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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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1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7화
은천검제
제17화
경극에 오른 무희처럼 보일 행동이었다.
그러나 마등이 진무린을 찾았다는 말을 듣고 난 지금, 이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다는 판단에서 결정한 일이었다.
비룡방에 도움을 청한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다.
진무린을 아는 이들 중 이름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을 사람을 선택한 것이고, 비룡방은 이미 우중객과 하왕하칠살을 상대했던 곳이어서 부담도 적었다.
“이리와 진 대협께 인사드려라. 내가 진 대협의 사부와 호형호제하는 사이니 너희에게는 사숙의 항렬이니라.”
나이는 비슷하나 명문정파의 항렬이 어디 그것으로 따질 수 있다든가.
“화산의 제자 미온이 진 사숙을 뵙습니다.”
“화산의 제자 소철이 진 사숙을 뵙습니다.”
진무린은 단박에 조카뻘이 된 열 명과 인사를 나누었다.
화산은 비룡방과는 확실히 달랐다.
기와의 끝에 선 열 명의 제자들은 엄중하기가 바위와 같았고, 날카롭기는 한 자루의 검과 닮았다.
여기에 사제 종무헌이 있다면 참으로 좋았겠지만, 사매 모려원을 찾는 일이 중해서 그것까지 바라기는 어려웠다.
해는 서산을 향해 기울고 저 산 아래 몸을 감춘 어둠이 새로운 밤을 위해 긴 그림자를 펼칠 때였다.
“와아-!”
사람들 틈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가 고개를 돌린 진무린은 가볍게 웃었고, 청강은 궁금한 얼굴이었다.
홍화루의 총관 백섭광이 열 명 정도를 거느리고 오는데 그들 모두 어깨에 바구니를 메고 있었다.
“아는 사이요?”
“인연이 닿아 식사를 도움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잊지 않은 모양입니다.”
“받기만 할 진 대협이 아니니 필시 베푼 것도 있겠구려.”
청강의 말이 끝났을 때, 물결처럼 갈라진 사람들의 틈을 헤치고 백섭광이 흑사련 호북지부의 앞에 도착했다.
‘어떻게 할까요?’
‘들여보내 주십시오.’
시선을 든 비룡방의 방주 등평을 향해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찌하실 참이오?”
“제자 분들도 있고 하니 잠시 신세를 질까 합니다. 마등을 잡고 나면 훗날 제가 계산토록 하겠습니다.”
“진 대협의 뜻이 현명해 보이오.”
청강은 제자 넷에게 음식을 받아오라 하였다.
훌쩍 지붕에서 내려간 제자 넷이 다섯 개의 바구니를 들고 올라왔고, 백섭광은 나머지를 비룡방의 등평에게 전했다.
“총관이 진 사숙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 합니다.”
열 명의 제자 중 미온이 진무린에게 나직하게 말을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또 한 냥의 음식값을 요구하지는 않을 테고.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상태라 진무린이 함부로 지붕을 내려서기는 곤란했다.
[총관은 돌아가. 해가 진 뒤에 상황을 봐서 잠시 들르도록 하지.]
진무린은 전음을 통해 뜻을 전했다.
양손을 맞잡은 백섭광이 함께 온 이들과 돌아가는데 사람들이 홍화루의 선행을 칭찬하는 소리가 그들이 걸어가는 내내 요란하게 울렸다.
목이 마르던 참이었다.
진무린은 청강과 함께 술을 마셨고, 간단하게 요기했으며, 제자들에게도 음식을 먹도록 배려했다.
떨어져 있던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짧은 가을 하늘에 어둠이 스며들었다.
“그렇다면 아직 부맹주의 소행을 밝히지 못하셨습니까?”
“한 달을 약속했으니 이제 열흘이 조금 더 남았소. 뭐라 해도 구대문파에 속하는 점창을 증거도 없이 핍박하기는 어려울 일이라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라오.”
환호하던 이들이 근처의 객잔과 반점으로 몰려가 흑사련의 호북지부는 고즈넉하게 바뀌었다.
“진인. 잠시 홍화루에 다녀오겠습니다.”
“어차피 마등을 맡겨달라 부탁하였는데 걸릴 것이 무엇이오. 노도가 제자들과 이곳을 지킬 테니 편히 걸음 하시구려.”
지금 서 있는 지붕에서도 홍등을 요란하게 밝힌 홍화루는 한눈에 들어왔다.
청강에게 내용을 전한 진무린은 곧장 경공을 펼쳐 홍화루의 전각 3층을 향해 달렸다.
예의가 아닐 수는 있어도 언제 닥칠지 모를 마등과 흑사련의 잔당에 대비하고,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기에 이만한 방법도 없었다.
“무슨 일이지?”
