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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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4화
은천검제
제14화
황가장의 장주 황종관은 구대문파 출신이 아님에도 정도맹의 맹주에 추대될 정도로 강호의 신뢰를 받았으며, 무공 또한 뛰어났다.
광동에서 수십 명을 살해한 취중사귀를 반나절의 대결 끝에 베면서 ‘황가도법’과 황종관의 이름은 강호 전역에 떠들썩하게 울렸다.
이후 도법을 가르치는 무관이 북새통을 이룰 정도로 요란한 반응이 있었는데 변치 않는 그의 인품에 많은 이들이 감복했고, 결국 정도맹의 맹주가 되었다.
내년이면 쉰다섯인 정도맹의 맹주 황종관은 비월이 올린 보고를 보며 먼저 신음을 토해냈다.
“마등을 홀로 상대했다니.”
그뿐만이 아니라 설중객과 피풍객도 죽은 채 발견됐다.
말해 뭐하겠나.
흑사련 호북지부를 홀로 궤멸시킨 은천문의 진무린 외에는 짐작 가는 이도 없었다.
보고를 재차 확인한 황종관은 청강에게 사람을 보냈다.
황종관이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였다.
“찾으셨다 들었소.”
청강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이리 앉으십시오, 진인.”
황종관은 청강을 맞아 한쪽에 있는 자리를 권했다.
“호북의 흑사련 지부에서 마등이 목이 잘린 채 발견되었습니다. 설중객과 피풍객도 함께였습니다.”
“나중에 말씀하신 둘은 어찌 되었소?”
“상체에 무수한 검상을 입은 채 죽었다는 보고였습니다. 셋을 동시에 상대했고, 처음 보는 검법이라는 보고를 보면 진무린이라는 무인 외에는 짐작 가지 않습니다.”
“무수한 검상이라면 분명 은천문의 춘설난무란 초식일 게요.”
“봄눈이 흩날린다?”
반문하는 황종관을 향해 청강은 확신하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그려냈다.
“강호의 큰 근심을 덜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흑사련의 잔당을 물리치는 일이오.”
“이를 말씀이십니까. 마등의 목을 베었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청강의 말을 황종관이 후련하게 받았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마등을 잡기 위해 정도맹이 들인 노력은 말로 다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앞에 섰던 문파들이 고수를 줄줄이 잃고 난 뒤로는 감히 함부로 나서는 이가 없어 머리를 싸매던 참이었다.
“진무린이라는 후배를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맹주께서는 은천문이 처음 당부했던 내용을 상기해주시구려. 공식적인 자리에 부르지 않는다. 마등을 해결하면 바로 돌아간다. 맹주께서도 약조했던 일이오.”
“그를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그저 큰 공을 세운 후배라 손이라도 한번 잡아주고 싶은 바람이었습니다.”
아쉬운 심정을 전한 황종관은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본 뒤에 시선을 가져왔다.
“진인. 지난번에 말씀하신 부분은 점창의 이름이 걸려있으니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이라 봅니다. 또한, 부맹주는 현재 맹에 없습니다.”
“맹주의 생각을 말씀해주시구려.”
“한 달의 말미를 주시면 부맹주가 부인하지 못할 증거를 준비하여 진인을 모시겠습니다.”
청강은 집무실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루가 마무리되는 시간이었다.
“맹주의 이름으로 약속해주시겠소?”
“황가와 본인, 그리고 내 도를 걸고 이 일을 투명하게 밝히겠노라 약속합니다.”
더할 수 없이 분명한 태도에 청강은 그나마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노도는 이만 화산으로 돌아가 장문인에게 맹주의 뜻을 전할까 하오.”
“절대 말이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오.”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실력이 부족해 마등에게 당한 것이야 절치부심 무공을 닦을 일이나, 함정에 빠진 것이라면 이는 결단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오.”
“최선을 다해 화산과 희생된 열두 명의 매화검수가 억울하지 않도록 처리하겠습니다.”
“고맙소, 맹주.”
감사의 인사를 전한 청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달 뒤에는 어떤 형태로든 부맹주의 행태가 밝혀질 테고, 마등마저 죽은 터라 그나마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진무린이 곁에 있다면 마등과의 대결을 전해 듣고 그의 수고를 위로했을 텐데.
청강은 아쉬운 마음을 담은 채 집무실을 나섰다.
**
소능산에 오른 진무린은 장 노대와 마주 앉았다.
오래된 사당이 긴 세월의 끝자락에 오늘 하루를 담는 시간이었다.
늦게 나타난 것에 대한 해명을 할 줄 알았다.
“오후에 마등의 시체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장 노대의 첫 마디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흑사련의 지부를 정도맹 무인 넷이 지켰는데 모두 피를 토한 채 죽어 있었습니다.”
