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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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34화
은천검제
제34화
언제고 검을 마주할 날이 있을 줄 알았다.
곽가를 두고 부딪칠 줄은 몰랐지만, 소수음공에서 시작한 악연을 좋은 인연으로 바꾸기는 어려운 상대라 생각했었다.
현실로 돌아온 진무린은 먼저 곽가를 내려다보았다.
반노쌍복을 상대하며 저대로 두기는 곤란한 일이었다.
진무린은 주저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 곽가의 몸뚱이를 찍었다.
“끄윽.”
왼손만 남은 곽가의 혈도 일곱 군데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안 그럴 것 같은데 잔인한 면이 있군.”
“이 자를 지키기 위해 두 분과 검을 마주합니다. 굳이 뒤탈을 둘 필요 없고,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면 목을 잘라버릴 생각이라 동정의 여지도 없습니다.”
마등이 어떻게 은천문의 무공을 익혔는지, 사매를 왜 납치했다가 느닷없이 풀어주었는지, 그녀의 기억은 어떻게 된 건지, 그 모든 열쇠를 쥔 곽가를 쉽게 대할 마음 따위 진무린에게는 없었다.
양가의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진무린을 보는 옆에서 변화무쌍한 노인 조보휘는 독한 눈빛이었고, 바닥에 쓰러진 곽가는 이제야 진무린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전대의 선배가 돼서 후배를 상대로 둘이 달려드는 것은 미안한 일이나 우리는 원래 합공으로…….”
“말씀 길게 하실 것 없습니다. 두 분이 달려들 생각이라면 바로 시작하십시오.”
말이 잘린 양가의의 볼이 씰룩했다.
“자네는 매사가 그리 자신만만한가?”
“말씀을 길게 하신 뒤에 한 분만 나서신다면 그래도 좋습니다. 두 분이 후배 한 명에게 달려드는 일입니다. 변명하시면 체면이 좀 더 서십니까?”
“크흠.”
휘리릭.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양가의가 허공을 향해 연검을 세차게 뿌렸다.
그 직후였다.
바늘이 달려드는 것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진무린을 덮쳤고, 이어 송곳처럼 뾰족한 기운이 옆을 파고들었다.
파라락.
노인 조보휘는 뜻밖에도 손목에 감았던 단편을 풀어냈다.
길이가 대략 석 자에 끝에 엄지손톱만 한 날이 반짝이는 것으로 봐서 채찍과 연검의 득을 함께 보는 모양이었다.
진무린은 묵룡심법의 내공을 일으켜 검에 담았다.
그런 뒤에 우습게도 진무린이 놀랐다.
달랐다.
이전과 너무 달라서 놀랐다.
잘게 흔들리는 잎사귀, 양가의와 조보휘의 호흡, 그들이 조절하는 기운까지, 너무 많은 것이 단숨에 진무린의 뇌리에 쏟아져 들어왔다.
감각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느닷없이 뒤에 눈이 생긴 것처럼 주위의 모든 것이 뇌리에 들어오는데 그 바람에 오히려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진무린의 강렬한 기운에 놀란 양가의가 시간을 끌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첫수에 어딘가를 베였을지 모를 정도로 당황스러운 경험이기도 했다.
숨을 길게 들이마신 진무린은 검을 늘어트린 채 마음을 비웠다.
이런 변화 역시 생명을 담보로 벌이는 싸움의 변수로 이해하면 그만이다. 불리한 것도 아니고 유리한 변화에 놀라 평소의 모습을 잃는다면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일이 아닐까.
대치는 길어졌다.
양가의와 조보휘는 예상했던 것보다 월등히 뛰어난 진무린의 기운에 놀란 것이 분명했다.
바람이 잎사귀를 흔들고, 일렁이는 그림자가 다섯 그루의 나무 근처를 어지럽게 떠돌았다.
진무린은 시선을 들어 양가의를 보았다.
더 시간을 끌다가는 발목 두 개와 오른손목이 잘린 곽가가 위태로울 수 있었다.
쉐에엑!
생각과 동시에 검이 나갔다.
채아앙! 파락!
진무린이 연검을 밀쳐내는 순간이었다.
뒤를 노리고 채찍이 날아들었다.
쉐에엑! 쉑쉑!
허공을 차는 동작으로 몸을 뒤튼 진무린은 채찍의 틈으로 검을 찔러넣었다.
휘리릭!
조보휘가 급히 물러난 사이에 이번엔 양가의의 연검이 날아들었다.
쉐엑! 채앵! 쉐에엑! 파라락!
양가의와 조보휘는 마치 한 몸처럼 앞뒤에서 달려들었고, 이전의 진무린이었다면 필시 힘겹게 버텼을 정도로 연검과 단편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러나 지금의 진무린은 이미 한 단계를 올라서 있어서 앞과 뒤로 검을 내는데 막힘이 없었고, 두 사람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쉐에엑! 쉐엑! 쉐엑!
