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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32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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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32화

은천검제

제32화

 

맹주의 거처 곳곳에 피운 횃불이 거만한 달빛을 밀쳐냈다.

소강명은 부맹주의 직위를 인정해 포박하지 않은 상태에서 맹주의 거처 별관에 가두었는데 화산의 제자들이 경계를 맡았다.

또한, 내상을 입은 약연은 환약을 입에 넣은 뒤에 운기에 들었으니 이 밤에 점창과 공동의 제자들은 분한 마음이 가득했으나 분위기에 눌려 다른 말을 내지는 못했다.

황종관과 청강이 잠이 올 턱이 없었다.

밝은 날 듣기를 기다리느니 당장 자세한 내막을 듣고 싶기도 하고.

황종관은 청강과 함께 진무린의 이야기를 들었다.

“현장에서 발목과 손목이 보이질 않았네.”

“그 점을 노렸습니다.”

황종관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등을 살려낸 것이 혈교라면 곽가는 분명 손과 발목을 붙인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연결되나? 그렇다면 자네는 그 순간에 그런 계산을 했단 말인가?”

황종관이 감탄을 터트렸는데 이 대목에서 진무린이 답할 말은 딱히 없었다.

“진 대협. 그런데 무위가 한 단계 상승한 듯한데 혹시 소수음공을 녹인 덕분이오?”

“그렇게 보셨습니까? 저는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진무린은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소수음공을 녹일 적에 사당이 무너질 정도여서 내심 기대한 바도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 몸을 점검해 본 결과 전혀 변화가 없어서 그렇게 소수음공이 소진된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진무린을 익히 아는 청강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 대협이 어디 거짓을 말할 분이오? 그러나 노도가 느끼기에 분명 단계를 넘은 성취가 보이니 훗날 기회가 되면 천천히 점검해 보시구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인.”

“진인께서 말씀하시니 나도 한마디 거들겠네.”

진무린은 말을 낸 황종관에게 시선을 주었다.

“진인의 말씀대로 약연 장로를 누른 기운은 분명 생사현관을 타통한 수준을 넘는 것이라 보네. 그리 본다면 이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겠지. 그러나 대결의 승패는 내공의 고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게.”

“맹주의 말씀을 새기겠습니다.”

“또한, 감추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자네가 그 정도 무위를 지녔음을 자각하지 못하여 드러낸 것이니 앞으로 내공을 발휘할 일이 있다면 과하게 사용하는 일을 자제하는 것이 좋아.”

“그 또한 주의하겠습니다.”

진무린이 진지하게 건넨 답에 황종관은 기가 막힌 웃음을 토해냈다.

“이거야 원. 생사현관을 넘어선 고수가 자신의 경지를 모르고 있다니, 진인께서 안 계셨다면 맹주인 내가 헛소리를 한다고 소문날 뻔하지 않았나.”

“맹주만 그러신 게 아니오. 노도도 맹주께서 함께 계시지 않았다면 노망났다는 말을 들을 뻔했소.”

청강과 황종관이 농을 주고받으며 가벼운 웃음이 지나갔다.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인가?”

“혈교와 점창, 공동이 손을 잡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본문의 암연과 연락해 혈교를 칠 방법을 강구토록 하겠습니다.”

“흠.”

오간 대화의 끝에서 황종관은 나직한 신음을 뱉었다.

“자네가 사매를 찾아 나선다면 그를 어찌 말리겠나. 그러나 홍화루가 저렇게 천서유기에 얽혀 있는 한 강호에 불어닥칠 피바람이 이곳 호북의 상등에서 가장 먼저 일어날 확률이 높다는 점을 한 번 더 고민해 주게.”

“맹주께 여쭐 것이 있습니다.”

진무린의 질문에 황종관이 시선을 들었다.

“만약 홍화루나 귀혼곡이 천서유기를 지녔다면 어찌 됩니까? 옥환을 노린 것이 아니라 단지 소수음공을 익히려 했다면 그것은 죄가 없지 않습니까?”

진무린의 질문을 들은 황종관은 난처한 듯 청강을 보았다.

“진 대협. 강호삼보는 금편, 옥환, 흑판을 말한다오. 셋은 각기 다른 능력을 지녔으니 이 중 하나만 차지해도 그에 담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 들었소.”

이미 아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청강이 이리 진중하게 꺼낼 때는 이유가 있으리라. 

