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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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6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23화
은천검제
제23화
홍화루를 나선 진무린은 황종관이 정도맹의 맹주란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길 양쪽에 정도맹의 깃발을 등에 멘 무인들과 대기하던 호위대만 봐도 어지간한 사람은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진무린은 바람결이나 음식을 만드는 냄새처럼 온몸으로 느껴지는 강한 기운에 슬쩍 시선을 들었다.
“지붕에도 호위들이 있을 걸세.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지켜보는 눈이 많으니 걸어서 갈까 하는데 괜찮겠나?”
“그편이 저 역시 좋겠습니다.”
진무린이 바라던 바로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경공을 펼치지 않는 것에 안도한 진무린은 조금이나 마음 편하게 걸었다.
가는 길에서 좌우에 늘어선 정도맹의 무인들과 몰려든 구경꾼들이 진무린을 힐끔거렸다.
마등을 잡은 무인이라는 소문쯤 들었겠다.
아니라면 정도맹주와 함께 걷고 있으니 얼굴이라도 봐두려는 것일 수 있고.
이런 정도맹주에게 본의 아니게 소수음공을 얻었고, 낯빛과 손의 색을 찾기 위해서는 천서유기를 봐야 한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할 일은 많은데 이런저런 사연들이 발목을 잡는 느낌이어서 진무린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흑사련 호북지부는 멀지 않았다.
몸을 돌리는 화산파의 제자 둘이 보였고, 그 주변으로 구대문파 소속이 분명한 이들과 철비완, 등소옥, 그리고 비룡방에서 보았던 여섯 명의 하급무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황종관과 청강을 본 구대문파 제자들이 길을 비켰다.
“비룡방주와 마 대협은 어디 있는가?”
“안으로 모셔서 치료를 마쳤습니다.”
황종관이 엄중하게 질문했고, 검을 든 무인 하나가 서둘러 답했다.
그때 진무린은 철비완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도움을 청해놓고 제대로 살피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이것이 어떻게 진 대협의 잘못이라 하십니까. 오히려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할 뿐입니다.”
들어보면 공손했으나 실제 철비완은 분을 참느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어서 말투가 이상했다.
“방주와 마 대협이 상처를 입었다 들었습니다.”
“정도맹에서 치료해주었어요, 진 대협.”
진무린의 질문에 등소옥이 낸 답이었다.
부친에 대한 걱정과 울분이 올라와서 가면을 쓴 것과 같이 억지로 만든 표정이었다.
“내가 진 대협을 모셔온 것은 이번 일에 대한 처리를 공평하게 하겠다는 의도요. 비룡방의 호법과 소가주는 나와 함께 들어가 일의 끝을 함께 보고 억울한 점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나서시오.”
“맹주의 공평한 처사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비룡방은 진 대협이 결정하시는 일이라면 한 점 불만도 없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호법 철비완의 대꾸를 들은 황종관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 흑사련의 건물 안으로 움직였다.
청강, 진무린, 철비완과 등소옥이 그 뒤를 따랐고, 마지막으로 맹주의 호위무사들이 걸었다.
마등의 시체는 열십자의 형틀에 놓였는데 목을 잘랐고, 어깨와 허벅지, 손목과 발목에 거대한 쇠꼬챙이를 꽂아 두었다.
거기에 다시 내공이 강한 사람이 잡아채면 어깨와 사타구니가 끊기도록 팔과 다리에 굵은 줄을 묶어 두어서 잔혹한 몰골이었다.
마등에게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떠올리면 저런 모습조차 사치이련만, 당장 보이는 광경은 처참한 느낌이 전부였다.
흑사련 호북지부 지부장 추굉이 앉았던 자리에 거대한 의자가 놓였고, 그곳에 황종관이 앉았다.
정도맹과 맹주를 상징하는 깃발을 등에 멘 무인들이 마당을 둥글게 둘러쌌고, 호위들이 늘어선 데다, 구대 문파의 제자들이 무거운 얼굴로 지켜보는 통에 분위기는 사뭇 엄숙했다.
진무린은 청강과 함께 황종관의 반걸음 뒤에 앉았다.
“공동의 자경은 나서라.”
황종관의 말에 구대문파의 제자들 뒤에서 서른쯤으로 보이는 무인이 나섰다.
회색 장포를 늘어트린 자경은 반성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의 눈과 얼굴에 담긴 것은 억울함이었고, 심지어 진무린을 날카롭게 노려보는 것으로 이 자리가 공동과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항변을 드러냈다.
“자경은 할 말이 있는가?”
“노골적으로 바라보아서 연유를 물었더니 자중하라며 하대하였으니 이번 사태의 책임은 비룡방에 있다 할 것입니다.”
