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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20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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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20화

은천검제

제20화

 

부루주 설란과 총관 백섭광을 부르게 한 진무린은 거대한 의자에 원예를 앉혔다.

“주변에 정도맹의 무인들과 화산파의 제자들이 있어서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호흡을 세 번 셀 때까지만 막아줘.”

“알겠습니다, 공자.”

원예를 위한 일이었다.

설란과 백섭광이 굳은 태도로 답을 내놓았다.

이미 운기를 마쳤던 터라 진무린이 준비할 것은 없었다.

“내가 전에 담아놓은 기운을 되찾아온다고 생각해. 총관에게 말했던 대로 소란이 생기더라도 호흡을 세 번 헤아릴 때까지만 견뎌.”

“예, 공자.”

진무린은 원예의 등에 앉아 기운을 넓게 펼쳤다.

혹 주변에 중년과 노인이 있는가를 살폈는데 다행히 그들의 기운이 잡히지는 않았다.

내공을 펼쳐낸 진무린은 손을 위아래로 움직여 원예의 목 아래와 허리 위에 얹었다.

먼저 기운을 풀어 천천히 원예의 맥과 상태를 살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의 몸 안에 남은 묵룡심법의 기운이 어디에 있는지를 세심하게 찾았다.

‘어떻게 된 거지?’

일각, 이각이 지나도록 진무린이 남겨놓은 내공은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것은 원예의 단전이었다.

조심스럽게 기운을 뻗어 그녀의 단전을 살핀 진무린은 뜻밖의 상황에 놀라 흔들리는 호흡을 얼른 바로잡았다.

맥을 눌러야 할 묵룡심법의 내공이 원예의 단전에 똬리를 틀고서 기가 지나다녀야 할 길목을 틀어막고 있어서였다.

이런 현상이 있으리라 짐작하지 못했다.

기운을 심는다고 해서 모두 단전에 자리 잡는다면 어떻게 고수가 하수의 몸을 살펴줄 수 있겠나.

일각쯤 지난 뒤에 진무린은 대강이나마 원인을 짐작했다.

기초가 단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연공을 한 후유증이 원예의 몸 곳곳에 있었다.

정종무공이 오래도록 내공을 수련해야 빛을 발하는 건 혈도와 단전이 수련에 맞춰 단련되고자 함인데 원예의 몸은 도에 넘치는 기를 받아들여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불안정한 맥을 피해 진무린의 내공이 단전에 자리 잡아 생긴 일이 분명했다.

원인을 알았으니 내공을 가져오는 일만 남았다.

진무린은 원예의 단전에 자리한 묵룡심법의 내공을 흡수하기 위해 기운을 좀 더 끌어올렸다.

원예의 호흡이 짧아졌고, 얼굴이 붉어졌으나 염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려운 일 아니다.

진무린의 것이니 놓아두었던 물건을 찾듯이 흡수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놓인 자리가 원예의 단전이고, 지나치는 길이 온전하지 못한 혈도라 조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단전에 자리한 묵룡심법의 내공을 확인한 진무린이 혈도로 꺼내기 위해 호흡을 고를 때였다.

밖에서 처음 느끼는 기운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고, 무리했다가는 원예의 몸이 제대로 망가질 수 있었다.

‘잠시만 막아라, 총관. 호흡 세 번까지만.’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기운이 이곳을 향해 똑바로 날아드는 것을 보면 우선 원예의 몸에서 기운을 천천히 빼내는 것이 좋았다.

진무린이 호흡을 한 번 마쳤을 때였다.

기운은 벌써 창밖에 있었다.

그다지 강한 무인은 아닌데 경공만큼은 청강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진무린이 두 번째 호흡을 들이마시는 순간,

“나를 속였어!”

창을 통해 불쑥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소리에 놀란 모양이었다.

원예의 단전에 갇혀 있던 소수음공의 기운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제발 좀 막아! 호흡 한 번이면 돼!’

