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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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6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22화
은천검제
제22화
낯빛이 하얗게 변한 진무린이 하얀 손을 움직여 죽과 만두를 먹는 모습은 흡사 죽은 자가 제삿밥을 먹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아침을 해결한 진무린은 원예의 거대한 의자에 앉아 세 사람과 마주했다.
원예의 손은 그대로 하얀색이었는데 진무린에 비하면 좀 더 인간적인 느낌인 것이 달랐다.
“궁금한 것을 들었으면 싶은데.”
진무린의 시선을 받은 원예가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귀혼곡은 아시나요?”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방대한 은천문의 서고에는 암연이 제작한 강호에 관한 서적만 2백 권이 넘는다.
구대문파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오대세가, 문파, 마교, 사파를 총망라했고,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때마다 추가하는 형식이어서 어지간한 강호의 사연치고 진무린이 모르는 것은 없었다.
“귀혼곡은 기인들이 살아가기 위해 만든 곳이에요.”
안다. 다 아는 이야기였다.
“이안공자라고 들어보셨어요?”
“묻지 말고 할 말을 해.”
진무린의 독촉을 받을 원예가 숨을 내쉰 뒤에 말을 이었다.
“이안공자가 제 아버지세요.”
솔직히 좀 놀랐다.
그리고 확인하고 싶었다.
진무린의 눈빛과 표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맞아요. 아버지는 머리가 둘이에요.”
원예가 덤덤한, 그러나 조금은 씁쓸한 얼굴로 아플지 모를 사실을 알려주었다.
“귀혼곡에 모인 이들은 기형적인 몸을 타고났거나 다른 이들에게는 없는 능력을 지녀서 일반인들에게 배척당하는 사람들이에요. 나와 두 명의 부루주, 그리고 총관은 모두 귀혼곡의 후손이고요.”
“승조표국은?”
“단명하거나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아서 귀혼곡을 유지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요. 홍화루를 비롯한 객점, 반점 등에서 나온 수익을 보내죠.”
“그 과정에 승조표국을 이용했다?”
“이번까지만 거래하고 다음부터는 교체할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됐네요.”
“전표를 제법 가지고 있었는데 표물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인가?”
“전표는 귀혼곡이 3개월을 버틸 수준이었어요. 표물은 앞으로 1년을 견딜 물량인데 돈 외에도 필요한 약재가 들어 있었어요. 아버지 같은 몸은 약을 중단하면 두 해를 넘기기 어려워요. 그 상황에서 약재가 떨어진 거예요.”
진무린은 이제야 처음 승조표국을 보았을 때 수레에 가득했던 표물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모두 가짜 백향초일 거라 여겼더니 귀혼곡에 갈 약재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수음공은 어떻게 익히게 됐지?”
떨구고 있던 시선을 든 원예가 주저함 없이 입을 열었다.
“천서유기에서 얻었어요.”
“뭐?”
“놀라실 줄 알았어요.”
원예의 말대로 머리가 둘이라는 설명보다 오히려 천서유기라는 책 이름에 진무린은 더 놀랐다.
“귀혼곡에 고통받는 이들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으로 아버지는 강호삼보 중 옥환을 찾으시려 했어요.”
진무린은 심오한 표정으로 원예를 바라보았다.
‘강호삼보’는 금편, 옥환, 흑판의 세 가지를 말한다.
말이 좋아 강호의 세 가지 보물이지 백 년 전에 말이 돌아 세 번이나 강호에 피바람을 일으킨 물건이고, 그로 인해 삼보를 찾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공적으로 지정한다는 정도맹의 공표까지 있었다.
“천서유기라.”
진무린은 신음처럼 혼잣말을 뱉고는 웃고 말았다.
세 가지 보물 중 옥환의 위치를 적어 놓았다는 책자가 천서유기였다.
“그래서 옥환은 찾았나?”
“옥환을 찾기 위해서는 소수음공을 대성해야 해요.”
“그만.”
진무린은 원예의 말을 막았다.
더 들어봐야 공연히 강호삼보에 얽힐 확률만 높아지는 탓이었다.
“루주의 혈도나 몸 상태로 봐서는 소수음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이 분명해. 내 얼굴과 손에 나타난 부작용도 그렇고. 그러니 나중에 그 부분을 다시 검토한 뒤에 익혀.”
“공자. 이렇게 됐으니 차라리 도움을 주시면…….”
“무림 공적이 되라고?”
“옥환을 찾으면 그에 담긴 무공도 얻으실 수 있어요.”
“나는 아직 본문의 초식도 제대로 못 얻었어. 그리고 공연히 강호에 피를 부르고 싶지도 않아.”
