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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4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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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4화

은천검제

제4화

 

날이 밝았다.

진무린과 함께 머문 청강은 바닥에 앉아 운기를 하며 아침을 맞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진무린은 곁에 없었다.

두리번거릴 법도 하련만, 청강은 익히 짐작하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방을 나선 뒤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진인?”

이른 시간인데도 방주 등평과 철비완, 등소옥, 그리고 마세호를 포함한 일곱의 무인들이 줄줄이 인사를 올렸다.

정도맹주가 불러도 쉬 가지 않는다는 화산의 검이요, 섬서 3대 고수이며, 검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청강의 위치를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장면이리라.

“어찌 이리들 계신 게요?”

“진인을 모실 기회를 얻었으니 잠시라도 곁을 지키고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허허. 진 대협이라면 아마 지붕에 계시지 않을까 하오. 진 대협! 노도의 운기가 끝났으니 이만 내려오시오!”

청강이 고개를 들고 말을 전하자 실제로 진무린이 지붕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절벽에 발을 내디디는 사람처럼 허공을 향해 걸었다.

사람은 날개가 없으니 떨어지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진무린은 마치 줄로 매달아 놓은 듯 느긋하게 내려서고 있어서 지켜보는 이들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진 대협. 홀로 고생하셨습니다.”

“마세호가 진 대협께 인사드립니다.”

청강의 태도에 더해 지붕에서 내려오는 한 수를 보고 난 터라 진무린을 대하는 이들의 고개가 절로 숙어지고 있었다.

“방주와 호법, 그리고 마 대협은 편히 대하십시오.”

이러니 더 미안하고 황송하다.

처음에는 의심했고, 중간에 눈알을 부라리기까지 했던 이들을 여전히 겸손한 태도로 대해주니 말이다.

“진 대협은 또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이오?”

“실마리를 붙든 것은 같은데 혹 막히는 일이 있으면 진인께 가장 먼저 달려가 매달릴 생각입니다.”

친근한 진무린의 답에 청강은 넉넉하게 웃었다.

아끼는 동자를 지켜보는 신선처럼 자애로운 태도여서 과연 이 두 사람이 강호에서 검을 들고 살아가는 이들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평화로워 보였다.

“내 방주께 청이 있소.”

“말씀만 주십시오, 진인.”

“나와 진 대협은 기름진 음식을 싫어한다오. 그러니 혹 아침을 주실 요량이면 죽과 만두를 부탁하겠소.”

“아.”

이미 특별한 음식을 준비했던지 등평의 얼굴에 서운함이 맴돌았다.

준비한 노고가 아까운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이 너무 검소한 죽과 만두인 것이 아쉬운 눈치였다.

그러나 청강과 진무린이 그렇다는데 달리 방도는 없었다.

총관과 서기, 비룡방의 수하들이 나서 객청에 죽을 준비했는데 마세호와 여섯은 마치 심복처럼 청강과 진무린을 챙기느라 자리에 앉지 못했다.

“마 대협은 왜 그러고 있나?”

“저 같은 사람이 진인을 뵐 기회가 또 있겠습니까? 가진 것이 없어 드릴 것도 없으니 보일 것은 존경하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마 대협의 마음은 이미 보았네. 어서 앉아 함께 드세.”

두 번쯤 권유하고서야 마세호와 여섯이 어렵게 자리에 앉았다.

간단한 음식을 참으로 경건하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자 이번엔 차가 나왔는데 이때는 청강이 웃음기 지운 얼굴로 나무라는 바람에 다들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뜨거운 차를 마신 진무린이 입을 열자 시선이 단박에 달려들었다.

“하왕하칠살과 엇비슷하게 우중객이 비룡방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진무린이 찻잔을 휘둘러 몰려 앉은 이들의 얼굴에 뿌리면 아마 저런 표정이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모여 앉은 이들은 당혹감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 시진 뒤면 도착하지 싶습니다.”

“한 시진이라 하셨습니까, 진 대협?”

그런데도 죽을 먹고 차를 마시고 있단 말인가?

놀라 되묻는 등평 앞에서 청강은 덤덤한 얼굴로 진무린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송구하나 진인께 청을 드릴까 합니다.”

“노도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나서리다. 내가 상대할 자가 우중객이요, 아니면 일곱 마리의 닭이요?”

“흑사련의 시선이 제게 집중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흠. 진 대협이 우중객을 맡아주신다면 노도가 모처럼 닭을 몰아보리다.”

의미심장한 대화가 오갔는데 설명을 요구할 정도로 간 큰 사람은 없었다.

“본 방은 어찌 대처하면 좋겠습니까, 진 대협?”