진무린은 두 번째 호흡을 내뱉으며 혈도를 차지하고 있던 기운의 절반을 거둬들였다.

“무슨 일이오? 지금은 곤란하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기다리긴 뭘 기다려? 내 딸이 죽는 걸 기다리라고? 백향초가 가짜였어! 그걸 먹은 내 딸이 위태로워졌다고! 이 사기꾼들아!”

그러나 다가온 남자는 기다릴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흑사련 호북지부에 몰려있는 무인들을 의식했는지 그는 마치 성난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말투였는데 입을 다물 마음은 없어 보였다.

진무린이 건드린 원예의 단전에서 소수음공이 그동안의 갑갑함을 이겨내려는 것처럼 움직였다.

‘제발 좀 막으라고.’

진무린이 남은 기운을 거둬들인 직후였다.

“잠시만 참으시오. 우리는 절대 가짜를 전하지 않았소.”

“흥! 승조표국이 모두 죽고 표물이 없어졌으니 그것으로 비긴 것으로 해주마!”

남자가 건넨 말이 창을 통해 넘어왔다.

이건 돌이키기 어렵다.

진무린이 기운을 회수한 직후에 원예의 몸 안에 있던 소수음공의 기운이 급격하게 요동쳤고,

“푸훅.”

기운을 누르지 못한 원예는 상체를 숙이며 피를 토하고 말았다.

“루주!”

설란과 백섭광이 원예에게 달려들 때 손을 거둔 진무린은 고개를 창으로 돌렸다.

염소수염을 단 남자였다.

그 또한 진무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궁금한 것이 많았다.

백향초가 가짜라는 말, 승조표국이 모두 죽고 표물이 없어졌다는 말, 그리고 그런 말을 지껄이는 남자까지.

백향초를 가져간 남자?

퍼뜩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진무린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면호리?”

“새파란 놈이 감히 이 몸을 함부로 불러?”

원예를 돌아본 백면호리가 화를 풀지 못한 시선으로 고개를 가져왔다.

“네놈이 은천문의 영웅이라도 되냐? 보아하니 루주와 뭔가 수작을 피우다 뜻을 이루지 못한 모양이다만, 자업자득이니 그리 알아라.”

“잠시 들어와.”

“그런데 이놈이?”

나직하게 으르렁댄 백면호리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뒤가 켕기는 사람처럼 진무린을 살피고는 창에서 슬며시 고개를 빼냈다.

“이대로 움직이면 사부님과의 약조를 어긴 대가로 발목 두 개를 거둘 테니까 그리 알아.”

“뭐라?”

백면호리가 눈을 껌벅이며 짧은 침묵이 있었다.

“그럼 진짜로 은천문? 그것도 전 사부의 제자? 그럼 흑사련주를 상대했다는 그, 그, 그 영웅이 바로?”

백면호리는 과장된 동작으로 팔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손을 내리면서 비연탄을 터트릴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그런 짓을 하면 손목도 모두 잃게 돼.”

속을 들켰는지 얌전하게 손을 내린 백면호리가 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이보게. 내가 여기에서 발목이나 손목을 잘리면 내 딸이 진짜 죽어!”

“그러니까 잠깐 들어와.”

“에이! 백향초만 아니면 절대 청부 안 받는 건데. 황궁에서는 호색한으로 오해받지 않나, 가짜를 받지 않나.”

투덜대면서도 백면호리는 공간을 뛰어넘듯 빠르게 창을 넘어왔다. 

“승조표국 이야기는 뭐야?”

진무린이 질문을 던졌을 때 겨우 진정한 원예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말이지. 백향초를 먹인 뒤에 가짜라는 사실을 깨닫고 먼저 승조표국 놈들에게 달려가지 않았겠나. 뭐라도 알고서 이리 달려올 셈이었지. 그런데 화도곤에 도착해 보니 죄 죽어 있는 거야. 이렇게.”