단호하게 답을 한 진무린은 몸을 일으켜 창으로 다가갔다.
청강과 무림맹주 황종관의 부탁만으로도 정신이 사납고, 사매와 은천문의 무공을 유출한 자를 찾아야 하는 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인데 삼보 중 옥환까지?
저절로 고개가 저어질 일이었다.
오늘도 가을의 하루는 청명했다.
화창한 햇살, 높은 하늘, 하얀 구름을 바라보던 진무린은 구름만큼이나 하얀 손에 시선이 머물자 자연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청강과 황종관을 만나면 뭐라 설명할지 착잡한 심정이어서 진무린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단전에는 묵룡심법의 기운을, 중단전에는 소수음공의 기운을 담았다.
이러다가 누군가와 맞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부작용이 있지는 않을지 염려되는 마음도 있었다.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이 청강이었다.
그에게 비무를 요청해서 점검해 보는 것이 가장 좋았는데 그러려면 또 소수음공을 설명할 핑계가 필요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진무린은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그때까지 세 사람과 탁자에 놓인 찻잔이 진무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면호리의 딸은 무사하겠지?”
“흔히들 아버지의 얼굴에서 왼편을 좌안, 오른편을 우안이라 불러요. 좌안은 기관진식을 비롯한 세상사에 박학하고, 우안은 의술에 조예가 높죠.”
어색함을 덜어볼까 하고 내민 질문에 빤히 알고 있던 답을 들었다.
진무린은 목을 축일 심정으로 찻잔을 잡았다.
쩌정.
그 순간, 찻잔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나왔다.
진무린은 물론이고, 세 사람마저 급히 찻잔을 향해 시선을 주었고, 다함께 놀랐다.
“공자!”
목소리의 주인공은 원예였다.
“세상에!”
설란이 떠들었고,
“공자?”
백섭광도 빠지지 않았다.
진무린조차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찻잔에 담긴 찻물이 얼어서 얼음으로 변한 것이 말이다.
“소수음공의 벽을 뚫으면 이리된다 했어요! 천서유기에 다음 단계를 익혀야 증상이 사라지고, 마침내 대성에 이를 수 있다고 적혀 있어요.”
“내가 아는 소수음공과 다른데?”
“공자께서 들으신 것은 혹시 마교에서 변형한 소수마공이 아닐까요?”
진무린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녹색의 얼음이 담긴 찻잔에서는 아예 하얀 서리가 피어나고 있었다.
이럴 때 묵룡심법을 발휘하면 혹시 녹지 않을까.
확인해 볼 요량으로 진무린은 묵룡심법의 내공을 일으켜 손으로 전했다.
파사삭.
놀랍게도 찻잔과 안에 담긴 얼음이 단숨에 부서져 탁자에 흩어졌다.
“공자! 손은 괜찮으세요?”
진무린이 찻잔을 세게 쥐었다고 여긴 눈치였다.
급히 수건을 가져온 설란이 진무린에게 전해주고는 능숙하게 탁자에 흩어진 찻잔과 얼음을 정리했다.
대결 중에 상대방을 얼린 뒤에 이렇게 부수면?
희대의 마인이 태어났다는 누명과 함께 굳이 강호삼보를 들추지 않아도 무림 공적이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운기를 해야겠는데 여기 말고 조용한 곳이 있을까? 혹 맹주와 진인께서 오시면 운기 중이라 말씀드리고.”
“옆방에 제가 운기하는 공간이 있어요.”
“부탁해.”
진무린은 원예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
강호의 사파를 한 손에 휘어잡은 마등의 전설이 이렇게 끝나는가 싶을 정도로 흑사련 호북지부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몰려들었던 이들도 흥미를 잃은 모양으로 반 이상 줄어들었고, 남은 이들 또한 청강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자리를 지키는 수준이었다.
흑사련 호북지부의 지붕 위로 정도맹에서 달려온 구대문파 소속 제자들이 삼엄하게 경계했고, 그 안에는 화산의 제자들도 포함되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야.”
공동의 제자 자경은 지붕 아래 정문과 담을 둘러보며 불평을 토해냈다.
가뜩이나 공동은 마등에게 열여섯이나 잃어서 분통이 터진 상태였다.
죽어라 달려와서 흑사련에 속한 사파 놈들의 목을 베기는커녕 죽어 자빠진 마등의 시체를 지키자니 부글부글 속이 끓어서 견디기 어려웠다.
화산의 제자들은 진무린의 엄청난 무위를 보았으니 자연스레 고개를 숙였는데 한편으로는 청강의 지시에 따라 그날의 일을 말하지 못했다.
