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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25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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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25화

은천검제

제25화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점심을 먹은 후, 진무린이 먼저 일어섰다.

식사하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제법 나누었으나 모두 사적인 내용이어서 꽤 유쾌했던 식사였다.

진무린이 떠난 다음이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청강이 입을 열었다.

“어쩌실 셈이오?”

“어쩌긴요. 젊은 친구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으니 부딪쳐 봐야지요.”

황종관은 아예 뒤편에 서 있는 무인을 향해 고개를 돌려 보았다.

“너는 가서 내 도를 가져오너라.”

“허어. 맹주께서 직접 도를 드실 요량이오?”

“의지를 보일 것입니다.”

지금 황종관이 보이는 다부진 각오는 청강이 말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진 대협의 의견이 옳다 해도 대뜸 맹주께서 비룡방의 호법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또한 격에 맞지 않는 일이외다. 그 점도 생각해 보셨소?”

“찾아야지요.”

“무엇을 말씀이오?”

“호법과 이 몸의 공통점이 뭔가 있지 않겠습니까? 성씨야 철 씨와 황 씨로 갈리니 아닐 테고, 고향이 같을 리도 없고. 뭔가 핑계를 찾아내려 합니다.”

황종관이 말을 마쳤을 때 무인이 도집에 담긴 도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도를 받아든 황종관은 먼저 미소를 그렸다.

“이 녀석이 그동안 서운했던 모양입니다. 전에는 손에 딱 붙었는데 이리도 낯설게 구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구대문파가 아니라 무시당하지만 그런데도 정도맹주에 선출될 정도의 무공은 지녔다.

그가 도의 손잡이를 잡아 천천히 뽑자 자연스럽게 눈에 광채가 서렸고, 청강도 긴장할 정도의 기운이 온몸에서 뿜어졌다.

“시작도 함께였으니 끝도 함께해야지.”

황종관의 말에 답을 하는 것처럼 눈앞에 세운 도가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

 

점심을 먹은 진무린은 소능산의 오래된 사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공을 발휘했다면야 단숨에 도착할 거리겠으나 내공을 중단전에 모은 터라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오가는 이는 없었다.

진무린은 주변을 둘러보았고, 묵룡심법의 기운을 풀어 보이지 않는 먼 곳까지를 살폈다.

막혔던 시야가 뚫린 듯하고 아프던 몸이 나은 것처럼 상쾌함이 온몸을 휘감는데 염려했던 대로 떨군 시선에 하얗게 변한 손이 들어왔다.

소주천이야 걸으면서도 얼마든지 하는 경지였다.

오래된 사당 앞에 도착한 진무린은 걸음을 멈추는 것과 동시에 운기도 멈추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기운을 돌리고 싶었으나 중단전에 가둬두었던 소수음공이 묵룡심법의 내공을 타고 퍼지려는 것을 막아야 했다.

이유는 또 있었다.

진무린은 서둘러 소수음공의 기운을 중단전에 가두고 양손을 맞잡은 채 상체를 숙였다.

진무린의 얼굴과 손의 색이 돌아온 뒤였다.

숲에서 몸을 날린 임운령이 사당의 지붕을 밟고는 진무린의 앞에 가볍게 내려섰다.

“제자 진무린이 문주를 뵙습니다.”

“하던 대로 해라. 누구 보는 사람도 없는데.”

두건에 회색 단삼, 녹색 장포를 걸친 임운령은 손에 검을 들고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네놈이 걱정돼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진무린을 살핀 임운령이 저 앞으로 펼쳐진 상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공은 왜 가둬 뒀느냐?”

그가 던진 질문이었다.

진무린은 먼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왜 답을 못해?”

“사연이 길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듣는 나를 걱정하는 게냐, 아니면 긴 사연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 그러냐.”

세상에서 가장 믿는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사부 전도위요, 둘을 꼽으라면 사제이고, 셋을 꼽으라면 어렵다. 문주와 사매의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탓이었다.

곱지 않은 시선의 임운령을 향해 진무린은 지난 이야기를 모두 꺼내놓았다.

단 한 가지만 전하지 않았다.

마등의 어깨에 검을 찍어 넣은 후에 보았던 검은 연기에 관해서였다. 

일각에 걸쳐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임운령은 먼저 입맛을 다셨다.

“술이라도 한 병 가져올 걸 그랬다.”

“제자가 가져오겠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변하면 어쩌려고? 말이 났으니 어디 한 번 보기나 하자. 내공을 풀어봐라.”