널브러진 자세를 보여주는 것처럼 백면호리는 팔을 머리 위로 어지럽게 든 뒤에 고개마저 옆으로 기울였다.

굳이 혀를 내밀 필요는 없을 텐데 백면호리는 열과 성을 다해 죽은 자들을 표현했다.

“그걸 보고는 곧장 이리 왔지.”

“표물은요?”

“이봐, 루주.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표물은 어찌 되었냐고요?”

“아무것도 없더라. 아무것도. 죽은 승조표국 사람들만 봤다.”

세상 참 복잡하게 얽힌다.

승조표국과 인사를 나누고 표물이 백향초인 것을 알았는데 그것을 받을 사람은 또 백면호리였던가 보다.

“이보게. 자네의 사부와 약속한 뒤로 정말 두 손 딱 씻고 살지 않았겠나. 처음에 홍화루에서 청부가 온 것도 거절했어요. 그런데 딸아이의 몸에 마비가 오니 방법이 있어야지.”

백면호리는 진무린에게 사뭇 사정조로 매달렸다.

“내가 못 가면 딸아이가 죽어. 진짜로. 그렇지 않으면 내가 미쳤다고 여기 무림맹 사람들이 쭉 깔린 곳에 달려왔겠나. 자네를 단번에 몰라본 것도 딸아이 때문에 내가 눈이 뒤집혀서 그런 거지.”

진무린의 침묵에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백향초는 진짜였어요.”

“백향초는 진짜가 맞겠……. 뭐라? 루주! 사람을 끝까지 그렇게 속일 셈이냐. 이렇게 되면 잘못했다, 죄송하다, 여기 환약이 있으니 가지고 가라. 이렇게 나오는 게 최소한의 도리지.”

백면호리는 화를 내는 중에도 진무린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루주. 표물은 뭐였지?”

진무린의 질문을 받은 원예가 백면호리를 살폈다.

그의 앞에서 내용을 말하기 곤란하다는 의미처럼 보였다.

“나는 가봐도 되겠나?”

“따님이 위태롭다면서요?”

“자꾸 말에 끼어들래? 어쩌자고? 가짜 백향초까지 먹였으니 여기에서 떠들 게 아니라 막말로 ‘귀혼곡’이라도 찾아가야 할 것 아냐!”

원예와 대화를 나누던 백면호리가 분통을 터트렸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바깥을 의식한 듯 나직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귀혼곡에 들어갈 방법은 있어요?”

“약 올려? 그런 게 있으면 귀혼곡으로 바로 갔지, 내가 홍화루의 청부를 받았겠냐고?”

이상하게 흘러가는 대화의 중간에서 원예는 무언가 결심한 얼굴이었다.

“귀혼곡으로 가세요.”

“뭣이?”

“귀혼곡으로 가시라고요.”

빠르게 이어지던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의심 가득한 눈으로 백면호리가 원예를 노려보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백향초가 가짜고, 따님이 그걸 복용했다면 되돌릴 분은 세상에 한 분밖에 없어요.”

귀혼곡이라는 장소와 이어진 원예의 말을 들으며 진무린 역시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존재하리라 믿지 않았는데 그게 또 원예와 연결된 모양이었다.

“정말 루주가 귀혼곡과 연결되었다는 거냐? 또 속이는 건 아니고?”

“금선전장의 전표를 드릴 테니 따님을 데리고 가서 그걸 전해주세요. 제가 보냈다고 말씀하시면 알아서 치료해주실 거예요.”

원예가 시선을 돌리자 설란이 몸을 일으켰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설란은 주저하지 않고 거대한 의자의 좌측 벽으로 움직여 손을 뻗었다.

홍화루라면 저 정도 기관장치야 당연히 갖추었으리라.

설란의 손길이 닿자 벽에서 작은 상자 크기의 공간이 나왔다.

그녀가 가져온 것은 두툼한 봉투 세 개였다.

“이걸 전해주시고, 따님을 살리세요.”

“나를 어떻게 믿고?”