“비룡방의 담을 넘는 자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때를 대비해 안을 지켜주시면 진인과 제게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진 대협.”

진무린의 요청을 등평이 받아들이며 엄청난 적을 맞이하는 의논이 참으로 간단하게 끝났다.

“그렇다면 노도는 어제 약속했던 일을 마칠까 하오. 진 대협의 감사는 우중객을 물리치는 것으로 대신하겠소.”

진무린이 웃을 때였다.

“어제 검을 보아주겠다던 약속을 지금 이행하는 것이 좋겠네. 다들 나서게.”

청강이 여섯을 데리고 정원으로 나서는 동안, 등소옥은 자꾸만 넘어가려는 마른침을 감추려 얼른 찻잔을 들었다.

솔직히 우중객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짐작조차 못 한다.

무공을 익히고 늘 안평에서만 지낸 탓도 있고, 비룡방을 방문하는 이들이라야 아비인 등평, 호법 철비완 수준이어서 진정한 고수를 볼 기회도 없었다.

추굉의 실력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등소옥이다.

그러니 우중객은 아예 사천과 같이 먼 곳의 이야기고, 청강은 화산에서 내려온 신선으로 느껴질 만큼 실감이 가지 않았다.

‘변했어. 달라.’

그런데 지금은 마당에 선 청강을 바라보는 진무린의 눈빛을 보며 고수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감정이 배제되었다고 하나?

아니면 굳은 의지 탓에 독기가 서렸다고 해야 할까?

표정도, 자세도, 손짓마저 변한 것이 없는데 눈빛만큼은 마주하기 무서울 정도였고, 그래서인지 감히 맞서지 못할 기운을 풍기는 느낌이었다.

진정한 실력은 정말 모른다.

진무린이 어느 정도 고수인지는 아까 지붕에서 내려온 것을 보고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나 지금 진무린이 검을 낸다면 맹세컨대 등소옥은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했다.

고양이 앞에 놓인 쥐와 매의 발톱 아래 몸을 웅크린 토끼가 죽음을 앞두고도 감히 대들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중객을 맞아 진무린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금도 저런데 적을 마주할 때의 진무린은 과연 얼마나 무서운 기운을 뿜을까?

생각이 달리던 등소옥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진무린이 저런 눈빛을 할 정도로 우중객이 강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지금보다 백 배는 무서울 진무린의 눈빛, 그 눈빛을 마주하고도 검을 뽑아 달려들 우중객, 그 옆에서 신선 같은 청강이 상대할 하왕하칠살.

그들의 싸움에 끼어든다면 비룡방에서 숨 쉬는 그 어떤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늘 협을 위해서는 죽음 따위 두렵지 않다고 떠들었는데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숨결처럼 느껴지는 죽음의 공포는 처음이었다.

등소옥은 얼른 손을 탁자 아래로 내렸다.

무공을 익힌 이후 처음으로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익힌 무공이 있어 그녀는 재빨리 숨을 들이마신 뒤에 천천히 내뱉었다.

그리고는 확인처럼 시선을 들었다.

진무린의 모습을 보는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손의 떨림이 멎었다.

청강과 여섯의 무인을 바라보는 진무린은 웃고 있었다.

추굉과 칠십이 넘는 수하를 홀로 무너트린 사람, 화산검 청강이 아끼고 인정하는 사람, 하왕하칠살을 홀로 상대하겠다던 사람, 결국 우중객을 맡겠다고 나선 사람.

세상 그 어떤 이보다 강하고 두렵고 무서운 저 사람이 한 편이라는 것을 깨닫자 떨림이 멎었고, 긴 안도의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

 

흑사련의 련주 마등은 구척장신으로 덩치가 어마어마했다.

눈은 왕방울만 하고 목은 통나무처럼 굵었는데 그의 덩치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손가락이었다.

보통 체격의 수하는 그의 엄지를 한 손에 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굵었다.

또한, 마등은 타고난 힘이 엄청났다.

거기까지면 어찌 하늘이 내린 저주라 평가받으랴.

거대한 몸과 타고난 완력에 믿지 못할 정도의 탄력과 유연함마저 갖췄다.

여기까지만 해도 정도맹과 정도문파에는 완벽한 저주련만, 어쩐 일인지 하늘은 마등에게 영특함도 담았다.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를 더해야 한다.

일을 미루는 법이 없었고, 바지런하기까지 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잠시도 쉬는 법이 없었다.

아침을 맞은 마등은 산의 중턱에서 몸을 일으켜 길게 기지개를 켰다.

감숙의 묘성산이었다.

“새로 들어온 소식은?”

“청강이 비룡방에 합류했고, 우중객 역시 그리 향하고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마등은 눈가를 좁혔다.

