를 달리던 약연이 나직하게 지시를 내리고는 몸을 던졌다. 그를 따라 달리던 제자 셋이 뒤늦게 나무 아래로 내려섰다.
“왜 그러십니까?”
“이것이? 이건 놈의 기운이 아니다!”
약연이 놀라 고개를 쭉 내밀 때였다.
앞서 달리던 셋의 기운이 느닷없이 방향을 틀어 약연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단 말이냐!”
약연이 혼잣말을 토해낸 뒤에야 제자들은 앞선 세 사람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알아챘다.
제자들이 약연의 눈치를 살피는 동안, 세 사람의 기운이 바짝 다가왔다.
“이런!”
약연이 외마디 비명을 지른 뒤였다.
앞쪽의 바위를 훌쩍 건너뛴 세 사람이 약연과 제자 셋 앞으로 내려섰다.
“장로께서 이 야심한 시간에 이곳까지는 어쩐 일이오?”
나타난 이는 맹주 황종관이었다.
그의 뒤로 호위 둘이 서 있는데 그들은 또한 황가장 출신이라 황종관의 심복과 같았다.
“제자들이 보고하기를 누군가 수상하게 움직인다 하여 급히 달려온 길이오.”
“약연 장로와 같은 분이 이리 애써주신 덕분에 강호가 무탈한 모양이오.”
눈과 눈을 마주한 상태에서 나눈 대화였다.
황종관은 매서운 눈빛이었고, 약연은 켕기는 구석이 많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약연 장로의 말씀대로 나 역시 수상한 기운을 따라 이곳까지 왔던 참이오. 그러니 이제는 함께 돌아갑시다.”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 봐야 할 듯싶소. 맹주께서는 천천히…….”
“약연 장로.”
몸을 돌리는 약연을 황종관이 무겁게 불렀다.
“함께 가자고 했소.”
이미 속을 다 알고 있다.
그러니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황종관의 눈빛과 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설마 내게 말 못할 급한 일이라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리라 믿소.”
게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언제고 도를 꺼낼 수 있다는 강한 의지마저 내보였다.
‘당했구나!’
약연은 함정에 제대로 빠졌음을 실감했고, 그 직후에 온몸에 기운이 쭉 빠졌다.
**
진무린은 당연하게 홍화루의 지붕 끝에 있었다.
맹주 황종관이 철비완에게 공력을 전한 터라 호위를 둘 붙였고, 그 정도면 약연이 함부로 덤비지 못할 수준이었다.
아무리 기운이 빠졌다 해도 황종관은 약연쯤 상대한다.
그러니 약연이 달려들었다가는 맹주에게 대든 죄인이 되는 것 말고는 없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약연이 나서기 무섭게 자경 또한 소능산을 향해 움직였다.
진무린에게 자경쯤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자경을 따라간 진무린은 곽가가 몸을 숨겼던 곳에 도착해서는 아예 나무 위에 있었다.
처음 비룡방이 진무린의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자경 역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 근처에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누군가 나타날까?
하기는 곽가가 숨었던 곳에 자경이 달려왔다는 것만으로도 정황은 충분했다. 그러나 이왕 이리되었으니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나길 바랐다.
자경을 통해 얽히고설킨 가장 아래쪽의 줄을 붙들 수 있다면 거기에 매달린 흉수들을 하나씩 잡아낼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었다.
진무린이 자경을 바라보며 신경을 곤두세울 때였다.
‘왔나?’
낯선 기운이 소능산의 중턱으로 달려들었다.
달빛에 드러난 무인은 검은 무복에 두건을 뒤집어썼고, 등에 도를 멨다.
반노쌍복이 말한 풍령관의 수하와 같은 복장이었다.
무인은 진무린의 앞쪽을 달려서 곧장 자경 앞에 내려섰다.
“뉘시오?”
“풍령관에서 오셨소?”
자경의 질문에 검은 무복은 답을 하지 않은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곽가는 어디에 있소?”
“시간이 없소.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장로님의 말씀을 전해드릴 테니 가서 관주께 전해주시오.”
자경은 곽가가 잡혀 온 일부터 귀혼곡에 진무린이 달려갔다는 내용까지를 빠르게 전했다.
“부맹주께서 구금되셔서 전음으로 말씀을 전하시는 상황이오. 내일 중으로 곽가를 어찌할지에 대해 답을 주거나 아니면 직접 행동에 나섰으면 한다는 말씀이오.”