“마등의 시체를 가져간 이들은요?”
“목격자도 없을뿐더러, 흔적조차 전혀 남기지 않았습니다.”
“불성단괴 노일오를 비롯한 수괴들이 아직 남았으니 그들의 소행이 아니겠습니까?”
“흑사련은 사파입니다. 거친 이들이라 이토록 모습을 감추기 어렵고, 근처에 몸을 숨긴 지부장의 움직임 또한 분명하게 살피고 있습니다.”
시체를 가져갔다면 장례 외에 무엇에 쓸까.
진무린이 눈가를 좁히며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진 대협.”
장 노대가 조용하게 진무린을 불렀다.
“본문에서는 모 소저와 종 소협을 내보내 원남과 천산 근처를 수색하라 결정했습니다. 또한, 대협께서는 뒤에 있을지 모를 임무에 대비해 이곳에서 기다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고, 지시였다.
“모 소저와 종 소협을 내보낸 것은 마등의 시체를 가져간 곳이 혈교나 마교의 소행이 아닌가 짐작해서 내린 결정으로 보았습니다.”
“원남이나 천산을 확인해야 한다면 내가 가도 됩니다. 굳이 사매나 사제를 파견할 이유가 있습니까?”
장 노대는 답을 하지 못했다.
강호에 나서기를 꺼리던 은천문이었다.
마등을 잡아달라는 청강의 간곡한 요구를 받아들인 것까지야 그러려니 하겠다. 그러나 사매와 사제를 또다시 강호에 내보냈다면 그사이 무언가 변화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막말로 마등의 시체를 찾는 일은 은천문의 몫이 아니라 정도맹이 알아서 할 바였다.
“진 대협. 지금은 본문의 명을 따르실 때입니다.”
진무린의 눈빛을 확인한 장 노대가 잔잔한 음성으로 달랬다.
장 노대는 늘 이렇다.
정보를 담당하는 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투박하게 생겨서는 감정이 흔들릴 때마다 진무린을 다독여주었다.
“재미있는 소식도 있습니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것처럼 장 노대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백면호리가 황궁에서 본가에 관한 내용이 담긴 ‘강호문파일람’을 훔쳤다가 죽게 생겼습니다.”
강호에서 첫 번째 손가락으로 꼽는 도둑이니 책을 훔친 것이야 개가 달을 보고 짖는 것만큼이나 빤한 일이다.
황궁에 들어갔다가 발각되었다면 죽게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고.
“서책을 싸겠다며 집어 든 것이 하필 후궁의 치마라…….”
헛바람이 터지듯 진무린이 웃음을 터트렸고, 장 노대가 되새기듯 웃었다.
웃음이란 참으로 희한해서 무겁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진무린은 마등을 상대한 일과 뒤에 보았던 노인과 중년에 대해 전해주었다. 이어 원예가 소수음공을 익혔다는 사실과 다시 두 사람이 찾아오며 벌어진 일련의 과정도 들려주었다.
“노대의 노고에 늘 감사합니다. 혹 시간이 되시면 제가 보았던 중년인과 노인, 두 사람에 관해서 조사를 부탁드립니다.”
“홍화루주가 소수음공을 익혔다는 점도 의아하니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하신 두 명은 아무래도 반노쌍복과 비슷한데 전대의 고인 둘이 소수음공을 찾는다면 반드시 연유가 있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장 노대가 몸을 일으켰다.
“진 대협. 어쩐지 풍파가 몰아치는 느낌입니다. 오랜 평화를 시기하는 것처럼 흑사련의 마등이 등장했고, 이어 혈교와 마교, 그리고 전대의 고인마저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은천문의 지시를 이해시키려는 사람처럼 장 노대는 말을 길게 늘였다.
“진 대협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으나 부디 몸을 살피십시오.”
양손을 맞잡은 장 노대를 향해 진무린 역시 비슷한 자세로 인사했다.
노을이 상등의 기와지붕들을 덮고는 소능산의 오래된 사당을 물들일 때 장 노대는 몸을 돌렸고, 진무린은 그를 묵묵하게 바라보았다.
**
황종관은 급하게 들어온 비월단 단주 윤고상의 보고를 받고는 의아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자세한 내막을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본맹 호북지부에서 파견했던 네 명이 죽었다는 보고와 어떤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볼을 매만지던 손길로 턱을 감싼 황종관은 “흠.” 하는 신음을 뱉어냈다.
정도맹의 비월단을 책임지는 단주 윤고상은 아직 매화검수의 비보에 관해 보고하지 않았다.
아직 사건을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로 비월단의 능력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구대문파의 출신이 아닌 황종관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는 증명쯤 된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정보를 빼돌리거나, 어느 쪽일까.