홍화루의 3층 지붕에 도착한 진무린은 원예의 방이라 짐작되는 창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원예는 바로 창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자. 보름이 지났는데 금제를 당한 것처럼 내공을 일으키지 못하겠어요.”
원예는 실제로 기운이 없어 보였다.
“다른 증상은?”
“내공을 일으키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혈도가 막혔거나 통증을 느끼지는 않아요. 다만, 단전에서 기운이 일어나지 않는데 기감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라 체력이 많이 떨어져요.”
금제라고 느낄 정도로 심하게 내공을 심지 않았다.
그러나 무공에도 상극이 있는 법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있었다.
“루주. 알다시피 마등을 기다리는 중이라 당장 살피기는 무리가 있어. 상황을 봐서 내일 다시 오던가 할 테니 혹 그사이에 맥이 막히거나 통증이 생기면 이걸 복용해.”
진무린은 품에서 환약 하나를 꺼내 창으로 넘겨주었다.
“은천환인가요?”
의아해하는 진무린을 향해 원예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홍화루는 모르는 것이 없답니다.”
“백면호리가 황궁에서 문파에 관한 서책을 훔쳤다고 들었다. 후궁의 치마로 감싸는 바람에 죽을 뻔했다던데 혹시 그 서책을 요구한 게 루주인가?”
“진 공자께서도 모르시는 게 없군요. 암연 덕분이겠지요?”
진무린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백면호리가 여기 있나?”
“그는 거래를 마치고 떠났어요.”
“아쉽군. 여기 있었다면 발목 두 개를 잘라버렸을 텐데.”
무슨 말인지 모르는 원예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진무린은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퍼뜩 돌렸다.
“간다.”
“부디 몸을…….”
짧은 한마디를 남긴 진무린은 원예의 당부를 다 듣지 못할 정도로 급하게 경공을 발휘했다.
그 직후였다.
“와하하하하하!”
엄청난 웃음이 상등의 기와지붕을 있는 대로 들썩였다.
‘마등!’
진무린이 채 도착하기 전이었다.
부으-응!
허공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울렸고, 곧바로 청강과 열 명의 제자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콰자자작!
호북지부의 지붕 한쪽이 커다랗게 터져나가며 잘게 부서진 가루가 날카롭게 사방으로 퍼졌다.
“마등!”
청강의 외침이 떨어질 때, 진무린이 호북지부의 지붕에 도착했고, 그와 동시에 시커먼 그림자 역시 맞은편에 내려앉았다.
이어 몸을 피했던 청강이 제자 열 명과 진무린의 뒤에 내려섰다.
“마등! 본파의 제자들을 살해한 죗값을 받아라!”
“으하하하하!”
마등이 두 번째로 웃음을 터트렸다.
밟고 있던 기와가 들썩였고, 호북지부를 둘러싸고 있던 비룡방의 수하들과 마세호를 비롯한 여섯 명의 무인들이 비틀거릴 정도로 엄청난 내공이 웃음에 담겨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마등이라 믿기 어려운 발전이었다.
목을 베던 당시와는 비교조차 못 할 정도로 내공은 더욱 고강해졌고, 몸에서 풍기는 기운 역시 믿기 어려울 만큼 강렬했다.
“진 대협. 저자가 정말 마등이 맞소?”
청강 역시 놀란 것이 분명했다.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기운을 느껴 그런 모양이었다.
“네놈을 어찌 찾을까 고심했더니 이리 기다려줄 줄은 몰랐다!”
외모와 본질적인 기운만큼은 목을 잘랐던 마등이 분명했다.
그러나 감당하기 어려운 기운과 사악한 눈빛을 뿜어내는 마등의 모습은 한 마리 악귀와 다르지 않았다.
진무린은 다부진 태도로 검을 뽑았다.
“진인. 아무래도 기운이 수상합니다. 저 상태에서 폭렬공을 운용하면 지금보다 최소 다섯 배는 강한 기운을 뿜어내니 우선 제가 상대하고 필요하다 여기실 때 도움을 주십시오.”
“알았소, 진 대협.”
마음 같으면 죽는 한이 있어도 달려들 청강이련만, 제자들을 염려해서인지 그는 순순히 진무린의 뜻을 받아들였다.
“오늘도 목을 잘라줄 테니 할 수 있다면 언제고 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때마다 목을 잘라주마.”
“이번에 잘리는 것은 네놈의 목일 것이다!”
불길처럼 일어난 마등의 눈빛이 진무린을 뚫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진인. 이곳을 지키는 이들을 피하게 도와주십시오.”
진무린이 청을 내놓은 직후였다.
“목을 내놔!”
부으으-응!
마등의 도가 날아들었다.