“알았소. 그럼 이만 돌아가리다.”
자경의 말을 들은 검은 무복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 발을 굴렀다.
그가 몸을 띄운 직후였다.
진무린은 비둘기를 낚아채는 매처럼 나무 위에서 몸을 날렸다.
진무린을 발견한 흑색 무복의 무인이 화들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등에 멘 도를 붙잡았다.
“어딜!”
진무린은 오른손을 뻗어 흑색 무복의 팔꿈치를 엄지로 찍었다. 그런 뒤에 연달아 혈도를 누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퍼러러럭!
팽이처럼 몸을 돌리며 내려선 진무린은 붙들었던 흑색 무복의 무인을 바닥에 던졌다.
자경은 놀라고 당황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고, 청강 앞에서조차 서슬 퍼렇던 기개는 어디에 버렸는지 꼬리를 다리 사이에 집어넣은 개 꼴이었다.
“어떻게……?”
“아무리 예상 밖의 장소에서 만났다지만 인사조차 없으니 구대문파의 배분 따위 역시 개에게 주었다는 거냐?”
당황한 자경은 대꾸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구대문파의 한 축이라는 것들의 모양새가 이리 한심하니 누군들 강호를 일통하겠다는 야심이 생기지 않을까.
자경의 모습은 마치 썩고 타락한 현 강호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단숨에 목을 잘라 벌하고 싶은 욕구를 누르느라 진무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헛소리를 지껄이면 곽가처럼 발목부터 베겠다. 그러니 조용히 앞장서.”
“나는 약연 사숙의 지시를 받아 이곳을 감시하러 왔던 길이오.”
“한 번은 봐준다.”
진무린의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자경의 눈이 바삐 움직였다.
“헛소리를 지껄인 것을 한 번 봐줬다는 뜻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발목을 베겠다.”
진무린은 묵룡심법을 운용해 기운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기운을 통해 자경을 억눌렀다.
“끄윽.”
“맹주의 거처로 가겠다. 앞장서.”
말을 마친 진무린이 기운을 수습하자 자경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몸을 돌렸다.
점창과 공동이라면 그 지역의 주인 노릇을 하며 남부러울 것이 없다.
소유한 토지와 객잔, 반점이 있고, 말 한마디에 고개 숙이는 속가 제자 또한 그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무엇이 저들을 유혹했기에 명예, 자긍심을 모두 버리게 했을까.
지이이이익.
흑색 무복의 무인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소능산의 밤을 깨우는 동안, 진무린은 자경의 뒷모습을 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
밤이 되면서 동굴에 있던 이들이 모두 본래 사용하던 거처로 돌아왔다.
“정이의 회복이 예상보다 빠르오.”
“정말 그런가? 확실한 거지?”
반문하는 백면호리의 질문에 가볍게 웃은 좌안이 기특한 얼굴로 요정을 들여다보았다.
“치료를 견디기 어려운데 잘 참았다.”
“이안공자님께서 살펴주신 덕분이에요.”
“허허. 어디에서 이런 말을 배웠을꼬?”
“뭐야, 그 눈빛은? 나를 왜 그렇게 봐?”
따지는 백면호리를 향해 이안공자가 몸을 일으켰다.
“뭐? 왜?”
“이틀 뒤에 돌아가시면 되겠소.”
“그렇게나 빨리?”
“대신 이후로 지금까지 익혔던 심법을 운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주화입마란 것이 반복될수록 더 독한 증상이 나오는 법이니 자칫하다가는 돌이키지 못할 일이 생길 수도 있소.”
“그러지 뭐.”
백면호리는 어쩐지 아쉬운 기색이었다.
요정 또한 이들을 떠나기 싫은지 백면호리의 허리를 붙든 채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약재를 구할 것이 있어 나가실 때 상하일체와 섭성이 함께 나설게요. 그러니 그리 알고 준비하시오.”
“에효. 다 때가 있는 거지. 알았네.”
백면호리의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
호북의 상등은 밤을 완전히 잊었다.
약연과 돌아온 황종관은 가장 먼저 횃불을 밝히게 해서 대낮이 무색할 정도로 거처를 환하게 만들었다.
“밤이 늦었소. 맹주께서는 무엇을 하시려는 게요?”
“약연 장로께서는 잠시 기다려 주시오.”