임운령이 지켜주는 앞이었다.

진무린은 염려할 것 없이 중단전에 모아둔 묵룡심법의 내공을 풀어냈다.

“됐다.”

고개를 저은 임운령은 못 볼 것을 봤다는 투로 다시 상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수음공을 다른 말로 소녀공, 독음기공이라 한다. 아느냐?”

“처음 듣습니다.”

“음공이라 그렇지. 주로 여인이 익히는 이유도 그것이고. 성취를 이룰수록 냉기가 도는데 가장 큰 단점은 보다 강한 양공을 만나면 그에 따라 녹아드는 데 있다.”

진무린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설명이었다.

“홍화루의 루주는 아직 남자 경험이 없었던 모양이다만, 그 상태에서 소수음공이 너의 강한 기운을 만나게 되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걸 게다.”

“처음 듣습니다.”

“이런 것도 있어야 문주의 체면이 서지, 네 녀석과 내가 아는 것마저 같으면 어디 부끄러워서 앞에 설 수나 있겠냐.”

진무린은 나오려는 웃음을 얼른 삼켰다.

저 퉁명스러움을 모를 때는 고개를 조아렸는데 그 안에 담긴 문주의 정을 알고 나면서부터는 능청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천서유기를 볼 것 없다. 기회를 봐서 소수음공을 완전히 녹여. 그리하면 이후에는 생소한 기운이 남았다가 묵룡심법을 운기할수록 완벽하게 녹아들 게다.”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마교에서 양공에 녹지 않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 소수마공이지. 강호에 알려진 소수마공이 익힌 자의 심성을 상하게 하는데 그 이유가 양의 기운을 이기려는 독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임운령이 그렇다면 믿어도 되는 일이었다.

“제자, 명심하겠습니다.”

“암연에서 올라오는 정보가 왜곡되고 있다.”

그런데 진무린이 답이 있은 직후에 임운령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장로 두 분이 의심스러운데 아직 이름을 거론하기는 어렵다. 무공을 유포한 것이 확실하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네 짐작과 다르지 않다. 너와 려아, 그리고 무헌이를 노리는 듯하니 각별히 조심해.”

“예, 문주.”

“맹주와 진인의 청을 받아들일 테니 너는 강호의 안녕을 위해 움직이고, 혹여 너의 뜻대로 본문의 무공을 유출한 자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리하고.”

“사매는 어찌해야 합니까?”

“내게 맡겨라.”

임운령은 준비하고 온 것처럼 막힘이 없었다.

“정보가 왜곡되니 현장에서 내가 지휘해야 려아를 찾는다. 마침 무헌이가 함께 있다니 녀석도 돌봐야 할 테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만 내 안전은 염려하지 마라.”

진무린은 이제야 임운령이 은천문을 나선 이유를 분명하게 알았다.

모려원을 직접 찾아 나서 암연을 틀어쥘 생각이고, 더불어 진무린에게 달려들 위해를 사전에 막으려는 계획이 분명했다.

“당장 할 일이 없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임운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가 지켜줄 테니 사당에 들어가 기운을 녹여. 혹여 소수음공을 느낀 맹주나 진인이 온다 해도 내가 특별한 심법을 지도했노라 말씀드리마.”

“이곳에서 녹이는 소수음공의 기운이 저곳까지 당도하리라 여기십니까?”

진무린의 질문에 임운령은 고개를 반쯤 돌렸다.

“네놈이 완벽하게 소수음공을 녹인다면 저 사당은 반드시 무너진다. 루주의 경지를 모르니 속단하기는 어렵다만, 얼굴까지 색이 변하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 얻는 것이 있을 게다.”

이 정도였나?

멍하니 있는 진무린을 보며 임운령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네가 얻는 것을 생각해서 나중에 홍화루의 힘겨움을 한 번은 도와주려무나.”

말을 마친 임운령이 시선으로 사당을 가리켰다.

“설마 루주를 떠올려 시간을 끄는 게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닌데 왜 그러고 섰어?”

“문주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두 손을 모아 인사한 진무린은 사당으로 향했다.

 

**

 

오전에 보았던 정도맹의 맹주가 행정가의 느낌이었다면, 오후의 중간에 흑사련 호북지부로 들어선 황종관은 위풍당당한 무인, 그 자체였다.

단단한 눈매, 다부진 어깨와 팔뚝,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대변하는 도가 무인 황종관의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환자가 왜 일어나는가?”

“자리를 보전할 정도는 아닙니다.”

“자네는?”