“따님을 죽이고 욕심을 채울 분은 아니라고 봤어요. 그리고 다른 분도 아닌 진 공자께서 함께 지켜보고 계세요. 내가 거짓을 말하면 홍화루가 벌을 받을 테고, 백면호리가 오늘 일을 떠들거나 전표를 빼돌리면 마땅히 그에 합당한 벌을 주실 거예요.”

졸지에 증인이 된 진무린을 향해 백면호리가 바쁘게 고개를 돌렸다.

백면호리는 딸을 살리고, 원예는 표물 대신 전표를 전한다.

백향초가 가짜인 것은 나중에 밝히면 되는 일이니 진무린이 지켜보기에 가장 적합한 판단이었다.

딸자식의 목숨이 걸려있다니 백면호리의 발목을 자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진 공자. 아니 진 대협. 어쩔까?”

“일단 귀혼곡으로 가 있어. 그리고 내가 허락할 때까지 그곳에서 나오지 말고.”

뭔가를 잘게 씹는 사람처럼 입술을 움직인 백면호리가 봉투에서 시선을 들었다.

“내가 또 속아준다, 진짜.”

“화도곤에서 안휘 방향으로 산을 오르다 보면 두 그루의 소나무가 좌우로 기울어져 관문처럼 서 있는 장소가 나와요.”

“이송암관?”

“맞아요. 두 그루의 소나무 사이로 바위가 둥글게 올라와 있는데 그걸 때리세요.”

“뭐로?”

“돌이든, 나무든, 그건 상관없어요.”

백면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원예의 설명을 머리에 담았다.

“나오는 분이 계시면 그 전표를 드리고 따님을 구해 달라 하세요.”

“거절하면?”

“내가 부탁했다고 하시면 그런 일 없어요.”

“전표를 받고서 나를 죽인다거나 뭐 그런 거 아니지?”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치고는 참으로 꼼꼼한 점검이었는데 그의 삶이 일평생 도주로 점철된 것을 생각하면 또 이해할 만했다.

“왜 말을 못해?”

“그걸 지금 어떻게 증명해 드려요?”

백면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기야 여기에서 원예가 아무리 답을 해봐야 막상 도착한 뒤에 귀혼곡의 인물들이 달려드는 것을 백면호리가 피할 방법은 없었다.

해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공교롭게 모두의 시선이 진무린을 향해 움직였다.

딸의 목숨을 구하고 싶은 백면호리, 진실을 담보 받고 싶은 원예,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다급한 표정의 설란과 백섭광이 재촉하는 얼굴로 진무린을 바라보았다.

“루주. 지금 한 말에 목숨을 걸 수 있나?”

“소녀는 단 한 마디의 거짓도 말하지 않았어요, 공자.”

질문을 던졌던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지? 만약 귀혼곡에서 죽게 된다면 내가 홍화루와 귀혼곡에 속한 모두를 죽여서 응징할 테니까 지금은 믿고 출발해.”

“죽은 뒤에 복수하면 뭐하나.”

혼잣말을 투덜대던 백면호리가 진무린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귀혼곡에 언제까지 있어야 하나?”

“내가 답을 줄 때까지.”

“그 전에 나오면?”

“발목을 자르지.”

“큼.”

마지막까지 꼼꼼함을 잊지 않은 백면호리가 못마땅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휘익.

그리고는 다시 먹이를 향해 몸을 던지는 뱀처럼 창을 빠져나갔다.

다른 것은 몰라도 경공 하나는 청강보다 한 수 위가 분명하다 싶을 정도로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복잡한 밤이었다.

아직 남아 있는 묵룡심법의 내공을 거둬야 했고, 날뛰기 시작하는 원예의 소수음공도 달래야 했다.

그것도 중년과 노인 두 사람이 오기 전에.

“내가 들어야 할 게 있지 않나?”

그 모든 것을 넘어서 백향초, 승조표국, 귀혼곡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 그 까닭도 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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