유례없이 긴 평화를 누린 구대문파는 객잔, 주루, 반점과 다점을 운영하며 부를 축적했고, 주변에 위세를 부리며 살았다.
“비록 구대문파의 말석을 차지하나 정도맹의 한 축이요, 강호를 이끄는 본파를 업신여기고, 진 대협이란 분과의 친분을 앞세워 교만하게 굴었던 자입니다. 처벌을 주신다면 달게 받겠으나 이는 비룡방의 방주가 자초한 일임을 고민해 주십시오.”
자경은 막힘이 없었다.
마등의 출현 이후 흑사련에게조차 변변하게 대항하지 못했던 자들이 그가 죽기 무섭게 구대문파의 위신을 드러내는 꼴이라니, 진무린은 자경의 모습이 역겨웠다.
“비룡방의 호법과 소가주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라.”
“비룡방의 호법 철비완입니다.”
철비완은 이를 악문 채 씹듯이 당시 보았던 상황을 전했다.
누가 보아도 등평이 억울할 일이었다.
“화산은 당시에 함께 있었던가?”
황종관이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맹주. 청강 진인께서 진 대협이란 분과 친분이 두터워 화산파의 제자들은 불리한 증언을 하지 못합니다. 그 점을 고려해 주십시오.”
청강은 물론이고, 듣고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낯빛을 바꿀 정도로 당돌하고 맹랑한 말이었다.
좋게 말해서 그렇지 있는 그대로의 뜻은 화산파는 정에 휘둘려 공평한 일 처리를 못 한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었다.
“자경은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느냐.”
“청강 사숙조의 추궁을 미욱한 제자는 받기 어렵습니다. 이는 본파의 어른들과 의논해서 답할 문제라 생각합니다.”
질문을 던졌던 청강이 상체를 세운 뒤에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공동의 제자가 배분이 월등히 높은 화산의 어른에게 저런 식으로 대꾸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점창이 변절했다더니 공동도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구나.’
진무린은 흑사련 호북지부 안을 빠르게 살폈다.
화산의 제자들은 비분강개한 얼굴인데 반해 곁에 있는 다른 이들은 긴장만 할 뿐 자경의 대꾸에 그다지 반감을 담지 않은 얼굴이었다.
진무린은 황종관의 고민을 이해했다.
구대문파 출신이 아니라서 점창과 맞서기 어렵다더니 함께 다니는 구대문파 제자들의 모습에 공손함은 없었다.
제자들이 이 정도면 문주는 어떨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었다.
오늘 자경이 화산을 물고 늘어진 것은 맹주를 감싸면 너희도 따돌림당할 것이란 의미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라 해도 무방할 경고였다.
진무린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황종관이 점창을 제대로 조사하기란 어렵다.
게다가 이런 모습이 잦으면 정도맹주의 위신은 땅에 떨어진다.
홀로 점창을 모두 죽일 수도 없을뿐더러, 죽인다고 해도 남은 팔대 문파의 비난과 도전을 감당하기도 어려워 그렇다.
생각을 정리한 진무린은 자경을 보며 마음을 굳혔다.
얼굴과 손이 하얗게 변하는 일은 나중에 해명할 문제이고, 당장 저 못된 주둥이와 태도를 고쳐주지 않으면 비룡방에게 너무도 미안한 일이었다.
진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종관의 옆으로 움직였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지켜보겠네.”
황종관의 답을 들은 진무린은 고개를 아래로 돌렸다.
“자경이라 했나?”
“뉘시오?”
“은천문의 진무린이라 한다.”
“오늘 처음 뵙는데 어째서 하대를 하시오?”
“화산의 일대 제자들이 나를 사숙이라 부르니 너와의 배분 또한 비슷할 듯한데? 정도맹, 구대문파와 나누는 배분 따위 개나 줘버렸다면 말투를 바꿔주마.”
멈칫한 자경이 대꾸할 말이 없는지 입을 꿈틀거렸다.
“복잡할 게 뭐가 있나. 칼끝에 사는 사람들답게 검으로 해결하면 되지.”
마등을 두 번이나 상대했던 진무린이었다.
보기 전에야 자신 있었으나 막상 마주하면 사람 마음이 또 달라지는 터여서 자경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흘 뒤에 비룡방의 호법과 이 자리에서 대결하는 것으로 하자. 죽든, 살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후환이 없어야 한다. 그 정도는 되겠지?”
이게 무슨 소리야?
자경, 주변에 둘러선 이들이 멍한 얼굴로 진무린을 바라보았다.
“그 말씀을 후회하게 되실 거요.”
“말 돌리지 말고 확실하게 답해.”
“좋소.”
“나흘 뒤, 이 시간에 하겠다.”
숨도 쉬지 않은 채 대화가 오갔다.
진무린은 고개를 돌려 맹주를 보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진 대협이 뒤를 어떻게 해결하려 하는지 궁금할 뿐이네.”
