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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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27화
은천검제
제27화
양가의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정도맹주가 달려올지 모른다는 말에 마음을 굳힌 눈치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그러나 감춘 것이 있다면 반드시 다시 보게 될 걸세.”
“감춘 것이 없으니 더 볼 일은 없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임운령의 답에 눈을 부라렸던 양가의가 몸을 날렸다.
“어쩐지 우리는 또 볼 것 같거든. 잘 있게. 안색이 좋아 보여서 나도 좋았네.”
촐랑촐랑 태도를 바꾼 조보휘가 훌쩍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이 사라진 뒤였다.
“굉장한 기운을 뿜어내기에 뭔가 얻은 것이 있나 했더니 아쉽구나. 혹여 감춘 것이 있거든 내게는 내놔봐.”
임운령의 독촉에 진무린은 안에서 있었던 일을 쭉 설명했다.
“그것참. 소수음공이 대단하다는 말은 들었다만 이 정도의 위력일 줄은 몰랐다.”
임운령은 확인처럼 무너진 사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됐다. 이제는 낯빛이 바뀔 일도 없고, 뜻도 전했으니 나는 이만 가보련다.”
“저녁이라도 드시고 출발하십시오.”
“이제 와서 아쉬운 척이냐?”
모르는 이라면 임운령이 진무린을 못마땅해 하나 싶을 정도의 대꾸였다. 그러나 임운령은 인자한 눈빛이었고, 진무린은 진심으로 아쉬운 심정이었다.
“반노쌍복 정도의 전대 고수가 무림의 세 가지 보물을 찾는다. 조만간 강호에 피바람이 불 것이라는 경고로 봐도 무방하지. 아직 확실치 않은 일을 떠드는 것은 경솔한 행동이나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것이 나쁠 것은 없어.”
넉넉하게 말을 건넨 임운령은 원남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드시 려아를 찾을 것이고, 무헌이를 지켜낼 테니 너는 네게 주어진 소임에 최선을 다해.”
“예, 문주.”
임운령이 방향을 트는 것을 보며 진무린은 얼른 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숙였다. 옷자락이 날리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들었을 때 임운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 같으면 운기를 다시 한 번 하고 싶었다.
그러나 살펴야 할 일이 있어서 진무린은 걸음을 옮겼다.
올라올 때는 기운을 감추느라 걸었다면 지금의 진무린은 여유를 보이느라 경공을 펼치지 않았다.
느긋하게 상대의 반응을 살펴야 할 때여서 그렇다.
**
섭성의 안내를 받은 백면호리는 딸 요정과 함께 이안공자를 만났다.
머리가 둘인 사람을 보면 누군들 놀라지 않을까.
다만, 그 반응에 담긴 감정이 놀라움이냐, 멸시냐, 거만이냐, 측은함이냐가 문제인 거지. 그리고 머리 둘인 당사자는 상대방의 감정을 분명하게 알아챈다.
만약 섭성의 벽력어 기운에 당하지 않았다면 교만했을지 모르나 호되게 당했던 백면호리는 전에 없이 공손한 태도로 이안공자를 대했다.
“홍화루의 루주 아시지? 부탁을 받아 왔소. 확인이야 이안공자의 얼굴이 그 증명일 테니 다른 말 않으리다.”
백면호리는 품에 보관하던 전표를 꺼내 먼저 이안공자에게 전했다.
좌안과 우안, 두 개의 얼굴은 각기 다르게 생겼고, 눈동자도 다르게 움직이며 표정 또한 달랐다.
백면호리는 두 사람을 상대한다는 심정으로 대했다.
어설프게 굴었다가 딸의 치료도 날리고, 자칫 벽력어의 기운에 당하는 것보다 더 호된 경험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염려 탓이었다.
전표를 확인한 두 개의 고개가 백면호리의 품에 있는 요정을 향해 움직였다.
“이 아이는 내 딸 정이라 하는데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와서 도움을 청할까 하오. 인사해야지?”
백면호리는 요정을 앞으로 내려놓았다.
“예쁘게 생겼구나. 얼마 만에 보는 아가씨인지 마음이 다 기쁘다. 나는 이안공자라 한다.”
“성이 오빠에게 들었어요. 정이가 이안공자를 뵙습니다.”
좌안이 말을 건넸고, 붙잡고 있던 백면호리의 허리를 놓은 요정이 예쁘게 인사했다.
“허허허허.”
이안공자의 좌안이 웃음을 터트렸고, 우안은 기특하다는 투의 미소를 그렸다.
“공자! 그 예쁜 아이에게 점심을 먹었는지 물어봐 주시오. 조금 이른 저녁을 하면 어떤지도 물어주시고.”
“자네가 직접 묻게.”