호위를 서던 참이라 청강은 이미 맹주의 거처에 있었고, 횃불과 소란에 놀란 점창과 공동의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굳이 이 밤에 이리할 필요가 있소? 하실 말씀이 있다면 날이 밝은 뒤에 하시오.”
“약연 장로. 잠시 기다리라 했소.”
“기다리지 않으면 어쩌실 게요?”
악에 받친 것처럼 약연이 눈매를 날카롭게 세웠을 때였다.
힘이 축 빠진 자경이 들어섰고, 이어 흑색 무복의 뒷덜미를 잡은 진무린이 횃불에 모습을 드러냈다.
진무린은 마당의 중앙으로 나가 흑색 무복의 무인을 버리듯 놓았다.
“풍령관의 사람입니다. 공동의 자경과 만난 것을 잡았습니다.”
황종관은 이래도 할 말이 있느냐는 투로 약연을 본 뒤에 시선을 가져왔다.
“부맹주께서 전음을 통해 지시를 전달했다 하였고, 곽가를 어찌할지, 내일까지 지시를 주거나 아니면 직접 해결하라는 당부를 전했습니다.”
“자경이 그랬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황종관은 자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경은 대답해라. 누구의 지시로 그런 말을 전했느냐?”
“맹주께서 저자의 말만 믿고 본파의 제자를 핍박하고 있으니 이는 구대문파를 업신여기는 것과 같소!”
약연이 버럭 고함을 지른 직후였다.
“화산은 진무린 대협의 말씀을 믿고 맹주의 행사를 지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외다.”
나직하나 힘이 담긴 청강의 음성이 횃불 사이를 메웠다.
“화산이 구대문파를 대변한다 말씀하시는 게요?”
“이 상황에서 구대문파가 왜 거론되는지 이유를 모르겠소. 우리는 모든 정도 문파를 통합하여 정도맹을 설립하였고, 대표로 맹주를 선출하였으니 지금 약연 장로의 말씀은 모든 정도문파의 결정을 무시하는 오만한 언행임을 명심하시구려.”
말문이 막힌 약연은 입술만 씰룩였다.
내려앉는 침묵을 깬 사람은 황종관이었다.
“자경이 대답하지 않는 것은 너의 죄를 인정한다는 뜻이냐?”
“네놈은 뭘 하고 있어! 아니라고 얼른 답을 해!”
“저는 사숙의 지시를 받아 더 수상한 일이 없는지를 살피러 소능산에 갔을 뿐입니다.”
약연의 고함을 들은 자경이 홀린 것처럼 답을 냈다.
“그렇다면 왜 풍령관의 사람에게 곽가를 해결하라는 말을 했느냐?”
“너는 그런 적이 없다. 그렇지 않으냐?”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약연이 먼저 입을 열었고, 자경이 지시를 받은 것처럼 그 말을 다시 지껄였다.
진무린은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았다.
명예와 자긍심을 버렸다고 여겼더니 이들은 아예 사람이 지닌 기본적인 양심마저 저버린 모양이었다.
그때 어찌했으면 좋겠냐는 투로 황종관이 진무린을 보았다.
진무린은 답을 하지 않았다.
부맹주와 곽가를 잡아다 주었고, 이번에는 풍령관의 수하를 만나는 자경마저 붙들었다.
이런 증거를 앞에 두고도 망설인다면 황종관의 의도가 어떻든, 더는 그의 의지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눈빛과 눈빛이 오간 뒤에 황종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약연 장로와 자경을 구금하겠다. 이 시각 이후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점창과 공동의 제자들 역시 거처에서 나오지 마라. 이는 맹주의 직으로 내리는 지시다.”
횃불이 일렁이는 아래에서 맹주 황종관은 죽음을 각오했구나 싶을 정도로 독한 눈빛이었다.
“맹주! 이틀 뒤에 대결할 제자를 구금하면 공정한 승부가 되지 않소! 그것을 노리고 이러시는 게요!”
약연이 최후의 발악처럼 고함을 지른 뒤였다.
“문파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물론이요, 목숨마저 경각에 달린 분이 이틀 뒤의 대결을 염려하시니 참으로 약연 장로의 배포가 대단하시오.”
황종관은 단박에 도를 꺼내 들 것처럼 약연을 노려보았다.
‘운이 좋았어, 약연.’
황종관이 저토록 강경하게 나서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진무린이 옅게 웃을 때, 횃불이 일렁이는 안에서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