누구도 대결의 모습을 전해주지 않는 데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비룡방이라는 무관에서 온 이들과 떠돌이 무인들이 당당하게 서 있으니 어쩐지 무시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더구나 자경은 은천문과 진무린이라는 이름이 생소했다.
수련이나 적게 했나?
검을 들어 서른하나가 되도록 익히고 익혔다.
구대문파에서는 말석이라고 하나 강호 어디에 내놓아도 이름값이면 이름값, 검이면 검, 밀리지 않는 몸이다, 이 말이다.
사람이 또 그렇다.
검을 빼서 휘둘러봐야 고하를 아는 것이지, 막말로 죽었다가 살아나서 상태가 별로 안 좋은 마등을 해치운 건지 누가 알겠나.
어깨에 검을 박아 넣은 것을 보면 알지 않을까.
빌빌거리며 힘을 못 쓰니 그 긴 검을 찔러넣을 수 있었던 거지, 마등이 정상적인 상태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는 말이다.
생각이 달리고, 달려 흑사련 호북지부를 열두 바퀴쯤 돌았을 때 하필 등평이 고개를 들었다.
“뭘 봐!”
자경의 반응은 날카로웠다.
어쩐 일일까.
대들 줄 알았던 등평은 얌전히 고개를 돌렸는데 이상하게 자경은 그게 또 더 화가 났다.
“사람을 무시해? 이름도 없는 것들이!”
화산의 제자가 황급히 말렸는데 하필 그때 등평이 고개를 들었다.
“자존심은 있어?”
눈과 눈이 마주친 상태에서 건넨 말이었고,
“자중하시오.”
등평의 다부진 대꾸가 있었다.
**
운기를 통해 진무린은 얼굴과 손의 색을 되찾았다.
손을 이리저리 돌려본 진무린은 원예의 방으로 달려가 동경을 확인했는데 확실히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무공이 궁금한 원예가 물었고,
“대단하십니다!”
총관은 감탄을 토해냈다.
남은 것은 하나였다.
“총관. 시험할 것이 있으니 비무한다고 여기고 내게 권을 넣어 봐.”
의아해했던 총관은 이내 엇갈린 모양으로 양손을 가슴 앞에 들었다.
전에 1층 객잔에서 달려들던 바로 그 자세였다.
백섭광의 무공이라야 진무린에게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지만 시험 삼아 해보기에는 적절했다.
진무린은 무리하지 않은 선에서 온몸에 내공을 돌렸다.
“공자!”
결과는 그 직후에 나타났다.
거짓말처럼 원예가 든 동경 안에 얼굴이 하얗게 변한 진무린의 얼굴이 담겼다.
갑갑하기 그지없는 현상이었다.
묵룡심법의 내공을 이용해 중단전을 틀어막으면 제 색을 찾는데 백섭광 정도의 무인을 상대하기 위해 기운을 돌리면 얼굴과 손이 하얗게 변한다.
의자에 앉은 진무린은 얼굴을 문지르며 답답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닦아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할 때였다.
익히 짐작하는 기운이 느껴졌고, 잠시 뒤에 문이 열리며 부루주 설란이 들어왔다.
“공자. 아래에 맹주와 진인께서 기다리십니다.”
“지금은 얼굴이 괜찮나?”
“예, 공자.”
진무린은 있는 대로 중단전을 틀어막은 상태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장 경공조차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실로 기막혔다.
그러나 청강은 몰라도 황종관에게 소수음공과 홍화루의 사연을 전하다가는 천서유기를 빼놓을 수 없어서 우선은 중단전을 누른 상태로 만날 생각이었다.
계단을 내려선 진무린이 인사했는데 어쩐 일인지 두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앉으십시오.”
“진 대협. 그 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 잠시 움직이시는 것이 좋겠소.”
황종관을 살핀 진무린이 시선을 청강에게 돌렸을 때였다.
“공동의 제자가 비룡방의 방주와 마세호 대협을 상하게 했다오. 사소한 시비가 있었던 모양인데 함께 가서 판단해주시구려.”
“상하게 했다면 어느 정도입니까?”
“방주는 얼굴을 깊게 베였고, 마 대협은 왼쪽 어깨에 상처가 중하오.”
진무린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뒤에 길게 내쉬었다.
“혹 구대문파의 위세를 보이려 그런 것입니까?”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네. 그래서 함께 가자고 한 걸세. 정도맹 소속이라 자네가 함께 상황을 판단해주면 공정하지 않을까 싶은 게지.”
진무린은 또다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뒤에 길게 내쉬었다.
화가 치밀면 자연 내공이 일어나고, 그리되면 얼굴이 하얗게 변한다.
‘공동, 이 어리석은 인간들.’
진무린은 중단전을 누른 상태에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