허초에 느닷없이 내공을 담아 실검을 만들었고, 실검으로 여겨 반노쌍복이 피할 때면 내공을 줄여 허초를 만들었다.
맹세컨대 이전에는 이런 검을 구사하지 못했다. 게다가 처음엔 낯설게 느껴지던 감각이 대결이 계속될수록 능숙하게 몸에 익었다.
쉐에엑! 채앵! 채애앵! 파락! 파라락!
반노쌍복은 점점 더 변해가는 진무린의 검에 힘겨운 기색이었다.
그들이 어찌 알겠나.
생사현관을 타통한 수준의 상위에 있는 데다, 전대의 고수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것이 실제로는 진무린의 수련을 도와주는 꼴이라는 것을 말이다.
쉐엑! 채앵! 쉑쉑쉑쉑! 쉐엑!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앞과 뒤로 몸을 돌리며 찌르고 베는 진무린의 검이 점점 더 현란해지더니 지금은 한 사람이 반노쌍복 둘을 묶어놓은 꼴이 되었다.
쉐엑! 채앵! 쉐에엑!
겨우 한 번 검을 마주한 뒤로 양가의는 상체를 뒤로 빼느라 바빴고,
쉐에에엑!
“이크!”
조보휘는 단편을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바닥을 구르는 지경이었다.
양가의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할 때였다.
쉐에에엑!
진무린의 검이 날카롭게 울었고, 조보휘가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의 손에 들린 단편은 손잡이만 남은 채 잘렸는데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조보휘의 앞섶 역시 길게 갈라져 있었다.
휘리리리릭! 카아앙!
양가의가 목숨을 버리다시피 달려드는 것을 진무린은 단 한 번의 검으로 때려냈다.
쉐엑!
그리고 또 어느 틈에 진무린의 검은 경고하듯 바닥에 주저앉은 조보휘의 이마 앞에 있었다.
“이것이 진정 은천문의 검술인가?”
“두 분은 이상하게 싫지 않았습니다. 마등과의 대결 직후에, 홍화루에서 뵈었을 때, 그 뒤에 문주와 불편한 모습이 있기는 했어도 늘 선배의 품위를 잃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양가의의 질문에 진무린은 엉뚱한 대꾸를 내놓았다.
“호북 상등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고 약속하시면 이만 검을 거두겠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양가의는 답을 하지 못했다.
“선배. 곽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마음을 굳히면 고민 따위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결정하십시오. 끝내 물러서지 않겠다면 이제는 매몰차게 검을 내겠습니다.”
양가의를 힐끔 본 진무린이 픽 웃었다.
끝내 목숨을 노리는 대결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면 된다.
눈빛에 담긴 감정을 알아차렸을까.
“물러가겠다.”
양가의가 급하게 말을 내었다.
진무린은 검을 당겨서 곽가의 앞으로 움직였고,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조보휘가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 호북의 상등에는 들어서지 않는 것만 약속하면 되겠나?”
“그렇습니다.”
“우리는 곽가를 구출하려 했었어. 마등이나 부맹주와 한편이어서 자네를 곤란하게 하면 어쩌려고?”
양가의의 질문에 진무린은 먼저 가볍게 웃었다.
“선배 두 분의 눈빛을 믿습니다. 악한 자는 절대 조보휘 선배와 같은 눈빛과 웃음을 보이지 못합니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조보휘를 보았던 양가의가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복수를 위해 옥환을 그리 찾았더니 우리는 주인이 아니었던 모양일세.”
그런 뒤에 뜻밖의 말을 꺼냈다.
“마등의 목을 베었을 때 선배의 표정을 기억합니다. 절대 한 편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랬나? 오늘 곽가를 찾으러 온 것은 어찌 이해하나?”
“부맹주와 혈교, 마교, 그리고 구대문파의 배신자들이 하나로 엮여있습니다. 그들 모두를 연결한 암중세력이 있으니 두 분을 이용한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진무린의 답을 들은 양가의가 허탈하게 웃고는 검을 집어넣었다.
“강호에는 이미 새로운 영웅이 생겨났는데 흘러버린 강물 같은 우리가 쓸데없는 욕심을 부렸던 게로군.”
자조 섞인 말을 건네는 양가의 옆에서 잘린 단편이 아쉬운지 조보휘는 조각을 집어 든 채 말이 없었다.
그는 심지어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진무린이 곽가에게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풍령관의 ‘구양강’ 관주일세.”
양가의가 덜컥 이름을 내놓았다.
“섬서와 산서의 경계에 금룡산 봉우리를 이어 만든 관이 있는데 그곳을 풍령관이라 하지.”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의 관주 구양강이 부탁했던 일일세. 저 사람을 데려오면 천서유기가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고 하더군.”