“세 가지 보물의 위치를 적어놓은 서적이 있으니 ‘보양진서’, ‘천서유기’, ‘유광록’이 바로 그것이라오. 그 세 가지 서적에는 보물을 찾기 위한 무공이 각각 들었고, 진 대협이 얻었다는 소수음공은 천서유기에 담긴 것이외다.”

청강의 이야기가 길다고 여겼던지 황종관이 다음 말을 받았다.

“무공을 익힌 것까지는 탓하지 못해. 그래서 부맹주도 소수음공이 아니라 마공이라 우겼겠지. 마교로 몰아가는 것이 쉽고 빠르니까. 그러나 천서유기를 지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네.”

“무림 공적이 됩니까?”

“그 정도는 아닐세. 다만, 소지하게 된 연유와 과정을 소상히 밝혀야 하지.”

고개를 갸웃했던 진무린은 바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세 가지 책자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 온 강호에서 욕심 많은 이들이 달려들겠군요.”

“바로 그거네. 어지간한 무위를 지녔더라도 견디기 어렵지.”

대강 대화가 끝났다.

가을밤이 길어서 그나마 어둠을 주변에 둘렀지 여름날이었다면 벌써 여명이 밝을 시간이었다.

“부맹주의 일이야 나를 비롯해 진인과 각 문파의 제자들이 혈교의 붉은 기운을 보았으니 다른 문파들도 함부로 변호하기 어렵네. 그렇더라도 자네는 신변을 특히 조심하게.”

“그리하겠습니다.”

자리를 마치기 전에 황종관이 당부했고, 진무린이 듬직하게 답했다.

“또 지붕에 오를 참인가?”

“암연을 만나볼까 합니다.”

“아침은 함께 드세.”

“알겠습니다.”

답을 한 진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고는 바로 마당으로 나섰다.

훌쩍 몸을 띄운 진무린이 지붕 위로 사라진 다음이었다.

그 모습을 본 황종관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인의 말씀대로 다음 대 검왕을 미리 보는 듯한데 심정이 이리 복잡하니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것입니다.”

“노도도 그렇다오. 저런 모습이기를 바라며 한평생을 검과 함께 보냈는데 생사현관의 경지를 벗어나기는 요원한 것 같으니 실로 하늘이 내리셔야 가능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려.”

말끝에 남은 여운을 되새기는 것처럼 청강은 고개를 들어 진무린이 사라진 지붕을 보았다.

“단계를 넘어선 내공이 조만간 검에 담길 텐데 그때 진 대협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울지 노도는 벌써 기가 꺾이오.”

“그렇더라도 막상 눈앞에서 보시면 검을 섞어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야 이를 말씀이오.”

두 사람은 넉넉하게 웃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기를 하든, 잠시라도 눈을 붙이든, 새로운 날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강한 기운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차가운 바람처럼 두 사람을 휩쓸고 지나갔다.

“진 대협이 암연을 부른 모양이오.”

청강의 설명에 황종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뵙겠습니다.”

“그러십시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

 

곤히 잠들었던 백면호리가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쿠으응. 쿠응.

귀혼곡 전체를 울리는 거대한 진동 탓인데 실제로 몸이 흔들렸고, 주변에 놓인 작은 가구들이 떨었다.

쿠으응. 쿠으응.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진동에 놀라 깬 요정을 백면호리가 안아 들었을 때였다.

“아저씨!”

밖에서 섭성의 음성이 들렸다.

백면호리는 요정을 안은 채 급히 밖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냐?”

“침입자가 있나 봐요. 절 따라오세요.”

“침입자?”

“가끔 귀혼곡의 소문을 들은 무인들이 저렇게 입구를 부수겠다며 달려들 때가 있어요. 이번은 좀 심하거든요. 공자께서 일단 숨으라 하셨어요.”

섭성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급히 달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쿠으응. 쿠응.

그러나 훈련이 되었는지, 아니면 이런 경험이 잦아서인지 누구도 소란스럽게 떠드는 사람은 없었다.

“성아! 서둘러!”

대신 이안공자의 음성이 멀리서 들렸다.

“가세요! 얼른요!”

“그래? 그래!”

백면호리는 요정을 안고 섭성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고작 이틀인데 요정은 다리에서 느끼는 통증을 잊었고, 전보다 훨씬 편하게 움직였다.

‘칠주야면 치료된다는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섭성을 따라간 백면호리는 이안공자의 거처를 돌아 뒤편에 있는 동굴에 들어섰다.