이안공자가 고개를 돌린 곳에 팔이 네 개인 노년이 쭈뼛댔다.
어깨에서 내려온 팔 두 개는 정상인데 그 아래 옆구리에서 절반 정도 길이의 팔 두 개가 더 있었다.
사람이 새로 온 것이, 그것도 예쁜 아이인 것이 좋은데 몰골이 흉해서 혹시 놀라면 어떻게 하나 싶은 염려가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배고파요.”
“내가 만들 텐데 괜찮을까?”
“직접 만들어주신다니 더 기대돼요.”
“그래?”
화들짝 반가운 얼굴을 한 남자의 오른쪽 아래 팔이 불쑥 올라와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나는 이곳에서 노반이라 불린다.”
“정이에요. 요정. 노반께 요리를 부탁드려요.”
“기다려! 내가 최고의 요리로 대접할게.”
노반이 기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지켜보는 이들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보아 백면호리와 요정이 귀혼곡에 좋은 인상을 남긴 것이 분명했다.
“이리 고맙고 귀여운 아가씨가 어째서 아플까? 내가 잠시 맥을 살펴도 되겠지?”
“감사합니다.”
이안공자의 우안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 오른팔을 내밀었다.
시간이 걸릴 텐데 조용한 곳에서 해야 하지 않나?
요정을 살펴주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백면호리는 내심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허리 뒤에 짧은 다리가 하나 더 달린 남자, 귀의 숫자가 많은 여자를 제외하면 주변에 둘러선 이들의 외모는 평범했다.
주변을 슬쩍 살핀 백면호리가 시선을 가져온 뒤였다.
“내공을 익혔구나?”
“예. 아빠가 알려준 구결대로 익혔어요.”
“다섯 해 정도 된 것 같은데?”
“맞아요.”
고개를 끄덕인 우안이 오른손을 놓고는 몸을 세웠다.
“일종의 주화입마 증상일세.”
“내공을 익히는 내내 괜찮다가 느닷없이 주화입마가 올 수도 있소? 그저 매일 하던 심법대로 운기한 것뿐인데?”
“심법은 어디에서 얻었나?”
“그것이…….”
백면호리가 요정을 슬쩍 보았다.
차마 딸 앞에서 말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백면호리 그대가 익힌 것과 다른 것이겠지.”
“그렇긴 하오.”
“도인이 잘못된 부작용이 쌓이고 쌓인 것이니 그것을 치료하면 괜찮겠네.”
“아후!”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쉰 백면호리가 고개를 삐딱하게 틀고는 이안공자의 두 얼굴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나저나 연배가 어찌 되시오?”
“네 해 전에 지천명을 넘겼으니 올해 쉰넷이지.”
“어쩐지 이상하더라. 내가 세 살이나 위인데 말을 조심해야지.”
이번에는 이안공자와 주변인들이 백면호리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폈다.
답은 바로 나왔다.
백면호리가 얼굴 위로 오른손을 문지르기 무섭게 나이에 걸맞은 얼굴로 바뀌었다.
“오!”
지켜보던 이들의 탄성이 터져 나오자 보답한다는 듯 백면호리는 연달아 세 번이나 얼굴을 바꾸었다.
“과연 백면호리시오. 별호를 제외한 어떤 내용도 알려진 것이 없어 정이를 보아 연배를 짐작했더니 내 실수를 한 모양이오.”
“앞으로 조심하면 되지, 뭐.”
백면호리의 대꾸가 있을 때였다.
코를 간지럽히는 냄새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갑시다. 오늘은 노반이 제법 솜씨를 발휘한 모양이니 먼저 요기를 하고 치료를 하겠소.”
“치료가 될까?”
“일주일 뒤에 보시면 아실 게요.”
“그렇게나 빨리?”
흥분한 백면호리가 냉큼 요정을 안고는 이안공자의 뒤를 따랐다.
**
진무린이 흑사련의 호북지부에 들어섰을 때 마당에는 도끼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번득이는 빛이 가득했다.
수련을 방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그것도 정도맹주가 지켜보는 자리여서 진무린은 고개만 숙인 뒤에 황종관의 뒤로 움직였다.
비룡방 일행과 눈인사를 마친 진무린은 도끼를 휘두르는 철비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몸을 감싸듯 바삐 움직이던 도끼가 느닷없이 앞으로 날았다.
철비완은 자루에 연결한 끈을 잡아채는 방식으로 도끼를 부렸는데 제법 화려한 맛은 있었다.
휘릭! 붓붓붓붓!
그가 오른손을 휘젓자 허공에 떠 있는 도끼에서 벌의 날갯짓과 비슷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마나 수련했을까.
철비완은 지친 기색이었고, 이마와 목 뒤에 분명하게 땀이 올라와 있었다.