“지난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부탁을 언제 들으셨습니까?”
“오늘 동이 트기 직전일세. 우리를 찾아왔었지. 검은 무복 차림으로 자신을 풍령관의 사람이라 했는데 이름은 알지 못하네.”
“누군가 소식을 전했다는 말이 되는군요.”
“아는 바는 여기까지일세. 아우를 살려준 보답이라고 해두세. 우리는 복수를 뒤로 미루고 은거할 테니 다시 보기 어렵겠군.”
씁쓸하게 웃은 양가의가 몸을 돌렸다.
“뭐하냐? 가자.”
“예, 형님.”
양가의를 따라 움직이던 조보휘가 끝내 고개를 돌렸다.
“또 보세.”
익살스러워야 할 표정에 슬픔이 묻어 있어서 어딘가 어색한 인사였다.
진무린은 다시 곽가를 살폈다.
혈도를 일곱 곳이나 막아두어서 고통스러워 보이는데 사매를 납치한 범인이라 생각하니 그다지 동정이 가지는 않았다.
진무린은 잠시 서서 조금 전에 있었던 대결을 복기했다.
마음이 가면 검이 이미 그곳에 가 있는 느낌이었다.
조보휘의 단편을 자르는 순간에는 초식을 버리고 자유로워진다는 경지가 바로 이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쉰 진무린은 상체를 숙여 쓰러져 있는 곽가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그런 뒤에 고양이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그의 얼굴을 눈앞에 들었다.
“내게 해줘야 할 말이 많지?”
곽가는 감히 진무린에게 대꾸하지 못한 채 시선을 떨어트렸다.
눈빛도 그렇거니와 발목과 손목을 자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 냉정함, 귀식대법으로 몸을 감췄음에도 찾아내는 실력, 그리고 반노쌍복을 완벽하게 굴복시킨 무위에 질린 기색이었다.
“가자.”
진무린은 곽가를 내려놓은 뒤에 뒷덜미를 잡고 걸었다.
그의 엉덩이와 허벅지가 바닥에 끌렸는데 이 자가 마등을 살려내는 바람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생각해 더 배려할 마음은 없었다.
“경고하는데.”
지이이익.
곽가의 발 두 개가 산길에 기다란 자국을 남겼고, 그 위로 아직 굳지 않는 피가 덩어리지듯 뭉쳤다.
“말하기 싫으면 입을 다물어. 거짓말을 하면 내가 잔인해질 것 같거든.”
내려가는 길이라 곽가의 다리가 위로 들린 꼴이 되었다.
돌이 뾰족하게 나온 길이었는데 진무린은 거칠 것 없이 곽가의 뒷덜미를 잡은 자세로 계속 걸었다.
“풍령관의 관주에게 연락할 사람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한 명밖에 없어.”
진무린은 혼잣말처럼 입을 열며 계속 소능산을 내려갔다.
“부맹주를 구금했으니 남은 것은 공동의 약연 장로인 거지.”
찌이익.
뾰족하게 올라온 돌에 엉덩이와 허벅지를 베였는지 곽가의 몸이 움찔했고, 이어 그의 몸뚱이가 지나온 자리에 길게 피어난 붉은 피가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사매를 왜 납치했는지, 그래놓고 갑자기 풀어준 이유가 뭔지, 마등이 어떻게 폭렬공을 익혔는지 궁금한 게 아주 많아.”
거기까지였다.
이후 진무린은 침묵한 채 곽가를 끌고 소능산을 내려오는 기다란 길을 묵묵하게 걸었다.
한편으로는 잔인한 광경이었다.
아직 피가 굳지 않은 두 개의 발목과 오른쪽 손목, 아래가 갈라지고 헤져서 피를 줄줄 흘리는 곽가가 뒷덜미를 잡혀 짐승처럼 끌려오는 모습이 말이다.
소능산의 입구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하나둘 있었는데 등에 검을 멘 진무린과 끌려오는 곽가를 보고는 고개를 돌리느라 바빴다.
이후 맹주의 거처로 향하는 길은 난리도 아니었다.
길 양쪽에 몸을 숨긴 이들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보았는데 진무린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곽가를 끌고 계속 걸었다.
누군가 보고한 모양이었다.
정도맹의 무인이 달려왔고, 이어 황종관과 청강, 조금 뒤에 약연이 나타났고, 그 뒤로 엉망인 몰골의 비룡방 철비완과 등소옥마저 급한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황종관이 길을 막듯 서 있는 바람에 진무린은 걸음을 멈췄다.
“뭔가?”
“지난밤에 놓쳤던 혈교의 곽가입니다.”
시선을 떨구었던 황종관이 그나마 다행이란 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네.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맡기게.”
진무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다가 시선을 멈췄다.
‘왜? 나를?’
진무린의 시선을 받은 공동의 약연은 확실히 당황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