황종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답을 내놓았다.
“자경은 이의 없느냐?”
“후환이 없음을 맹주께서 증명해 주신다면 이 몸은 만족합니다.”
자경의 답을 들은 황종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흘 뒤에 다시 보도록 하겠다.”
한 마디를 건넨 황종관이 몸을 일으켰다.
“진 대협은 나와 차를 마시는 게 어떤가. 그 뒤에 점심을 함께하기로 하지.”
“잠시 비룡방의 방주와 호법을 볼까 합니다.”
“그렇기도 하군. 그렇다면 안내할 자를 붙여둘 테니 거처로 오게.”
“진 대협. 그럼 노도는 맹주와 함께 기다리겠소.”
복잡한 표정의 청강이 황종관을 따라 움직였다.
**
거대한 기와지붕 사이로 난 골목을 세 번 돌아간 황종관은 임시로 정한 거처에 들어섰다.
정도맹과 맹주를 상징하는 깃발을 걸었고, 정도맹의 글자를 가슴에 단 무인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보기에는 위세 당당했다.
황종관은 대청에 있는 탁자에 청강과 마주했다.
“진무린이란 젊은 친구를 대협이라 부르는 것이 처음에는 마뜩잖았습니다.”
그는 청강을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보면서 모처럼 강호에 용이 나왔음을 알았습니다. 든든하면서도 한 가지 염려되는 점은 저 용이 세상을 호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할 테니 그들을 제압할 때까지 얼마나 힘겨울까 하는 것입니다.”
“짧은 순간에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셨소.”
“정도맹의 맹주 자리를 차지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의미심장한 말이라 청강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의와 협, 예와 도를 잃은 구대문파라니. 무엇이 저들을 저리 탐욕스럽게 했는지 걱정이고, 나흘 뒤에 있을 대결을 진 대협이 어찌 감당할지 그도 염려된다오.”
“보시고도 그러십니까?”
“무엇을 말씀이오?”
질문을 받은 황종관은 진무린을 되새기는 것처럼 흑사련의 지부가 있는 방향을 향해 잠시 시선을 주었다.
“진 대협은 내공을 전혀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야 자경을 힘으로 누르고 싶지 않은 탓이 아니오?”
“그보다는 내공을 전해줄 심산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내공을 전해주다니요?”
“진 대협은 지닌 공력을 비룡방의 호법에게 전하여 대결에 임하게 할 요량이라 봅니다. 그러니 오늘은 본인의 기운을 감추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흠.”
청강은 먼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내공을 전한다 해도 구대문파가 지닌 무공은 쉬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질 않소? 공동에는 유명한 검법이 있고, 또 초식의 변화마저 유려해서 비룡방의 호법이 감당할 수 있을지 그것도 걱정이외다.”
“생각이 있겠지요.”
두 사람은 흑사련 지부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무린이라면 분명 방법이 있으리라.
약속한 것처럼 두 사람이 기대하는 바도 같았다.
**
등평을 찾은 진무린은 먼저 그와 마세호를 위로했다.
자식 앞에서 얼굴이 갈라졌는데 서른쯤의 상대가 일방적으로 건 시비에 그리되었다. 얼굴에 천을 감은 등평은 먹이를 빼앗긴 들고양이처럼 독이 바짝 올라 있었다.
“그런 이유로 호법께서 나흘 뒤에 자경과 비무를 하게 약속을 잡아두었습니다.”
설명을 들은 등평이 빠르게 철비완을 보고는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진 대협. 그렇게까지 하셨다면 필시 호법이 승리할 묘책도 있으실 텐데 그 점을 알고자 합니다.”
“묘책이라니요?”
예상치 못한 진무린의 반문에 등평은 눈을 껌벅였고, 철비완은 야바위꾼에게 돈을 날린 표정이었으며, 등소옥은 이마를 세게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무인끼리 일어난 시비입니다. 호법께서는 구대문파라는 허울에 눌리실 것 없이 당당하게 나서서 자경의 목을 가르시면 됩니다.”
“진 대협?”
등평과 철비완은 멍한 표정이었고, 등소옥이 비명처럼 진무린을 불렀다.
진무린은 야바위꾼이 아니다.
힘없는 이들을 우롱해 기쁨을 느끼는 사악한 인간은 더더욱 아니고.
“오늘 오후나 내일 오전에 도움을 주실 분이 계실 테니 믿고 따르시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봅니다. 저도 옆을 지키겠습니다.”
“진 대협 덕분에 살아 있는 목숨입니다. 실력이 부족한 것이야 어쩔 수 없으나 기개에서 꺾이지는 않겠습니다.”
그래도 호법 철비완은 믿음을 버리지 않은 모양으로 다부진 대꾸를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