흑사련의 호북지부를 살피라고 보낸 우중객이 직접 비룡방으로 향했단다.

천부적인 감각이 껄끄럽다고 느꼈던 무언가가 비룡방에 있다는 의미였다.

“흉수는?”

“그것이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수하가 부어주는 물로 얼굴을 문지르던 마등이 왕방울만 한 눈을 꿈틀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도맹과 구대문파도 그의 정체를 아는 자가 별로 없는 눈치입니다.”

“청강이 그리 갔다면 화산은 알고 있다는 뜻 아니냐.”

마등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조심해야 한다.

저러다가 화가 치밀면 보고하는 수하의 머리를 진짜로 잡아 뽑는다.

“짐작하기로는 화산과 특히 관계가 깊은 것으로 보입니다.”

“흐흠.”

얼굴의 물기를 닦아낸 마등이 입술을 비틀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계획대로 잘 되고 있었다.

조만간 구대문파 중 하나를 부술 정도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상한 인물 하나가 불쑥 나와서 계획을 뒤틀고 있었다.

“화산은 알고 있다?”

“어쩌면 청강이 개인적으로 연을 맺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유는?”

“매화검수 열두 명이 하북의 정도맹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그것이 어째서 개인적인 연이라는 추측을 만들지?”

마등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하가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화산이 단숨에 공을 쌓는 일입니다. 이름을 드높일 이때 매화검수 열둘이 정도맹으로 향한다는 것은 화산 내부에서도 청강의 움직임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의미라고 보았습니다.”

마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국지전이었다.

구대문파가 자리한 지역의 주루와 객잔, 표국, 전장, 다점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가는 터라 대놓고 전면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불시에 구대문파 중 하나인 화산을 무너트려 정도맹을 흔들려 하던 참인데 엉뚱한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추굉 이 멍청한 놈. 내 손으로 머리를 뽑아버렸어야 하는데.”

마등이 거대한 손을 쥐었다가 펴자 보고하던 수하의 몸이 움찔했다.

“매화검수 열둘이 하북으로 향한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잠시 고개를 비틀던 마등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놈들을 잡겠다.”

“예?”

꿈틀 마등의 눈알이 번득였다.

“다시는 내 앞에서 구대문파의 이름에 놀란 소리를 내지 마라. 한 번만 더 그러면 아예 척추까지 뽑아주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등은 수하가 가져온 삶은 고기를 집어 들었다.

“구대문파?”

마등에게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이었다.

살면서 규율을 지키라는 말이 가장 끔찍한 마등이라 그렇다.

힘이 있는데 뭐 고개를 숙이겠나.

역지사지, 인간의 도리?

그건 약한 놈들이 하는 말이다.

구대문파와 정도맹이라는 것들이 하는 행태를 봐라.

어렵고 힘겨운 이들을 돕는다는 명분 뒤에서 객잔이고, 주루고 놈들이 다 해먹고 살지 않은가 말이다.

“이 기회에 제대로 시작해주마.”

고기를 베어 문 마등이 씹듯이 혼잣말을 뱉었다.

 

**

 

청강의 가르침을 받은 여섯은 잠시 흥분했는데 곧바로 피어나는 긴장을 이기지 못하는 얼굴로 바뀌었다.

철비완이 바삐 움직여 수하들을 곳곳에 배치했고, 딴에는 도리를 하겠답시고 등소옥은 객청의 입구에 섰다.

마세호와 여섯 역시 받은 값을 하겠다며 객청의 정원에 섰는데 진무린과 청강은 등평과 함께 탁자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등평이나 바삐 움직이는 철비완, 등소옥, 그리고 마세호와 다른 여섯, 비룡방의 수하들 모두 오금이 저릿저릿한 상태였다.

우중객과 하왕하칠살의 이름값이 주는 두려움 탓이었다.

언제 나서려고 이러지?

등평이 눈치를 살필 때였다.

진무린이 담장 너머로 고개를 돌렸고, 뒤따르는 것처럼 청강이 시선을 옮겼다.

뭔데? 왜 그러는데?

등평이 화들짝 고개를 돌렸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창한 가을의 파란 하늘뿐이었다.

“이제는 나가볼까 합니다.”

“그럽시다, 진 대협.”

진무린과 청강이 몸을 일으켰고, 놀란 등평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수란 이런 것인가.

지금까지는 이름값에 고개 숙였다.

그런데 청강이 풍겨내는 기도를 느끼고, 진무린의 눈빛을 본 등평은 마른침을 삼키며 놀란 가슴을 눌렀다.

맹세코 다른 사람의 기도에 눌려 숨죽인 적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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