“흑사련의 잔당들이 어디에 집결하는지는 파악했나?”
“수뇌부였던 몇을 제외하면 거의 완벽하게 파악해두었습니다.”
“구대문파가 공을 세울 좋은 기회일세. 신진들이 실전을 경험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고. 정확한 장소와 인원을 정리해서 알려주게.”
“명을 받았습니다.”
황종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군례처럼 인사한 윤고상이 집무실을 나섰다.
강호에 피 냄새가 짙어지고 있었다.
마등과 흑사련을 정리했으니 남은 것은 뒤에 도사린 세력일 텐데 누군가 마등의 시체를 가져가는 바람에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당대의 영웅도 아니요, 그렇다고 엄청난 위업을 이룬 인물도 아닌 마등의 몸뚱이를 무엇에 쓰려고 가져갔을까?
사파의 잔당들이 우두머리의 장례를 위해 가져갔다면 떠들썩하게 소문을 내는 게 합당한 추론이었다.
매화검수의 비참한 죽음, 부맹주의 석연찮은 움직임, 느닷없이 사라진 마등의 시체까지.
황종관은 어쩐지 나열한 사건들에 알지 못하는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
하루가 지났고, 이틀, 사흘, 그렇게 훌쩍 열흘이 흘렀고, 어느 틈에 보름을 앞두었다.
그동안 진무린은 홍화루가 있는 상등에서 오십여 리 떨어진 우양에서 지냈다.
화려함을 상등에 모두 넘겨준 것처럼 조용한 도시 우양은 화려하게 빛나는 건물도 없을뿐더러, 몇 개 되지 않는 상점 역시 어둠이 깔리기 무섭게 문을 닫았다.
대신 우양은 붉게 떨어지는 노을이 그 어느 곳보다 일품인 도시였다.
우양에 들기 전, 진무린은 검을 천으로 감았다.
은천문에서 임무가 내려올 때까지는 조용하게 지내고 싶었고, 그런 만큼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아서였다.
진무린의 소박한 바람은 시작부터 고비를 맞았다.
조용한 우양에 어울리지 않는 점소이의 집요한 관심 때문이었다.
“검이 아닙니까? 무인이신가 보죠? 상등에서 흑사련의 련주가 죽었다더니 혹시 정도맹에서 파견한 고수이신가요?”
점소이 양일은 천에 감은 검을 단박에 알아보았는데 진무린은 사흘이 넘어서야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식사한 뒤 오전 내내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점심을 먹고 나서는 산에 올라 노을이 떨어지는 것을 지켜본 뒤에 돌아오는 진무린을 양일은 안쓰럽게 보기도 했다.
“손님!”
사흘째부터는 산에 오르는 진무린의 손에 노반 몰래 두툼한 만두를 쥐여주기도 했다.
시선을 드는 진무린을 향해 양일은 눈을 찡긋거렸다.
열여섯 나이에 무너진 문파의 떠돌이 무인처럼 보이는 진무린이 안돼 보였을까?
아니면 그냥 그러고 싶었을까?
진무린은 보기 좋은 미소와 함께 양일이 건네주는 만두를 거절하지 않았다.
고작 보름이었다.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었던 산은 벌써 겨울을 준비하고, 우양은 진무린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산에 가시오?”
간혹 만나는 나이 든 나무꾼이 인사를 건넸고, 하나 달랑 있는 다점의 주인은 뜬금없이 차를 권하기도 했다.
한 잔 마셨다가 질문이 얼마나 쏟아지는지 이후 진무린은 다점을 멀리 돌아다녔다.
그렇게 산에 오른 진무린은 늘 앉던 자리를 택해 묵룡심법을 운기했다.
은천심법이 단전의 그릇을 키우는 방식이라면, 묵룡심법은 내기를 단단하게 압축하는 방식이라 그 효용과 운용이 크게 달랐다.
그동안 익혔던 검법을 되새겼고, 상대했던 이들의 검과 도, 무기들을 떠올리며 시간을 보낸 진무린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우양의 노을을 감상한 뒤에 객잔을 향해 걸었다.
처음 보았다.
객잔의 앞에 승조표국이라 적힌 깃발을 매단 마차 두 대, 말 다섯 필, 그리고 쟁자수 둘이 붙은 짐수레가 여섯 개나 줄줄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말이다.
기운을 살짝 풀어 살펴본 바로 내공의 고수는 없는 듯 느껴졌다.
‘오늘은 노반이 흐뭇하겠는데.’
넉넉하게 웃으며 객잔의 문을 연 진무린은 멈칫한 뒤에 안을 둘러보았다.
늘 밝게 웃던 점소이 양일이 중앙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문소리에 고개를 든 양일은 눈물범벅인 얼굴로 진무린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