안은 꽤 넓었다.

심지어 가장 안쪽에는 나무틀에 짚을 깔아놓은 침상이 줄줄이 있어서 이런 경우를 대비해 철저히 준비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이를 안으로 눕히시오.”

“그러지.”

백면호리가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옷을 잡아당긴 요정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자고?”

요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사람과 섞여 살지 못한 탓이라, 가슴이 아린 백면호리는 딸 요정의 청을 받아들여 입구 쪽에 앉았다.

쿠으으응. 쿠으응.

“이번은 좀 심각하오.”

이안공자의 두 얼굴이 모두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동안에도 기인촌 촌민들은 아픈 이들을 침상에 눕히고 물을 건네주는 등, 나름 이 상황에 잘 대처하고 있었다.

“밖의 진을 뚫고 들어올 정도로 능력 있는 자들이 이곳에 숨어 있는 것을 모를까?”

“중간에 웅덩이 있는 곳에 진이 하나 더 있소. 그리고 이 동굴 앞에 또 다른 진을 설치해 두어서 밖에서 보면 넝쿨이 우거진 절벽으로 보일게요.”

“오호!”

그 와중에도 백면호리는 감탄을 터트렸다.

쿠아아앙. 쿠아앙.

“이건 뭐야?”

“아무래도 대단한 고수가 직접 나선 듯하오.”

“고수가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저러지?”

인상을 찌푸린 백면호리가 입구를 노려본 뒤였다.

“보시다시피 흉한 몰골이다 보니 괴인을 죽인 영웅으로 이름을 알리고 싶은 무인이 간혹 찾곤 한다오.”

“고약한 인간들!”

“주로 정파의 인물들이 저런다는 것이 가장 서글프지요.”

“저것들을 그냥!”

백면호리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달려왔다.

혹시 무공을 익혔을까 하는 기대 가득한 시선이었다.

“내가 진 대협에게 말해서 이리 불러올까 보다!”

백면호리는 얼른 말을 바꿨다.

 

**

 

여명이 밝을 때였다.

진무린은 암연이 보내는 기운을 느끼고 아직 밝지 않은 능동의 지붕 위를 달렸다.

호북의 능동에 오고부터는 어쩐지 길을 걷는 것보다 지붕 위를 달리는 것이 더 잦은 것 같은데 당장은 다른 도리가 없었다.

무너진 사당 앞에 도착한 진무린이 어젯밤의 일을 되새길 때였다.

사당의 뒤편에서 장 노대가 걸어 나왔다.

“노대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긴히 전할 말씀이 있어서 오던 길이었습니다.”

진무린의 곁으로 다가온 장 노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감으로 살폈는데 의심스러운 정황은 없습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진 대협. 놀라지 마십시오.”

무슨 일인데 이럴까.

혹시 문주 임운령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었나?

진무린은 이어질 장 노대의 말에 집중했다.

“모 소저를 찾았습니다.”

“예?”

“원남에서 가까운 횡장석에서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또한, 소식을 들은 문주께서 급히 그리 향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놀랄 소식이 아니라 반가운 소식 아닙니까?”

진무린의 질문에도 장 노대의 무거운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진 대협. 모 소저가 암연의 표식과 기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눈가를 좁힌 진무린을 향해 장 노대가 계속 말을 이었다.

“혹시 일부러 감추는가 싶어 대놓고 표식을 보였는데 들여다보기만 할 뿐,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말씀을 해보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기도 곤란한 것이 전중방의 제자 셋과 합류해서 움직이는데 그들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흠.”

나직하게 신음을 흘린 진무린은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장 노대에게 들려주었다.

“그렇다면 혈교에서 모 소저에게 술법을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식을 문주께 가능한 한 빠르게 전하겠습니다.”

“사제는 어디 있습니까?”

“근처에 있으니 바로 문주와 합류할 것으로 압니다.”

진무린은 장 노대를 묵묵하게 보았다.

문주는 분명 정보가 왜곡되어 올라온다고 하였다.

장 노대가 시작인지, 아니면 그 위의 장로 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노대. 문주께 전할 말이 있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주십시오. 지난밤의 일을 전하는 길에 함께 드리면 되겠습니다.”

“부맹주와 약연 장로의 목을 자를까 합니다.”

언제나 표정을 감추던 장 노대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진무린을 보았다.

“그에 대한 허락을 맡아주십시오.”

장 노대는 아직 답을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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