진무린과 헤어져 바로 시작했다면 족히 한 시진은 넘는다.
이윽고 손목을 잡아채 도끼를 붙든 철비완이 숨을 크게 내쉰 뒤에 몸을 돌렸다.
“진 대협이 왔으니 한 번 더 해보게.”
황종관의 지시를 받은 철비완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왼손을 내미는 것과 동시에 자세를 낮췄다.
비룡방 일행의 눈에 담긴 것은 염려와 걱정이었다.
지켜보지 못해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황종관은 지금까지 내내 기본식을 반복하라 요구했을 것이 분명했다.
철비완의 손을 따라 도끼가 바쁘게 휘돌았고, 그의 몸이 위아래, 좌우로 번갈아 움직였다.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은 분명하게 알았다.
그러나 내공은 탁하고 보법마저 흔들리는 수준으로 자경을 상대하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또한, 그는 황종관이 왜 이토록 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지시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자신보다 강한 적, 그것도 구대문파에 속한 제자를 상대하면 단박에 호흡이 거칠어지고 손발이 어지러워진다.
마치 지금의 철비완처럼 말이다.
황종관이 비록 몇 가지 수법을 알려준다 한들, 이리 거친 호흡과 흔들리는 보법으로는 득을 얻기 어렵다.
진무린의 앞에서 도끼를 회수한 철비완이 몸을 돌렸다.
“자네는 기운이 탁해. 보법이 흔들리고.”
황종관의 지적을 철비완은 무겁게 받아들였다.
“어차! 어디 몸을 풀어볼까.”
뜻밖이었다.
진무린의 앞에서 황종관은 도를 들고 철비완의 앞으로 나섰다.
“잘 보게.”
한 마디를 툭 던진 황종관이 오른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가 도집에서 도를 꺼내는 순간을 진무린만 정확하게 보았을 뿐,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니 다른 이의 눈에는 팔을 내민 황종관의 손에 도가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보였을 거다.
도를 내민 황종관은 뚜벅뚜벅 세 걸음을 앞으로 걸었다.
결국, 도의 끝이 철비완의 이마에 닿았다.
“도끼를 부리는데 상대는 안중에 없고, 배운 것을 반복하기에 바쁘다면 그것이 나무꾼과 다를 바가 무언가.”
쩌렁하는 황종관의 꾸짖음이 나온 직후였다.
주룩.
도의 끝에 걸린 철비완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나와 눈 안쪽을 타고 입가를 적신 뒤에 바닥에 떨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상황을 이해 못 한 비룡방 일행이 놀란 시선을 주었는데 진무린은 묵묵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황종관은 도를 통해 철비완의 탁한 내공을 풀어주었고, 심지어 그가 지닌 공력의 일부를 전해주고 있었다.
열 개가 가면 하나쯤 남는다.
그 정도의 손실을 감수하며 황종관이 베푸는 은혜였다.
휘릭! 휘리리리릭!
한순간 철비완의 앞에서 번득인 황종관의 도가 다시 이마에 닿아 있었다.
지켜보던 등평이 마른침을 삼켰고, 등소옥은 나오려는 탄식을 감추기 위해 입을 가렸다.
지금 서 있는 철비완의 앞쪽 곳곳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탓이었다.
터억!
황종관은 철비완의 왼쪽 어깨를 때려 몸을 돌린 뒤에 재차 도를 휘둘렀다.
휘익!
그리고는 어깨를 잡아채 다시 정면에 세웠다.
이런 모습은 놀랍다.
그렇게 앞으로 돌린 철비완의 이마에 황종관의 도가 다시 붙어있는 것은.
“상대가 어디를 노리는지 기억하게. 나의 약점을 모른 채 부리는 도끼는 한낱 쇠붙이일 뿐이지.”
보기에는 처절했다.
이마에서 흐른 피로 입가와 턱이 흥건하게 젖었고, 온몸 곳곳이 붉게 물드는 철비완의 모습은 그랬다.
진무린은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삼켰다.
전해준 공력이 원활하게 돌 수 있도록 황종관은 탁한 철비완의 맥을 일일이 뚫어주었다.
철비완이 “명심하겠습니다, 맹주.”하는 그 쉬운 대꾸조차 못 하는 것만 봐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진무린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지켜보는 비룡방 일행의 표정은 참담했다.
기연이었다.
이로써 철비완은 분명 한 단계를 올라선 무인이 되었다.
휘릭!
도를 번득인 황종관이 두 걸음을 물러섰다.
“비무를 준비하게.”
“맹주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피투성이가 된 철비완이 다부지게 예를 보이고는 도끼를 부여잡았다.
그 직후였다.
황종관이 번득하며 진무린에게 시선을 주었다.
의미가 분명한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