“어깨를 다쳤을 뿐입니다.”

등평과 마세호의 태도가 나쁘지 않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인 황종관이 시선을 돌렸다.

이왕이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이 좋다.

나중에 달려들 팔대문파를 생각해서 그렇다.

더구나 뒤에 줄줄이 호위 무인들이 지금 나누는 대화를 고스란히 듣는 형국이었다.

제법 다부져 보이는 철비완을 바라보던 황종관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는 고향이 어찌 되는가?”

“비적 떼에 잡혀가던 이 몸을 사부께서 구해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향이 어디인지 알지 못합니다.”

“흠.”

황종관은 입술을 길게 늘였다.

고향을 모르니 첫 번째 질문은 틀어졌다.

“요녕에 들러본 적이 있는가?”

“맹주를 배출한 황가장이 있는 곳으로 아는데 복이 없어 아직 들러보지 못했습니다.”

비룡방에서만 살았던 게지.

이걸 어쩐다?

고개를 비튼 채 철비완을 노려보던 황종관이 퍼뜩 시선을 돌렸다.

방향으로 따지면 소능산이었다.

왜 그런가 싶어 등평을 비롯한 비룡방 일행과 따르던 호위 무인들이 시선을 돌렸는데 그들이 알아차린 것은 없었다.

잠시 소능산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던 황종관이 망설이는 눈빛으로 시간을 끌었다.

날카로운 침묵이 흐른 뒤였다.

“마교가 온 모양이군.”

황종관이 깜짝 놀랄 만한 한 마디를 꺼냈다.

“저런 기운이라니. 의도가 있는 듯하니 우선 기다려 보기로 하지.”

상황을 설명하는 것처럼 혼잣말을 뱉은 황종관이 다시 철비완에게 시선을 주었다.

강호에서 정도의 무인을 대변하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이가 바로 눈앞의 황종관이었다.

그가 움직이면 따라붙는 깃발이 기본 스무 개요, 호위 무인과 수행원만 오십에 이른다.

한 마디 명을 내리면 구대문파는 물론이고 정도맹에 속한 수백 개의 문파가 나서는 인물이 바로 맹주 황종관이었다.

그런 황종관이 말을 잊은 채 훑듯이 노려보고 있으니 앞에 서 있는 철비완과 그를 지켜보는 비룡방 일행은 목이 바싹 마르는 심정이었다.

“호법은 술을 하는가?”

“방주를 모시고 술잔을 나누기는 합니다.”

“무슨 술을 즐기는고?”

“홍고량을 자주 찾습니다.”

질문이 이상했으나 철비완은 성심성의를 다해 답변했다.

“홍고량이라니? 자네의 출신이 혹시 산동이 아닌가? 내가 사는 요녕과는 바로 이웃이지! 나는 또한 산동에 자주 들렸었다네!”

“맹주. 홍고량은 작고하신 사부께서 즐기시던 술이어서 버릇이 들었건 것이지 출신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지나치게 정직한 철비완을 보며 황종관은 알기 어려운 미소를 그려냈다.

“이토록 강직한 사람을 두고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웃음과 함께 고개마저 끄덕인 황종관이 말을 이었다.

“내가 온 것은 자네의 무공으로 자경을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아 가볍게 훈수나 두어볼까 해서이네. 그러니 자네가 가장 자신 있는 무공을 한 번 보여보게.”

돌변한 황종관의 태도와 말에 철비완은 물론이고, 등평과 등소옥마저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제안이었다.

“진 대협에게 일을 부탁한 대가로 자네를 살펴달라는 당부를 받은 점도 있고.”

일단 시작한 황종관은 거침이 없었다.

“너는 가서 의자를 하나 가져오너라.”

무인 하나가 득달같이 달려가 의자를 가져왔다.

“뭐하나? 나흘이라고 하나 자경을 상대하려면 한순간이 아쉬워.”

의자에 앉은 황종관은 거듭 철비완을 재촉했다.

진무린의 등장 이후에 청강 진인을 만났고, 얼굴이 갈라지는 수모를 당하더니 이제는 정도맹주가 무공을 보아주겠다며 나섰다.

참으로 위기 뒤에 은혜가 줄줄이 내려오는 형국이 아닌가.

“맹주. 그리 은혜를 베풀어주시니 이 등평이 비룡방과 사제를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방주라고 등평이 조금 나았다.

그가 얼른 고개를 조아리는 옆에서 철비완과 등소옥이 비슷한 자세로 손을 잡고 상체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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