진무린은 바로 묵룡심법의 내공을 바탕으로 섬전검법의 초식을 펼쳤다.
카앙! 카아-앙! 카가가가강!
삽시간에 검과 도가 부딪쳤고, 곧바로 어둠 속에서 불꽃이 연속해 피어났다.
부응! 카앙! 카가가가강!
묵룡심법으로 쏟아낸 내공이었다.
그런데도 마등의 도를 감기는커녕 진무린은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쉑! 카앙! 부응! 부으-응!
소리는 하나인데 두 겹, 세 겹의 도광이 눈앞에 날아들고, 그런 뒤에 연검보다 빠르게 진무린의 몸을 감쌌다.
쉐엑! 카가강! 쉐에엑! 카가가강!
진무린이 한 번 검을 내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세 번, 네 번의 도가 날아들었다.
진무린이 내는 검을 완벽하게 막아낸 마등의 도가 눈앞에서 번득했다.
진무린이 상체를 비트는 순간이었다.
카가가각! 부응.
마등의 도가 진무린의 왼쪽 어깨를 스쳤고, 곧바로 비수로 가른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알고 있다! 어떻게?’
그 직후에 진무린의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고작 한 번의 대결을 통해 진무린의 검이 갈 길과 몸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으으응! 카가가각.
생각이 많아진 진무린을 노리고 도가 달려들었다.
‘이런……!’
심지어 마등은 진무린의 검을 감기 위해 도를 화려하게 뒤틀었다.
카앙! 카가가가가강! 카가각!
진무린은 이를 악물며 마등의 도를 뿌리쳤다.
확실했다.
누군가 검법을 알려줬다.
부응! 부으응! 카가각! 부응!
‘크흑!’
섬전검법의 초식을 마등에게 알려준 이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리 정확하게 다음 움직임을 예측할 수는 없다.
“목을 내놔!”
부응! 붓붓붓붓붓!
벌이 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등의 도가 달려들 때, 진무린은 먼저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어설프다.
그러나 마등이 지금 펼치는 초식은 분명 섬전검법의 춘설난무가 분명했다.
“이익!”
이를 악문 진무린은 마등이 펼친 춘설난무를 막아내기 위해 현란하게 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가각! 카가가가각!
어설프게 배운 만큼 부족한 면이 있었다.
놀라고 당황한 가운데 진무린이 춘설난무를 막은 직후였다.
“이것도 막아봐라!”
부으응! 부부부부부부붕!
마등은 또다시 춘설난무를 펼쳤다.
“진 대협!”
지켜보던 청강이 놀라 부를 정도로 마등의 기운이 폭발했고, 그만큼 놈이 뿌린 도광이 날카롭게 진무린을 감쌌다.
카가가가가강! 카가가강!
진무린이 있는 힘을 다해 내공을 일으켰으나 폭렬공을 운용한 마등의 기운을 모두 받아내기는 어려웠다.
검이 밀리면서 그사이를 파고든 눈발이 가슴을 베었고, 다시 어깨를 갈랐다.
“크흑.”
뒤로 밀려난 진무린을 보며 마등은 달려들지 않았다.
“흐흐흐.”
오히려 비릿한 웃음을 터트리며 상체에 피가 잔뜩 배어 나온 진무린을 흡족한 듯 보고 있었다.
“진 대협? 방금 초식이?”
차마 은천문의 춘설난무가 마등에게 유출되었느냐는 말을 꺼내지 못한 청강의 질문이었다.
그 역시 마등의 초식을 알아보았을 정도이니 더는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프다. 은천문에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확실히 알았다.
누구인지는 모르나 배신자가 이 기회를 통해 진무린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마등의 폭렬공, 이미 드러난 섬전검법, 그리고 폭렬공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춘설난무까지.
진무린은 픽 웃었다.
사매가 실종되었고, 검법은 유출되었다.
진무린을 이 자리에서 죽인다면 은천문에 남는 것은 강직한 가주와 힘이 빠져가는 사부밖에 없다.
“웃어? 아직 여유가 있단 말이냐?”
“본가에는 세 가지 검법이 있다.”
진무린은 검을 향했던 시선을 천천히 들었다.
“어떻게 귀동냥을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지금부터는 다를 거다.”
“흠흐흐흐하하하.”
허세라고 여겼을까.
진무린의 각오를 들은 마등은 지지 않겠다는 투로 웃음을 흘려냈다.
“오의는 깨우치지 못했고, 동냥에 불과한 검법을 보자니 화가 치밀어 더는 견디기 어렵다.”
진무린이 차갑게 말을 던진 직후에,
우우우우우웅.
묵룡검이 강한 울음을 토해냈고,
쉐에에에엑!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부으-응!
그와 동시에 마등의 도가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